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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31)
-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과 비토리아 교회, 스페인 톨레도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예 교수)
2015년 7월 12일(일) :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
오늘은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를 거쳐, 보르게세 미술관, 산타마리에 델 포폴로 성당을 다녀온 후, 비행기로 마지막 여행지인 마드리드로 향하는 날이다.
1.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
베르니니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출생하여 로마에서 사망한 조각가, 건축가, 화가로 바로크 미술과 건축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는 자신의 공방에서 아들을 미술가로 훈련시켰고 당시 로마의 세도가이자 중요한 후원자였던 보르게세가(家)와 바르베르니가(家)에 자기 아들을 소개하였다. 1621년에서 1622년에 걸쳐 완성한 <페르세포네의 납치>와 1622년에서 1625년에 걸쳐 제작한 <아폴론과 다프네>의 조각은 아주 섬세하여 대리석이지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를 보는 듯하다. 이 두 조각은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162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베르니니를 교황의 수석 미술가로 임명하여, 성 베드로 광장을 포함한 로마의 주요 건축과 조각 등을 맡겼다. 특히,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장식을 주관하여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교황 사후에도 많은 작품의 주문을 받았으며, 특히 1652년에 완성한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를 위해 제작된 <성 테레사의 법열>은 “풍부한 감정 묘사와 독창적인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1655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선출과 함께 베르니니의 최고 미술가 직위도 복구되어 성 베드로 광장과 주랑(柱廊)의 설계를 맡았다.
2.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Chiesa Santa Maria della Vittoria)
시간을 절약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열고 있는 비토리아 교회를 먼저 찾기로 했다. 시간이 많아 호텔에서 걸어서 교회에 9시에 도착하였다. 베르니니의 조각상 <성 테레사의 법열(Santa Teresa d’Avila)>이 있는 곳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 <천사와 악마>에서 ‘불의 요소’를 뜻하는 곳이기도 하다.
베르니니가 조각한 <성 테레사의 법열>은 천사가 꿈에 나타나 신성한 사랑의 불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는 테레사의 환영을 조각한 것이다. 테레사 데 세페다 이 아우마다(Teresa de Cepeda y Ahumada, 1515-82)는 예수의 테레사(Teresa de Jesús)라고도 불리며, 로마 가톨릭의 성인으로 상징물은 가슴을 관통한 불화살·IHS가 새겨진 심장이다. 16세기에 수도회 개혁운동을 했고 많은 수도원을 세웠다. 사후에 성녀로 인정된 수녀이며, 천사가 창을 빼는 순간 극심한 고통을 느꼈으나 동시에 신의 사랑에 대한 환희로 불타올랐다고 그녀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베르니니는 이 법열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휘몰아치는 옷자락, 한껏 뒤로 젖힌 목, 반쯤 황홀경에 잠긴 눈, 환희에 차 반쯤은 벌린 입을 통해 무한한 황홀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관능적인 쾌락의 절정으로 읽힐 수도 있어서 적지 않은 논란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Bernini, Santa Teresa d’Avila, 1646, Marble. Santa Maria della Vittoria>
3. 보르게세 미술관(Galleria Borghese)
