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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요셉이 가나안을 사모함
<창세기 50:22~23>
“22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창세기는 사람을 창조했다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요셉이 입관했다로 끝난다. 창세기라는 말이 시작이라는 말이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또 하나님의 계시, 전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전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진행해서 마지막 계시록에 가서 완성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씨가 뿌려진 셈이다. 창세기에서 씨가 다 뿌려져서 그것이 역사적으로 여러 과정을 격어서 마지막에 가서 추수를 하게 되는 것이 계시록이다. 축복이나 저주나 모든 시작이 창세기에 이미 다 있다. 그것이 발전하는 것이다. 이 씨를 알고 과정을 보아야 하는데 이것을 모르고 성경을 보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모르니까 결국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성경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불교와 다른 점이 불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시작이 끝이 있다. 마침이 있다.
그 말은 또 시작하신 이가 있고, 마치신 이가 있다는 사상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말 자체가 시작하신 이가 있고, 그리고 시작이 됐다는 말이니까 이 말 속에는 벌써 마지막 추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일을 시작해놓고 결과를 보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관은 추수 때를 기다리는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이 창세기에서 마지막 주자이다. 아담-셋-에노스-노아, 이렇게 11장까지 지나간다. 그런 후에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이다. 중요한 사람이 8명이다. 창세기 1장부터 2장까지는 역사가 아니고, 그것은 영원한 계시이다. 시간의 세계가 아니고,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인 것이다. 그것이 어디에 가서 마쳐지는가? 계시록 22장에 가서 앞뒤가 서로 맞아진다. 만일 창세기 3장 이후의 사건이 없다고 가정하면, 창세기 1장 2장과 계시록 22장과 딱 맞는다. 중간에 어떤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복잡하게 역사가 진행된다.
창세기 3장 이후는 쉽게 말하면 치료하는 역사이다. 무엇이 잘못됐기 때문에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역사이다. 잘못된 것만 생각하고 사람들이 성경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형, 즉 맨 처음 시작한 것과 그 시작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중간에서 치료를 하다보면, 마치 의사가 건강한 몸을 모르고 병만 알고 있는 것과 똑같다. 건강한 몸을 먼저 알고 난 다음에 병을 알아야 치료할 때 어떻게 치료해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치료를 하면 어디로 치료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성경에서 혼란이 일어난 것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될지를 모르는 것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여기서 요셉이 입관했다고 했다. 지금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물으면, 요셉이 입관한 다음에 무엇이 나오겠느냐고 물으면 그 다음은 천당이 나오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 창세기에서는 입관했다로 끝나면서 요셉은 무엇을 당부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실 때 내 해골을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열조가 있는 곳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있는 곳에 자기를 묻어달라는 것이 유언이었다. 나는 이제 천당으로 간다는 말도 아니고,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간다는 말도 아니다. 나는 열조에게로 가야할 것이니까 거기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 기이한 현상이 이 유골을 가지고 앞세워 애굽을 나간다. 광야 40년 동안 이 유골을 매고 다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 유골을 매고 들어간다. 어쩌면 죽은 요셉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는 행렬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상으로 보면 그렇다. 요셉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결국 애굽에서 매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관만 하고 가나안 땅을 간다. 그들의 영원한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아주 현실적이다. 그들의 종교가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하늘이 된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다. 가나안 땅 어디로 가는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묻혀있는 그곳으로 간다. 구약에서 보면 사람이 죽었을 때 어디로 갔다고 말하는가 하면 천당으로 갔다고 말하지 않고,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천당 갔다는 말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 씨를 확실하게 알아야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이며, 어디에서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알게 된다. 이것은 씨이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가나안이라는 땅이 과연 마지막 땅인가? 그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최종적인 땅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가나안이 있는가? 그 문제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들어가서 점령을 하여 그 안에 다윗의 왕국이 건설되고 그 왕국이 패망하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 만일 그 가나안 땅이 목적지라면 가나안 땅까지 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끝나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가나안을 재해석하는 사람이 생겼다. 가나안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그 가나안이라는 것이 어디인가? 그것을 재해석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 사람이 예수의 제자인 사도 바울이다. 히브리서를 읽으면 여호수아가 만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4장 8절에 보면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하고 말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써 그들에게 안식이 다 주어졌다면 왜 또 다른 날을 말했겠는가? 그것은 아직 완전한 안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날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또 다른 안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완성될 안식이 남아있다는 그 말이다.
