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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자연 (natura, la nature)과 권능(potentia, la puissance)
스피노자(Spinoza, 1970)(PUF); [III]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색인」에서
들뢰즈, Sup “Philosophes”: PUF, 1970, pp 39-99(P. 128)
-[이 내용은 수정 및 첨가를 하여, 스피노자: 실천 철학(Spinoza: philosophie pratique, 1981)(P.177)에 있음,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민음사, 1999) 속에 들어 있음]
* 스피노자(Spinoza, 1970)의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색인」에서 내가 개념들을 정리하는 10가지 순서와 방향을, 필히 「스피노자와 세편의 윤리학(Spinoza et les trois “Ethiques”, 1993)」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색인’의 개념들은 스피노자 철학 개념의 이해를 위한 해설이다. 그런데 ‘세편의 윤리학’에서는 인간의 본성(la nature)을 해명하기 위한 세 가지 구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데카르트 이래로 칸트에 이르기 까지 이원론으로 보는 것과 달리, 스피노자에게는 무한한 속성들에서 양태로 진행하는 두 가지 선들이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실은 다른 하나의 선이 보이지 않는 선처럼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선은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의식의 일반(공통감각들)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비해, 셋째 선은 직관이라고 하지만 내재하지만 오성의 범위 밖의 본능(벩송이 인식 또는 의식이라고 말하는)에 닮은 것 같다. 나로서는, 벩송이 지성을 통한 인식의 길이 막힐 때, 본능의 길이 심층에서 표면으로 올라와 새로운 인식을 창조해낸다고 본다. 이 셋째 인식에 관하여 스피노자가 다른 서술 방식으로 썼다는 것이다.
갑자기 생각한 것으로, 이 본능처럼 있었던 것이 표면으로 올라와 의식 또는 인식의 활동을 하는 측면을, 들뢰즈에서 탈영토화에 붙여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있기는 있었는데 그저 내면에 침잠해 있으면서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다가, 생태와 신체의 감화에서 새롭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창안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창안에서 신체적 행동이나 그에 대한 감화와 감정의 변이가 탈영토와의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 새로운 방식 또는 새로운 창안에 시대와 환경에 걸맞지 않을 경우에, 사람들은 괴물이 등장한 것처럼 불쾌히 여기거나 또는 무섭게 여기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삶에서 편안과 습관을 바꾸기 어려운 데서 오는 불평 또는 무지일 것이다. 잘 들여다보면 그 불쾌와 괴물이 곧 자신의 진솔한 면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권능의 잠재성에서 현실화로 표면의 등장 과정일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화, 전진, 진화해 갈 것이다.
이런 생각의 동기는 일반적으로 배태에서 개체 발생은 종발생은 (이질)반복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태어나서 제2의(20세) 탄생까지는 정체성이 발현되기까지 인류역사를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2탄생 이후로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 ‘이뭣꼬’이며 이 과정을 들뢰는 「드라마화의 방법」에서 역동의 단계들을 설명했을 것 같다. 그러면 개별적 영혼이 ‘이뭣꼬’를 만드는 과정에서 탈영토화(탈영혼화)에서 등장하는 내재성의 힘은 직관으로 또는 본능으로 알아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단 한번으로 그치더라도, 플로티노스처럼 몇 번의 몰아경(en-tase)에 들어 갈 수 있고, 그 몰아경이 열반일 것이다. (52VLF)
*** 오랫동안 영혼(생명)과 신체(물체)에 관한 이중성을 생각해 왔었다. 영혼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신체가 영혼에 미치는 영향보다 크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벩송의 8자도식에서 밑의 회로들은 위의 회로들 보다 더 크다(벩송도 그렇게 설명한다)는 점과 그 밑의 회로들(기억)이 의식(영혼)의 차원으로 보았고, 위의 사실(또는 사건, 신체)로 여겼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권능을 읽으면서 신체가 운동하고 작동하며 움직임이 크면 클수록 의식(영혼)의 활동이 크다는 것을 보았다. 신체의 회오리가 큰 만큼 영혼은 활동성이 넓다. 다시 말하면 신체의 오랜 진화 과정들(정보의 축적과정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유의 범위는 넓다. 나는 신체의 회오리가 너무나 넓어서 그 중심에 두뇌라는 것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고 상상해 보았다. 플로티노스처럼, 사유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확장된 회오리의 가장자리에 모든 측면에서 연관되어 있는데(마치 사영기하학처럼), 중심의 신체는 기억력의 압축일 수 밖에 없고 가장자리는 현실에서 추억의 힘을 발휘하는 장소(위치)정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신체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상상이며, 이마쥬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마쥬는 벩송의 이마쥬와 닮은 것이 된다. 