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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12.금. 참으로 깊은 묵상의 글과 단상의 기도(38P)
*아래의 글들은, 나의 친구 은평 온누리교회 담임 박병문 목사님이 매주 한 편씩 보내 주는 주옥 같은 글들이다.
한 편, 한 편의 글들을 읽고서, 몇 분간 조용히, 또는 소리 내어 기도하고 지나 간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갖는 6단계의 욕구
(나 배종부 목사가 늘 묻는 질문이 이것이다.
나는 이대로 계속 가면 되는 것인가?
나는 이대로 계속 살아 가면 되는 것인가?
나는 옳은 것인가?
나는 最高(최고), 最善(최선), 最上(최상)의 삶을 지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바로 가고 있는가?)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H.Maslow)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6단계 욕구가 있다고 했다.
1.생리학적 욕구:호흡, 음식, 물, 성, 수면, 배설 같은 생리적 욕구가 채워지는 것.
2.안전 욕구(Safety)
3.사랑과 소속 욕구(Love/Belonging)
4.존경(Esteem) 받고 싶은 욕구
5.자아 실현(Self-actualization) 욕구
6.후에 한 가지 더해서 자아 실현의 단계를 넘어선, 자기 초월의 욕구를 주장하였다. 즉, 자기 자신의 완성을 넘어서 타인, 세계에 기여 하고자 하는 욕구다.
이 말은 ‘나로부터 시작한 행복이, 타인의 행복으로 완성된다’ 는 것이다.
이기주의자(egoist)로서는 인간은 행복해질 수가 없다. 이 같은 말을 성경에서는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약2:8)라고 했다.
최고, 최상의 법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탁월하신 방법이다.
자신 만을 사랑해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먼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힘이 있어야 한다. 컵에 물이 차야 넘치듯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 영혼을 소생(蘇生)시키시고’(시23:3)’
내가 소생하고 회복되어야, 가능하다.
하나님은 심폐소생술, 즉 영과 육을 소생시키시는 전문가이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먼저 회복되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다.
주저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소생시키시고, 나는 다른 사람을 소생, 회복시키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의 환상의 팀웍이 되는 것이다.
지금 주변에 심정지 될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욥(Job)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있는지 살펴 보자.
있다면 권면, 위로, 기도, 물질, 사랑... 으로 소생 시킬 일이다.
그렇게 하시면 당신이 치유되고, 행복하게 되는 첩경이 된다.
당신이 회복되고 복 받아야 할 이유다.
부산과 울산을 오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임랑’과 ‘월내’라는 작은 어촌 마을 중간 지점에 조계종 직할 ‘임제종가 묘관음사’라는 돌 간판이 나온다.
이 사찰이 그 유명한 성철스님이 수행한 절이다. 성철이 출가한 후 낳은 딸을 처음 만났던 절이기도 하다. 출가한 후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고 한다. 스님이 된 딸의 본명은 수경(壽卿)인데 성철은 불필(不必), ‘필요 없는 딸’이란 법명으로 불렀다.
성철스님이 죽을 때 남겼다는 유언이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 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음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아버지와 딸, 부모와 자식은 천륜이다. 이것을 끊기는 불가능하다. 부모는 자식을 그렇게 사랑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네 자녀를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없다. 단,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오래 살 것이다.(출 20:12/우리말)’라는 말씀뿐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아도, 목숨처럼 사랑한다. ‘공경’은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받들어 모시다’는 뜻이다. 영어는 Respect(존경), Honor(경의), Reverence(숭배)다. 모시는 차원을 넘어서는 존경과 숭배까지 하는 것이다.
원숭이로 실험했단다. 아빠 원숭이와 아들 원숭이, 엄마 원숭이와 아들 원숭이 두 쌍을 불을 지펴 뜨겁게 하는 불판 위에 넣고 서서히 가열했다. 사이좋게 놀다가 불판이 점점 뜨거워져 도저히 받을 딛지 못하자, 엄마 원숭이는 아들을 머리에 올리고 자신은 뜨거운 불에 타고, 아빠 원숭이는 자식 원숭이를 자기 엉덩이 밑에 넣고 방석 삼아 깔고 앉더란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모성은 하나님과 동격이다. 숭배해도 된다는 말이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아인슈타인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기자는 나중에 또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 보려고 그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산책을 마친 뒤 아인슈타인은 전화번호 수첩에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찾은 뒤 기자에게 적으라며 번호를 하나 하나 읽어 주었다. 기자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수첩에서 찾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자의 마음을 읽은 천재는 이렇게 말했다. ‘전화번호부에 이미 적혀 있는데, 굳이 머릿 속에 기억할 필요가 있겠소?’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칵테일파티효과’라고 한다. 파티장에서 웃음소리, 발걸음소리,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음악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등 온갖 다양한 소리로 떠들썩하지만, 그런 주변소리가 아무리 커도 곁에 있는 친구의 말을 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칵테일파티효과’는 본래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청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 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용도 마찬가지다. 자기에게 유리한 음성과 내용만 듣는다. 성경에 ‘내 양들은 내 음성을 알아 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10:27)다고 했다.
심리적인 것이나 신神적 소리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그 음성이 커도 듣지 못한다. 아니, 듣는 귀가 없고 듣기를 거부하고 나아 가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큰 비극이다.
아인슈타인이 자기전화 번호를 기억 못하는, 아니 기억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음성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듣는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듣고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의 문제다. 소리를 듣는 청각과 마음의 청각을 모두 열어 놓을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 지금 들려 오는 소리가 바로 당신의 존재 가치를 설명해 준다.
항상 년초만 되면 ‘신축년’ 같은 단어 때문에 고민한다. 이런 단어는 정통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목사들 조차 이 말을 즐겨 쓴다. ‘신축년’ 용어는 천 간 10개와 지지 12개를 순서대로 조합하여 만든 간지 60개를 말한다.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 신화나 제사, 제례 목적으로 만든 용어다. 사람이 소? 동물인가? 이슬람 교도들은 이슬람력을 쓴다. 히즈라력이라고 하는데, H. 혹은 A.H(라틴어로 Anno Hijrae)라고 한다. 2021년은 이슬람력으로는 1443~1444년이다.
불교도들은 부처를 기점으로 해서, 불기 2565년이다. 히브리력으로는 5781-5782년이다. 우리나라는 단기 4354년이다.
기독교(서양력)에서는 B.C와 A.D로 표기한다.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다. 그리스도 예수님 이전의 시대라는 뜻이다. 그리고 A.D는 라틴어로 Anno Domini다. Anno라는 ‘년’이고, Domini는 ‘주’라는 뜻이다. 즉, ‘주님이 오신 해’라 뜻이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해를 원년으로 계산한다.
따라서 올해는 A.D(주님이 오신 후) 2021년이다. 예전 신앙의 선배들이나 아버지께서는 항상 편지를 쓸 때 마지막 [주후 2021년 1월 1일] 이런 식으로 썼다. 앞으로도 ‘신축년’ 같은 단어는 신앙인들은 쓰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계22:13) 말씀이 있다. 성경에서는 시간의 개념을 직선으로 본다. 그 시간 속에서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B.C와 A.D.가 있다. 신앙인으로 당신에게 B.C.와 A.D가 있느냐? ‘A.D. 2021년’은 당신에게 ‘주님을 만난 후’의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한다.
당신의 생애에 가장 기억되고 복되고 형통한 원년 A.D가 되시기를 기원한다.
나는 모태 예수님 띠다.
1971년 미국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환경 조작에 따른 심리 변화를 연구하기 위해 ‘감옥 실험’을 했다.
24명의 대학생을 선발, 모든 실험사항을 수행하고 일당 15달러를 받기로 했다. 24명은 2조로 나누어 간수와 죄수의 역할을 맡았다. 스탠퍼드대학 지하실을 개조 실제 감옥처럼 만들었다. 죄수들에게는 수감번호, 무거운 체인, 삭발 대신 나일론 스타킹을 쓰게 하고 간수들의 말에 복종하게 했다. 간수 역할에는 간수복, 호루라기, 경찰봉, 선글라스와 감옥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 했다. 실제 실험이 시작되자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실제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났다. 죄수와 간수 사이에 충돌하고, 죄수들은 수감번호를 찢고, 머리에 쓴 스타킹을 벗어 던지고, 간수들이 감방 안으로 들어 오지 못하도록 침대로 문을 막았다. 간수들도 강경했다. 달려 드는 죄수에게 소화기를 분사했고,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고 모욕했다.
실험 죄수들의 행동을 통제하자, 이상 행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안과 망상에 빠지고 고함을 지르거나 마구잡이로 화 내고, 히스테리 증상을 보였다. 2주로 계획했으나 6일 만에 종료됐다. 그런데 간수 역할을 맡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실험이 종료되자 아쉬워 했다. 짐바르도의 실험은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지’ 그 원인을 밝혀 주었다.
평범한 학생이 단지 며칠 만에 무자비한 간수가 됐다. 어쩌면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사악하고 어두운 면이 감춰져 있다가 전쟁이나 감옥 같은 상황이 오면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롬7:21)라고 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없다. 누구도 이 선과 악을 오가며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고 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선한 척 하는 것이 가장 큰 악이다. 그런데 내 안에 정말 선이 있을까?
잠언은 지혜서다. 모두 31장이다. 마지막 31장 10절부터 예상치 않는 결론을 맺는다.
‘현숙한 여자’에 관한 내용이다.
왜 지혜서인데 현숙한 여자로 결론을 맺을까?
지혜는 여자를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19장 14절 ‘집과 재물은 아버지에게서 상속 받지만, 현명한 아내는 여호와께 받는다.’고 했다. 잠언 31장 10절부터 여자들은 반드시 읽어 보라. 남자가 아닌 여자가 지혜를 가져야 할 이유와 팩트를 제시하고 있다. 잘되든 못되든 모두 여자 탓이다.
시편128편 3절에도 ‘네 아내는 네 집안 곳곳에서 열매 맺는 포도나무 같다’고 했다. 우리는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다. 안녕은 한자로 安寧이다. 둘 다 ‘宀’집면 부수에서 만들어진 한자다. 安자는 ‘宀’에 여자 女가 있다. 집에 여자가 있어야 안녕의 첫 단계다. 집에 여자가 없으면 안녕이 안 된다. 불가능하다.
‘안녕히’ 되려면 집에 여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녕寧자 역시 ‘宀’밑에 3자가 있다. 마음 심心 자다. 집에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여자의 마음이, 남자의 마음이 집에 있어야 한다.
이 마음이 가출하면 안녕히 될 수 없다. 마음이 가출한 집은 불행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릇 명皿 자다. 집에는 그릇이 있어야 한다. 그릇은 먹거리에 대한 문제다. 집에 먹을 것이 있어야 안녕히 된다. 컵 라면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고무래 정丁 자다. 농사 지을 때 사용하는 도구인데, 요즘 말로 하면 직업이다. 또한 정丁은 일꾼 정, 즉 직업을 가진 남자라는 뜻이다.
안녕히 되려면, “집에 여자가 있고, 집에 남자든 여자든 마음이 집에 있어야 하며, 먹거리와 직업을 가진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초가 바로 여자다. 집에 여자가 없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안녕할 수 없다.
현숙하고 슬기로운 여자가 있으면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안녕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여자라면 더 명심하고, 남자라면 여자 말씀 잘 들어라.
지혜는 여자를 통해서 온다는 것이 잠언의 하이라이트다.
심리학자 스탠리 샥터는 감각 차단을 실험했다. 5명의 지원자는 모든 실험 조건이 동일한 다섯 개의 방에 각각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하루를 버티면 보수를 받기로 했다. 실험 결과 외부와 격리되어 가장 짧게 견딘 사람은 20분, 가장 오래 견딘 사람은 8일이었다. 8일 동안 격리된 실험자는 실험 기간 동안 외로움을 느꼈고 긴장했으며 히스테리 증상까지 보였다. 실험을 통해 인간이 다른 사람의 관심과 배려를 필요로 하는 것은 타고난 본능임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서 모여 사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정을 이루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집단을 떠나면 인간은 격리되고 버렸다고 느낀다. 격리 기간이 오래 되면 인간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고, 행동과 정신에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숙명이다. 예수님도 혼자 고독했다. 그런데 그 고독을 이렇게 해결했다.
‘너희는 나를 버려 두고 모두 떠나 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요16:32)
인간은 누구나 절대 고독 속에 산다. 그 절대 고독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은 정말 고독한 시대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모든 사람을 고독 환자로 몰아가고 있다. SNS에 올라 온 글이다.
