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도론 제31권
48. 초품 중 십팔공(十八空)의 뜻을 풀이함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내공(內空)‧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자상공(自相空)ㆍ제법공(諸法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내공(內空)25)이라 함은 안의 법이어서 안의 법[內法]이 공하다는 것이다.
안의 법이라 함은 이른바 안의 6입(入)이니,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이다.
눈이 공하면 나[我]가 없고 내 것[我所]이 없으며 눈의 법도 없나니,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역시 그와 같다.
외공(外空)26)이라 함은 바깥의 법이어서 바깥의 법[外法]이 공하다는 것이다.
바깥의 법이라 함은 이른바 바깥의 6입이니,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이다.
빛깔이 공하면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빛깔의 법도 없나니,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ㆍ법도 역시 그와 같다.
내외공(內外空)27)이라 함은 안팎의 법이어서 안팎의 법[內外法]이 공하다는 것이다.
안팎의 법이라 함은 이른바 안팎의 12입(入)이니,
이 12입 중에는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안팎의 법도 없다.
【문】 모든 법은 한량없이 공하고 법대로라면 역시 한량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18종류만을 말하는가?
만일 간략히 말하면 하나의 공, 즉 “일체법공(一切法空)”이라고 해야 하며,
만일 자세히 말한다 하면 낱낱의 법을 따르는 공 즉 안공(眼空)ㆍ색공(色空) 등 매우 많아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18공만을 설명할 뿐인가?
【답】 만일 간략하게만 말하면 일이 두루하지 않게 되고, 만일 자세하게만 말하면 일이 번잡하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약을 적게 먹으면 병이 낫지 않고 많이 먹으면 악화되는 것이므로 병에 알맞게 약을 더하거나 덜하지 않게 먹어야 병이 낫게 되는 것과 같다.
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부처님께서 하나의 공만을 말씀하면 곧 갖가지의 삿된 소견과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없게 되고,
만일 갖가지의 삿된 소견을 따르면서 공을 말씀하면 공이 너무도 많아서 사람들이 공의 모양에 애착하여 아주 없다[斷滅]는 데에 떨어질 것이므로 이 18공만을 말씀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그 중도(中道)를 얻은 것이다.
또 만일 10공을 말씀하거나 15공을 말씀하신다 해도 역시 의심은 있을 것이므로 이것은 질문거리가 아니다.
또 착하고 악한 업에는 모두가 일정한 수효가 있다.
4념처(念處)나 4정근(正勤)ㆍ37품(品)ㆍ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ㆍ5중(衆)ㆍ12입(入)ㆍ18계(界)ㆍ12인연(因緣)ㆍ3독(毒)ㆍ3결(結)ㆍ4류(流) 및 5개(蓋) 등이 그것이다.
모든 법에는 이와 같이 저마다 일정한 수가 있나니, 18종의 법 가운데서 집착을 깨뜨리는 까닭에 18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문】 반야바라밀의 공은 18공과는 다른가, 동일한가?
만일 다르다면 18공을 여의고 무엇으로 반야의 공[般若空]을 삼는가?
또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이냐 하면, 이른바 물질[色]도 공이요 느낌[受]도 공이요 생각[想]도 공이요 지어감[行]도 공이요 의식[識]도 공이며, 일체종지(一切種智)까지도 공이다.
만일 다르지 않다 하면 어찌하여,
“18공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인연이 있기 때문에 “다르다” 하겠고, 인연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 하겠다.
다르다 함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 하여 온갖 관법(觀法)을 소멸시키며, 18공은 18종의 관(觀)으로 모든 법을 공하게 하므로 이 모든 법의 실상을 배우면 18종의 공이 생기게 되나니, 이것을 다르다고 한다.
동일하다 함은 18공 이것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요 반야바라밀도 역시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며,
18공 이것은 모양을 버리면서 여의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의 온갖 법 중에서도 역시 모양을 버리면서 여의는 것이며,
이 18공은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반야바라밀도 역시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바로 18공을 배우는 것인데 이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의 갈래[分]가 있나니, 작은 것이 있고 큰 것이 있다.
큰 것을 얻고자 하면 먼저 작은 방편의 문을 배워야 하고, 큰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18공을 배워야 한다.
이 작은 지혜의 방편문에 머무르면 18공을 얻을 수 있다.
어떤 것이 방편의 문이냐 하면, 이른바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密經)』을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갖가지의 좋은 보물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큰 바다로 들어가야 하듯이,
만일 사람이 내공(內空) 등의 삼매와 지혜의 보물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큰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문】 수행하는 이는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 어떻게 내공과 외공(外空)과 내외공(內外空)에 머무르는가?
【답】 세간에는 네 가지의 뒤바뀜[四顚倒]이 있다.
깨끗하지 않은[不淨] 것 가운데서 깨끗하다[淨] 하는 뒤바뀜이 있고,
괴로운[苦] 것 가운데서 즐겁다[樂] 하는 뒤바뀜이 있으며,
항상 없는[無常] 것 가운데서 항상하다[常] 하는 뒤바뀜이 있고,
나 없는[無我] 것 가운데서 나가 있다[我] 하는 뒤바뀜이 있다.
수행하는 이는 이 네 가지의 뒤바뀜을 깨뜨리기 위하여 4념처(念處)와 열두 가지의 관[十二種觀]을 닦는다.
이른바 처음에,
“안의 몸(內身]에는 서른여섯 가지의 깨끗하지 못한 것이 가득히 차서 아홉 개의 구멍으로 항상 흐르므로 매우 싫어하고 근심할 만하며 깨끗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觀)하는 것이니,
깨끗한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내공(內空)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미 안의 몸은 깨끗하지 않다” 함을 알았으므로 바깥에서 집착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줄 관하는 것이니, 모두가 진실로 깨끗하지 않건마는,
어리석은 범부는 미치고 헷갈려서 음욕에 마음이 가리어진지라 그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여긴다.
집착하고 있는 “물질[色]은 역시 나의 몸과 같아서 깨끗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관하는 것이니, 바로 외공(外空)이다.
수행하는 이가 자기 몸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관하면서도 혹은 바깥의 물질은 깨끗하다고 여기기도 하고 바깥은 깨끗하지 못하다고 관하면서도 자기 몸은 깨끗하다고 여기기도 하나,
이제는 다 함께 안팎을 관찰하면서,
“나의 몸도 깨끗하지 못하듯이 바깥의 것도 그와 같으며 바깥의 몸도 깨끗하지 못하듯이 나도 역시 그와 똑같이 다름이 없어서 깨끗한 모양은 얻을 수 없다”고 하나니,
이것을 내외공(內外空)이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여,
“안팎의 몸이 다 같이 진실로 깨끗하지 못하다” 함을 아는데도,
미혹한 이는 이것에 애착하고 그 애착이 깊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몸을 받나니, 몸은 큰 고통덩이인데도 어리석어서 즐거운 것이라고 여긴다.
【문】 세 가지의 느낌[三受]은 모두가 밖의 입[外入]에 속한 것인데,
어찌하여 “안의 느낌[內受]으로 관하다”고 하는가?
【답】 6진(塵)은 처음에 6정(情)과 화합하여 즐거움이 생기므로 이것을 밖의 즐거움[外樂]이라 하고,
뒤에 탐착이 깊이 들어가서 즐거움이 생기므로 이것을 안의 즐거움[內樂]이라 한다.