완성될 안식! 이것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유태인들은 가나안 땅이 종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기서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계시가 없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날을 말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날은 시편에서 시인이 말하는 것이다. 그 다른 날을 바라보고 가나안 땅이 전부가 아니구나, 마지막은 아니구나, 여기서 무엇인가가 또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고, 거기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선지자들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의 혈통을 통한 세계에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비약을 한다. 예수님이 오시면서부터는 쉽게 말하면 혈통의 세계는 끝난 것이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안식의 땅도 가나안 땅에서 다른 땅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다른 땅으로 넘어가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천당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다른 땅은 천당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할 때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백성 단위의 안식이 남아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은 단체적인 안식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오늘 교회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해서 교회가 왔지만 교회는 이스라엘의 완성이다.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어떤 것을 완성하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 안에 와서는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가서 끝났고, 교회는 어디에 가서 끝나는 것인가? 그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 막연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세계이다. 이 세계는 오늘날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지금 히브리서에 있는 말은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당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할 처소는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백성은 안식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셉은 입관하여 결국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은 결국 어디로 가기 위한 것인가? 그리스도께로 가기 위한 것이고, 결국 교회로 가기 위한 것이다. 교회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새 예루살렘을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라 했기 때문에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 쉽다.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사회가 어떻게 하늘로부터 내려오겠는가. 하늘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가 온다는 말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더 나은 본향을 찾아 더 나은 교회를 찾는 것이다. 더 완전한 교회를 향해서 가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와서 교회가 더 나은 교회를 계속 추구하고 더 나은 교회로 발전해갔다면 지금 2000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교회는 엄청난 변화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초대교회보다 못해졌는가? 오늘날 교회가 항상 꿈꾸는 것이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처럼 될 수 있는가로 되어버렸다. 이것은 초대교회보다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맞물린 원인이 있지만 이것이 생명과 그 영이 끊어지면서 2세기 3세기를 지나면서 자꾸 교리화되고 제도화되어 나갔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교리로 어떤 것을 고정시켜서 교파를 만들거나 교리를 만들어놓으면 그때 당시에는 그것을 유지하기가 참 좋지만 그것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진행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인데 어떤 교리라는 틀을 놓고 이것을 지키자고 해버리면 거기서 더 하나님이 움직일 수 없고 운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500년 1000년을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때로 예를 들면 율법에 보면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가면 너희가 조석으로 드리는 번제로 인해 내가 냄새 맡기가 괴롭다는 말이 나온다. 그 절대적인 율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어떤 단계에 왔을 때는 너희가 조석으로 드리는 그 예물로 인해서 내가 냄새 맡는 것이 괴롭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들이다. 예언자적인 종교와 제사적인 종교가 이스라엘 종교의 두 주류를 이루었다. 제사적 종교라는 말은 종교적이라는 뜻이다. 교리적이고 제도적이니까 똑같은 일을 똑같이 되풀이해야 된다. 제사적이라는 것은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오늘 드린 이 방식대로 성경에 기록된 문자대로 해야 된다. 이것은 굳어져 있고 경직되어 있다.
그런데 예언자적 종교는 그것이 아니고 항상 새로운 계시를 접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분명히 이렇게 번제를 드리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합당했지만 사람들의 마음들이 잘못되어 잘못된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는 예언자들에게는 저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저것을 받지 않는구나를 알게 된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제도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이스라엘 종교는 예언자를 통해서 늘 새로운 물갈이를 하고 또 새로운 개념이 들어오고 새로운 관념이 들어온다.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왔다. 예수님은 구약에 나와 있던 모든 것을 재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일 문제를 예수님이 접할 때는 어떻게 접하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은 절대로 범하지 말라. 안식일에 일한 자는 죽일지니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대로 밖에 할 수 없는데, 예수님 안에 와서 다시 해석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 안식의 개념이 하나님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날짜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편안케 하는 것이 아니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안식일을 창조해서 드린다는 뜻이다. 정해진 날짜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안식케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편안케 해야만 하나님이 안식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다. 이렇게 뒤바꿔져 있다.
구약의 문자적인 모든 것이 한 인격 안에 와서 완전히 재해석됨으로써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이 말은 사람이 곧 하나님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입장에서 다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 안식했는가?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안식했다. 사람이 창조된 것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고 안식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갈망은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창조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안식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인격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구약 4000년의 전통과 역사 속에서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런 개념을 예수님계서 가지고 오시게 되었다. 오늘 우리도 그분 안에서 이런 개념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개념 전환이 없으면 우리는 그냥 구약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의문에 빠져 있고 문자에 빠져 있게 된다.