‘큰 올케가 아는 사람이 강아지를 한 달 60만 원 하는 강아지 유치원에 보냈는데, 1교시 체육, 2교시 음악 감상, 3교시 자율 학습 등 시간표가 짜져 있단다. 누가 잘 봐 주라고 선생님께 봉투를 줬더니, 다음 날 강아지가 ‘반장’이라고 적힌 목걸이를 차고 왔다’
왜 사람들은 강아지에 애정을 쏟고 좋아할까!
인간의 고독을 해결해 주는, 사람보다 배신과 아픔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강아지도 줬던 먹이를 빼앗으면 바로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 내고 주인에게 대든다. 인간의 절대고독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나마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 최선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이야기다.
엘리스와 붉은 여왕은 숨을 헐떡이며 달렸다. 엘리스가 말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달리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돼요.’
그러자 붉은 여왕이 호통쳤다. ‘이런 느림보 같으니, 여기서는 이렇게 달려야 겨우 제 자리야. 어딘가에 닿으려면 2배는 더 열심히 달려야 해.’
앞서려면 2배는 더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것이 [붉은 여왕의 법칙]이다. 모두 달린다고 달리지만, 주위를 살펴 보면 그 자리에서 맴돌거나, 아니면 뒤처지기 일쑤다. 나도 달리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열심히 달리기 때문이다. 영양과 얼룩말이 사는 아프리카 초원에는 치타도 함께 살고 있다.
치타가 살아 남으려면 얼룩 말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 영양은 치타 보다 더 빨리 달려야 살아 남는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의 90%가 멸종했다고 한다. 개별적 종의 입장에서 나름 열심히 달렸지만, 주위의 경쟁자들이 더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속도 보다 목표다. 마냥 달리기만 하다 보면 둘 중 하나는 진다. 하지만 목표가 다르면 생각하며 달려도 된다.
그런데 세상은 모두 돈과 권력이 목표가 돼 경쟁하다 보니, 거짓말도 2배, 편법도 2배, 사기도 2배, 선동도 2배, 모함도 2배, 이렇게 서로 죽이려는 목표로 살고 있다. 그러다 함께 자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듯이 싸우지 않습니다.’(고전9:26)라고 했다.
바울의 목표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다. 내가 정한 목표가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라면, 빨리 달리지 않더라도 안심해도 된다.
이 말씀을 기억하자.
‘그들의 발은 나쁜 일을 하려고 뛰어 다니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빨리 다닌다. 그들의 생각은 못된 궁리 뿐이고, 그들이 가는 길에는 폐허와 파멸만 깔려 있다.’(사59:7)
사람 살리는 데 2배로 힘써 보자.
중국에 장신, 장차오 형제는 80층짜리 고층 아파트 80층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두 형제가 여행을 갔다 돌아 오니 시간은 이미 새벽 2시, 엘리베이터가 전기회로 고장으로 운행 중지됐다. 두 형제는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진 채 로비에서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결국, 계단으로 걸어 올라 가기로 했다. 20층까지 올라 갔을 때 동생 장신이 ‘가방이 너무 무거우니까 복도에 가방을 놓았다가 엘리베이터가 운행되면 찾으러 오자’고 했다. 가방을 놓고 훨씬 가벼운 몸으로 40층까지 왔을 때 둘은 서로 원망했다. 여행 가면서 왜 안내문을 못 보았느냐? 상황을 설명하며 서로 네 탓 공방을 했다. 60층에 도달했을 때는 서로 다툴 힘조차 없었다. 서로 부축하며 남은 20층을 모두 올라 갔다. 형제가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둘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열쇠가 없었다. 열쇠는 20층에 놓아 둔 여행 가방 안에 있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 글을 보는 순간 섬뜩했다.
80층을 나이로 환산해 계산해 보면, 어떤 사람은 20세에 삶의 아주 중요한 열쇠를 잃어 버린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40세에 방황하고 허튼 짓 하다가 삶의 방향키를 분실했고, 어떤 이는 30세에 이미 열쇠 조차 갖추지 못한 채 황혼의 나이에 도달한 것이다.
몇 살 때 무슨 열쇠를 잃어 버렸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80층에 도달한 형제는 힘을 되찾아 다시 내려 가서 열쇠를 가져 오면 되지만, 이미 지나 온 세월은 어떻게든 할 수 없어 한숨만 나온다. 하지만 위안되는 성경 말씀이 있다.
‘지나 간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사43:18)
과거는 이미 지나 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 이 시점에서는 과거는 무조건 감사로, 미래는 무조건 좋은 것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맡길 뿐이다. 지금, 이 순간 할 일은 열쇠를 찾아 챙길 일이다. 앞으로 올라 가야 할 층수가 많이 남아 있다. 잃어 버리면 다시 찾을 길이 없다.
어느 가정에 술꾼인 언니를 둔 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언니가 술이 떡이 되어서 들어 왔다. 그런데 한 밤중에 자는 동생을 깨우더란다. ‘얘, 일어나 봐! 위층 집 앞에 토하고 온 것 같아. 같이 치우고 오자’ 가서 봤더니 누가 치웠는지 물 한 방울 없이 깨끗했다. 안심하고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언니랑 외출했다. 귀가 중 1층에서 승강기 층수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는데, 지하에서 누군가 올라왔다. 타고 보니 자기 집 위층에 사는 남자였다. 어제 일도 있고 해서 긴장하고 있는데 남자가 물었다. ‘자네야’ 식겁했다. 어제 언니가 토한 것이 맞구나 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또 ‘자네야’ 그랬다. 네? 하고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더니, 남자 왈, ‘자매냐고?’ 아이고! ‘자매’를 ‘자네’로 알아들은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잘못 들을까! 성경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계3:20)이라는 말씀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고 아는 것만 듣는 속성이 있다. 자기 수준 이상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에 많은 외국어가 있지만, 익히지 않으면 하나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소리는 있으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 삶에서 온갖 것들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때마다 열어 줄 때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과 도둑의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열어 주면 낭패다.
들리는 소리를 잘못 듣고 문을 열면, 삶은 망가지고 회복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 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22)’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귀’는 육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귀를 말한다.
세상이 온갖 소리들이 많아 시끄럽다. 어떤 소리를 듣느냐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 엉뚱한 소리에 마음과 정신 빼앗기지 말고, 들려 오는 소리 구분하여 바른 길을 찾아 가 보자. 진리를 구분하여 듣는 것이 가장 큰 능력이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이 함께 필 것 같은 비 오는 봄날 아침에...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 박사는 심리요법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창안했다.
성경에서 ‘말씀’으로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logos(로고스)라는 단어와 치료법(therapy)과 합성한 ‘의미 치료법’이다.
삶에 실존적인 위기나 어려움이 생길 때 좌절하고 포기하는 이들에게 이 치료법을 권한다. 이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살다 보면 극단의 어려움과 시련 앞에 무기력하여 극단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이들이 많다. 이에 대하여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1)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 갈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이들이 지쳐 있다.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 가능한 분노와 근심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두 번째 사람의 만남이란 ‘사랑’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그리고 삶의 의미로 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 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바로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하는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범사(all circumstances)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God's will)이니라.’(살전5:18)
이 보다 더 적절한 대응책이 있을까!
‘어떤 환경’에서라도 감사의 통로를 지나면 의미를 찾게 되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탁월하고 더 좋은 방법의 출구로 나오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다.
부디 감사의 바다에 뛰어 들어라.
어느 술꾼인 남자가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차비도 남기지 않고 술 먹는데 썼다. 잔뜩 먹고 취해서 집에는 걸어 가기로 했단다. 어찌하여 집에 도착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전등 스위치도 찾을 수 없어 그냥 포기하고 잠을 잤다.
얼 만큼 잤을까! 갑자기 잠자는 방바닥이 지진 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란다. 놀라 잠에서 깨어 보니 방바닥은 계속 흔들리고, 전능 스위치는 찾을 수도 없고, 덜컥 겁이 나서 문고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잠시 후 지진 같은 요동이 멈추더니, 방문이 덜컥 열렸다. 그런데 문이 열려 밖으로 나가 보니 경부고속도로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유는 이랬다. 술에 취해 자기 집인 줄 알고 들어 간 곳이 차량용 컨테이너박스였다. 아침이 되어 차량이 움직이니 지진 난 줄 알았고, 운전사가 문을 여니 경부고속도로였던 것이다.
둘 다 식겁했단다.
라디오에 소개된 실화다.
그렇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성경에 ‘또한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십시오.(엡5:18/우리말성경)’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술은 포도주인데, 문자적 또는 상징적인 말이다. 술도 취하지 말고, 술과 같이 상징적인 것으로도 취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 술이 바로 돈, 쾌락, 성, 도박, 마약, 동성애, 명예, 권력 등이다. 이런 것들에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 벌어지는 온갖 추행과 문제는 술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술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온갖 세상 것에 취해 제 정신 잃지 말고, 성령으로 가득 채워 제 정신을 차리라는 것이다.
왜 하필 술과 성령을 비교했을까!
사람에게 있어 술은 ‘최악’이고, 성령은 ‘최선’이기 때문이다. 술 마시듯 성령을 마시는 방법이 무엇일까! 술이 아닌 생수, 예수님의 말씀을 마시면 된다. 말씀이 성령이다.
술이 아닌 생수를 마시자.
아침에 내가 깨어날 때 행복하다면, 당신은 최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감사와 눈물로 읽었다.
죽음과 맞닿아 있는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혹독하고도 상상 할 수 없는 노동과 모욕감,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죽음의 그늘에서도 잠을 자는 동안 만큼은 모든 것이 평온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용소생활의 24시간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은 언제였을까? 바로 기상시간이었다고 한다. 잠자는 동안 가졌던 평온함이나 안전함에서 깨어 지상의 현실로 돌아 오는 새벽 녘 기상시간이 가장 끔찍했다고 한다.
성경에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下)’는 말씀이 있다. 밤새 울었더라고 아침이면 기쁨이 찾아 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다.
또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문화적 동면’에 들어 간다고 한다. 그런데 두 가지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치와 종교였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서나 시도 때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와 관련된 의식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막사 귀퉁이나 자물쇠가 채워진 컴컴한 가축 운반용 트럭 안에서 행해지는 임시기도나 예배였다. 넝마 같은 옷을 입은 채 멀리 떨어진 작업장에서 피곤하고 굶주리고 얼어 붙은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가는 바로 그 트럭 안에서 즉석 예배와 기도회가 이루어지곤 했다고 한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가장 끔찍하고 힘에 겨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침이면 기쁨이 찾아 오게 되는 축복의 길은 무엇일까?
좋은 옷, 안락한 의자, 탁월한 음향, 조명,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에어컨 바람 가득한 예배당에서 드리는 기도나 예배가 일상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는 무엇을 더 바라고 원하는 것일까! 죽음과도 같은 삶의 환경에서도 예배와 기도를 잊지 않으면 아침에 깨어 나는 것이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삶에서 극단의 시련과 아픔과 질고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언젠가는 자기에게 집행유예가 내려질 것이며,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산다.
실낱 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에는 그렇게 나쁘지 않고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자기암시 같은 것이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망상이다. 우리는 믿음과 망상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망상해서는 안된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에게 정말 가슴으로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그냥 있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을 가만히 두면 썩는다. 소용돌이를 일으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 난다. 나 배종부 목사는 영적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자이다. 내가 무엇을 하지 말고, 성령으로 영적 소용돌이를 일으켜라. 그러면 반드시 행복해진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우리 기도의 열매가 합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내일을 걱정하며 산다.
우리나라는 1년에 새해를 두 번 맞이한다. 신년과 구정 설이다. 두 번 결심하게 되어, 행복하다. 새로운 내일 365일이 기다리고 있다. 막연하게 망상하듯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빌3:13~14)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려야, 앞에 있는 것을 잡을 수 있다. 실패의 흔적과 아픔, 과거를 깨끗이 잊어야 앞에 있는 미래의 것들이 잡힌다. 뒤에 있었던 것들에 잡혀 있으면 앞에 있는 것, 어떤 것이든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방법이다. 오로지 목표와 상을 위하여 달려 가야 한다. 게으름으로 일관하면서 집행유예 망상에 사로 잡혀 우연히, 어떻게든 잘 되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살아 내야 한다.
망상이 아닌 결심과 부지런함으로 목표를 정해 놓고 달려 가면, 하나님이 100배의 열매로 상 주실 것이다. 새해에는 모두 집행유예 망상을 버려야 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그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 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다.