또 안의 법이 즐거움을 반연하므로 이것을 안의 즐거움[內樂]이라 하고,
밖의 법이 즐거움을 반연하므로 이것을 밖의 즐거움[外樂]이라 한다.
또 다섯 가지 식[五識]과 상응(相應)한 즐거움을 바로 밖의 즐거움이라 하고,
의식(意識)과 상응한 즐거움을 바로 안의 즐거움이라 하며,
거친[麁] 즐거움을 밖의 즐거움이라 하고,
세밀한[細] 즐거움을 안의 즐거움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으로 안팎의 즐거움을 분별하나니,
괴로운 느낌[苦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不苦不樂受]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이 안의 즐거움은 실로 얻을 수 없다”고 관하면서도,
실로 얻을 수 없음을 분별하여 알지 못하고 다만 이 괴로움이 되는 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즐거운 것이라 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즐거움은 괴로움의 인연에서 생기고 또한 괴로움의 과보를 내기 때문이니,
즐거움은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또 마치 사람이 옴이 올랐을 때 불을 쪼이면서 긁으면 잠시 동안만은 즐거움을 느끼기는 하나, 나중에는 몸을 더욱 상했기 때문에 더 크게 괴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즐거운 것이라 여기지만 슬기로운 이는 그것을 고통이 될 뿐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세간에서는 즐거운 것이라 하는 뒤바뀐 병 때문에 5욕락(欲樂)에 집착하게 되고 번뇌는 더욱더 많게 되나니,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즐거운 것이라고 보지 않고,
다만 괴로운 것이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상처와 같고 가시와 같다고 볼 뿐이다.
또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많나니, 즐거움이 적어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큰 강물에 한 홉[一合]의 소금을 집어넣으면 그 소금의 형상은 없어지면서 짜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즐거움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미혹하여 이것은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저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며, 저것은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이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집착한 이는 즐거운 것이라 하고, 상실한 이는 괴로운 것이라고 한다.
어리석으면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슬기로우면 괴로운 것이라고 여긴다.
즐거운 것의 우환을 보면 괴로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된다.
즐거운 것은 덧없다는 모양을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은 덧없다는 모양을 보면 괴로운 것이 된다.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사람은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욕망을 여읜 사람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즐거운 것과 괴로운 것이 된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것은 마치 화살이 몸 속에 들어간 것과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도 덧없고 변하여 달라진다는 모양임을 관해야 하는데, 이와 같이 세 가지의 느끼는 마음을 관찰하면 곧 버리고 여의게 되나니,
이것을 안의 느낌이 공[內受空]임을 관찰한다고 한다.
밖의 느낌[外受]과 안팎의 느낌[內外受]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수행하는 이는,
“만일 즐거움의 그것이 곧 괴로움이라면 누가 이 괴로움을 받는 것인가”라며,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곧 마음으로 받는다 함을 알게 된다.
그런 뒤에는,
“이 마음이 진실인 것인가 거짓인 것인가” 관찰하며,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나고[生] 머무르고[住] 사라지는[滅] 모양”이라고 관찰하나니,
괴롭다고 느끼는 마음[苦受心]과 즐겁다고 느끼는 마음[樂受心]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마음[不苦不樂心]도 저마다 생각을 달리한다.
즐겁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괴롭다는 마음이 생기고,
괴롭다는 마음이 한동안 머무르다가 그 마음이 도로 사라지면서,
다음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이 머무르다가 그것이 도로 사라지고 나서는 다시 즐겁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나니,
세 가지의 느낌은 무상하기 때문에 마음도 역시 무상하다.
또 음욕에 물든 마음과 물들지 않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성을 내지 않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어리석지 않은 마음과 산란한 마음과 가다듬은 마음과 속박된 마음과 해탈한 마음 등의 마음도 저마다 다른 모양임을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무상하고 일정한 마음의 항상 머무름은 없다 함은 알 것이다.
괴로움을 느끼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마음은 화합하는 인연(因緣)에서 생기고, 인연이 여의거나 흩어지면 마음도 역시 따라 소멸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안의 마음과 바깥의 마음과 안팎의 마음은 무상한 것인 줄 관찰하는 것이다.
【문】 마음은 곧 안의 입[內入]에 속한 것인데 어찌하여 밖의 마음[外心]이라 하는가?
【답】 안의 몸[內身]을 관찰하면 안의 마음이라 하고, 밖의 몸[外身]을 관찰하면 밖의 마음이라 한다.
또 안의 법[內法]을 반연하면 안의 마음이라 하고, 밖의 법[外法]을 반연하면 밖의 마음이라 한다.
또 다섯 가지 식[五識]28)은 항상 밖의 법을 반연하면서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의 마음이라 하고,
의식(意識)은 안의 법을 능히 반연하면서 또한 아름답고 추함도 분별하기 때문에 안의 마음이라 한다.
또 의식이 처음에 생겨났으나 아직 분별하여 결정하지 못하면 이것을 밖의 마음이라 하고,
의식이 점차로 깊이 분별하면서 모양을 취하게 되면 이것을 안의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으로 안팎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마음과 뜻이 차츰차츰 달라지면서 몸은 깨끗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알고, 느낌은 괴로운 모양이라고 알며, 마음은 머무르지 않는 무상한 모양이라고 알면서도,
번뇌[結使]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나라는 마음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만일 마음이 무상하다면 누가 이 마음을 알며 마음은 누구에게 속한 것일까.
누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으며 온갖 모든 물건은 누구의 소유(所有)일까” 하기도 한다.
이렇게 분별하다가 따로 주인도 없고 다만 5중(衆)에서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사람모양이 있다 함을 헤아리면서 나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나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 것[我所]이 생기고, 내 것이라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나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탐욕을 내고 나를 거스르면 성을 내게 된다.
이 번뇌는 지혜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미치고 미혹된 데서부터 생기기 때문에 이것을 어리석음[癡]이라고 하며, 3독(毒)이 온갖 번뇌의 근본이 된다.
모두가 나로 말미암아 짐짓 복덕을 지으면서,
“나는 뒷날 당연히 얻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닦으면서,
“나는 당연히 해탈을 얻어야 한다”고 하면서,
처음에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상중(想衆)이라 하며,
나로 말미암아 결사와 모든 선행(善行)을 일으키는 이것을 바로 행중(行衆)이라 하나니,
이 두 가지의 상중ㆍ행중이 바로 법념처(法念處)이다.
상중ㆍ행중의 법 안에서 나를 구해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법은 모두가 인연(因緣)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조작하는 법이어서 견고하지도 않고 실아(實我)의 법과 행도 없다.
마치 파초의 잎사귀마다 구한다 해도 그 속은 견고한 모양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멀리서 아지랑이를 보면 물이 없는데도 물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과 같은데,
이는 다만 눈이 미혹되어서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안의 법과 밖의 법과 안팎의 법을 볼 뿐이다.
【문】 법(法)은 곧 밖의 입[外入]에 속하는데 어찌하여 안의 법[內法]이라 하는가?
【답】 안의 법이라 하면 안의 마음과 상응하는 상중과 행중이요,
밖의 법이라 하면 밖의 마음과 상응하는 상중ㆍ행중과 그리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心不相應] 모든 행(行)과 무위의 법[無爲法]이다.
그리고 한꺼번에 평등하게 관하면 이것을 안팎의 법[內外法]이라 한다.