신체의 중심도 바깥의 가장자리도 아닌 중간지대가 이마쥬가 되는 것이다. - 윤구병이 그토록 유물론적으로 고심하면서 0과1사이의 아페이론을 설명하려고 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 이런 사유방식을 전개한 것이 스피노자이고, 이것을 권능과 양태로서 설명한 것은 들뢰즈이다. 이제 속성들이 아페이론이 된다고 해보자. 그러면 아페이론이 무한하다는 것도 윤구병식으로 설명이 된다. 일반적으로 공통감각을 통해서는 속성이 두 가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마치 0과 1사이에 무한한 단계 또는 부분들이 있는데, 중간부분에서 양편을 거의 대등하게 비교할 수 있는 사이(자름)은 마치 두 개의 속성(영혼과 신체)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재료처럼 보인다. 이를 평행으로 보는 것은 라이프니츠였다. 스피노자는 알려진 두 가지 평행도 대칭도 대립도 아니라고 했다. 벩송은 우선 원뿔로서 다음을 8자화로서 비대칭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서로의 연관이 깊은 경우에는 거울효과와 같다고 했다. 이 거울은 둘이 동등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실재성 다른 하나의 가상성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혼과 신체를 넘어서, 도덕적 면에서 선과 악도 0과1사이 인가? 도덕덕인 면은 속성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양태인 것이다. 내재성의 연속에서 드러난 행동을 문제삼는 것이다. 이데아(1, 정신)의 연속에서 양태까지거나 흐름(0, 물질)의 지속에서 양태까지 둘다 시뮬라크르를 생산한다. 그런데 전자는 이데아에 비해 보면 완전하게 잘 못 만들어내지만 이데아의 모습이 있다는 측면에서 선이라고 할 것이고, 후자에서는 흐름을 고정화하여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가 다른 형태들과 더불어 연관에서 좋은지 멋진지 등으로 그나마 꼴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에 선이라 한다. 이 두 측면 0와1사이의 한 중간에 만나면 마치 대응처럼 여길 수 있는데, 플라톤이 “소피스트”편에서 시뮬라크르의 두 종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무래도 스피노자는 ‘0와1 사이’의 유형을 드러내며, 권능의 현존을 형상화(양태화)하려고 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점에서 0와1 사이의 무한이 아니라 0의 생성의 구성방식에서 무한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면 0측이 무한한 요소 이거나 무한한 권능이어야 한다. 무한한 요소로 보려고 했던 것이 소박한 유물론이고, 그냥 무한한 흐름(권능, 운동)으로 보는 것이 스피노자와 벩송이다. 그러면 흐름이 순수 유물론이 된다. 흐름의 권능과 운동은 지금까지 만들어지는 것도 보존하는 의미에서 만들기도 하지만, 이 권능의 확장은 여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고 또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을 능가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흐름(신체)의 권능이 상상(사유, 공상)을 확장하게 한다. 신체의 흐름이 빠르면 빠를수록 사유는 공상을 넘어서 환상에 빠지거나 망상과 착락에 빠질 수 있다. 이 신체 흐름의 과도함을 권능에 맞추는 것을 스피노자는 온이성이라 부르고 벩송은 고등상식이라고 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간의 제3인간으로 기준 또는 유형(표준)을 찾으려는 데서 문제제기를 잘 못한 것이다. 기준의 일반화는 논리의 극한에서 추상화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추상화의 두길 0길과 1길에 어느 쪽엔가 향하게 되는데, 이를 부정하게 되면 중간이라는 일반화를 추상화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종과 류의 분류에서 최고류를 만들면 된다. 이런 생각은 18세기 분류학에서 린네로부터 진화론을 분류학에서 말하는 작은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바꾼 것이 다윈이라 보면 된다. 그런데 제3의 기준을 종과 류를 넘어서는 최상위 분류(추상)은 순수 사유(추상)으로 갈 수 밖에 없으니 부동의 원동자를 만든다. (52WMJ)
# 4.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 색인 63-148. (번 69-163)
- [III] 윤리학(Ethique)의 주요 개념들의 색인 39-99
[우리는 이 중에서 10개의 중요 개념을 옮길 것이다. 이런 순서는 아니지만 방향성으로 선을 연결해보면, 스피노자 사유의 진솔한 면을 따라갈 것이다.]
1) 자연 (natura, la nature) 133-135
내재성(immanentia, immanence) 121
본질(essentia, essence) 110
실체(실체 substantia, substance)
2) 권능(potentia puissance) 번 148
코나투스(conatus) - 권능 참조
욕망(cupiditas, désir) - 권능 참조
욕구(appetition, appétit) - 권능 참조
소질(aptitudo, aptitude) - 권능 참조
3) 영혼-정신 (mens et corpus, esprit et corps: parallélisme) 92
4) 인식(인식 종류)(cognitio-genus cognitionis, connaissance-genre de connaissance) 79
5) 속성 (attributum, attribut) 81
6) 양태 (modus, mode) 131
7) 감화(변용)-감정 (affectiones-affectus, affections-affects)
사랑-증오(amor-odium, amour-haine) 변용(감화) 참조
기쁨-슬픔(laetitia-tristitia, joie-tristesse) 변용, 좋음, 권능 참조
지복(beatitudo, béatitude) - 감화 참조.