주인은 승낙했다. 하인이 허겁 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죠’
그렇다. 하인은 죽음의 장소인 테헤란으로 자원하여 찾아 달려 간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믿는 운명이다.
그래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 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고 한다. 운명의 힘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 간 인도하신 방법이 나온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13:22)’
그렇다. 하나님은 백성들, 개인, 교회, 당신의 백성들을 앞서 가셔서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기다리신다. 운명이 아닌 섭리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앞서 가셔서 좋은 것을 준비해 주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시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 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게 하시고 앞서 가신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라. 당신의 삶에도 구름기둥, 불기둥이 존재 한다.
미국 영화배우 데이브 베스치오(Dave Vescio)의 트위터에 올라 온 글이다. 한국어로 옮기면 이렇다.
[오늘 스타벅스에서 어떤 남자를 봤는데, 폰도 없고, 태블릿도 없고, 노트북도 없이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완전 사이코 패스 같았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됐을까?
커피점에 가서 커피만 마시고 있는 것이 불편한 시대가 되었다.
영화관에 가면 영화만 보고, 교회에 가서 예배만 보고, 독서실에 가면 책만 보면 사이코 패스가 되는 시대다.
본질에 충실하면 인정 받지 못하는 시대다. 정직하면 정치인, 종교인, 그 무엇도 될 수가 없다. 이 시대를 인정하지 못하고 일반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같이 살지 않으면 사이코 패스가 되어 미칠 것 같은 세상이 돼 버렸다.
세상은 악인들이 형통하고 잘된다. 그래서 성경은 ‘내가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시73:3)라고 했다.
정직하면 외면 당하고, 진실을 말하면 욕을 먹고, 적당히 세상과 섞여 살면서 대충 살면 살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아니다. 성경은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라고 했다.
‘본 받지’라는 단어 원뜻은 ‘비슷하게 꾸미다’ 이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과 비슷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도 했다.
기독 청년들 40.4%가 성경 말씀 지키며 살면 성공 못 한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악한 사람과 비슷하게 해서라도 성공하고 싶다는 말인데, 그런 성공은 어떤 것일까?
그래도 우리는 커피점에 가서 커피만 마셔도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본질에 충실했다면 누가 사이코패스라도 놀려도 괜찮다.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 잔 하며 책을 보고 싶은데, 누가 볼까 무섭다. 이 시대를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인간관계에서 강제적인 힘이 작용할 때가 있다. 권력의 서열이나 회사나 가족 간에도 그 힘이 작용한다. 그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복종한다. 마음 속엔 반발, 불만, 원한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힘을 행사하는 사람에 대해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그가 좋아하고 기분 좋은 말만 골라서 이야기 하는 경향이 있다.
윗사람의 기분을 거스르는 비판이나 충고, 자신을 평가 절하시킬 수 있는 내용은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을 '멈 MUM 효과'(MUM:침묵하고 있는)라고 한다.
잘못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강제적인 힘을 두려워 한 나머지 '멈'에 빠지게 되면 상사 역시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IMF가 그래서 일어났다.
결국, 잘못이 있어도 즉시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진행되므로, 이후에 커다란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문제는 힘이 있는 사람, 상사, 어른들은 쉽게 누가 충고해 주거나 잘못을 지적해 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깨닫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큰 일을 한 ‘영웅’ 들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하다. 계속 군대, 권력, 전쟁, 돈, 여자, 향락을 쫓다가 그 끝이 비참하게 끝나는 것이다. ‘영웅’ 과 반대로 ‘위인’ 이란 자기 내면을 살펴 진리의 길을 가는 자들이다. 그래서 위인들은 세상에 생명을 살리고 행복을 뿌리는 것이다. 사람들이여! 절대 영웅을 길을 흠모하지 말라.
깨닫는 것은 2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깨닫거나, 연단과 어려움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길이다.
그래서 성경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12:10)고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단 받지 않고, 어려움 겪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파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가능하면 아무리 힘이 있고 어른이 돼도 누군가 충고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다.
성경에, '어리석은 사람을 100번 때리느니 지혜로운 사람을 한 번 꾸짖는 게 더 깊이 박힌다.'(잠17:10)는 말씀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100대를 맞아도 안 된다니, 사람 된다는 것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깨닫는 방법 외에는 없다.
2021.3.12.금. 매월 실시하는 <성령 컨퍼런스>에 오는 지방의 목사님 들을 호텔에 재운다.
정말이지 성심을 다하여, 모텔은 혹시나 불편할까 하여, 명색이 호텔에 재운다. 하룻밤 요금이 5만-7만이다. 이런 방을 여러 개 예약하여, 내 딴에는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재운다.
그리고 반드시 방이 어떠했는가 보고하도록 한다.
그런데 늘 속이 상하는 일이 있다.
‘호텔이 춥다, 불편하다’ 하는 것이다. 오신 목사님들의 반응은 정직하니, 내가 할 말이 없다. 또 그래야 내가 개선할 수 있고...
이럴 때면 정말이지 너무나 속이 상한다. 내가 재운 목사님들이나 사모님들께 속이 상하는 게 아니다. 그러한 방을 내 주는 호텔 주인 놈들, 호텔 직원 놈들에게 속이 상하는 것이다. 이 악하고 나쁜 놈들이 바람을 피러 오는 연놈들에는 제일 좋은 방들을 내어 주고, 하룻밤 숙박하는 외지 손님들에게는 나쁜 방을 내 주는 것이다.
내가 또 화가 나는 놈들은 이 정권자 놈들이다. 방역을 핑계로 사우나에서 잠을 자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세한 나는 세미나를 하면서 계속 피를 흘리고, 적자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왜 내 돈 들여서, 그것도 적자가 나면서까지, 얼마나 큰 희생과 사랑을 베푸는가?
그런데 돌아 오는 것은 쓰라린 후회 뿐이다. 내 돈 쓰고, 내가 욕 먹는 것이다. 그것도 내게 은혜와 성령을 받으러 온 목사님, 사모님들에게 말이다.
다시 말한다. 목사님, 사모들에게 하는 욕이 절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사람들은 오해를 너무 잘 하니까...
내가 깊이 깨닫는 사실이 있다.
진주를 절대 돼지에게 던지면 안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은 자기 탓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남이 아무리 좋은 선행이나, 도움을 주어도, 뭔가가 자기 기미에 맞지 아니하면, 불평 불만 원망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아무리 복지를 베풀어도 ‘더 달라 더...’ 하며 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로 가야 맞는 법이다.
나는 앞으로 일체 내 돈 들여, 내가 욕 먹는 이런 일들을 하지 않겠다.
단지 호텔 소개는 하겠다.
노원구청 뒤의 ‘딘 호텔’ 에 가라. 그리고 창동의 ‘창동 플라자’ 로 가라. 이게 내가 그 동안 파악한 정보의 종합이다. 다른 호텔들은 전부 나쁜 놈들이다.
들어 가기 전에 반드시 따뜻하고 좋은 방을 달라 하라. 춥거나 불편하면 바로 퇴실하여, 다른 호텔을 찾아 가라.
앞으로 나는 내 돈을 대 가면서, 선행을 베풀지 않으리라. 나는 늘 그렇게 살다가 욕을 먹은 사람이다. 병신이지... 정신이 빠진 것이지...
소개는 해 주고, 차로 픽업도 해 주리라.
그러나 내 돈 쓰고, 내 소중한 목사님들, 사모님들에게 더 이상 욕 먹지는 않으리라.
좋은 우물이란 항상 일정 수위를 유지한다. 장마에도 넘치지 않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들이 퍼가도 항상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 쉽게 넘치고 쉽게 마르는 우물은 수원이 짧은 우물로 좋은 우물이 아니다.
재물은 흔히 우물에 비유된다. 재물이란 좋은 우물과 같아서 남에게 베푼다고 줄어 드는 게 아니라, 베풀면 그 만큼 다시 채워진다. 이것이 '우물의 법칙'이다. 미국에서는 기부자들을 Rain Maker라고 부른다. 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극한 가뭄에, 뜨거운 여름에 한 줄기 시원하게 소나기를 쏟아 주는 것에 비유하는 말이다.
미국의 큰 부자들은 모두 확고한 기부 철학을 갖고 있다. 록펠러, 카네기, 포드, 빌 게이츠,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등 모두 기부 왕들이다. 이들 중 헨리 포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들이다.
이들의 기부는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돌려 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기부는 오랜 종교적 전통이기도 하다. 이런 기부 문화는 성경적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도 '남에게 주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것도 많이 꾹꾹 눌러 흔들어서 넘치도록 너희 품에 안겨 줄 것이다.'(눅6:38)라고 하셨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의 재물은 그에게 면류관이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어리석음은 어리석음만 낳는다.'(잠14:24)라고도 했다.
재물만 우물이겠는가? 사람 마다 각기 가지고 있는 우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주는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과 사회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고, 이웃과 사회에 주면 다시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적 원칙이다.
받기만 하는 우물은 썩는다. 받기만 하는 모든 삶은 인생 자체가 썩은 우물이 될 수도 있다.
그 동안 대면예배 참석하시고, 지난 주에는 코로나로 예배당에 나오지 못하시던 분들이 나오셔서 한꺼번에 3개월 치 헌금하시는 모습을 보면 눈물겹도록 축복해 주고 싶다. 자자손손 우물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꾹꾹 눌러서 흔들어 넘치도록...
‘차도살인’ 은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남의 칼로 미운 놈을 제거하는 기법이다. 삼국지에서 왕윤이 여포의 힘을 빌려 동탁을 살해하고, 문화혁명 당시의 마오쩌둥은 국방장관 린뱌오와 사인방을 부추기고, 자신을 추종하던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변신시켜 미운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민심이 흉흉할 때는 누군가를 책임을 져야 민심이 가라 앉는다. 즉, 희생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양에서는 권모술수 하면 마키아벨리를 최고의 고수로 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마키아벨리가 '큰 형님'으로 모신 사람이 있다.
바로 '체사레 보르자'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알렉산데르 추기경의 사생아로 태어 났다. 그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되자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청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체사레 보르자의 활약상을 보고 싶거든 미드(Mid) '보르지아'라는 작품을 보면 당시 교황의 타락과 상황을 실감 나게 볼 수 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외교관 자격으로 체사레를 몇 번 만났다. 그리고 체사레의 매력에 반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보고 느꼈던 점을 본국의 왕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그 유명한 '군주론'이다.
군주론의 모델이 바로 차도살인의 고수, 희생양 법칙의 고수, 체사레 보르자다. 군주론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체사레의 로마냐 정복 과정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세상은 차도살인의 법칙, 희생양의 법칙에 움직이고, 순진한 백성들은 그것이 정의와 진실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단번에 지성소로 들어 가셔서 영원한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히9:12)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남의 피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 피로 모든 것을 해결하셨다. 그래서 위대하시다.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손에 피를 묻혔다는 죄의 고백이 가장 중요하다. 내 손에 피가 묻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래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17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은 모든 백조는 희다고 믿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한 탐험가가 호주에서 '흑조(Black Swan)'를 발견한 후, 이제까지의 통념이 산산이 부서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유래하여 '과거의 경험으로는 아무리 분석하더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를 지칭하는 것을 심리학 용어로 블랙스완효과 (Black swan effect)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좌표로 삼는 경향이 많다. 자신의 경험이 진리라고까지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 이외에는 어느 것도 수용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세상에는 ‘백조’만 있는 것이 아니고 ‘흑조’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방법을 버리라고 한다.
과거의 경험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과거의 것 때문에 미래가 불확실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돌아봄으로 해야 할 일은 회개 밖에는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경험은 내려 놓을 필요가 있다. 과거로 인하여 발목이 잡힌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5:17)’라고 한다.
지나간 것은 잊어라. 기억하지도 말라. 실패한 과거, 잘못된 흔적은 생각지도 말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셨다. 당신의 인생에도 블랙스완은 존재한다. 과거의 사건이나 경험에 생각이나 방법이 묶여 있다면 미래를 여는 문은 닫힐 수 밖에 없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말이다. 과거의 것은 폐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짐을 인정하라. 그러면 새로운 세상, 미래의 불확실한 문도 열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천지개벽의 역사다.