또 안의 법을 6정(情)이라 하고, 밖의 법을 6진(塵)이라고 한다.
또 몸[身]ㆍ느낌[受]ㆍ마음[心]과 상중ㆍ행중을 통틀어 관하면 법념처(法念處)가 된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이가 이미 상중ㆍ행중과 무위의 법 중에서 나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고 도리어 몸ㆍ느낌ㆍ마음 가운데서 구하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갖 법 중에서, 빛깔과 빛깔이 아닌 것과,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과, 대(對)할 수 있는 것과 대할 수 없는 것과, 번뇌[漏]가 있는 것과 번뇌가 없는 것과, 함[爲]이 있는 것과 함이 없는 것과, 먼 것과 가까운 것과, 거친 것과 세밀한 것들 가운데서 나를 구하여도 모두 다 얻을 수 없다.
다만, 5중(衆)이 화합한 까닭에 억지로 이름 붙여 중생이라 하며 이 중생이 곧 나요 나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모든 번뇌도 모두가 쇠하고 박할[衰薄] 뿐이다.
또 신념처(身念處)를 온갖 색법(色法)이라 하나니,
수행하는 이는 안의 물질[內色]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며,
밖의 물질[外色]을 관찰하는 데서나 안팎의 물질[內外色]을 관찰하는 데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그리고 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도 역시 그러하다.
4념처에서 내관(內觀)과 상응한 공삼매(空三昧)를 내공(內空)이라 하고 4념처에서 외관(外觀)과 상응한 공삼매를 외공(外空)이라 하며 4념처에 내관ㆍ외관과 상응한 공삼매를 내외공(內外空)이라 한다.
【문】 공은 이 삼매의 힘 때문에 공한 것인가, 이 법이 저절로 공한 것인가.
【답】 삼매의 힘 때문에 공이라 한다. 마치 경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삼삼매(三三昧)의 3해탈문(解脫門)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다.
이 공삼매는 몸ㆍ느낌ㆍ마음ㆍ법을 반연해도 나와 내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고 한다.
【문】 4념처의 공한 법은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은 깨끗하지 않다고 관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하며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하기 때문이다.
【답】 비록 네 가지의 법을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다고 관한다 하더라도,
중생은 몸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깨끗하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느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즐겁다 하는 뒤바뀜에 잡착하며,
마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항상하다고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법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나가 있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한다.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몸은 깨끗하지 않다고 관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하며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또 내외공(內外空)이라 함은,
안과 밖에는 일정한 법이 없고 서로의 인(因)이 상대하기 때문에 안과 밖이라고 하면서,
저것은 밖이라고 여기고 나는 안이라고 여기며,
나는 밖이라고 여기고 저것은 안이라고 여기나니,
사람에게 매인 바에 따라 안의 법을 안[內]이라 하고, 사람이 집착한 바에 따라 밖의 법을 밖[外]이라 한다.
마치 사람이 자기 집을 안이라 하고, 다른 이의 집을 밖이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수행하는 이는 이 안팎의 법은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관하는 것이다.
또 이 안팎의 법은 자성(自性)이 없다. 왜냐하면 화합으로 생기기 때문이니, 이 안팎의 법은 역시 화합하는 인연 가운데에도 있지 않다.
만일 인연 가운데에도 없다면 그 밖의 다른 법도 없고 안팎의 법의 인연도 역시 없나니, 원인과 결과가 없기 때문에 안팎의 법은 공하다.
【문】 안팎의 법은 반드시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말하는가?
마치 손과 발 등이 화합하기 때문에 몸이라는 법이 생기면서 이것을 안의 법이라 한 것과 같고,
마치 들보와 서까래와 벽 등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이라는 법이 생기면서 이것을 밖이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몸의 법은 비록 따로따로의 법이 있다하더라도 역시 발 등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발 등을 여읜다면 몸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집도 역시 그와 같다.
【답】 만일 발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는 마땅히 발이어야 하나니, 발과 몸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머리가 바로 발이라 하면 아주 우스운 일이다.
【문】 만일 발이 몸과 다르지 않다면 이러한 허물이 있을 것이다.
이제 발 등이 화합하기 때문에 다시 법이 생기면서 몸이라고 해야 되나니, 몸이 비록 발 등과 다르다 하더라도 마땅히 발에 의지하여 서야 된다.
마치 뭇 무명실이 화합하면서 무명베가 생기고 이 무명베는 무명실에 의지하면서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답】 이 몸의 법에서 발 등은 다 함께 갖추어 있는[具有] 것인가, 따로 나누어져 있는[分有] 것인가.
만일 갖추어 있는 것이라면 머리 안에는 마땅히 발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몸의 법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나누어져 있다면 발의 부분과 다를 것이 없다.
또 몸 이것은 하나의 법이면서 인(因)이 되는 것이 많지만 하나가 여럿이 되지도 않고 여럿이 하나가 되지도 않는다.
또 만일 발 등을 제외하고서 몸이 있다고 분별한다면 온갖 세간과는 모두 어기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몸은 그것이 곧 모든 부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모든 부분과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몸은 없다. 몸이 없기 때문에 발 따위도 없는데 이와 같은 것들을 내공(內空)이라고 한다.
방사(房舍) 등의 밖의 법도 역시 이와 같이 공한 것이므로 외공(外空)이라 한다.
【문】 몸과 집 등을 격파[破]하면 이것은 바로 하나[一]라는 것도 격파하고 다르다[異]는 것도 격파하는 것이 된다.
하나라는 것도 격파하고 다르다는 것도 격파하는 이러한 격파는 외도의 가르침[經]이다.
부처님 경 안에는 실로 안팎의 법이 있나니, 이른바 안의 6정(情)이요 밖의 6진(塵)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없다는 말인가.
【답】 이 안팎의 법이 호합하여 임시로 가정하여 이름이 있는 것이니, 마치 몸과도 같고 집과도 같다.
또 간략하게 설명하면 두 가지의 공[法空]이다.
소승(小乘)의 제자는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중생의 공함을 말해 주나니, 나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승(大乘)의 제자라면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법의 공함을 말해 주나니, 즉시 세간이 항상 공하여 마치 열반과 같음을 알게 된다.
성문의 논의사(論議師)는 내공(內空)을 말하면서,
“안의 법 안에는 나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무상하고 짓는 이도 없으며 아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고 하나니, 이것을 내공이라 한다.
외공(外空)도 역시 그와 같지만,
“안의 법의 모양[內法相]과 밖의 법의 모양[外法相]이 곧 공이다” 함은 말하지 않는다.
대승에서는 “안의 법 안에는 안의 법의 모양이 없고 밖의 법 안에서는 밖의 법의 모양도 없다”고 한다.
마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가운데의 설명과 같아서,
물질[色]은 물질의 모양이 공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은 느낌에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의 모양이 공하며,
눈[眼]은 눈의 모양이 공하고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은 귀에서부터 뜻에 이르기까지의 모양이 공하며,
빛깔의 모양이 공하고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은 소리에서부터 법에 이르기까지의 모양이 공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온갖 법은 스스로 법이 공하다.
【문】 이 두 가지로 내외공을 설명하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가?
【답】 두 가지 모두가 다 진실이다.
다만 지혜가 적고 근기가 둔한 이를 위하여 먼저 중생의 공을 설명했고, 지혜가 크고 근기가 영리한 이를 위하여 법의 공을 설명했을 뿐이다.