감정(sententiae, sentiment) - 감화 참조
[나로서, affections 과 affects의 경계에 emotion을 설정해보자. ]
정념(수동) (passio, passion) - 감정 참조
8) 무한 (infinitum, infinit) 124
9) 필연 (necessarius, le nécessaire) 135
10) 자유 (libertas, la liberté) 126
1. 자연 (natura, la nature ) p.120, 133
(실체의 원인으로서) 능산적(naturante)이라고 말해지는 자연과 (결과와 양태로서) 소산적(naturée)이라고 말해지는 자연은 상호 내재성의 연관들 속에서 파악된다. 한편으로 원인은 자신 안에 머물면서 생산한다. 다른 한편, 결과 또는 생산물은 원인 속에 머물러 있다(E, I., 29, sc). 이 이중의 조건에 의해 우리는 다른 특별한 규정이 없이 자연 일반에 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자연주의는 일의성의 세 가지 형식을 충족시키게 된다. 1]속성들의 일의성, 여기서 속성들은 동일한 형식 아래서 능산적 자연으로서 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소산적 자연으로서 양태들의 본질들을 함유한다. 2]원인의 일의성, 여기에는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소산적 자연의 발생으로서 신, 자기 원인과 동일한 의미로, 능산적 자연의 계보의 발생으로서 신, 신에 대해서 말해진다. 양상의 일의성, 여기에서 필연성은 능산적 자연의 질서 또한 규정하게 된다.
소산적 자연의 질서라는 관념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1) 상이한 속성들 안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일치, 2) 각 속성 안에 존재하는 사물들 사이의 연쇄(직접적 무한 양태, 매개적 무한 양태, 유한 향태들), 3) 양태들의 모든 본질들이 신의 능력의 부분들로서 다른 본질들과 갖는 내적인 적합성, 4) 존재 양태들을 그것들의 본질에 따라 특징짓는 관계들의 구성, 이 구성은 영원한 법칙들에 따라 이루어진다(한 존재 양태는 자신의 관계 아래서 다른 양태들과 결합된다. 반대로 그 관계는 다른 양태들에 의해 해체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여전히 내적인 질서이지만,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적합과 부적합의 질서이다(E, II, 29, sc; V, 18, sc). 5) 관계들의 결합의 질서로부터 점점 더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존재 양태들 사이의 외적인 만남들(이번에는 부적합성의 질서인 외적 질서, 즉 만남들의 질서, <자연의 공통적 질서>를 말한다. 이 질서는, 마찬가지로 필연적이긴 하지만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의 합리적인 질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큰 효력을 갖는 외적인 결정론의 법칙들을 따르기 때문에, <우발적>이라고 일컬어진다<E, II, 29, cor, 그리고 II, 36 참조>. 이에 따르면 부적합성의 질서라는 것이 존재한다).
1-1.
내재성(immanentia, [une] immanence) 121, - <속성>, <원인>, <우월성>, <자연> 참조.
1-2
본질(essentia, [une] essence) 110
“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그 사물이 존재할 수도 사유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며, 그리고 거꾸로 그 사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도 사유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E, II, 10, sc). 따라서 모든 본질은 어떤 사물의 본질이며, 그 사물과 상호 교환된다.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에 덧붙여진 이 상호교환성(la réciprocité)의 규칙은 세 가지 귀결을 갖는다.
1) 동일한 속성을 갖는 여러 개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 실체들 중의 하나와 더불어 사유되는 속성은 다른 실체들 없이도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실체와 양태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본질적 차이가 존재한다(왜냐하면, 양태들이 실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사유될 수도 없다면, 반대로 실체는 양태들 없이도 능히 존재할 수 있고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형식 아래서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말해지는 속성들의 일의성은 어떠한 본질의 혼동도 초래하지 않는다.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지만 양태들의 본질은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태들은 단지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에게, 속성들의 일의성은 이러한 본질적 구별을 보증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3) 존재하지 않는 양태들은 신의 지성 속에 있는 가능태들이 아니다(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양태들에 대한 관념들은, 이 양태들의 본질들이 신의 속성들에 내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관념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E, II, 8>. 그런데, 모든 본질은 어떤 사물의 본질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양태들은 그 자체로 실재적réels이고 현실적인actuels 존재들이며, 그렇게 그 관념은 필연적으로 무한 지성안에 주어져 있다).