요즘은 아기가 태어 나기도 전에 예비 아버지들이 아이의 출생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런 관심이 지나치다 못해 어떤 남편들은 아내가 임신 중에 아내와 함께 식욕 상실, 매스꺼움, 구토, 치통과 같은 증상을 겪기도 한다. 이처럼 아내의 임신과 출산 중에 나타나는 남편의 여러 가지 심리적, 신체적 증상들을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인 트리도우언은 '꾸바드(couvade)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꾸바드는 불어 'couver'에서 온 말로 '알을 품다, 부화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 용어 꾸바드 증후군은 임신 3개월 경에 가장 심하다. 그리고 점차 약해지다가 임신 말기가 되면 또 다시 심해진다.
이 증상은 비단 신체적 증상에만 그치지 않고, 우울증과 긴장이 고조되고 신경과민적인 심리적 증상으로도 나타난다. 즉, 아내를 극심히 사랑하기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렇다.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에 동의하고, 동참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11:17)
세상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세상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려면 이런 ‘꾸바드 증후군’에 빠져야 한다. 누군가 옆에 울고 있는지, 고통당하고 있는지, 슬픔에 빠져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살펴 같은 마음으로 울고,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만 생각지 않고, ‘너’를 생각하는 세상, 그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가정, 교회, 직장, 삶의 자리에서 이런 ‘꾸바드 증후군’에 빠진 이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위해 울어 눈물의 선지자가 아닌가!
누군가를 위해 ‘울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하다. 이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소망해 본다.
심리학 중에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이다. 즉,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했다가, 나중엔 지역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주변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쓰레기가 버려져도 바로 청소하는 공간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의식적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게 되지만, 쓰레기통이 있더라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방치했다면, 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은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곳인가라고 생각하여 너도 나도 쓰레기를 버리게 되어 그 곳이 오염된다는 것이다.
당장 문제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한번 임계점을 돌파하기 시작하면(=유리가 깨진 상태) 그 이후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이론은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자기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원리다.
성경에 보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는 말씀이 있다. 마음이 깨진 유리창이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어떤 위기나 문제 앞에서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개인이든, 가정이든, 공동체든, 바로 그 위치에서 ‘나’라는 존재가 깨진 유리창이 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은 개인이 망하면 되지만, 가정과 공동체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 생각하기를 ‘나는 깨진 유리창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반성해 본다. 내가 바로 깨진 유리창이었다. 다행스럽게 깨진 유리창 수리하는 방법이 성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의 평강이 수리 방법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 평강이 당신을 지배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마음이 깨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어느 날 오후 지하철 안에서 6살 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며 소란을 피웠다. 아이의 보호자인 듯 한 할머니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었다. 5분 이상 계속되자 승객들은 한두 마디씩 불평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요즘 할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 ‘할머니가 그러니 애가 그렇지.’ ‘버릇 없는 거 엄마 아빠는 알고 있느냐?’ 드디어 충고하기 시작했다. ‘아이 좀 어떻게 해봐요.’
‘공중 도덕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지.’ ‘좀 조용히 좀 갑시다.’ 불평, 불만, 짜증이 가득해 있을 때 할머니의 조그만 목소리에서 나오는 한 마디에 지하철 안은 쥐 죽은 듯 했다.
‘이 아이 엄마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어서 지금 장례를 치루고 오는 길입니다.’
지하철 안에 있던 그 누구도 불평하거나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아이가 뛰어 다니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을 ‘프레임(frame)의 법칙(theory)’이라고 한다. ‘똑 같은 상황임에도 어떤 프레임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사건과 상황을 맞이했을 때 어느 프레임을 적용해서 보느냐에 행복과 삶의 질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는 말씀이 있다. 시험을 당하거든, 그 상황을 기쁘게, 즉, 유쾌하게, 은은한 기쁨으로, 여기라는, 판단하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사건과 상황을 분석하지 말고 프레임을 바꾸어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행해 불평, 비판, 원망, 비난을 쏟아 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기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금 불평 불만이 있다면, 프레임을, 생각을 바꾸어 적용해 보라. 그러면 예기치 않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물밀 듯 다가 올 것이다. 나한테 하는 말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수용소에 들어 오기 전에 꽤 유명한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던 F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물었다.
‘의사선생! 꿈을 꾸었는데 어떤 목소리가 소원을 말하라는 거예요. 알고 싶은 것을 말하래요. 질문에 모두 답을 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를 위해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것이냐고 물었어요. 우리의 고통이 언제 끝날 것인지 알고 싶었거든요.’
‘언제 그런 꿈을 꾸었소?’
‘1945년 2월에요’
그 때는 3월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그래 꿈 속의 목소리가 뭐라고 대답합디까?’
그가 내 귀에다 나직하게 속삭였다.
‘3월 30일이래요’
F는 희망에 차 있었고 꿈속의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의 날이 임박했을 때 수용소로 들어온 전쟁 뉴스를 들어 보면 약속한 날에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3월 29일. F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열이 아주 높게 올랐다. 30일, 꿈속의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전쟁과 고통이 떠나 갔다. 헛소리를 하다가,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31일 사망했다.
인간의 정신상태,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이, 육체의 면역력과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무너졌을 때 오는 충격이었다. 성경은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했다. 의인은,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다.
당신의 삶에 죽음이 코앞에 다가 왔는가? 그래도 소망을 가져야 한다. 소망 만이 당신을 살린다.
일본 최고의 공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한 청년이 모교에서 마련해 준 기회들을 거절하고 일본의 세계적인 기업 마쓰시타 회사의 입사시험에 응모했다. 그러나 최종 합격자 명단에는 빠져 있었다. 발표 당일 수치심과 분노에 괴로워하던 학생은 그만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다음 날 전보가 왔다. 수석 합격자인데 전산 처리에 문제가 생겨 누락됐다는 내용이었다. 가족도 회사 책임자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그룹의 총수인 일본 경영의 신(神)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의 귀에 전해 졌을 때 그의 반응은 전혀 엉뚱했다.
‘이 청년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가 이 청년을 받아 들이지 않게 된 것은 큰 행운입니다.’
‘그 정도의 좌절을 이겨 내지 못했다면 문제다. 그런 심리적 자질로 회사의 중요한 자리 올라 좌절을 만나게 될 경우, 스스로 자살한 것처럼, 다분히 충동적이고 비극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럴 경우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 뻔 하다는 이유였다.’ 잠깐만 참고 지나가면 되는데 그 좌절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성경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는 말씀이 있다. 인생사 여러 가지 시험은 당연한 것이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잠깐’이라는 단어다. 원어 ‘올리곤’이라는 이 단어는 ‘아주 작은 범위, 기간’을 말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든, 문제든, 넘어야 할 강과 산이든 잠깐만 참으면 길이 보이고 열린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순간’이 곧 온다. ‘크게 기뻐하다’의 ‘아라갈리아오’는 ‘기뻐 날뛰다. 미칠 듯이 기뻐하다’는 뜻이다. 잠깐만 기다리면 미칠 듯이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이런 순간이 곧 온다.
존 맥스웰의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중앙 한 곳에 막대기가 세워져 있는 공간에 원숭이 4마리를 넣고 실험했다. 그 막대 꼭대기에 바나나를 달아 놓고 배고픈 원숭이가 먹으려고 바나나를 잡아 채는 순간 억수같이 차가운 찬물이 쏟아지게 했다. 도전하는 원숭이 마다 비명을 지르며 물러 서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시도조차 포기했다. 4마리 모두. 그 때 연구원이 4마리 중 한 마리를 교체했다. 그런데 새로 들어 온 원숭이가 올라 가려 하자 다른 3마리 원숭이가 잡아 끌어 내리더란다. 몇 번 반복하더니 그 신참 원숭이도 포기했다. 그렇게 나머지 3마리 모두 차례대로 교체 실험하는 동안 끌어 내리는 것을 반복했다. 마침내 처음 실험에 참가했던 4마리 모두 빼 내고, 한 번도 물벼락을 맞아 보지 못한 원숭이 4마리로 채워 넣었는데 이유도 모른 채 신참 4마리는 바나나 먹기를 포기하더란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바나나를 보고도 먹을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실패한 경험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은 누군가 도전 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 때 누군가가 과거의 실패한 경험을 생각지 말고 말해야 한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회당장의 딸이 아파 예수님을 찾아 와 애원하고 있을 때 이미 딸은 죽었다. 실패한 경험 중 가장 큰 것이다. 그때 그 현장으로 가신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막5:41)’ 하셨다.
모두가 죽음 앞에 포기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져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달리다굼 하셨다.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사회도, 국가도 이런 외치는 사람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해라. 달리다굼! 일어 나라. 시도해라. 포기와 실패가 만연한 교회와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승리가 눈앞에 있다. 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사람이다. 그 곳이 천국이다.
‘100명의 특별한 유대인’(박재선)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현재 우리나라의 역술시장은 약 2조원 규모로 추정된다고 한다. 영화산업과 맞먹는 수준이다. ‘미래 예측 산업’의 종사자가 40만 명에 이른다는 비공식적인 통계도 있다.
<뉴욕타임스(2007.7.7일자)>는 한국의 샤머니즘 부활 현상을 한국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사주카페, 일간지 운세코너, 인터넷사주 클럽등 역술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점쟁이, 점집 같은 용어 대신 도사,법사,제마사,보살,철학관,법당,심령원으로 바뀌었다. 한국의 역술 부활현상은 현대문명의 다양성과 풍요함이 가져온 역작용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의구심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스스로 키운 결과다.
요즘 북한에도 점문화가 극에 달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사람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할 때 잠 못 이룬다. 사람들은 왜 미래에 대하여 행복 보다 두려움이 앞설까! 껌 딱지처럼 달라 붙어 있는 과거의 실패한 기억들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염려와 다시 패배 할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성경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고 했다. ‘맡기라’는 말은 ‘던지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물건이나 돌을 던질 때 멀리 던지는 사람이 있고, 바로 앞에 가까이 던지는 사람이 있다. 될 수 있으면 염려와 걱정을 멀리,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멀리 던져야 한다. 사람들 앞에 던지면 주워서 내게 다시 던질 수 있다. 그러니 주께, 하나님 앞에 던져라. 그러면 주께서 ‘나의 염려’를 주워 속히 처리 할 것이다. 던지는 방법은 ‘말’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을 ‘기도’라고도 한다. 계속 말해라. 염려, 걱정, 근심, 이해되지 않는 삶의 모든 것을 말해라. 자주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하나님이 관심을 갖게 되고, 돌봄의 대상이 되신다고 하셨다. 당신의 염려를 던지면 하나님은 항상 받을 준비를 하고 계신다.
가짜는 절대로 절대로 진짜를 흉내 조차 내지 못한다
영국 센턴 브리지라는 마을에서 매년 11월 ‘세계 최고의 거짓말쟁이 대회’가 열린다. 19세기 이 동네에 살았던 윌 릿슨이란 노인을 기리는 행사다. 술집 주인이었던 릿슨은 늘 그럴듯한 거짓말로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 누구나 이 대회에 출전할 수 있지만, 정치인과 변호사는 참가할 수 없다. ‘거짓말 기술이 너무 뛰어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정치인과 변호사가 아니라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인간은 나와 너, 예외 없이 거짓말쟁이다. 그래서 인간의 비극은 멈추지 않는다. 성경에 ‘너희는 너희 아비인 마귀에게 속해 있고, 너희는 너희 아비가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한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기 본성을 드러 낸다.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요8:44)라고 했다. 인간의 아비는 마귀다. 본성이다. ‘너의 목소리를 보여 줘’ 일명 ‘너목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과 완전 음치를 그럴듯하게 설정해 놓고 진짜와 음치를 구분하는 프로그램이다. 진짜는 음치인 척, 음치는 진짜 노래 잘하는 사람인 척 속인다. 그렇게 하면 가수로 활동하는 패널도 청중도 혼란 빠진다. 마침내 진짜와 가짜, 구분하기 위해 노래를 시작하면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 본다. 그런데 진짜와 가짜는 첫 소절 시작하자 마자 탄성을 지른다. 반주가 시작되고, 첫 마디, 첫 소절, 첫음절을 내면 진짜와 가짜가 구분된다. 속은 사람과 속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뒷목을 부여잡고 탄식하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진짜 실력자는 가짜를 흉내 낼 수 있다. 가짜인 척 음치 흉내를 아주 잘 낸다. 하지만 가짜는 절대로, 절대로 진짜를 흉내 조차 내지 못한다. 아! 그렇다. 적어도 진짜가 가짜인 척 흉내 내거나 모방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짜가 진짜인 척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가짜가 정말 진짜인 척 잘 속인다. 속지 말아야 하는데, 나도 가짜여서 속는다. 속지 않으려면 내가 진짜가 돼야 한다.