마치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차꼬와 수갑을 부수고 옥졸을 살상한 뒤에 마음대로 도망갈 수 있는 것과 같으며,
또한 어떤 이가 도적을 두려워해29) 담벽을 뚫고 탈출하게 되는 것과 같다.
성문을 닦는 이는 다만 나라는 인연으로 생기는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모든 법애(法愛)를 여의며 늙고 병들고 죽는 것과 악도(惡道)의 고통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욕망의 본말(本末)을 추구하여 분명하게 모든 법을 파괴하지 않고 단지 해탈을 얻는 것을 능사로 삼을 뿐이나,
대승을 닦는 이는 삼계(三界)의 감옥을 깨뜨리고 악마들을 항복 받으며, 모든 번뇌[結使]를 끊고 몸에 밴 기운[習氣]을 없애면서 온갖 법의 본말을 분명하게 알아 통달하고 막힘이 없으며, 모든 법을 부수어 흩고 세간을 열반과 같이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 되게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 온갖 중생들을 거느리고 삼계를 벗어나게 한다.
【문】 대승에는 어떠한 방편이 있기에 모든 법을 파괴할 수 있는가?
【답】 부처님께 말씀하시되,
“물질은 갖가지 인연에서 생기며 견고하거나 충실함이 없다.
마치 물에 물결이 일면서 거품이 생기면 잠깐 동안 보이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처럼, 물질도 역시 그와 같다.
지금 세상에서의 4대(大)는 전생에 행한 업의 인연이 화합한 까닭에 물질을 이루게 되었지만 이 인연은 소멸되는 까닭에 물질도 역시 함께 소멸된다.
무상한 도[無常道]를 수행하여 차츰차츰 공의 문에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나고 없어지고 하면서 머무르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머무르는 때가 없으면 곧 취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하셨다.
또 유위(有爲)의 모양이기 때문에 생기는 때에는 소멸함이 있고, 소멸하는 때에는 생기는 것이 있다.
만일 이미 생겨났다면 생기는 것이 소용이 없고,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생기는 것이 생길 것이 없나니, 법과 생기는 것에는 역시 다름이 있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생기는 것이 만일 생겼다면 법도 당연히 생김이 있어서 생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다시 생김이 있어야 하므로 이것은 곧 다하는 일이 없다.
만일 생기는 것이 생겨서 다시 생길 것이 없다면 생기는 것은 생기는 일이 있지 않아야 하고,
만일 생기는 것에 생기는 것이 없다면 법도 역시 생기는 것이 있지 않아야 하나니,
이와 같아서 생기는 것도 얻을 수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공하여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나니, 이것이 진실이다.
또 모든 법이 있다면 마침내 없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니, 만일 뒤에도 없는 것이라면 처음에도 역시 없어야 한다.
마치 사람이 신을 신을 때 처음부터 헌 데가 있었지만 미세한지라 깨닫지 못한 것과 같나니,
만일 처음에 헌 데가 없었다 하면 언제나 새로운 신이어야 한다.
만일 뒷날 헌 모양이 있었다면 처음에도 역시 헌 데가 있었을 것이다.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뒤에 있을 것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도 있을 것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마땅히 공해야 된다.
중생들은 뒤바뀌어서 안의 6정(情)에 집착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이 뒤바뀜을 파괴하는 것이니, 이것을 내공이라 한다.
외공과 내외공도 역시 그와 같다.
공공(空空)30)이라 함은 공으로써 내공과 외공과 내외공을 깨뜨리는 것이요 이 세 가지의 공을 깨뜨리기 때문에 공공이라고 한다.
또 먼저 법의 공[法空]으로써 안팎의 법을 깨뜨리고 다시 그 공으로써 이 세 가지의 공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것을 공공이라 한다.
또 공삼매(空三昧)로 5중(衆)이 공함을 관찰하여 8성도(聖道)를 얻고 모든 번뇌를 끊으며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얻으면서 전생의 업의 인연으로 목숨이 다할 때에는 여덟 가지의 도를 놓아 버리고자 하기 때문에 공공삼매(空空三昧)31)가 생기나니, 이것을 공공이라 한다.
【문】 공과 공공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공은 5수중(受衆)을 깨뜨리고 공공은 그 공을 깨뜨린다.
【문】 공이 만일 이것이 법의 공이라면 이미 깬 것이 되지만, 공이 만일 법의 공이 아니라면 무엇을 깬다는 것인가?
【답】 공이 온갖 법을 깨뜨리면 오직 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공이 온갖 법을 깨뜨린 뒤에는 그 공도 역시 버려야 하나니, 이 때문에 이 공공이 필요한 것이다.
또 공은 온갖 법을 반연하고 공공은 다만 공을 반연할 뿐이니,
마치 하나의 건장한 남아가 온갖 도적을 깨뜨리고 다시 또 어떤 사람이 그 건장한 남아를 깨뜨린 것처럼, 공공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또 마치 약을 먹을 때 약은 병을 깨뜨리는 것이므로 병을 벌써 깨뜨렸다면 약도 역시 그만두어야 하는 것인데, 만일 약을 그만두지 않으면 다시 그 병을 악화시키듯이,
이 공으로써 모든 번뇌의 병을 소멸시키지만 이 공이 또 근심거리가 될까 두려워서이니, 이 때문에 공으로써 공을 버리는 것을 바로 공공이라 한다.
또 공으로써 열일곱 가지의 공을 깨뜨리기 때문에 공공이라 하는 것이다.
대공(大空)32)이라 함은 성문의 법 안에서는 법이 공함을 대공이라 하나니,
마치 잡아함(雜阿含)의 『대공경(大空經)』33)에서,
“나는[生] 것은 늙어 죽음[老死]에 인연한다”고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이 늙어 죽는 것이다”고 하거나 “이것이 사람의 늙어 죽는 것이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삿된 소견이다.
“이것이 사람의 늙어 죽는 것”이라 하면 중생이 공한 것이요
“이것이 늙어 죽는 것”이라 하면 바로 법이 공한 것이다.
마하연경(摩訶衍經)에서는 시방을 설명하면서, “시방의 모양은 공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대공이다.
【문】 시방이 공한 것을 무엇 때문에 대공이라 하는가?
【답】 동방(東方)은 끝이 없기 때문에 대(大)라 하고,
또한 온갖 처소도 존재하기 때문에 대라 하며,
온갖 물질[色]에 두루하기 때문에 대라 하고,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대라 하며,
세간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대라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대라 하나니,
이와 같이 큰 방소[方]로 능히 깨뜨리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그 밖의 공은 인연(因緣)으로 생긴 법을 깨뜨리고 조작된 법[作法]과 거친 법[麤法]은 깨뜨리기가 쉽기 때문에 대(大)라 하지 않지만,
이 방소는 인연으로 생긴 법도 아니요 조작된 법도 아니며 미세한 법이라 깨뜨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문】 부처님 법 안이라면 방소는 없다. 3무위(無爲), 곧 허공무위(虛空無爲)나 지연진무위(智緣盡無爲)나 비지연진무위(非智緣盡無爲)에도 역시 속한 바가 아닌데, 무엇 때문에 방소가 있다고 말하는가?
역시 이것은 항상 있는 것[常]이요 무위의 법이어서 인연으로 생긴 법도 아니요 조작된 법도 아니며 미세한 법도 아니다.