실체의 본질이 존재를 함축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원인이라는 실체의 성질 때문이다. 이 증명은, 본질은 그것을 표현하는 속성 또는 모든 속성들에서 표현되는 실체에 연관되기 때문에, 먼저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각 실체에 대해서(E, I, 7), 그 다음에는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구성되어(constituée) 있는 실체에 대해서 이루어 진다(E, I, 11). 따라서 속성들은 본질을 표현하면서 반드시 그 본질이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존재 또한 표현한다(E, I, 20). 본질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능력과 행위 능력인 반면, 속성들은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을 만큼의 힘들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함축하고 있지 않고 본질들, 속성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각 본질은, 신의 능력이 양태의 본질을 통해서 펼쳐지는 한, 신의 능력의 부분이다(E, IV, 4, dém). 스피노자는 소론에서부터 항상 양태들의 본질들을 단일한 것들로서 간주하였다. 따라서 본질들의 구별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론의 본문(2부, 20장, 각주 3; 부록 2장, 1)는 실제로는 단지 그것들의 외적인 구분만을 부정할 뿐인데, 이 외적인 구분은 지속 안에서 존재와 외연적 부분들의 소유를 함축하는 것이다. 양태들의 본질들은 단순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그 본질들은 속성과 더불어 서로 간에 순전히 내적인 또 다른 유형의 구별을 갖는다. 그것들은 능력의 부분들, 즉 물리적 강도들(degrés d‘intensité physiques)이다. 그것들은 부분들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 자체가 부분들, 즉 보다 작은 양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닌 구성되어 있지 않은 내포량들(quantité intensives)에 따라 달라지는 능력의 부분들이다. 모든 본질들은 각 본질의 생산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본질들 모두는 서로에게 무한히 적합하지만, 각 본질은 다른 모든 본질들과 구별되는 특정한 능력의 정도에 상응한다.
1-3
실체 substantia, [la] substance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 즉 그 개념을 형성하는 데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E, I, 3). 고전적인 정의에 “스스로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이라는 점을 첨가함으로써, 스피노자는 동일 속성을 갖는 실체들의 다수성(pluralité)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동일한 속성을 갖는 실체들은 공통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서, 이 공통적인 것을 통해 각각은 다른 것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학 초반부의 여덟 명제가 동일한 속성을 갖는 여러 개의 실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전적으로 할애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수에 의한 구별은 결코 실제적 구별이 아니다.
동일한 속성을 갖는 실체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특징지어진각 실체에 일의성, 자기 인과성, 무한성, 그리고 필연적 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상이한 속성들을 갖는 실체들의 이러한 복수성(multiplicité, 지수성)은 순수하게 질적인 방식으로, 즉 질적인 복수성 또는 실재적-형식적 구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적인 복수성에 “다수의(plusieurs)”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초반부의 여덟 명제는 가설이 아니라, 윤리학 전체를 관통하며 그 정언적 진리성을 간직한다.
반면, 존재(l’être)의 관점에서는, 모든 속성들에 대해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여기에서도 “하나(un)”라는 말은 잘못 적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수에 의한 구별이 결코 실재적인 구별이 아니라면, 반대로 실재적인 구별은 수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적으로(형식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은, 자기 인과성, 무한성, 필연적 존재라는 특성을 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속성들 모두를 소유하고 있는 절대적으로 하나뿐인 실체에 관련해서 말해진다. 무한 본질들은, 그것들을 표현하는 속성들 속에서는 형식적으로 구별되는 반면, 속성들에 의해서 관계를 맺게 되는 실체 속에서는 존재론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E, I, 10, sc 1). 속성들의 실제적-형식적 구별은 실체의 절대적인 존재론적 통일성에 대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통일성(l’unité)을 구성한다.
2. 권능 (potentia, la puissance) p. 134 번148