스티븐 롱구가 쓴 ‘예수를 업고 가는 아프리카 당나귀’에 나오는 흑인 소년 이야기다.
빈민촌에서 태어나 백인들 집 쓰레기통을 뒤져 하루 하루 살았다. 어느 날 백인 선교사 부인이 그에게 청소 일을 시켰다. 그런데 흑인 소년이 볼 때 자기가 살던 움막에 비해 선교사의 집은 너무 깨끗해 청소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온 종일 놀다가, 집에 갔다. 그렇게 며칠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쫓겨 났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보기에는 그 집이 깨끗해 보였는데, 선교사 부인의 눈에는 한없이 더러워 보였다. 인간의 최대 약점이다.
성경은 이런 상황을, ‘사람의 행위가 자기 눈에는 다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잠16:2), ‘사람의 행위가 다 자기 눈에는 옳게 보이지만 그 마음은 여호와께서 살펴 보신다.’(잠21:2)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옳은 줄 알고, 옳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의 가장 큰 오류다. 자신을 볼 줄 알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가수가 TV공연 시 귀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한다. 그걸 ‘인이어 모니터’라고 하는데, 여러 사람과 함께 노래하거나, 반주에 맞춰 노래할 때 ‘자기 목소리를 듣는 기구’다. 즉,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큰 공연장이나 교회에도 무대 앞에 청중석과 반대로 되어 있는 스피커도 마찬가지다. 자기 목소리를 듣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듣지 못하는 것은 모두를 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정확하게 듣고 분석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밖으로부터 오는 소리도 정확하게 듣고,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도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인의 가장 기본 자세다. 그런데 내 안의 소리가 너무 크면,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 소리에 함몰되지 않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길이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이 된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이어모니터’는 없을까? 시내 나가 볼까?
일본 아오모리 현은 유명한 사과 산지다.
어느 해에 태풍이 불어 사과의 90%가 떨어졌다. 수입의 90%가 날아 간 셈이다. 이 때 한 농부가 기막힌 역발상을 했다. 초속 50m의 태풍에도 견딘 특별한 사과라면서 ‘합격 사과’, ‘회복 기원 사과’라는 이름을 붙여 일반사과의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소문이 돌자 수험생을 둔 부모와 병원에 입원한 환자 가족들이 부적처럼 사과를 샀다. 불티나게 팔렸고 풍작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이러한 역발상의 사고를 ‘수평적사고’라고 한다.
1960년대 에드워드 보노에 의해 처음 소개되어 세계적으로 사고 혁명을 일으켰다. 이는 수직적 사고의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수직적 사고가 논리적 직선적이라면, 수평적 사고는 직관적 곡선적 사고에 가깝다. 수직적 사고가 수학이라면, 수평적 사고는 음악이나 미술이다. 수학 문제에는 정답이 하나 뿐이지만, 그림 그리기에는 정답이 없다. 베토벤의 피아노 곡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다. 모두 정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직적 사고는 앞으로 나란히라면 수평적 사고는 옆으로 나란히다. 수직적 사고는 목표물 하나만 보고 추격하는 사냥이라면, 수평적 사고는 나물을 뜯듯이 여기도 살피고 저기도 살피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수직적, 여자는 수평적 사고를 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수직적으로 보지 말고, 수평적으로 이리 저리 여기 저기 살피면 여러 답들이 존재한다. 성경에, ‘우리가 잠시 당하는 가벼운 고난은 그것 모두를 능가하고도 남을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뤄 줄 것입니다.’(고후4:17)라고 했다.
고난과 어려움이 생기면 길이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 무너져, 고통이 크다. 그러나 길은 여러 가지다. 한쪽 벽이 막히면, 다른 창문이 열린다. 사방이 다 막히면, 하늘 문이 열린다.
수직적 사고에서 수평적 사고로 생각을 바꾸면, 놀라운 길들이 생긴다. 그러니 고난이나 문제가 발생했다면 하나의 길에 집착하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 봐라. 반드시 당신이 몰랐던 더 좋은 길이 있다.
이서윤✱홍주연 지음, ‘더 해빙’(The Having/부와 행운을 끌어 당기는 힘)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진짜 부자들의 공통점은 좋은 인연을 알아 보고, 그것을 소중히 가꿔 간다는 데 있죠. 그들이 인연을 통해 Having의 과실을 거두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죠. 여기서 귀인(貴人)이라는 단어가 생각 났다.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도록 도와 주는 귀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렇다. 살아 가면서 귀인을 만나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복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귀인이 누구인지, 언제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귀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방법은 딱 하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귀인이라고 생각하고 만나는 것이다. 성경에도,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히13:2)’라는 말씀이 있다. 부지 중에 나그네를 대접했더니, 먼 훗날 보니 천사였다는 것이다.
당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귀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좋은 사람, 귀인 만나기를 소망하기 보다는 ‘내가 귀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좋은 사람 만나기를 소망하기 보다는 당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귀인이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데, 귀인을 만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욱 확실한 방법이 있다. 성경에, ‘왕들을(개정 개역에는 ‘귀인’) 의지하지 말고 사람의 자손들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도움이 없습니다.(시146:3)
옛날에 귀인의 최고는 왕이다. 그런 왕조차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권고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이다. 제일 탁월한 방법은 내가 먼저 좋은 사람과 귀인이 되는 것이요, 나아 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제 좋은 사람, 귀인 찾지 마라. 당신이 귀인이고 좋은 사람이면 됐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 그나 저나 사실은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 진짜 귀인이다.
미국 MIT대학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는 천체의 운동까지 정확하게 예측하는 현대과학이 날씨 하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실험했다. 습도, 온도, 바람 등 기상을 좌우하는 변수들을 컴퓨터에 입력한 다음, 초기 조건 값을 1/1000씩 다르게 입력했더니,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습도와 바람의 값을 조금씩 높이자, 브라질에서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던 바람이 미국의 텍사스에 미칠 무렵에는 토네이도로 변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주에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나비 효과의 개념이다. 초기에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차이가 결과는 큰 차이로 나타 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이 경제학, 사회학 등 광범위하게 쓰였다.
성공이나 실패도 능력이나 노력에서 아주 사소한 차이가 성공과 실패라는 큰 차이로 나타 난다는 것이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에서 유인우주선에 첫 번째 탑승할 사람 선정할 때 최종 후보가 19명이었다. 모두 뛰어난 후보라 선정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사소한 행동 하나가 결정했다. 우주선 탑승시험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발을 신고 탑승했으나 가가린은 신발을 벗고 탔다. 가가린 합격.
어느 회사 신입사원 면접 장소에 종이 뭉치 하나를 떨어 뜨려 놓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때 한 명이 집어 들었다. 종이를 펼쳐 보라고 했다. 거기엔 ‘입사를 축하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 사람은 입사한 후 몇 년 후에 최고 경영자가 됐다.
현대 건축의 3대 거장 중 한 명인 독일 출신의 미국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디테일 Detail 속에 있다.’
이미 성경에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오늘 조그만 날갯짓 같은 행동, 생각, 삶의 흔적이 언젠가 강력한 토네이도 같은 결과로 나타 난다.
작은 한숨도 쉬지 마라.
인류가 오랫 동안 버리지 못한, 실현 불가능한 꿈이 3가지가 있다. 불로장생의 불로초를 찾는 것과 납, 구리, 주석 등 값싼 금속으로 황금을 얻고자 했던 연금술, 그리고 외부 에너지의 유입 없이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영구 동력기관이다.
이 중 불로초와 연금술은 19세기 이후 꿈을 접었지만, 영구 동력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집념을 보인다고 한다. 각국의 특허청 직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도 영구 동력기관을 발명했다며 찾아 오는 몽상가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영구기관을 만들었다며 출원하는 특허 건수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1998년 45건, 99년 42건, 2000년 79건, 2001년 96건, 2002년 110건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이건 절대 사기이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과학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열역학 제1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물체가 지닌 에너지는 내부, 역학적, 화학, 전기 에너지 등과 그 양상이 바뀌어도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하는 법칙’이다.
즉, 외부의 에너지 없이는 다른 에너지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과 투입된 에너지 만큼만 생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구동력기관은 만들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체 동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스스로 존재하고, 움직이고, 뭔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하나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15:5)고 단언한다. 즉 하나님, 신을 떠나서는, 외부에서 공급하는 어떤 힘이나 에너지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어린이가 철이 없을 때 외치는 구호일 뿐이다. 장성한 사람이 됐는데도 이렇게 외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은 없다.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람도 예외 없다. 이 말씀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진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것이 열역학 제1법칙이라면, 에너지가 흘러 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 즉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외부 에너지의 유입이 없는 닫힌 계에서 에너지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를 뿐 그 반대로 흐르지 못한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에너지가 흘러 가는 동안 일을 한다. 흐르는 강물을 막으면 댐이 되고, 여기에 수차를 돌려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나 한번 흘러 내린 물은 다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즉 자연계의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는 형태에서 일할 수 없는 형태로 바뀐다. 이처럼 에너지가 ‘흐름을 멈춘 상태, 평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Entropy)’라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은 ‘쓸모없는 에너지의 상태로 나아 가고 있다’는 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세상은 외부 에너지가 없으면 멈춘다. 사람도 외부에서 에너지가 유입되지 않으면 엔트로피 상태가 된다. 그래서 물체, 세상, 사람, 모두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법칙에 따라서 물질세계이든, 정신세계이든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계22:13)라고 선언했다. 무엇인가 시작했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공급, 유입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출발, 근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듯, 누구든 무엇이든 정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려면 외부로부터 무엇인가 공급돼야 한다. 핸드폰 배터리 충전하듯 삶도 충전하여 엔트로피 지수를 낮춰야 한다. 엔트로피 지수가 높아질수록 사회든, 개인이든 삶은 피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 사람에게, 누군가에게, 힘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엔트로피 지수를 한없이 높이는 사람인가! 질문해야 할 시간들이다.
문제는 공급 받는 자 만이 공급할 수 있다.
미국의 미시간 대학교 학생 기숙사를 무대로 ‘근접성의 효과’에 대한 실험을 했다. 미국 전역에서 모여 서로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어떤 교우 관계를 맺는가를 추적했다. 많은 학생이 먼저 같은 방이나 가까운 방의 사람 등,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부터 친해졌다. 말 그대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시작해, 친밀도가 넓어진 것이다.
그런데 기숙사 내에서 함께 생활하고 서로의 태도나 성격, 사고방식 등을 알게 되면서 자신과 같은 취미나 관심, 태도,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에게 더 친근감과 호의를 갖게 되더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친구는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는 ‘유사성의 법칙’이 적용된 것이다.
즉, ‘근접성의 효과’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부터 친해지는, 결국 끼리 끼리 모일 수 밖에 없는 ‘유사성의 법칙’으로 귀결되더라는 것이다.
성경에, ‘가까운 이웃이 멀리 사는 형제 보다 낫다.’(잠27:10)에서 출발, ‘형제가 함께 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보기 좋은가!’(시133:1)로 확대되는 것이다.
세상은 끼리 끼리 모인다. 비슷한 무리끼리 내왕하며 사귄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 이름은 달라 보여도 따져 보면 한 가지라는 초록동색(草綠同色), 서양속담에도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끼리 함께 모인다’라고 했다.
시대가 악할수록 좋은 사람들을 사귀어야 한다. 악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면 안 된다. 좋은 사람들끼리 어울려라. 나쁜 사람과 어울리면 나쁜 사람 된다. 내가 좋은 사과라도 해도 썩은 사과 옆에 가면 썩는다. 썩은 사과는 절대 싱싱한 사과로 변하지 않는다.
내가 좋은 사람인지 아는 방법은 내가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들, 어울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 보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문제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기준이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다. 참으로 어렵다. 당신 주변에서 아주 싱싱한 사과를 찾아 그 곁에 있어라. 단, 당신이 썩은 사과면 안된다.
멀리 있는 큰 산과 가까이 있는 언덕 중 어느 것이 크게 보일까?
가까이 있는 언덕이 더 크게 보인다. 언덕 가까이 좀 더 가면 산은 언덕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된다. 사람은 좁고 얕은 생각이나 의견을 갖기 쉽다는 세상의 이치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이야기다. 이걸 ‘원근의 법칙’이라고 한다.