【답】 이 방소에 대한 법은 성문의 논의(論議) 안에는 없으며 마하연의 법 안에서는 세속제(世俗諦)로써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제일의(第一義) 안에서는 온갖 법조차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방소이겠는가.
마치 5중(衆)이 화합하면 임시로 중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방소도 역시 그와 같아서 4대로 이루어진 물질과 화합하는 가운데,
“이 사이다 저 사이다” 등으로 분별하면서,
임시로 방소라는 이름을 붙여,
“해가 돋아나오는 곳이 바로 동쪽이다. 해가 지는 곳이 바로 서쪽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따위가 바로 방소의 모양이며 이 방소는 자연히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인연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요,
또한 먼저는 없었다가 지금은 있다가 뒤에는 없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작된 법도 아니며,
바로 눈앞에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미세한 법도 아니다.
【문】 방소가 만일 그와 같다면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 것인가?
【답】 그대는 듣지 않았는가.
나는 먼저,
“세속의 이치로써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요 으뜸가는 이치로써 하기 때문에 깨뜨린다”고 했다.
세속의 이치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아주 없다[斷滅]는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고,
으뜸가는 이치로써 깨뜨리기 때문에 항상하다[常]는 가운데도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은 간략하게 설명하여 대공(大空)의 뜻이라 한다.
【문】 제일의공(第一義空)34)으로도 역시 조작이 없는 법과 인연이 없는 법과 미세한 법을 깨뜨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대공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앞에서 이미 대(大)라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에 대라고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제일의(第一義)라는 이름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이치[義]는 실로 대이다.
출세간(出世間)에서는 열반으로써 대를 삼고, 세간(世間)에서는 방소[方]로써 대를 삼나니, 이 때문에 제일의공도 역시 대공이다.
또 큰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마치 수행하는 이가 인자한 마음[慈心]으로써 동방의 한 국토의 중생을 반연하고 다시 한 국토의 중생을 반연하며 이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반연할 때에,
만일 “동방의 국토를 모조리 다 반연했다”고 여기면 끝이 있다는 소견[邊見]에 떨어지고,
만일 “모조리 다 반연하지 못했다”고 여기면 끝이 없다는 소견[無邊見]에 떨어진 것과 같나니,
이런 두 가지의 소견을 내기 때문에 곧 인자한 마음을 잃게 된다.
만일 방소의 공함[方空]으로써 이 동반을 깨뜨린다면 끝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거나 하는 소견이 소멸되겠지만,
만일 방소의 공함으로써 동방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동방이라는 마음을 따르게 되고,
마음을 따르게 되면 인자한 마음은 이내 소멸되면서 삿된 마음이 생기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닷물이 밀려들고 나가고 할 때 그 통상의 한계까지 이르면 물은 도로 나가게 되는데,
고기가 만일 그 물을 따라 되돌아가지 않으면 드러난 땅에 있으면서 갖은 괴로움을 받게 되지만,
만일 고기가 지혜가 있었다면 물을 따라 되돌아가서 영원한 안온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마음을 따르면서 되돌리지 않는다면 삿된 소견에 떨어져 있겠지만,
만일 마음을 따라 되돌아간다면 인자한 마음을 잃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큰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때문에 대공이라 한다.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함의 제일의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말하는 것이니, 부서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기 때문에 이 모든 법의 실상도 역시 공하다. 왜냐하면 받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법의 실상이 존재한다고 하면 마땅히 받아야 하고 집착해야 하겠지만,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받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만일 받거나 집착한다면 곧 그것은 거짓[虛誑]이다.
또 모든 법 중에서 으뜸가는 법을 열반이라 하나니,
마치 아비담(阿毘曇) 중에서,
“무엇이 위가 있는 법[有上法]이고 온갖 유위의 법[一切有爲法]이며 그리고 허공(虛空)과 비지연진(非智緣盡)인가. 무엇이 위없는(無上法)이고 지연진(智緣盡)인가. 지연진 이것이 곧 열반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열반 가운데는 역시 열반이라는 모양이 없나니, 열반이 공한 이것이 바로 제일의공이다.
【문】 만일 열반이 공하다면 모양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성인은 3승(乘)의 수레를 타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인가?
또 온갖 부처님 법은 모두가 열반을 위하여 설명된 것이니, 마치 뭇 물의 흐름은 모두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답】 열반은 있고 이것은 바로 으뜸가는 보배요 위없는 법이다.
이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고,
둘째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탐애(貪愛) 등의 모든 번뇌가 끊어지면 이것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성인이 이 세상에서 받은 바의 5중(衆)이 모두 다하여 다시는 받지 않게 되는 것을 바로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중생이 열반이라는 이름을 듣고 삿된 소견을 내면서 열반이라는 음성에 집착하면서 쓸모없는 이론으로 “있다. 없다”고 하므로 그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열반이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있다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세간에 집착한 것이요,
만일 없다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열반에 집착한 것이니,
이 범부가 집착한 열반을 깨뜨리는 것이며 성인이 얻은 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인은 온갖 법 가운데서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탐애 등의 모든 번뇌를 가정으로 이름을 붙여 속박이라 하는데 만일 도를 닦아서 이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으면 곧 열반이라 하나니,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열반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사람이 차꼬를 차고 있다가 벗어나서도 쓸모없는 의론을 하며,
“이것은 차꼬요, 이것은 다리인데 어느 것이 벗어난 것일까”고 한다면,
이 사람은 가소롭게도 다리와 차꼬 밖에서 다시 벗어남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도 역시 그와 같아서, 5중(衆)의 차꼬를 여의고 다시 해탈하는 법을 구하는 것이다.
또 온갖 법은 제일의(第一義)를 여의지 않고 제일의는 모든 법의 실상을 여의지 않으면서 모든 법의 실상을 공하게 하나니, 이것을 바로 제일의공이라 하며 이와 같은 등의 여러 가지를 제일의공이라 하는 것이다.
유위공(有爲空)과 무위공(無爲空)이라 함의 유위의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으로써 이른바 5중(衆)과 12입(入)과 18계(界) 등이요 무위의 법은 인연이 없는 것으로써 항상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서 마치 허공과 같다.
이제 유위의 법에서는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공한 것이니,
첫째는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그리고 통상 있는 모양에서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하다.
둘째는 유위의 법은 유위의 법의 모양이 공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 나와 내 것[我所]과 그리고 항상 있는 모양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공해야 하지만 어찌해야 “유위의 법은 유위의 법의 모양이 공하다”고 하는가?
【답】 만일 중생이 없다면 법은 의지할 데가 없다.
또 항상 없기 때문에 머무르는 때도 없고 머무르는 때가 없기 때문에 얻을 수도 없으며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법도 역시 공하다.
【문】 유위의 법 안에서 항상 있는 모양을 얻을 수 없을 때 그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중생의 공함[衆生空]이 되는가? 아니면, 법의 공함[法空]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나를 헤아리면서 항상하다 하나니, 이 항상하다는 것이 공하면 곧 중생이 공한 데로 들어간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으로써 항상함을 삼는다. 마치 범천왕(梵天王)이 이 4대(大)를 설명하면서,
‘4대로 조작된 물질은 모두가 다 항상 없는[無常] 것이지만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은 바로 항상 있는[常] 것이다’고 했으니,
이 항상 있는 것이 공하면 법이 공한 데로 들어간다”고 한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5중(衆)은 곧 항상 있는 것이다.