입관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한 것을 문자적으로 보면 해골 매고 가서 가나안 땅에 가서 열조의 무덤에 묻어주면 된다. 하지만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해야 된다. 이 해골은 무엇이며, 이 해골은 어디로 가야 되는가? 결국 안식의 땅으로 가야된다.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곳으로 가야된다. 하나님이 안식케 하는 곳으로 가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가야 되고, 그리스도 안으로 가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교회 안으로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확산이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교회가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것이 안 되면 하나님은 여전히 안식할 수 없다.
한 사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안식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을 때는 안식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한 사람만 가지고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가? 온 인류가 거역하고 있는 판에 하나님이 안식할 수 없다. 그러니까 교회를 택하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했던 것처럼 이는 내 집이고 이것은 내 몸이라고 보아질 때 하나님은 안식하시게 된다.
하나님이 안식하시게 될 때 인생은 무엇이 되는가? 인생은 최고의 축복에 이르게 된다. 아들이 부모를 안심시키고 부모에게 만족이 되게 하는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은 알고 보면 훌륭한 아들이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들어야 부모가 안심한다. 부모를 안심시켰다는 것은 사실은 다른 면으로 보면 자기가 잘되는 것이므로 자기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안식시켰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온전하다는 말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안식케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교회가 온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교회는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것이 되어야 된다. 다른 것은 해야 소용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 지어진 것이 사람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의 확산이고 그분의 증거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이 땅위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안식케 할 수 있는 곳이다.
요셉은 결국 입관되어 가나안으로 갔지만 오늘 우리는 입관되어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간다. 죽어서 그리스도 안으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어서 가는 것은 입관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부활하는가? 교회 안으로 부활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서 부활하시고, 부활하시고 난 후에 교회가 생겼다. 사실은 그것은 그분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로마서에 있는 대로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외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와 산 것이라고 할 때는 어디에 산 것인가? 나 혼자 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그 교회가 무엇인가? 아주 심각한 문제이고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의 집단도 아니고, 교리를 수호하는 단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정말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땅위에서 유일한 곳이다. 이것은 완전히 인격체여야 되지 다른 것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것은 인격 이외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안식케 할 수가 없다. 부모는 아들이 물론 공부 잘하는 것도 좋고 일 잘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전부가 부모의 갈망에 포함된다. 정말 부모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은 그 자식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서 안식을 구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서 안식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사업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식하는 것도 아니고, 번창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인격체이냐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예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제물들이다.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흠향하신다, 만족해하신다고 되어있다. 그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알고 보면 전부 인격의 표현이다. 송아지나 양이나 비둘기나 고운 가루 등은 전부 다 한 인격, 영원한 인격,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다른 것을 통해 하나님은 만족하실 수가 없다.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종교적인 모든 것이 끝났다. 사업적인 것이 다 끝났다. 나도 목회를 하고 선교기관에서 일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목회를 성공을 하는가, 어떻게 하면 선교기관에서 성공적으로 일을 하는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목회에 성공한 사람들, 선교에 성공한 사람들만 쫓아다녔다. 자기를 돌아볼 정신이 없을 만큼 그런 것에 집착해 있다. 교회 성장 세미나 같은 것이 열린다고 하면 구름떼처럼 군대처럼 몰려간다. CCC에 오면 전도하는 기술을 배운다고 하여 전국에서 교육자들이 전도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몰려든다. 나도 이런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고, 거기서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고, 또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리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한 인격이다. 그것을 알고 나서 그 모든 아주 시시한 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만일 내가 내 일생에서 엄청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가 성공을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고, 사실은 사업만 있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그대로 있는데 사업만 번창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내 관계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면서 사업을 내놓거나 이런 일을 내놓은 것은 안 된다. 영결식에 가면 이런 업적을 했다는 것을 내놓는 것은 사람들 보라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안식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 인격체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안식했는지가 중요한 문제이지, 얼마만큼 퍼졌는지 얼마만큼 커졌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니까 내 인생이 조용해졌다. 내가 일부러 깨끗해지고 정결해지려고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고 관심이 그곳으로 가니까 정결해졌다. 다른 생각이 없으니까 세상도 조용해지고 나도 조용해졌다. 그전에는 내 주변이 시끄러웠다.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 주변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떠나니까 내 주변도 조용해지고 나도 조용해졌다.