비토리아 교회 관람을 마치고, 걸어서 보르게세 미술관에 10시 반경에 도착하였다. 원래 2시간당 360명만 입장을 시키고 있어서 미리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능하다. 나는 인터넷은 물론 어제 ‘자전거 나라’ 현지 가이드에게 부탁을 해도 예약을 하지 못했으나 혹시나 해서 직접 찾아갔다. 역시 해답은 현장에 있었다. 출입구에서 사정을 하니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관리인이 11시가 되자 취소된 표가 1장이 있다고 하여 입장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 관람시간은 11시부터 13시까지이며, 다음 관람자들을 위해 오후 1시까지는 퇴장해야만 한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원래 보르게세 가문의 영지였던 보르게세 공원 안에 있다. 1615년 보르게세 가문의 별궁으로 세워졌으나 보르게세 가문이 파산하면서 국가가 이들이 보유하던 예술품을 사들여 1901년 미술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보르게세 공원은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때 만들어진 공원으로 보르게세 미술관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 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동물원, 극장 등도 있는 아름답고 넓은 공원이다. 공원 내에 있는 핀치오 정원(Pincio)에 유도화 꽃이 만발하여 이중에 빨간색과 하얀색의 줄기를 잘라왔다. 우리 집 정원에는 분홍색 유도화만이 매년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줄기를 잘라서 심어도 잘 번식하는 생명력이 강한 꽃이다. 내가 국제그룹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에 근무할 때 공원에 지천으로 심어져 있었던 꽃이라 애착이 가서, 서울 내 사무실이 있는 옥상 정원에서 기르기 위해서 였다. 물론 공항에서 입출국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1) 티치아노 <종교적 사랑과 세속적 사랑 >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인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90?-1576)의 작품으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세속적인 사랑을 상징하고 있으며 손에 든 도자기에는 세속의 부귀를 뜻하는 진주가 담겨 있다. 나체의 여인은 종교적 사랑을 뜻하며 손에 들고 있는 기름잔에는 푸른 연기가 나와 신의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나타낸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옷차림만 보아서는 오히려 나체의 여인이 세속적 여인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세상(세속)적인 것을 걸치지 않았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iziano, Sacred and Profane Love, 1512-15, Oil on Canvas, 118 x 279 Cm, Galleria Borghese>
(2)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야기를 조각한 것이다. 아폴론이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니는 에로스의 활솜씨를 조롱하자, 에로스는 아폴론이 숲에서 다프네와 만날 때 아폴론에게는 사랑의 금화살을, 다프네에게는 미움의 납화살을 쏘았다. 아폴론은 다프네에게 반해 쫓아다녔지만 다프네는 도망다니다 지쳐 아버지인 페네우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페네우스는 자기 딸을 월계수로 변하게 했고, 아폴론은 그녀를 잊지 못해 월계수관을 만들어 쓰고 다닌다. 베르니니는 월계수 가지로 변하기 시작하는 다프네와 그녀를 포옹하는 아폴론을 조각한 것이다. 아주 섬세하여 아폴론과 다프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3) 베르니니 <페르세포네의 납치>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이다.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를 당하는 순간을 조각한 것이다. 하데스는 친구들과 꽃을 꺾고 있던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자신의 지하왕궁으로 데리고 간다. 손가락이 피부를 누르고 있는 섬세한 모습이 특징이다. 대리석을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다.
<Bernini, Appollo and Daphne, 1622-25, <Bernini, Ratto di Proserpina, 1621-22,
Marble, H 243Cm, Galleria Borghese> Marble, H 295Cm, Galleria Borghese>
4.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Santa Maria del Popolo)
포폴로 성당은 아침 07:00-12:00, 16:00-19:00시에만 관람이 가능하였다. 널따란 보르게세 공원을 감상하며 횡단하여 13:30분 경에 포폴로 성당에 이르렀으나, 오후 4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아서 내부는 관람할 수 없었다. 라파엘로가 설계한 쿠풀라, 카라바조의 회화작품, 베르니니의 조각 등 훌륭한 예술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성당이어서 아쉬움이 컸다.
성당 옆에 있는 Flamino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테르미니역에서 하차하여, 호텔로 가서 짐을 꾸리고 공항직행열차인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를 타고 다빈치 공항에 조금 일찍 도착하였다. 비행기 시간이, 로마/마드리드 18:25/21:05 (UX-1048)였기 때문이다.