윤리학의 근본적인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전제자, 혹은 군주 – 비록 계몽된 군주라고 하더라도 – 의 능력(potestas, le pouvoir 권력)과 유사한 모든 능력을 신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신은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의지가 입법적 지성에 의해서 계몽된 것이라고 할지라고 말이다. 신은 자신의 지성 속에서 그가 자신의 의지로 실현시키게 될 그러한 가능태들을 사유하지 않는다. 신의 지성은 하나의 양태에 불과한 것으로서, 신은 이 양태를 통해 오직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을 이해한다. 그의 의지 또한 한 양태에 불과하다. 이 양태 아래서, 모든 귀결들은 그의 본질로부터 또는 그가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그는 능력(potestas,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본질과 동일한 권능(potentia)만을 가지고 있다. 이 권능에 의해여, 신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원인, 즉 본질에 함축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현존]의 원인이 된다(E, I, 34)
모든 권능은 행위(acte, 작동)이고, 능동적이며, 현실적(en acte)이다. 권능과 작동의 동일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모든 권능은 감화(변용)하는(되는) 능력/힘(un pouvoir d’être affecté)과 분리될 수 없고, 이러한 감화(변용)하는 능력/힘은 한결 같이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것을 감화하는 감화작동들에 의해 실현된다[채워진다]. 능력(potestas, le pouvoir 권력, 힘)이란 단어는 여기서 그 정상한 용도를 재발견한다. “신의 능력에 속하는(in potestae) 것, 그것이 신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기 위해서는, 신의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만 한다.”(E, I, 35, 증명). 즉 본질로서 권능(potentia)에, 감화(변용)하는 능력/힘(potestas)이 상응한다. 그리고 이 능력은 신이 필연적으로 생산하는 감화작용들(les affections, 변용들) 또는 양태들에 의해서 실현된다. 왜냐하면 신은 수동적(pâtir)일 수 없으며, 감화작용(ces affections, 변용들)의 능동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신적 권능은 이중적이다. 현존하는 절대적인 권능, 이것은 모든 사물들을 생산하는 권능으로서[안에서] 이어진다. 사유하는 절대적 권능, 따라서 이해하는 절대적 권능, 이것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권능으로서[안에서] 이어진다. 이 두 권능은 온절대자(l’Absolu)의 두 반쪽들과 같다. 우리는 이 두 권능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두 무한 속성들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물론 너비 속성은 현존하는 권능을 다 소모하지 못하나, 그러나 현존하는 권능은 비조건적 총체성이며, 이것은 모든 속성들을 마치 형식적 조건들처럼 선천적으로(a priori) 소유한다. 사유 속성에 관하여 말하자면, 사유 속성이란 현존하는 권능에 귀속하는 형식적 조건들의 일부를 그 자체적로[속성 그자체로] 이루는데, 왜냐하면 모든 관념들은 형식적 존재(un être fomel)를 갖기 때문이며, 그 이 형식적 존재를 통하여 관념들은 이런 속성 속에 현존한다. 사실은 사유 속성은 또 다른 측면을 갖는다: 즉 자신에서 만, 사유존재는 객관적(objective) 조건 전체이며, 사유한다는 절대적 권능은 마치 비조건적 총체성처럼 그것을(객관적 조건 전체를) 선천적으로 소유한다. 우리는 이 이론이 평행론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 조각이었다는 것을 보았다.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권능에 연관하여 속성들의 엄격한 동등성과, 절대적 본질과 연관하여 두 권능의 엄격한 동등성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 차례로 양태의 본질은 권능의 정도, 신적 권능의 부분, 말하자면 강도적인 것 또는 강도성의 정도 이다. “인간의 권능은, 그 권능이 인간의 현실적 본질에 의해서 설명되는 한,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권능의 일부분이다.”(E, IV, 4) 양태가 현존으로 이행할 때, 무한한 외연적 부분들은, 양태의 본질 또는 권능의 정도에 상응하는 연관 하에 들어가도록, 밖에서부터 규정되었다. 이 때, 바로 이때에만, 이 본질은 그 자체가 코나투스 또는 욕구로서 결정된다(E, III, 7.). 실제로 그 본질은 현존 속에서 계속 머무르고자, 즉 자신의 연관 아래서 자신에 귀속하는 부분들을 유지하고 새롭게 하고자 한다[경향이다](코나투스의 첫째 결정, E, IV, 39). 코나투스는 특히 현존으로 이행하는 경향성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냐하면 양태의 본질은 가능적(un possible)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 이 양태의 본질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는 물리적 실재성이기 때문에, 그 (양태의) 본질은 현존으로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양태가 현존하도록 규정[결정]되면, 즉 자신의 연관아래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을 포섭하도록 결정되면, 그 (양태의) 본질은 현존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고자(persévérer) 한다.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 그것은 지속하는(durer) 것이다. 따라서 코나투스는 무한정한 지속을 감싸고 있다(E, III, 8).