마치 물질[色衆]은 비록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소멸하지 않으며, 그 밖의 4중(衆)은 마치 마음과 같다. 5중이 공함을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의 공함이니, 그러므로 항상 있는 것의 공함도 역시 법의 공안에 들어간다”고 한다.
또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이 공하다 함은 수행하는 이는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면서,
“짓는 이가 없고 인(因)과 연(緣)이 화합한 까닭에 있는 것이니, 모두 이것은 허망한 것이요 생각과 분별에서 생기는지라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그 두 중간에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범부는 뒤바뀐 소견 때문에 있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면 유위의 법에 대하여 그의 모양을 얻지도 못하고 다만 임시 붙인 이름[假名]일 뿐임을 알면서, 이 붙인 이름으로써 범부를 인도하되, 그것은 거짓이어서 진실이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는 줄 알므로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다.
또 모든 성현은 유위의 법을 반연하지 않으면서 도의 과위[道果]를 얻나니, 유위의 법은 공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이요 유위의 법에 대하여 마음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유위를 여의면 곧 무위는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유위의 법의 실상이 곧 무위이기 때문이니, 무위의 모양이란 유위가 아닌데 다만 중생들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분별하며 설명할 뿐이다.
유위의 모양은 나고[生] 멸하고[滅] 머무르고[住] 달라지거니와[異] 무위의 모양은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머무르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나니, 이것이 부처님의 도에 들어가는 첫 문이다.
만일 무위의 법에 모양이 있다면 그것은 곧 유위이다.
유위의 법에 모양이 생긴다면 그것은 곧 쌓임의 진리[集諦]이고,
모양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곧 다함의 진리[眞諦]이다.
만일 쌓이지 않는다면 짓지도 않고 만일 짓지도 않는다면 사라지지도 않나니,
이것을 무위법의 여실한 상이라 한다.
만일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으면 다시는 나고 사라지고 머무르고 달라지는 모양 안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때에는 유위의 법이 무위의 법과 함께 합해지는 것도 보지 않고,
무위의 법이 유위의 법과 함께 합해지는 것도 보지 않으며,
유위의 법이나 무위의 법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의 법이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을 분별하면 유위와 무위에 대하여 장애가 있게 되기 때문이니,
만일 모든 생각과 분별을 끊으면 모든 반연이 소멸하고 반연이 없는 진실한 지혜로써 생기는 수효 안에 떨어지지 않으면 곧 안온하면서 항상 변함이 없고 즐거운 열반을 얻게 된다.
【문】 앞의 다섯 가지의 공은 모두가 따로따로 설명하면서 지금의 유위공과 무위공은 무엇 때문에 합쳐서 설명하는 것인가?
【답】 유위와 무위의 법은 서로가 상대하면서 존재한다.
만일 유위를 제거시키면 무위는 없고 만일 무위를 제거시키면 유위는 없나니, 이 두 가지의 법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
수행하는 이는 유위의 법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한 것 등의 허물을 관찰하면 무위의 법이 이익되게 하는 곳의 광대함을 알게 되나니, 이 때문에 두 가지 일을 합쳐서 설명한다.
【문】 유위의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며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이런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무위의 법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이 아니며 부서지는 것도 없고 무너지는 것도 없어서 항상 허공과 같은데 어떻게 공하다 하는가?
【답】 마치 먼저의 설명과 같아서 만일 유위를 제외하면 무위는 없으며 유위의 실상이 바로 무위이다. 마치 유위가 공하면 무위도 역시 공하나니, 이 두 가지 일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유위법의 허물을 듣고서 무위법을 집착하나니,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結使]가 생긴다. 마치 아비담(阿毘曇) 안에서의 설명과 같다.
89의 유위법에서의 반연은 여섯 가지이고 무위법에서의 반연은 세 가지이니,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욕계의 속박이 다하는 진리[欲界繋盡諦]에서 끊어야 할 무명의 번뇌[無明使]는 혹 유위의 반연이기도 하고 혹 무위의 반연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 유위의 반연인가?
다함의 진리에서 끊을 바 유위의 법이 반연하는 결사와 상응한 무명의 결사요,
어느 것이 무위의 반연인가?
다함의 진리에서 끊을 바 유위의 법이 반연하는 결사와 상응하지 않는 무명의 번뇌이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무명도 역시 그와 같나니, 이 번뇌 때문에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을 일으키고 착하지 않은 업 때문에 세 가지의 악도(惡道)에 떨어진다. 이 때문에 무위의 법은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위의 법이 반연하는 번뇌[結使]는 의심[疑]과 삿된 소견[邪見]과 무명(無明)이다.
의심이란 열반의 법 가운데서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고 의심하는 것이요,
삿된 소견이란 만일 마음을 내면서 “결단코 열반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 삿된 의심과 상응한 무명과 그리고 단순한 무명과 합하여져서 무명의 번뇌가 된다.
【문】 만일 무위의 법이 공하다고 한다면 삿된 소견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삿된 소견을 지닌 사람은 열반을 믿지도 않고 그런 뒤에 마음을 내면서,
“열반의 법은 없다”고 하는데,
무위의 공이라 하면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런 것이 다르다.
또 만일 사람이 유위를 버리고 무위에 집착하면 집착하기 때문에 무위는 곧 유위가 되나니,
이 때문에 비록 무위를 깨뜨린다 하더라도 삿된 소견이 아니다.
이것을 유위와 무위의 공이라 한다.
필경공(畢竟空)35)이라 함은 유위공과 무위공으로써 모든 법을 깨뜨려 남는 것이 없게 하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마치 번뇌가 다한 아라한을 필경 청정하다[畢竟淸淨]고 하며 아나함(阿那含)에서부터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의 욕망을 여읜 이를 마침내 청정하지 않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내공(內空)ㆍ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시방공(十方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 및 무위공(無爲空)이요 다시는 그 밖에 공하지 않는 법이 없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또 만일 사람이 일곱 세상 또는 백천만억의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귀족(貴族)이었으면 이것을 필경 귀족이라 하고,
한 세상 동안이나 두세 세상 귀족이었으면 진실한 귀족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필경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본래부터 결정되고 진실하여 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공이라 하더라도 맨 처음에는 공하지 않았나니, 마치 하늘과 물건을 창조한 시초와 그리고 명초(冥初) 때의 작은 티끌과 같다”고 하나,
이들도 모두가 공하다.
왜냐하면 결과가 무상(無常)하면 원인도 역시 무상하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은 결과를 짓지도 않고 또한 원인도 짓지 않는 것처럼,
하늘과 작은 티끌 등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만일 이것이 항상 있는 것이라면 무상한 것을 내지 않아야 된다.
만일 과거에 일정한 모양이 없었으면 미래와 현재의 세상에서도 역시 그와 같으며 3세(世) 동안에 하나의 법도 일정하거나 진실하여 공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문】 만일 3세가 온통 공하여 작은 티끌과 한 생각까지도 있는 바가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아주 두려워할 일이다. 모든 지혜로운 사람은 선정의 즐거움 때문에 세간의 즐거움을 버리고 열반의 즐거움 때문에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나니, 이제 필경공 안에서는 열반까지도 없는데 어떤 법에 의지하여 열반을 버리게 되는가?