중국 송대의 문인 소동파의 시詩 중에 여산(廬山/루산)을 보고 지은 제서림벽題書林壁이다. [가로로 보면 고개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 멀리서 가까이에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각기 다르구나. 여산의 참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 단지 내가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이리라.]
산 속에 있기 때문에 산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역설이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 멀리서 보아야 한다. 개인이든, 교회든, 사업이든, 국가든 모두에게 적용된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다.
인생사 모두, 우리는 지금 나무만 보고 있다. 숲을 보듯 멀리,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인생의 헛됨 속에서 진리를 발견한 솔로몬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는 의인들과 지혜로운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 누구도 ‘자기 앞에 놓인 것’(개정판에는 미래)이 사랑인지 미움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전9:1)라고 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과 미래는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인생은 여산과 같다. 당면한 문제에 함몰되어 있으면 내일에 대한 소망과 꿈을 볼 수 없다. 현재에 생각이나 에너지를 너무 소진하면 내일 꺼내 쓸 에너지가 없어진다. 하나님의 손안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도 하시고, 나쁜 일들을 좋은 일들로 바꾸시는 전화위복의 존재시다.
눈 앞에 있는 언덕을 보고 너무 높다 하지 마라. 가 보고, 지나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미래에 도달했을 때 후회할 짓들 하지 마라. 시퍼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알래스카는 원래 러시아 영토였다. 당시 오스만 터키와 크림전쟁을 치르면서 국고가 바닥나자 당시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2세는 주미 러시아공사 에두아르트 스테클에게 알래스카 매각을 위한 협상을 미국과 벌이도록 지시했다.
미국 측 협상 당사자는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W.H.Seward)였다. 두 사람은 밤새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인 결과, 1867년 3월 30일 새벽 4시에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매매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같은 해 10월 18일에 성조기를 올렸다. 이 금액을 환산하면 100평당 2원이 조금 넘는 헐값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슈워드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동물이나 잡아서 모피를 얻는 것 외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땅을 거금을 주고 샀다고 언론과 국민들에게 모욕 당했다.
알래스카는 남한 면적의 7배, 금과 매장량 45억 배럴의 석유, 천연가스, 주석, 니켈 등 자원과 군사 전략적 가치는 돈으로 계산이 나오지 않는 땅이다. 미국 교과서에는 알래스카 매입을 미국 외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중병에 걸려 있다. 그래서 성경에, ‘네가 보고 싶으면 안약을 사서 네 눈에 발라라.’(계3:18)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크고 많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출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부분,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믿음의 눈이라고도 한다. 믿음의 안약을 사서 바르라. 그리고 그들이 결정한 것에 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기다려 보라.
미국에 전설적인 자동차 판매 왕 ‘조 지라드’(Joe Girard)라는 사람이 있다. 기네스북에 12년 동안 연속 판매 왕 자리에 올랐다. 가난한 집, 주정뱅이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 구타에 못 이겨 고교를 중퇴하고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35세까지 40여 가지의 3D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 자동차 판매에 뛰어 들어 전설적인 대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 비밀은 250이라는 숫자였다. 친지의 결혼식에 갔더니 모인 숫자가 250명 쯤 되었다. 또한 장례식장에 갔더니 25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길흉사에 모이는 사람의 숫자가 약 250명이었다.
왜 그럴까? 해답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250명 정도의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세일즈에 적용하면 한 사람의 고객에게 확실한 신뢰를 얻으면 250명의 잠재고객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반대로 한 사람에게 신뢰를 잃으면 250명의 고객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때부터 그는 한 사람의 고객을 250명 대하듯 했다. 세일즈, 즉 돈을 벌기 위해 깨닫게 된 신의 한 수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이 소중하고 귀하다. 그는 한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실천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을 주거나, 이익이 생기거나, 돈이 되는 사람한테는 정말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아부하고 잘 대한다. 그러다 자기에게 불이익이 오거나 손해가 되면 바로 등을 돌리고 적이 된다. 그런데 성경은 한 걸음 더 나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사람은 그를 지으신 분을 비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자이다.’(잠 14:31)라고 한다. 가난하고, 궁핍하여 내가 얻을 소득과 이익이 없어도 하나님 대하듯 하라고 한다. 한 사람이 250명의 가치를 넘어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을 대할 때는 하나님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대로가 무섭다. 한 사람을 대할 때 250명의 가치를 넘어 하나님이 보이면 당신은 진짜 신앙인이다.
‘위대한 중국은 없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일본에서 ‘국민 작가’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순신 장군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을 침공했을 때 이를 멋지게 무찌른 조선의 명장이다. 일본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서 일본 해군이 창설될 당시 그의 전술을 연구했다.”
‘시바 료타로’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도고함대’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치자 도고제독에게 부하가 “제독께서는 넬슨 제독과 이순신 장군을 능가합니다.”라고 아양을 떨자 도고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넬슨 제독은 군신(軍神)이 아니다. 세계 해군 역사에서 군신은 이순신 장군 딱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왜적에게 23전 23패의 치욕을 안겨 주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들에게 불구대천의 적장이다. 하지만 일본 해군 장교 교육에서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鶴翼陣)을 가르친다고 한다.
‘경제전쟁 시대 이순신을 만나다’를 쓴 지용희 교수에 의하면, 일본 해군 예산서에 ‘이순신 장군 사당 참배’에 관련한 예산 항목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적장(敵將)일지라도 ‘배울 점은 배우고 존경하겠다.’는 자세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다. 성경에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먼저 존경하며’(롬12:10)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먼저’라는 헬라어 단어는 ‘프로에게오마이’인데, 뜻이 아주 심오하다. ‘앞서 가서 길을 보여 주다. 앞서서 인도하다. 지도자로서 앞에 서다.’라는 뜻이다. ‘앞서’라는 뜻이 ‘먼저’다. 서로 사랑은 기본이고 누가 ‘먼저’ 하느냐가 중요하다. 앞서 가서 길을 보여 주고, 앞서 인도하고, 먼저 존경하는 사람 그가 바로 진짜 지도자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면 사랑이 시작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내 뒷모습을 보면서 나를 사랑하도록 시도해 보자. 먼저 시도하는 사람이 승자요 지도자다.
스칸디나비아반도 고원지대에는 레밍이라는 이름의 들쥐 떼가 살고 있다. 이 쥐 떼들은 가끔 집단으로 절벽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한다.
연유는 이러하다. 먹이가 부족하기 쉬운 고원지대, 무리를 뒤따르던 쥐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선두 그룹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옆의 쥐들도 달리기 시작하고, 선두를 형성하고 있던 쥐들은 영문도 모르고 달리기 시작하여 쥐 떼 전체가 무작정 달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절벽에 다다르지만 멈출 수가 없어, 뛰어 내리게 된다.
사람도 비슷한 데가 있다. 다른 사람 가는 길 따라 가다 함께 망한다. 사람들은 어떤 길에서 걷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걷고 있다고 해서 올바른 길은 아니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보다 많은 사람, 군중 속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낄 때가 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걷고 있다면 안심이 된다.
하지만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 곳으로 들어 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험해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7:13-14)고 했다.
‘좁은’이라는 헬라어는 ‘스테노스’인데 좁은 이유가 ‘장애물이 가까이 서 있음으로’ 좁다는 뜻이다. 그래서 답답하고 걷기가 힘든 길이다. 본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올바른 길에는 사람들이 적다. 많은 군중이 모였을 때 예수님도 진리의 선포 보다 수준이 낮은 말씀만 전하셨다. 그리고 소수 제자만 있을 때 다시 해설하셨다.
현대인들은 다수의 힘을 즐긴다. 다수가 정의는 아니다. 그렇다고 소수가 정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에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에는 그 길이 험해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소수, 적은 사람이 있는 곳이 더 올바른 길이 될 수 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바른 길인가 고민하며 살 일이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정말 가치가 있고 올바른 것인지 점검이 필요하다.
독일의 심리학자 링겔만이 줄다리기의 심리학을 연구했다. 그는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 힘은 상승 효과를 내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가지고 실험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 났다. 한 명이 참여하는 줄다리기에서는 100%의 힘을 내지만, 참여자가 2, 3, 4로 늘어 나면서 이들이 발휘하는 힘은 각기 93%, 85%, 49%로 줄어 들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적 일탈 현상, 링겔만 효과’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다수가 동시에 내는 힘은 개개인의 힘의 단순한 합계 보다 낮다. 사람 수가 많으면 개개인의 힘의 합계가 반 밖에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경우도 있다. ‘모두가 하고 있기 때문에 나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심리적 상태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7)라고 하셨다. 그렇다. 십자가는 공동으로 함께 지는 것이 아니다. 함께 나누어서 지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분량대로 ‘개인’이 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십자가는 상징적으로 죽음의 위협에 노출됨’을 뜻하는 신앙인의 길이자 자세다.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즉 진실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 그리고 나아 가 국가에도 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정, 교회, 직장, 나라가 사는 것이다. 그 십자가라는 책임과 짐은 자신 만이 질 수 있는 것이면 아주 귀한 일이다. 내가 지지 않으면 아무도 질 수 없는 그 십자가는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을이 되면 조동화 님의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시를 되새긴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문제는 나다.
하늘의 제왕 솔개는 모습이 연을 날리는 것과 같다 하여 일명 검은 연 Black kite라고도 한다. 솔개의 수명은 약 40년인데 환골탈태를 통해 70년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한다. 환골탈태는 환골換骨, 뼈를 갈아 끼우고, 탈태奪胎, 태胎를 벗긴다는 말 그대로 죽음의 고통이다.
40년 쓴 발톱은 닳아서 더 먹이를 채지 못하고 부리도 구부러져 쓰지 못하게 된다. 이 때 그냥 죽을 것인가, 죽음의 고통을 견디고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먼저 적의 눈에 띄지 않는 높은 절벽에 둥지를 틀고 안전하게 숨는다. 그 다음 못쓰게 된 부리를 바위에 쪼아 뽑아 낸다. 이 때 부리가 뽑히도록 바위를 쪼면서 흘린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든다고 한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나면 새로운 부리가 나온다. 새로 난 부리로 발톱을 쪼아서 뽑아 낸다. 그러면 그 발톱도 새로 돋아 난다. 부리와 발톱이 돋아날 때까지 대략 6개월이 걸린다. 그리고 30년을 더 산다.
사람도 거듭 태어 나기 위해서는 초주검의 경지에 이를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하셨다. 여기 ‘다시’라는 말은 아노덴이란 단어인데, ‘위로부터’, ‘처음부터’ 뜻이다. ‘위로부터’라 함은 하늘의 뜻으로부터라는 뜻이요, ‘처음부터’라는 것은 그 뜻으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다. 1회성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거듭남 Born Again 은 1회성으로 구원의 자격은 얻지만, 지속적으로도 유지돼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이든 교회든 나라든, 못쓰게 된 부리를 쪼아 피를 흘려 새로운 부리를 만들어서 스스로 낡은 발톱도 뽑아 내야 한다. 문제는 스스로다. 스스로 자각하여 시도하지 않으면 모두 멈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 앞에 서기엔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길이 있는데 포기한다면 더 더욱 그렇다. 내게서 뽑아 내야 할 부리와 발톱이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해 보자. 발견하면 즉시 뽑아 버려야 한다. 그러면 길이 열린다.
고대 바빌론 왕자가 유프라테스강에 나가 물놀이로 더위를 식히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그만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왕은 군대를 총동원해서 아들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강 하류까지 샅샅이 수색해도 찾지 못한 왕은 자기 아들이 죽은 줄 알고 크게 절망했다. 그런데 뜻밖에 여러 주간이 지난 후 왕자가 어느 깊은 강의 바위 위에서 살아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살아 난 왕자에게 어떻게 살아 있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더니,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다행히 강 한복판에 우뚝 솟은 바위에 걸려서 바위 위로 올라 올 수가 있었고, 아침 저녁으로 빵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가 떠 내려 와 그것을 먹고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가죽 주머니에는 ‘모하메트 벳 핫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사람을 수색해 보았더니 강가에 실제로 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아침 저녁으로 가죽에 빵을 담아서 강 하류로 떠내려 보냈다. 왕이 그에게 그렇게 한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우리나라 속담에 ‘선행을 하라, 빵을 물 위에 던지라. 그러면 그대에게 어느 날 반드시 보상되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속담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 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상상할 수 없는 보상으로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있다. ‘네 빵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네가 다시 찾게 될 것이다.’(전11:1) ‘던져라’는 말은 ‘주다’인데, ‘포기하다’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모두 내가 가진 빵들을 물에 던지는 사람들이다.