우리의 갈 곳은 그리스도 안으로 가는 것이다. 그분 안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분의 몸이고, 그분의 확장이고, 그분의 증가이니까 그분의 생명, 그분의 인격이 증가되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고 우리가 내 한 사람으로서 그 한분의 영광을 드러내기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하다. 그 교회를 통해서 그 한분을 증거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나로서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면 형제를 찾게 되고 형제와 함께 살게 되고 같이 숨 쉬게 된다.
이 이후로 출애굽기로 연결되는 것은 바로 입관됐던 한 사람이 애굽을 탈출해 나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모든 영화를 누렸지만 그러나 거기는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곳은 가나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모든 것을 하지만 그것은 내가 영원히 갈 곳이 아니라 지금 밥 먹기 위해 하는 것이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것에 불과하다. 갈 곳은 다른 곳이다.
내가 갈 곳은 교회 안이고, 그리스도 안이고, 영원한 세계 안으로 가고 있다. 이것을 묘사해놓은 곳이 천년왕국이고, 새 예루살렘이다. 왕국이라는 말은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니까 승리라는 뜻이고, 왕들의 나라라는 뜻이므로 승리자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새 예루살렘은 신부로 단장된다고 하니까 그리스도의 배필이 된다는 뜻이다. 배필이 되려면 그분의 마음에 들어야 된다. 그분의 마음에 들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들려면 그분의 성향과 같아야 마음에 들지 그분의 성향과 틀린 것이 어떻게 마음에 들겠는가.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 신부를 보면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이렇게 질문할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자기를 보여주고 알려주고 싶은데 형상이 없는 분이니까 자기로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헷갈려서 우왕좌왕한다. 얼마나 그 갈망이 하나님 자기를 알려주고 싶겠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도를 통해 안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만일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어느 세월에 이 인류가 하나님을 알겠는가. 그리고 번쩍 번쩍 무엇이 와서 잠시 동안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꿈에 좋은 장면도 있고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다시 한번 꾸려고 해도 안 된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도 다시 한번 해보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과 사람 관계가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예수라는 사람을 보았을 때,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냈다”(요1:18)가 된 것처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집이라고 하고 그분의 모양이라고 하고 그분의 몸이라고 한다. 성막을 볼 때 성막은 하나님 자신의 표현으로서 지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지어놓은 후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 자체가 하나님 자신의 집이고, 하나님의 거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려면 누구라도 성막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형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교회로 가는 곳이 되어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려면 교회를 보아야 될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런 상태가 새 예루살렘이다. 이런 상황이 이루어지는 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오늘 우리는 이 새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가 다 그렇게 되지 못했다할지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을 바라고 가는 노선 안에 있어야 된다. 노선이 틀려버리면 아무리 가도 가도 다른 길로 가게 된다. 지금 비록 아니라할지라도 그렇게 못 본다할지라도, 예를 들어 유채꽃이 피려면 유채꽃 씨여야 하는 것처럼, 지금 그것이 아니면 아무리 다른 데를 가도 소용이 없다.
한 인격에 초점을 두고 있는 교회라야 거기로 가게 되는 것이지, 인격 이외의 것에 초점을 두고 있으면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아무리 가도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만다. 기독교 안에서 안타까운 것이 어떻게 해서 그 인격을 잃어버렸는지 하는 것이다. 그 인격을 잃어버리면 교리와 제도가 나온다. 사람들은 교리를 믿는다. 그것을 열심히 믿고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성경의 지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성경도 그분을 알게 하려고 준 것이지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치려고 준 것이 아니다.
한 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실 그분을 우리에게 알려주느라고 써놓은 것이 성경이다. 여기서 교리를 뽑아내어 신조를 만들고 교리를 신봉하게 만든다는 것은 그분과는 너무너무 관계가 없다. 이것이 1.5~2세기 무렵부터 교회에서 시작되어 이런 논쟁을 통해 교회가 이루어지고 핍박 기간 동안에도 마찬가지이고 국교가 되면서 확장되고 더 굳어지고 확고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종교가 되긴 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실종되게 되었다. 그분 자신의 한 인격은 실종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요셉이 입관하여 가나안으로 가고자 원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연합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고 방황하던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보여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길이 이렇게 환히 열려있어서 가는 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요셉은 죽어 장사되고 입관될 때 자기는 애굽에 살 사람이 아니고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할 사람으로 알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사람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하고 오늘 우리 길을 어디에 정해져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