【답】 나를 집착함이 있는 사람이 하나다, 다르다 하는 모양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이 두려운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범부의 사람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해야 할 곳은 이른바 나가 없고 내 것[我所]이 없다는 그것이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또 유위의 법에는 3세(世)가 있고 유루(有漏)의 법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일을 낸다. 열반은 온갖 애착이 끊어진 것이라 하는데 어떻게 열반에 대하여 버리거나 여의는 일을 구하겠는가.
또 마치 비구가 4중금(重禁)을 깨뜨리면 이것을 필경파계(畢竟破戒)라 한 것과 같나니, 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마치 5역죄(逆罪)를 지었으면 결국에는 세 가지의 선도(善道)를 닫아버리는 것과 같고,
만일 성문의 깨달음[證]을 취하면 결국에는 부처님이 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서,
필경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법에서 필경 공이요 다시는 남는 것이 없다.
【문】 온갖 법이 필경 공이라는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3세(世)와 시방의 모든 법은 법의 모양과 법의 머무름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진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법이라도 진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법은 허망한 것이 되지만,
만일 하나의 법도 진실한 것이 없다면 역시 모든 허망한 법도 이 필경공이 없어야 한다.
【답】 하나의 법도 진실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의 법이라도 진실한 것이 있다 한다면 이 법은 마땅히 유위에나 무위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유위라면 유위공에서 이미 깨뜨렸고,
만일 이것이 무위라면 무위공에서도 역시 깨뜨렸다.
이와 같아서 세간에서나 출세간에서도,
만일 세간에서라면 내공ㆍ외공ㆍ내외공 및 대공에서 이미 깨뜨렸고,
만일 출세간에서라면 제일의공에서 이미 깨뜨렸다.
색법(色法)과 무색법(無色法)과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에서도 역시 이와 같다.
또 온갖 법은 모두가 필경 공이라 이 필경공도 역시 공이며 공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역시 허망하나 진실이 서로가 상대함이 없다.
또 필경공이라 함은 온갖 법을 깨뜨려서 남는 것이 없게 하기 때문에 필경공이라 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남는 것이 있다면 필경공이라 하지 못한다.
만일 “서로가 상대하기 때문에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문】 모든 법은 모두 다 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因)과 연(緣)으로 생긴 법은 공하지만 인과 연은 공하지 않기 때문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들보와 서까래의 인과 연이 화합한 까닭에 집이라 할 때 집은 공하면서도 들보와 서까래는 공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답】 인과 연도 역시 공하나니, 인과 연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이 아버지가 낳았기 때문에 아들이라 하고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라 하는 것이다.
또 맨 나중의 인과 연이 의지하여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산과 강물과 초목과 중생의 무리는 모두가 땅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땅은 물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물은 바람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바람은 허공에 의지하여 머무르되 허공은 의지하여 머무는 데가 없는 것과 같다.
만일 근본이 의지한 데가 없으면 줄기도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필경공인 줄 알아야 한다.
【문】 그렇지 않다. 모든 법은 마땅히 근본이 있어야 한다. 마치 신통(神通)으로 변화를 가져올 때 그 변화로 된 것은 비록 거짓이라 하더라도 변화하는 주인은 공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답】 범부들이 볼 때 그 변화로 된 물건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공이라고 여기고, 변화하는 주인은 오래 있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여기지만,
성인은 변화하는 주인도 전생의 업의 인연이 화합하여 생겼고, 금생에서도 모든 착한 법을 쌓아서 신통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변화를 짓는다고 본다.
마치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의 후품(後品)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세 가지의 변화가 있나니, 번뇌(煩惱)의 변화요 업(業)의 변화며 법(法)의 변화법은 법신(法身)이다.이다. 이 때문에 변화하는 주인도 역시 공한 줄 알 것이다.
【문】 모든 견고하지 않은 것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공해야 하지만 모든 견고한 물건과 진실한 법은 마땅히 공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땅덩이와 수미산과 큰 바닷물과 해와 달과 금강(金剛) 등의 물질은 진실한 법이요 견고하기 때문에 공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땅과 수미산은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겁(劫)을 마치기 때문이며,
여러 시내들은 마른 적이 있기는 하나 바다는 항상 가득 차 있고 해와 달은 하늘을 빙빙 돌면서 한이 없기 때문이다.
또 범부가 보는 것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공해야 하지만,
성인이 얻은 바의 여(如)와 법성(法性)과 진제(眞際)와 열반(涅槃)의 모양은 바로 진실한 법이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결국에는 모두가 공하다고 하는가?
또 유위의 법은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으나,
무위의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진실이어야 하는데,
또 어찌하여 필경공이라고 말하는가?
【답】 견고하고 견고하지 않은 것은 정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공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견고한 것이 되지만, 어떠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견고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은 금강을 견고한 것으로 여기지만 제석(帝釋)은 마치 사람이 손으로 지팡이를 잡듯 견고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
또 금강을 부수는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견고하다고 여기지만,
만일 거북의 껍질 위에다 놓고 산양(山羊)이 뿔로 깨뜨려 버린다는 것을 알면 견고하지 않는 줄을 알 것이다.
마치 일곱 자가 되는 몸은 큰 바다를 깊다고 여기지만,
라후아수라왕(羅睺阿修羅王)이 큰 바다 속에 가 서면 무릎이 물 위로 나오고 두 손으로 수미산의 꼭대기를 숨기면서 아래로는 도리천(忉利天)의 희견성(喜見城)을 내려다보나니, 이런 이에게는 바닷물이 얕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또 수명이 짧은 사람은 땅이 항상 오래 있고 견고한 것으로 여기지만 오래도록 사는 이는 땅은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다고 본다.
마치 『불설칠일유경(佛說七日喩經)』36)에서와 같나니,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하고 변하면서 모두가 다 닳아서 없어지고 만다.
겁(劫)이 다하려 할 때 큰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하면서 약초와 나무들이 모두 다 말라 죽는다.
두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조그맣게 흐르는 물들은 모두 다 바짝 마르게 되고,
세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큰 강물에서 흐르는 물들은 모두 말라버리며,
네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염부제(閻浮提) 안의 네 개의 큰 강물[四大河]과 아나바달다못[阿那婆達多池]도 모두 다 바짝 말라버린다.
다섯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큰 바다 바짝 말라버리고,
여섯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대지(大地)와 수미산 등이 모두 다 연기를 뿜어내는 것이 마치 기와 그릇을 굽는 가마와 같이 되며,
일곱 번째의 해가 나오게 되면 모두가 다 활활 타서 연기조차도 없어지고 땅과 수미산과 범천(梵天)까지도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만다.
그때 새로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난 천인이 이 불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벌써 범궁(梵宮)이 다 탔습니다. 여기까지 번져 오지 않을까요’라고 하면,
그보다 먼저 난 하늘들은 그 뒤에 난 하늘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일찍이 여기서 살고 있었는데 범궁까지 타고는 그곳에서 꺼지면서 여기까지는 번지지 않았고’라고 한다.
이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다 태운 뒤에는 재나 숯까지도 없어진다.”
이어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큰 사건을 그 누가 믿겠느냐. 오직 눈으로 직접 본 이라야 믿게 될 뿐이다.