빵은 상징이다. 그것이 돈, 사랑, 진실, 말투, 눈빛, 손짓, 미소, 아주 약한 한숨까지 물에 던지며 산다. 단, 기대하지 말고, 던져야 한다. 전혀 예상치 않는 시간에, 예상치 않는 분량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오늘 무엇을 던질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은 정말 복되다. 왜냐하면 던질 것이 있기 때문이다. 흘러 가는 강물에, 세상에 무엇인가 던져 보자.
나쁜 결과만 이어지는 경우를 ‘머피의 법칙’, 좋은 결과만 이어지는 경우를 ‘샐리의 법칙’이라고 한다.
미 공군 머피 대위는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초음속 비행하고 지상에 내렸을 때, 신체 상태 급감속 적응 실험을 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원인은 기술자가 전극봉의 배선을 잘못 연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중 하나가 잘못을 초래할 방법이라면 누군가는 꼭 그 방법을 사용한다.’ 머피의 법칙이다.
반대로 샐리의 법칙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라는 영화에서, 해리와 샐리가 시카고에서 뉴욕 가는 차에서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잇따른 일들이 좋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동양에서는 운이라고 한다.
긍정의 심리학자인 미국 심리학회장 마틴 샐리그먼 박사는 그것은 운이 아니라 일에 임하는 사람의 심리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이어지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안 될 거라고 믿는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머피의 법칙이 발생하는 원인은 사람의 몸과 마음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결되었으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이 불안해지면 행동도 불안하게 되어, 결국 나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 믿음이 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뽕나무에게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겨라!’라고 하면 그 나무가 너희에게 순종할 것이다.”(눅17:6)라고 했다.
겨자씨는 크기가 1~2mm 정도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씨다. 우리 마음에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만 있어도 그 큰 뽕나무까지 순종한다고 했다. 삶의 모든 문제가 운이나 생각이 아닌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머피의 법칙도 샐리의 법칙도 믿음의 문제 앞에는 무용지물이다. 작은 씨가 자라서 또 다른 열매를 맺듯, 겨자씨 믿음은 상상을 뛰어 넘는 결과로 나타 난다. 머피든, 샐리든, 겨자씨 앞에서는 논하지 마라.
평형상태의 체계(System)에 외부 에너지가 가해지면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는 외부에서 가해진 에너지의 충격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균형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샤를(Charles’ Law)의 법칙인데, 1884년 르 샤를은 ‘어떤 가역 반응이 평형상태에 있을 때 농도, 압력, 온도 등 외부의 에너지가 가해지면, 외부 에너지의 충격을 줄이는 방향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평형을 이룬다’는 평형 이동에 관한 법칙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차가운 물체에 뜨거운 물체를 접촉시키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물체는 뜨거운 물체의 온도를 낮추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외부의 에너지에 대항해 현상 유지를 하려는 속성이다.
사람의 생각과 태도, 삶의 습관 모두 같은 이치다. 썩은 사과와 싱싱한 사과를 같이 놓으면 그 사과는 썩은 사과로 변한다. 절대로 싱싱한 사과로 바뀌지 않는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같이 있으면 악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과 영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8:13)
사람은 모두 육신대로 살고 싶어 한다. 영적인 부분이 우리 곁에 와도 육신은 거부한다. 신앙적인 부분이 우리 생각과 태도와 습관에 접근하면 영적으로 발전하기 보다 육신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가능하다. 주체가 바뀌어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밖에서 육적인 요소들이 아무리 접근해도 영적인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육에 머물면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영적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승리하는 방법이 된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하실 때 잠든 제자들에게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다. 항상 우리 몸 속에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싸우고 있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영으로 육을 이기는 수 밖에 없다.
아카이아 연합군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약 10년 동안 트로이와의 전쟁을 벌였는데,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공성전 만을 반복하다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 때 오디세우스가 내부에 사람 30명이 숨을 수 있는 거대한 바퀴 달린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 안으로 침공하는 계획을 세우고, 목마를 만드는 대외적 이유를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게 바치는 대규모 ‘제사의 상징물’ 제작으로 내세운다. 이 작전으로 트로이를 점령한다.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 온 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컴퓨터에도 등장한다.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다. ‘정상적인 프로그램으로 위장한 악성코드의 한 종류’다. 악성코드 유형별 비율에서 트로이 목마가 차지하는 비율은 35%가 넘으며, 이는 그래프에서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나 웜에 비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모두가 진실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거짓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나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1:14/우리말)라고 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거짓말로 유혹하여 파괴했다. 그래서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다. 내 안에 들어 온 트로이 목마 같은 요소가 있다면 하루 빨리 구분해야 한다. 그냥 두면 우리를 송두리째 점령하고 말 것이다. 트로이 목마 같은 사람, 사상, 생각, 경험, 느낌 모두 구분해야 한다. 트로이 목마 안에 30명의 정예군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모르고 있다가, 당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 중에, ‘영들 분별함’이 있다. 세상은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어 정말 분별하기 힘들다. 아니 온통 거짓이기에 진실을 찾아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내 안에 진실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래서 두렵다.
詩人 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란 시가 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 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 날 꽃봉오리인 것을!]
그렇다. 나의 열심, 수고, 노력, 깨달음에 따라 성숙한 열매를 수없이 맺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 파고 들고, 말을 걸고, 타인의 말에 귀를 열어 놓고, 사랑했다면 현재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위로 받는 것은 이 말씀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후회라는 원 뜻은 ‘취소할 수 없는’, ‘번복될 수 없는’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번복될 수 없습니다.’라고 번역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은사는 취할 수도 없고, 번복될 수도 없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오늘의 현실도, 삶의 자리도 하나님의 귀한 섭리가 적용되고 있기에 후회할 수가 없다. 이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나 다시 이 시를 읽게 되었을 때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는 감동의 눈물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이, 번복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어느 부인이 남편의 눈을 바라 보며 진지하게 말하더란다. ‘당신은 내게 로또 같은 사람이에요’ 남편 너무 좋아서 ‘내가? 정말로?’ 그러자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철 없는 남편을 보고, ‘응 안 맞아, 하나도 안 맞아!’
요즘 하나님이 아내 같은 말을 할까 봐 밤잠을 설친다.
9분짜리 단편영화 ‘The Lunch Date’(점심 데이트)가 있다.
백인 귀부인이 붐비는 기차역에서 흑인과 부딪혀 쇼핑백을 떨어뜨린다. 물건 주워 담느라 기차를 놓치고 음식점에 가서 샐러드 한 접시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한데 포크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가지고 오니, 걸인처럼 보이는 흑인이 자신의 샐러드 앞에 앉아 자신의 샐러드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귀부인은 화가 나서 포크를 들고 샐러드를 같이 먹었다. 다 먹고 났는데 흑인은 커피를 두 잔 가져 와 귀부인에게 건넸고, 미안해서 그러겠거니, 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기차를 타러 갔는데, 쇼핑백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나 음식점에 와 보니 흑인도 쇼핑백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몹시 당황한 귀부인, 음식점 여기 저기 살펴 보는데, 좀 전에 앉았던 옆 테이블에 자신이 가져 온, 손도 대지 않은 샐러드 접시와 의자 위에 쇼핑백이 있었다.
흑인의 음식을 빼앗아 먹은 것이다. 흑인은 화도 내지 않고, 커피까지 대접했다. 귀부인은 내내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남의 것을 빼앗았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내 것을 누군가 빼앗아 갔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사람들은 내가 타인에게 베풀었다고만 생각한다. 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준 것만 생각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드린 것일 뿐입니다.’(대상29:14/우리말성경)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서 무엇인가 빼앗으며 산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님에게서도 무엇인가 빼앗아야 되는 것처럼, 아니 빼앗으려고 신앙 생활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하나님은 흑인처럼 빼앗기면서 좋아하시는 분이시다. 문제는 그걸 깨닫고 아는 것 만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러니 내 것을 누군가 빼앗아 갔다 해도 서러워 하지 말자.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진공청소기 외판원이 외딴 농가의 문을 두드리자 할머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외판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 지금부터 할머니께서 평생 잊지 못할 놀라운 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외판원은 마당에 있는 흙을 퍼오더니 방바닥에 쫙~~뿌렸다. 그리고 ‘할머니 저랑 내기하죠. 제가 이 신제품 진공 청소기로 이 흙들을 모두 빨아 들이면 할머니가 청소기 한 대를 사시고, 못 빨아들이면 제가 이 흙을 모두 먹어 버리겠습니다. 어때요?’ 그러자 할머니는 멍하니 안됐다는 듯이 외판원을 한참 쳐다 보다가 부엌으로 들어 가서 커다란 숟가락을 하나 들고나와 외판원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안됐어 젊은이! 여기는 전기가 안 들어 온다네. 수저로 다 퍼먹게나!’
아무리 좋은 청소기, 만능 세탁기, 고화질 TV, 핸드폰, 컴퓨터, 그 어떤 전자 제품도 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전혀, 1초도 사용할 수 없다.
‘전기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성경은 이와 같은 말씀을 예수님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You can do nothing.)’(요15:5)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잊고 있어 문제다. 신앙인들이 이런 중증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모른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한센씨 병을 치료한 적이 있다. 나병에 걸리면 최소한 1년 지나야 증상을 알 수 있고, 5~7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고, 20~30년 걸려 증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특히 말초신경의 감염으로 촉감 악화로 통증과 온도를 느끼지 못해 화상을 입어도 모르고, 신체 부위를 잘려도 통증을 모르는 무서운 질병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 질병에 걸려 있다.
‘예수님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라는 중증 병이다. 문제는 통증, 원인을 모르니 문제다. 증상이 나타 났는데도 여전히 치료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아서 문제가 크다. 치유 방법은 딱 하다. 스스로 자각(自覺)하는 것이다. 이 방법 밖에 없다. 치료 시기를 놓치면 끝이다.
스위스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는 [죽음과 죽어 감(On Death and Dying)]이란 책을 썼다. 수백 명의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연구 한 결과, 사람이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슬픔이나 고통을 맞이하게 될 때, 그것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되는가를 정리했다. ‘퀴블러 로스 5단계 이론’이다. 흔히들 영문단어 첫 자를 따서 ‘다브다(DABDA) 모델’이라고도 불린다.
죽음을 통고 받고 나면 첫 번째 반응은 ‘부정(Denial)’이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잠시 후에 ‘분노(Anger)’로 이어진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나?’ 그다음은 자기 스스로 자기와 ‘대화와 타협(Dialogue&Bargaining)’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울(Depression)’에 빠지고 마침내 자기가 당한 현실을 ‘인정(Acceptance)’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정-분노-대화와 타협-우울-인정, 5단계를 거치면서 죽음이든 죽음과 같은 삶의 문제든 최종 단계는 인정하게 된다. 출생부터 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셨던 분이 계신다. 누구나 그 언젠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분은 애초 숙명적인 죽음을 껴안고 짧은 생애를 사셨다. 그러나 죽음 앞에 인간들이 겪는 5단계를 뛰어 넘어 인정하신 분, 바로 예수님이시다. 고난주간 막바지에서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하셨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께서는 고뇌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자 땀이 핏방울같이 돼 땅 위에 떨어졌습니다.’(눅22:44/우리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 들이고 인정하셨다. 사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죽음만 넘어설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죽음이 아무리 두렵고 무서워도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죽음이든, 문제이든 일단 인정하자. 인정해야 길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첫 부임한 신입 선생님!
탤런트 장나라를 닮아 예뻐서 전교 남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선생님!
마음은 얼굴 보다 더 예뻐서 유치원처럼 한 달에 한 번 생일 자 모아서 생일 파티와 함께 선물도 사 주시던 선생님.
졸업식 날 소 눈처럼 큰 눈에서 왕 방울만 한 눈물 뚝뚝 흘리며 내 첫 교사 생활을 속 썩이지도 않고 너무 좋은 추억 만들어 줘서 고맙다던 담임 선생님!
그 날 반 전체가 눈물바다였다.
3년 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 마치고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그 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예쁘고 착하던 우리 선생님은 별명이 ‘미친 치와와’가 돼 있었다.
삶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
사람은 왜 변질하는 것일까?
삶에 지치고, 이리 저리 치이고, 삶의 고난과 이기심이 사람을 아프게 하고 변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 목사 안수 받던 날 흘리던 뜨거운 눈물은 식었고,
결혼식 날 함께 울며 다짐했던 그 사랑의 흔적은 희미해졌고,
처음 임직 받던 날 흘리는 눈물의 감격과 헌신의 약속은 어느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이 돼 버린 것에 대한 변명이 가능할까!