감화(변용)되는 능력/힘(le pouvoir d’être affecté, (potestas, 능력)는 마치 권능처럼 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화(변용)되는 소질(une aptitude, aptus)은 마치 권능의 정도(degré de puisance, conatus)처럼 현존하는 양태의 본질에 상응한다. 따라서 코나투스는 둘째 결정(규정)으로서, 감화(변용)되는 소질을 최대한으로 유지하고 펼치려는 경향성([la] tendance)이다(E, IV, 38). 이 소질의 용어에 관하여, 윤리학, II, 13, 주석을; III, 전제(postulat) 1과 2 를; V, 39를 참조하자. 차이는 여기에 있다. 즉 실체의 경우에, 감화(변용)되는 능력/힘은 필연적으로 능동적 감화작용들에 의해 채워진다. 왜냐하면 실체는 이 감화작용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양태들 자체). 현존하는 양태들의 경우에, 감화(변용)되는 양태의 소질은 또한 매순간 마다 필연적으로 채워지지만, 우선은 감화작용들(affections affectio)에 의해 그리고 감화작동들(affects, affectus)에 의해 채워진다. 이것들[작용들과 작동들]은 그 양태를 적합한[충전적] 원인으로 삼지 않으며, 또 다른 현존하는 양태들에 의해 자기[그 양태]에서 생산된다. 따라서 감화작용들과 감화작동들[감화들와 감동들] 이 둘은 상상들이고 정념들이다. 감화작동-감정(affects-sentiments) 즉 아펙투스(affectus)는 정확히 코나투스가 취하는 모습들(les figures)인데, 이때 코나투스는, 자기[코나투스]에게 일어나는 감화작용(une affection, affectio)에 의해서, 이것 또는 저것을 행하도록 결정될 때 이다. 코나투스를 규정하는 이 감화작용들은 의식의 원인이다. 이런 저런 감화작동아래서 자기 의식이 되는 코나투스는 욕망(désir)이라 불리며, 그 욕망은 항상 어떤 것의 욕망이다(E, III. 욕망의 정의). [p. 136]
양태가 현존하는 순간부터, 왜 권능의 정도인 한에서 양태의 본질은 코나투스로서, 다시 말하면 노력 또는 경향성([la] tendance)으로서 규정되는 지를 사람들은 본다. [그것은] 현존으로 지내려는(passer) 경향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은 유지하고 긍정하려는 경향성이다[셋째 규정]. 그것은 권능이 현실태로[작동으로] 있기를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가 양태의 순수 본질들을 고려하는 한에서, 모든 본질들은 마치 신적 권능의 강도적[내포적] 부분들처럼 본질들 사이에 서로 적합하다. 현존하는 양태들은 마찬가지가 아니다. 외연적 부분들이, 양태의 본질에 또는 권능의 정도[코나투스]에 상응하는 연관 하에서, 각 양태에 속하는 한에서, 현존하는 양태는 다른 양태의 부분들을 새로운 연관 아래로 들어가도록 항상 이끌 수 있다. 연관이 현존하는 양태로부터 이렇게 해체되었을 경우에, 따라서 현존하는 양태는 약화될 수 있고, 극한에서 죽게 될 수 있다(E, IV, 39). 이때에 양태가 자기 속에 무한 지속처럼 감싸고 있었던 지속은 밖으로부터 종말을 받아들인다[죽는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것은 권능의 투쟁([la] lutte)이다. 현존 양태들은 서로 간에 필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것[특이한 사물]보다 능력[권능]있고 힘센 다른 사물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온자연 안에는 어떤 단일한[특이한] 사물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주어져 있을 때, 보다 능력 있는 다른 것이 주어지고, 그것에 의해 전자는 파괴될 수 있다.”(E, IV, 공리) “이 공리는 어떤 시간과 어떤 장소에 관계되어 고려된 특이한 사물들만에 관한 것이다.”(E, V, 37, 주석) 만일 죽음이 피할 수 없다면,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이 현존하는 양태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대로 현존하는 양태는 필연적으로 외부로 열려져 있기 때문이며, 현존하는 양태가 정념들을 필연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며, 현존하는 양태가 생명적 연관들 중의 하나를 손상시킬 수 있는 현존하는 다른 양태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기 때문이며, 양태의 복잡한 연관 하에서 양태에게 속하는 외연적 부분들이 밖으로부터 끊임없이 결정되고 감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태의 본질은 현존으로 이행하는 어떠한 경향성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태의 본질은 현존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상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태의 본질은 본질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 외연적 부분들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어떤 특이한 사물도 더 완전하다고 말해 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사물이 현존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계속해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지속은 사물들의 본질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E, IV, 서문). [p.138, 152]
따라서 만일 권능의 정도로서 양태의 본질이, 양태가 현존하기에 이르면서부터는, 노력 또는 코나투스일 뿐이라면, 본질의 요소 안에서(내포적 부분들인 한에서) 필연적으로 적합한 권능들은 현존의 요소 안에서는(외연적 부분들은 임시적으로 각 권능에 속하는 한에서) 더 이상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태로서(en acte) 본질은 이때부터 노력으로서만, 다시 말하면 언제나 [노력을] 능가할 수 있는 다른 권능들과 비교로서만, 현존 속에서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E, V, 명제3과 명제5).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두 경우를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ou bien) 현존하는 양태가 자신에 적합한 현존하는 다른 상태들을 만나고, 그리고 자신의 양태와 다른 양태들의 연관을 구성한다(예를 들어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음식물, 사랑받는 자, 우군(un allié)). 또 하나는(ou bien) 현존하는 양태가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은 다른 양태들를 만나고, 이 다른 양태들은 자기를 해체하고 또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독극물, 증오받는 자, 적군). 