<산타마리에 델 포폴로 성당 전면>
2015년 7월 13일 (월) 오전: 스페인 톨레도
오늘은 ‘자전거나라’ 여행사를 통해 톨레도와 프라도미술관을 다녀오는 날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Paseo Del Arte) 주위 1Km이내에 주요 미술관이 모두 모여 있지만 (Reina Sofia 미술관, Thyssen-Bornemisza 미술관, Prado 미술관), 마드리드에서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톨레도에 가기 위해서 8시 30분까지 Plaza Eliptica역에 있는 던킨도너스 가게 앞으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톨레도에 있는 파라도르 호텔까지 전세버스로 약 50분정도 걸렸다. 호텔 전망대에서 톨레도 시가지 전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또다시 버스를 타고 톨레도 시내로 들어가서 ‘돈키호테’와 ‘엘 그레코’의 자취를 더듬었다. 마드리드로 돌아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프라도 미술관을 가이드 안내로 관람한 후 일행과 헤어졌다. 나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10여분 걸어서 도착한 소피아 미술관에서 저녁9시까지 피카소의 <케르니카>, 그리고 달리와 미로의 그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 톨레도(Toledo)
오전 10시에 중세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톨레도에 도착하여 맨 먼저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파라도르(paradores)에 들려서 톨레도의 역사를 비롯한 개괄적인 설명을 들었다. 파라도르는 스페인의 국영호텔로, 옛 고성이나 귀족들이 살았던 저택, 수도원 등을 개조해 1928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에는 약 90여개의 파라도르가 있으며,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각종 테마 별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파라도르 전망대에서 바라 본 톨레도 전경>
옛 스페인의 수도 톨레도는 따호강(Rio Tajo)이 흐르고 있어 과거 요새로 적합했던 곳으로 560년 서고트왕국의 수도였다. 711년에 이슬람 사람들이 쳐들어와 지배하다가, 1085년 알폰소6세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존했던 곳이며, 스페인의 수석 성당 ‘톨레도 대성당’과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수도가 1561년 펠리페2세에 의해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겨진 이후, 중세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톨레도 구시가지의 중심이 되는 소코토베르 광장(Plaza de Zocodover)은 과거에는 시장이 열렸던 곳으로, 요즘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시장이 열리기도 하고, 특별행사나 종교행사가 있을 때 중심이 되고 있다. 톨레도 구시가의 좁은 골목길에 다양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도 돈키호테 관련 기념품 가게와 마사빤(Masapan) 가게가 유명하다.
<마사빤> <돈키호테의 길을 설명해 주고 있는 안내판>
톨레도의 명물인 마사빤은 수녀님들이 만들어서 파는 빵으로, 아몬드 가루와 계란 노른자 그리고 꿀을 첨가하여 구워낸 것이다. 화려한 색깔을 입혀 과일이나 동물 모양 또는 반달 모양으로 만든다.
2. 엘 그레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베네치아 공화국 지배하에 있던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에는 비잔틴 양식의 이콘화(icon: 종교·신화 등의 관념체계를 바탕으로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양식 혹은 작품)를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26세에 베네치아로 가서 3년간, 로마에 가서 10년 정도 머물렀으며, 35세에 스페인 톨레도에 정착하여 40년을 살았다. 그의 작품에는 르네상스미술에 반기를 들어 반자연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을 채용한 매너리즘 미술과, 프로테스탄트에 맞서 가톨릭을 지키려고 했던 개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종교운동 등이 반영되어 있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인(The Greek)’이라는 뜻으로, 그가 스페인에서 활동할 때 얻은 별명이며,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이다. 그가 베네치아에 왔을 때 아직 티치아노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으며, 엘 그레코는 항상 티치아노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에 온지 2년 후에 도미니코 그레코(Dominico Greco)라는 이름으로 화가 길드에 등록을 하고 작업장을 마련하였지만, 이탈리아 화가들도 주문을 받지 못해 외국으로 나갈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던 당시 미술계에서, 그리스 출신 화가가 자기 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엘 그레코는 36세가 되던 1577년에, 마드리드를 거쳐 톨레도에 도착했다. 톨레도는 1561년 펠리페 2세가 왕궁을 마드리드로 옮기기 전까지 왕궁이 있던 스페인의 수도였고, 스페인 가톨릭과 지식의 중심지였다. 톨레도는 유럽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국제적인 도시였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주문한 사람은 톨레도 대성당의 사제장이었다. 대성당에서 사제가 의식용 옷을 입는 장소에 걸릴 예정이었던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El Expolio de Cristo)>은 톨레도에서의 첫 작품이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돌며 오랜 수업을 거쳐 만든 엘 그레코만의 양식이 처음으로 나타난 걸작이다. 그는 톨레도에 정착할 결심을 하고 작업장을 마련하여 톨레도와 인근 성당과 개인들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내부 마리아상>
3.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은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가톨릭이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1226년 착공을 시작하여 1493년 완공된 스페인의 수석 성당이다. 성당 내에 있는 흰색 성모마리아 상은 어린 예수님을 안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성당 안에서 촛불에 그을려 여러 번의 복원을 거쳤다고 한다.