성경의 마지막 책에도, ‘그러나 내가 네게 책망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네가 첫사랑을 버린 것이다.’(계2:4)라고 했다.
그 옛날에도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나 보다.
위안은 되지만 그래도 아쉽고 불편하다.
세상 모두가 첫사랑을 회복하듯 자기 곳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변질됨 없이 유지하면 가정이나 교회나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사람의 눈이 2개인데, 모두 정면만 바라보게 설계 되어 자신을 볼 수가 없다. 오직 앞에 장애물이 있어야, 거울 같이, 자신을 볼 수 있듯 철저한 자기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 보고 흠과 티를 발견해서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 미친 치와와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아니면 옆 사람에게 물어 보라.
이제라도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버렸던 첫사랑을 찾아 보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신병기로 등장한 기관총 때문에 병사들이 참호를 파거나 요새에 숨어서 총을 겨눈 채 적이 나타 나기만을 기다리는 기이한 전쟁이었다. 프랑스가 독일군의 대포를 막아 낼 수 있었던 것도 근대적인 요새 덕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의 육군 장관 ‘앙드레 마지노’는 프랑스와 독일 국경 사이에 설치한 기존의 요새를 획기적으로 보강하여 거대한 시멘트 방벽을 쌓아 독일의 침략을 막자고 제안했다. 10년이 걸린 세계적인 공사로 750km 길이의 방벽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마지노선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마지노선을 쌓고 독일의 어떤 공격에도 안심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프랑스 전역에 팽배했고 안심했다. 그러던 중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여 서서히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프랑스는 군대를 예비군으로 돌릴 정도로 여유 만만했다. 마지노선을 믿었다.
그러나 막상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벨기에를 가로 질러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로 침공해 들어 갔다. 프랑스는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여기서 ‘마지노선의 법칙’이 생겼다.
견고한 방어선은 심리적 무장 해제를 부른다는 것이다. 사람 마다 마지노선이 있다. 돈, 권력, 명예, 건강, 외모,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것이 마지노선이 되어 그걸 믿고 살다가 삶이 무너지는 예기치 않는 상황을 빈번히 맞이한다.
그래서 성경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라고 했다. 신앙인의 마지막 마지노선은 말씀이다. 그 말씀이 빛 되고 등불 되어 고난과 역경, 터널 속에, 지하 갱도에 들어 가도 살아 돌아 올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신앙인들의 간증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말씀으로 승리했다는 고백이다. 삶에 말씀의 마지노선을 쌓아 놓으면 세상 어떤 존재가 공격해 와도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쌓아 놓은 마지노선 그거 믿지 말라.
2020년 QS 세계대학평가 순위 중 1위는 미국 MIT다. 2위 스탠퍼드. 3위 하버드다. 서울대는 37위, 일본의 최고 명문대 도쿄대학은 24위다. 그 도쿄대학을 지망하는 재수생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함께 수험공부를 시작한 50대 엄마가 1년 만에 도쿄대학에 합격했다. 아들은 두 번째 도전에서도 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왔을까?
아마도 엄마가 아들을 향한 간절함이 이런 기적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영국문화원에서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비영어권 102개국 4만 명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골라 달라고 했다. 1위 어머니(mother) 2위 열정(passion) 3위 미소(미소)였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이 기사를 읽다가 성경에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마22:33)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무리는 헬라어로 오클로스, 즉 군중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습과 모든 것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 지른 사람들이다.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만 했지, 삶에서 적용하거나, 그 가르침에 대한 열매는 없었다.
가르치는 자의 행복은 본인 보다 더 훌륭하고 더 잘 되는 것이다. 도쿄대학에 합격한 엄마는 아들이 떨어졌는데 기뻤을까, 슬펐을까!
2020년은 참으로 기나긴 시간의 연속인데, 나의 가정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 3월 10일 막내가 입대했고, 12월 7일에는 큰아들이 정현이 논산훈련소에 의무병으로 입소했다. 전날 매형이 좋은 중식당에서 밥 한 끼 사 주고, 누나들은 격려금을 주고 보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그 동안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고 백합꽃 한 다발을 엄마 품에 안겨 줬다.
전혀 예상치 못한 꽃다발을 받고 웃어야 하는데, 눈물에 가려 꽃을 제대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부모 보다 성숙한 아들을 보는 것은 가장 기쁜 일이다. 그리고 웃으며 KTX 타고 논산으로 갔다. 그 백합꽃은 거실에서 울고 있다.
케이블 방송 ‘미스트롯 2’ 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인 포항 동해중학교 2학년 전유진 학생이 ‘서울 가서 살자’ 라는 노래를 불렀다. 첫 가사에 감동을 받았다. 가스펠송은 아닌데 깨달음이 왔다. 가사다. ‘그 이불솜 베게 다 버리고, 우리 이제 서울 가서 살자. 그대야가 말한 천 번에 약속은 괜찮으니, 서울 가 살자. 저 달이 건너 가 먼저 비춘다니, 우리 무슨 어떤 걱정 있을까요.... 이젠 그래서 또 살아보는 세월일 건데 미련 없이 버리고 서울 가 살자.’
‘우리 이제 서울 가서 살자’라는 가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와, 그리고 그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는 데에, 새삼 감동했다.
만약 옥천에 살고 계시는 80대 나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답하셨을까?
아니야 ‘서울 가긴, 그냥 여기서 살다 천국 갈래’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어느 곳이든 다시 가서 시작할 기회, 나이, 청춘, 시험, 그 무엇이든 이런 기회가 있는 사람을 행복한 것이다.
그 다음 가사 “저 달이 건너 가 먼저 비춘다니, 우리 무슨 걱정 있을까요” 라는 가사에서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내가 네 앞에 천사를 보내, 네가 가는 길 내내 너를 보호하고, 내가 준비한 곳으로 너를 데려 가게 할 것이다.”(출23:20)
가사를 쓴 사람은 신앙인이 아닐 수 있을 텐데, 달이 먼저 가 비춘다는 말은 희망과 꿈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음에, 새삼 마음이 울컥했다. 그렇다. 이제 2020년 질병의 공포와 아픔에서 모두가 숨 죽이며 속앓이하고, 신음 끊이지 않았던 한 해 미련 없이 버리고 2021년 다시 시작하자. 저 달이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먼저 가서 보호하시고 준비해 주신다고 하셨다. 서울 가서 살든, 부산 가서 살든, 광주 가서 살든, 미국 가서 살든, 이불솜, 베게, 코로나, 근심, 걱정 다 버리고 다시 살아 보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2021년 가는 길 내내 복되고 형통하시기를...
당신도 서울 가서 살 수 있다.
어느 목사님이 안수 받은 후 처음 장례식 집례는 어린 꼬마였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 가정에 첫째 아들이었고, 첫 손주였다. 생전에 그 가정 심방했었는데 그 아이가 부모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 놓고 무시했다. 오라 하면 가고, 앉으라 하면 일어 섰다. 그렇게 행동해도 부모는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귀여워 하면서 사랑스럽게 여겼다.
하루는 집 앞마당 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 아이가 마당을 가로 질러 도로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부모의 눈에 들어 왔다. 한 쪽에서는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 오고 있었다. 아이는 주차해 둔 자동차 사이로 빠져 나가 도로 쪽으로 내달렸다. 그 때 부모는 다급하고도 절규하며 ‘안돼! 돌아 와!’ 라고 외쳤다.
그 때 아이는 잠깐 서서 부모를 보고 씩~웃더니 돌아 서서 달려 오는 도로로 달려 갔다. 그 순간 자동차가 그 아이를 세차게 들이 받아, 사망했다.
부모는 처음 얻은 아들이라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버릇없이 키웠다. 결국 잘못할 때 징계하지 않고, 사랑으로만 키웠기에, 결국 사고를 당한 것이다.
성경에, ‘회초리를 아끼는 것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 때에 징계한다.’(잠13:24)는 말씀이 있다. 사랑으로만 키울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것은 안된다고 반드시 가르치고 매를 대야 한다.
아이 때는 부모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어른들이 있다. 그런데 어른은 누가 징계할까?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징계와 고난과 연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돌아 오라고 소리칠 때 돌아 오면 산다. 성경에 ‘모든 연단이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통해 연단된 사람들에게 의로운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히12:11)라고 했다.
연단과 고난은 하나님 앞에 돌아 오라는 소리다. 때로는 나에게 고난과 역경이 겹치면 자신을 먼저 돌아 볼 일이다. 그 소리는 지금도 곳곳에서 들려 오고 있다. 그 소리를 듣고 돌아 오는 사람은 복되고 형통할 것이다.
지난 해 아들 둘이 군에 입대했다. 막내는 제1차 코로나 정점인 3월 입대했고, 큰 애는 제2차 코로나 정점인 12월 군에 갔다. 모두 훈련소 들어갈 때 따뜻한 포옹도 없이 나라에 빼앗긴 것 같았다. 막내는 딱 한번 휴가 나오더니, 지금까지 소식 없다. 외박도 면회도 불가능하다. 다만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어서, 매일 5시부터 9시까지 문자는 가능하다. 그것도 훈련을 나가거나 지원을 나가면, 문자도 쉽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매일 아들에게 문자를 보내 놓고 그걸 보면 답을 하는데, 막내 아들은 살갑지 않다. 긴 문자에 늘 단답형이다. 아무리 길게 문자를 남겨도 겨우 ‘알았어요’ 라고 보통 5자를 넘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 있고, 어디선가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다.
이런 상황에 엄마는 아들 생각에 사랑을 담아 늘 긴 문자를 담아 아들이 ‘보고 싶다’ 고 남긴다. 그런데 어느 저녁을 먹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얼른 가서 문자를 확인하더니, 밥을 먹다 말고 핸드폰만 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마음이 덜컹. 왜? 막내 훈이가 아픈가? 그러더니 문자를 읽지 못하고 핸드폰을 보여 줬다. 막내한테 장문의 답 문자가 왔다.
‘엄마, 나도 보고 싶어’ 8자다.
‘보고 싶다’ 는 문자에 생각이 복잡해졌다. ‘엄마가 보고 싶다’ 는 것은 군 생활이 힘든가 하는 생각에 밥을 먹다 가슴이 먹먹해 소리 없이 수저만 들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를 보고 싶은가에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다윗은 ‘내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시18:1)라고 했다. 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를 사랑해 주세요’ 요구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차원이 높다. 엄마는 늘 아들을 보고 싶어 하고 사랑한다.
아들이 엄마를 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철이 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1950년대에 메이어 프리드먼 등의 심리학자들은 특정 유형의 성격과 질병 발생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행동 양상 A형은 극단적인 승부욕, 공격성, 인내심 결핍, 조급함과 함께 주변 환경에 대한 ‘적의’[敵意]를 특징으로 한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삶의 여러 방면에 불만을 느끼고 개인의 힘으로 현재의 상태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B형은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만족하며 늘 마음 상태가 안정적이고 경쟁을 꺼리며 타인에 대해 ‘적의’를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A형이 B형 보다 질병에 걸릴 확률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게리 스완과 도리트 카멜리는 1996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A형과 B형의 행동 양상 중 가장 위험한 요소를 ‘적의’라고 밝혔다.
‘적의’는 ‘타인을 적대하는 마음’, ‘해치려는 마음’이다. 주변 환경과 자신이 속한 그룹에 대해 적의를 느끼는 사람은 언제나 고도의 각성 상태에 놓여 있어서 각종 질병에 걸리기 쉽다.
C형도 있다. C형은 선량함, 인내심, 자발적인 협동심과 자기 희생을 보이지만, 지나치게 참고 견디고 혼자서 울분을 삼키는 등 부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암에 걸릴 확률이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한다.
결국 1998년 연구에서 ‘낙관적인 사람’이 대부분 건강하고 질병에 걸리는 확률이 적다고 밝혔다.
문제는 지금 내가 ‘적의’를 품고 있느냐이다. 누군가를 향해서 적대하고, 해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개인과 사회는 병들 수 밖에 없다. 해결책은 적의를 품지 말고, 낙관적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의 분노는 당장에 드러 나지만 현명한 사람은 수치를 덮는다.’(잠12:16)고 했다.
분노와 적의는 질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기만 병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그룹과 사회도 병들게 한다.
요즘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니 모두일지 모른다. 인간 DNA에 용서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걸까? 고민되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