전자의 경우, 현존하는 양태의 감화받는 소질은 환희와 사랑을 토대로 즐거운 감정-감화들에 의해 채워진다. 후자의 경우에, 슬픔과 증오를 토대로 슬픈 감정-감화들에 의해 채워진다. 이 두 경우에, 감화(변용)되려는 소질(l’aptitude)은, 마치 소질이 주어진 감화(변용)(만난 대상들의 관념들)에 따라서 필연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채워진다. 심지어는 질병도 그러한 채워짐(un tel remplissment)이다. 그러나 이 두 경우의 큰 차이는 다음과 같다. 슬픔 속에서, 코나투스로서 우리 권능은 전적으로 고통의 흔적을 몰아내고 그것의 원인이 된 대상을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 권능은 동원되지 않지만 반작용할 밖에 없다. 반대로 기쁨 속에서 우리의 권능은 팽창이며, 다른 사물의 권능과 구성되고, 사랑받는 대상에 통합된다(s’unir)(E, IV, 18).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감화(변용)되는 능력/힘을 항상적인 것으로(상수로) 가정할 때조차도, 우리 권능의 어떤 것은 슬픔의 감화들을 통해 감소되거나 억제되며, 기쁨의 감화들을 통하여 증가하고 장려되는 것이다. 기쁨은 우리의 작동하는 권능(la puissance d’agir)을 증가시키고 슬픔은 그것을 감소시킨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리고 코나투스는 기쁨을 체험하려고, 작동하는 권능을 증가시키려고, 기쁨이 되는 것을 상상하고 발견하려고 행하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기쁨의 원인을 유지하고 그것을 장려한다. 코나투스는 또한 슬픔을 멀리하려고, 슬픔의 원인을 파괴하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발견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E, III, 12, 13 등등). 실제로 감정, 그것은 코나투스가 주어진 감화에 대한 관념에 의해 이것 또는 저것을 하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코나투스 그자체이다. 양태의 작용하는 권능(스피노자는 이 권능을 가끔 현존하려는 힘(force d’exister)이라 한다, 감화작동(affects 감동)에 대한 일반적 정의)은 양태가 현존하는 한, 비록 그 본질이 동일한 것으로 남아서, 그것이 갖는 감화될 수 있는 소질이 항상적인 것으로 가정될지라도, 상당히 많은 변이들에 종속되어 있다. 그것은, 기쁨과 이 기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감화될 수 있는 소질을, 작용하는 권능 또는 현존하는 힘은 상대적으로 증가되는 방식으로 채우고, 슬픔은 그 반대방향이다. 따라서 코나투스는 작동하는 권능을 증가시기위한 노력이고 즐거운 정념들을 체험하게 하는 노력이다(셋째 결정, E, III, 28.). (p. 139, 154)
감화될 수 있는 소질의 항상성(la constance)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상대적이며 내용적(contenue)이다. 물론 동일한 개체가 동일한 감화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아이, 어른과 노인, 건장한 사람과 병자(E, IV, 39, sc.; V, 39, sc.), 따라서 작동하는 권능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은 감화 능력을 최대한으로 높이려는 노력과 분리될 수 없다(E, V, 39). 코나투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여러 정의들을 조화시키는 데에는 어떠한 어려움도 보지 못할 것이다: 기계론적(정역학적) 정의(보존하다, 유지하다, 계속해서 머무르다); 역동론적(동력학적) 정의(증가하다 장려하다[선호하다]); 겉보기에 변증법적인 정의(대립되는 것에 대립되다,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본질에 대한 긍정적 개념화에 의존하고 그 개념화로부터 파생하기 때문이다: [이때] 마치 신 속에서 본질의 긍정과 같은 권능의 정도가 [파생되고]; 마치 현존 속에서 본질의 긍정과 같은 코나투스가; 마치 최소치와 최대치의 지위와 같은 운동과 정지의 연관 또는 감화(변용)되는 능력/힘(le pouvoir d’être affecté)이; 작용하는 권능의 변이들이 또는 실증적(긍정적) 한계 내부에서 현존하는 힘이 파생된다.
모든 방식으로 보아 코나투스는 현존하는 양태의 권리(le droit)를 정의한다. 현존 속에 계속 머무르도록 하는 데(à)(적합하지 않는 것과 나에게 해가되는 것을 파괴하는 것, 나에게 유용하고 나에게 적합한 것을 보존하는 것), 주어진 감화작용들을 통해서(par)(대상들의 관념들), 규정된 감화작동들 아래서(sous)(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내가 규정되어 버린 모든 것, 이 모든 것은 나의 자연권(mon droit de nature)이다. 이 권리는 정확하게 나의 권능과 동일하며, 그리고 이 권리는 목적들의 전 질서와 독립적이며, 의무들의 고려에도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코나투수는 제1의 기초이며, 제1의 운동자(primum movens)이며, 목적인이 아닌 작용인이기 때문이다. 이 권리는 “투쟁에도, 증오에도, 분노에도, 사기(기만)에도, 욕구가 권고하는 모든 것에도” 반대되지 않는다(신정론, 16장, 정치론 2장, 문단 8). 이성적 인간과 정신나간 인간은 그들의 감화작용들과 감화작동들에 의해서 구별되지만, 감화작용들과 감화작동들에 따라서 현존 속에 동등하게 [계속해서] 보존하려고 애쓴다. 이런 점에서 이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권능으로부터이다. (p.141, 번155)