톨레도 대성당이 자랑하는 미술전시관에는 엘 그레코의 그림이 주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만, 벨라스케스, 고야, 티차아노, 반 다이크 등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이 전시된 벽이다. 중앙에 있는 그림은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El Expolio de Cristo,
1577-79)’이며, 우측이 ‘베드로의 눈물(Lagrimas de San Pedro, 1605-10)’ 좌측이 ‘구세주(El Salvador,
1605-10)’이다.>
(1)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이 그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병사들이 옷을 벗기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는 십자가에서 못이 박힐 부분에 구멍을 뚫는 사람이 보이고, 이를 세 명의 마리아가 바라보고 있다. 화면 중앙의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있으며, 중앙 왼쪽 갑옷을 입은 군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로마군의 백부장으로 추측되고 있다. 예수님 손은 밧줄로 묶여 있다.
순차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한 화면에 모아놓고, 공간 묘사가 명확하지 않은 점 등은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눈물 어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표정은 엘 그레코가 창안한 것으로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El Greco, El Expolio de Cristo, 1577-79, <El Greco, Las larimas de San Pedro, 1603-07,
Oil on Canvas, 285 x 173 Cm, Oil on Canvas, Santa Iglesia Catedral Primada,
Santa Iglesia Catedral Primada, Toledo> Toledo>
(2) 엘 그레코 <베드로의 눈물>
엘 그레코 <베드로의 눈물> 연작은 전 세계 미술관과 성당 등에 최소한 16편이 남아 있고, 그 중에서 엘 그레코의 진품으로 여겨지는 그림이 6편 정도라고 한다. 마르틴 루터 등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교회의 권위와 교황권이 도전받았다는 것은, 교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이며 최초의 교황 베드로가 세웠던 사도의 전승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가톨릭교회는 엘 그레코와 같은 신심 있는 예술가를 동원하여 베드로의 이미지를 강화하였다. 엘 그레코는 신약성서에 의거, 베드로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고,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슬피 우는 장면이다. 종교개혁으로 교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으니 첫 번째 교황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자세로 깍지를 낀 두 손과 팔의 근육, 팔에 걸려있는 열쇠는 교회를 지키겠다는 베드로의 강한 믿음과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4. 산토 토메 성당과 엘 그레코의 집
<산토 토메 성당 입구>
엘 그레코의 집(Casa de El Greco)과 산토 토메 성당(Parroquia de Santo Tome)에서도 엘 그레코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산토 토메 성당 안에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Senor de Orgaz>이라는 엘 그레코의 대표작이 성당 입구의 오른쪽 오르가스 백작의 실제 무덤 위에 걸려 있다.
1558년 완성한 이 그림은, 생전에 선행과 기부를 많이 한 '오르가스 백작'을 성 스데반과 성 아우구수티누스가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매장해주는 그림이다. 그 뒤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이 그림과 연관된 실존인물들이다. 화면 가장 오른쪽에는 이 그림을 주문하여 백작의 후손들에게 선조가 약속한 교회에 대한 기부를 상기시키려고 한 교회 사제가 있고, 성 스데반의 위쪽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화가 자신이다. 엘 그레코의 아들은 그림 왼쪽 하단에서 오르가스 백작을 가리키고 있다.
이 그림은 상하 두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래는 장례식과 입관 장면, 위는 그의 영혼이 올라간 천상의 모습이다. 이상적인 기독교 기사로서 갑옷을 입은 백작을, 자신의 순교 장면이 그려진 옷을 입은 스데반과 주교관을 쓴 아우구스티누스가 관으로 옮기고 있다. 그의 영혼은 화면 중앙 천사의 손에 의해 천상으로 올려지고 있다. 천상에서는 심판 때 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탄원을 올리고 있다. 이 그림은 선행을 베풀고 교회에 기부를 하면 이런 영광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데, 이는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대조되는 가톨릭 특유의 것이다. 엘 그레코의 종교화 도상은 대부분 이런 반종교개혁의 의미를 갖고 있다.
<El Greco, El Entierro del Senor de Orgaz, 1588, Oil on Canvas, 480 × 360 cm,
Parroquia de Santo Tome, Toledo>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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