코나투스는, 권능의 모든 상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현실태(en acte)이다. 그리고 차이는 바로 이 작동(cet acte)이 실행되는 조건들에서 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연권에 따라서 다른 양태들과 만남들 우연에서, 외부로부터 양태를 결정하는 감화작용들과 감화작동들을 통해 현존 속에서 보존하려고 애쓰는 하나의 양태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양태는 자신의 작동하는 권능을 증가시키려고, 즉 기쁜 정념들을 체험하기를 애쓴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E, III, 13, 20, 23, 26). 그러나 이 파괴의 기쁨들은 그것들의 발단이 되었던 슬픔과 증오에 중독되어 있으며(E, III, 47), 만남들의 우연(le hasard)이, 우리보다 더 능력있는 사물[어떤 것]을, 또 우리를 파괴하게 될 사물을, 만날 수 있는 위험에 처하는 데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몰아가게 하며(신정론, 16장, 정치론 2장), 가장 좋은 경우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부조화와 적대적인 측면들 아래서 다른 양태들을 만난다(E, IV, 명제32-34). 그런 이유에서, 작동하는 권능을 보존하고 증가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 또 즐거운 정념들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 감화(변용)되는 능력/힘을 최대로 하기 위한 노력이, 언제나 실행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데, 그 노력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만남들을 조직하려고 애쓰는 정도에서만, 즉 다른 양태들 가운데 자신의 본성과 적합하고 자신과 구성되는 양태들을 만나려고 애쓰는 정도에서만, 그리고 다른 양태들을 알맞게 서로 구성하는 동일한 측면 아래서 이것들을 만나려고 애쓰는 경우에만, 성공한다. 이 노력은 정치체(la Cité)의 노력이며, 보다 근본적으로 온이성(la Raison)의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작동하는 권능을, 이것이 아직은 정념의 영역인데,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인간은 이 권능의 형식적 소유로 들어가게 되고, 온이성이 형성하는 적합한 관념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동적 기쁨들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성공한 노력으로서 코나투스, 또는[즉] 소유된 권능으로서 작동하는 권능은(비록 죽음이 어느 때 이것을 가로막게 될지라도) 큰덕(Vertu)라 불린다. 이 덕은 코나투스 이외 전혀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또한, 권능을 실행하는 양태가 그 권능을 소유하도록 하는 실행의 조건들 속에서, 효과인으로써 권능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E, IV, 정의 8; IV 명제 18, 주석; IV 명제20; IV, 명제 37, 주석 1). 그리고 코나투스의 적합한 표현은 현존 속에서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며, 온이성의 인도 하에서 행동하려는 노력이며(E, IV, 명제 24), 즉 인식으로 또 적합한 관념들과 능독적 감정들에로 인도하는 것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다(E, IV, 명제 26, 27, 35; V, 명제 38). (p. 142, 번 156)
신의 절대적 권능이 현존하는 권능과 생산하는 권능, 즉 사유하는 권능과 이해하는[내포하는] 권능의 이중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도로서[정도의 차이를 지니는] 양태의 권능도 이중적이다. [하나는] 현존하는 양태에 연관하여, 특히 신체에 연관하여 의미 있는 ‘감화(변용)되는 소질’; [또 하나는] 사유 속성 안에서 고려된 양태에 연관하여 따라서 정신에 에 연관하여 의미있는 ‘지각하고 상상하는 권능’. “한 신체가 다른 신체들에 연관하여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행동하고 또는 감당하는(agir ou patir) 소질이 있으면(apte) 있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영혼]은 다른 정신들과 연관하여 동시에 더 많은 사물들[사건들, 신체들] 지각하는 소질이 더 많이 있다.”(E, II, 13, sc.) 그러나 우리가 보았던 대로, 감화(변용)되는 소질은 이 소질의 한계들 안에서, 물질적으로 변화하는 그리고 형식적으로 아직 소유되지 않은, ‘작동하는 권능’에 귀착한다. 마찬가지로 지각하거나 상상하는 권능은, 그 권능이 감싸고(포괄하고) 있으나 그 권능이 형식적으로 아직 표현하지 못하는, ‘인식하고 내포하는(이해하는) 권능’에 귀착한다. 그런 이유에서 상상하는 권능은 아직 덕(une vertu)이 아니고(E, II, 17, sc.), 심지어는 감화(변용)되는 소질도 아니다. 온이성의 노력 하에서 지각들과 관념들이 적합하게 되고, 감화작동들이 능동적이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체로 우리자신의 감화들의 원인들이 되고, 우리의 적합한 지각들의 주인들이 될 때는, 우리 신체가 작동하는 권능에 근접하고, 우리 정신은 내포하는(이해하는) 권능에 – 이 권능은 작동하는 자기 방식인데 - 접근한다. “한 신체의 행동들이 자기 혼자에게만 의존하면 할수록, 그[각] 행동 속에 자기와 경쟁하는 다른 신체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그 신체의 정신[영혼]은 판명하게(distintement, 구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소질이 있다.”(E, II, 13, sc.) 이 노력은 둘째 종류의 인식을 관통하여(가로질러), 셋째 종류의 인식에서 완성된다(E, V, 39와 40). 그때에, 양태의 권능은 신의 절대적 권능의 내포적 부분 또는 정도로서 이해된다. 그런데 모든 정도들은 신[안]에서 적합하며, 적합성는 어떤 혼동도 포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분들은 단지 양상적(modales)일 뿐이기 때문이며, 신의 권능은 실체적으로는 불가분인(indivisible)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양태의 권능은 신의 권능의 부분이며, 그러나 [한 양태의 권능은] 신의 본질인 한에서 양태의 본질에 의해서 설명된다(E, IV, 4). 윤리학 전체는, 의무들의 이론과 같은 도덕이론에 대립하여, 권능의 이론으로서 소개된다. (p. 143, 번 158)
코나투스(conatus, [conatus]) - 권능 참조
욕망(cupiditas, un désir) - 권능 참조
욕구(appetition, un appétit) - 권능 참조
소질(aptitudo[aptus], une aptitude) - 권능 참조
(13:22, 53L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