또 비구들아, 지나간 세상에 수열다라(須涅多羅)라는 외도(外道)의 스승이 있었다. 욕망을 여의고 4범행(梵行)을 행하였으며 그의 한량없는 제지들도 역시 욕망을 여의게 되었는데,
수열다라는 생각하기를,
‘나는 제자들과는 같이 한 곳에 나지 않아야 하며 이제 인자한 마음[慈心]을 깊이 닦아야겠다’고 하고,
이 사람은 인자한 마음을 깊이 생각한 까닭에 광음천에 가 나게 되었다.”
부처님은 이어서 말씀하시되,
“그 수열다라는 바로 지금의 나의 몸이다. 나는 그때에 눈으로 이 일을 똑똑히 보았었다”고 하셨나니,
이 때문에 견고하고 진실한 물건도 모두가 다 소멸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문】 그대는 필경공(畢竟空)을 설명하면서 무엇 때문에 무상(無常)한 일을 말하고 있는가?
필경공은 지금도 곧 그것은 공하지만 무상은 지금은 있다가 나중에 공한 것이다.
【답】 무상은 그것이 곧 공의 첫 문이다.
만일 무상을 진실하게 깨달아 알면 모든 법은 곧 공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처음에 네 가지의 행[四行]으로써 세간은 무상하다고 관찰한다.
만일 집착하던 물건을 보게 되면 무상함을 느끼고 무상함을 느끼면 괴로움이 생기며 괴롭기 때문에 마음에 싫증을 내게 된다.
만일 무상하고 공한 모양이면 취할 수가 없어서 마치 환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이것을 공하다 하며, 바깥의 물건이 이미 공한지라 안의 주인도 역시 공하나니, 이것을 나가 없다[無我]고 한다.
또 필경공은 바로 진실한 공[眞空]이 된다.
두 가지의 중생이 있나니, 첫째는 애착[愛]을 많이 익힌 이고, 둘째는 소견[見]을 많이 익힌 이다.
애착이 많은 이는 기뻐하면서 애착하게 되나, 애착한 바가 무상하기 때문에 근심과 고통이 생기므로 이런 사람을 위하여,
“그대가 애착하는 물건은 무상이 파괴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만일 이 애착하던 물건에서 고통이 생긴다면 애착을 내지 않아야 된다”고 말해 주나니,
이것을 조작이 없는 해탈의 문[無作解脫門]이라 한다.
소견이 많은 이는 모든 법을 분별하게 되면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삿된 소견에 집착하나니,
이런 사람을 위해서는 곧장 “모든 법은 필경공이다”고 설명하여 준다.
또 만일 말한 바가 있으면 이는 모두 깨뜨릴 수 있나니,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보는 대상도 이미 공한지라 보는 주인도 역시 공하나니, 이것을 필경공이라 한다.
그대는 말하기를,
“성인이 얻게 된 법은 마땅히 진실해야 한다”고 하는데,
성인의 법으로는 3독(毒)을 소멸시킬 수 있어서 뒤바뀐 것이거나 거짓이 아니며 중생들로 하여금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여의면서 열반에 이를 수 있게 하나니,
이것이 비록 이름은 진실하다 하더라도 모두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먼저는 없다가 지금은 있다가 나중에는 없어지고, 때문에 받을 수도 없고 집착할 수도 없나니,
그러므로 역시 공한 것이요 진실이 아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벌유경(栰喩經)』37)에서의 말씀과 같이 착한 법조차도 오히려 버려야 하겠거늘 하물며 착하지 않은 일이겠는가.
또 성인은 유위무루(有爲無漏)의 법은 유루(有漏)법의 인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유루의 법은 허망하며 진실하지 않은 인연에서 생기는 법인데 어찌하여 진실한 것이 되겠는가.
유위의 법을 여의면 무위의 법도 없다 함은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유위법의 실상(實相)이 곧 무위법이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마침내 얻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필경공이라 한다.
무시공(無始空)38)이라 함은 세간의 중생이나 또는 법이 모두가 비롯됨이 없다[無始]는 것이다. 마치 금생은 전세의 인연에서 존재하고 전세는 다시 그 전세에서 존재한다.
이와 같이 차츰차츰 나아가도 중생에게 그 비롯됨이 없는 것처럼 법도 역시 그와 같다.
왜냐하면 만일 먼저 태어나고 뒤에 죽는다면 죽음을 좇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고, 태어났어도 역시 죽음이 없을 것이며,
만일 먼저 죽고 뒤에 태어난다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을 것이며 또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그 비롯됨이 없다.
마치 경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중생은 그 비롯됨이 없다. 무명(無明)이 가리고 애욕에 얽매어서 생사(生死)에 가고 오고 하나 그 비롯됨은 얻을 수 없다”고 하셨나니,
이 비롯됨이 없는 법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시공이라 한다.
【문】 비롯됨이 없다[無始]는 것은 바로 진실이라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중생과 법에 비롯됨이 있다[有始] 하면 곧 끝이 있다는 소견[邊見]에 떨어지고 또한 인연이 없다는 소견[無因見]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등의 허물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마땅히 중생과 법은 그 비롯됨이 없다고 설명해야 된다.
그런데 이제 무시공으로써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리면 도리어 비롯됨이 있다는 소견에 떨어지고 만다.
【답】 이제 무시공으로써 비롯됨이 없다는 소견을 깨뜨리면서 또 비롯됨이 있다는 소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을 불에서 구하면서 깊은 물속을 집착하지 않아야 하듯이,
이제 이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면서도 역시 비롯됨이 있는 속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다.
【문】 어찌하여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는가?
【답】 끝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끝이 없다면 뒤가 없을 것이요 끝이 없어서 뒤가 없다면 역시 그 중간도 없다.
만일 비롯됨이 없다면 온갖 지혜를 지닌 사람[一切智人]을 깨뜨리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세간이 끝이 없다면 그 비롯됨을 알지 못하고 그 비롯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지혜를 지닌 사람이 없게 된다.
만일 온갖 지혜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비롯됨이 없다고 하지 못한다.
또 만일 중생의 모양을 취하거나 또 모든 법이 동일한 모양[一相]과 다른 모양[異相]을 취하면 이 동일하다, 다르다 하는 모양으로 지금 세상에서 그 전의 세상을 추구하고 그 전의 세상에서 다시 그 전의 세상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중생과 법에 대해 차츰차츰 추구해도 그 비롯됨을 얻을 수 없으면 비롯됨이 없다는 소견을 내게 된다.
이런 소견은 허망한 것인데 동일하다 다르다 하는 것으로 그 근본을 삼았기 때문이니 이는 깨뜨려야 한다.
마치 유위공(有爲空)으로 유위의 법을 깨뜨리면 이 유위공이 다시 곧 근심거리가 되므로 다시 무위공(無爲空)으로 무위의 법을 깨뜨리는 것처럼,
이제 비롯됨의 없음으로 비롯됨의 있음을 깨뜨리면 비롯됨이 없는 것이 다시 곧 근심거리가 되므로 다시 무시공으로써 이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므로 이것을 무시공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중생이 생사를 왕래하면서도 그 본제(本際)를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중생으로 하여금 오랜 옛날부터 생사를 왕래하면서 큰 괴로움을 당한 것을 알아 싫증내는 마음을 내게 하려 함에서다.
마치 경의 말씀과 같이, 한 사람이 세간에 있으면서 한 겁(劫) 동안에 몸으로 받은 피해(被害)를 헤아린다 할 때, 그가 흘린 모든 피를 한데 모으면 바닷물보다 더 많고 울면서 쏟은 눈물과 어머니의 젖을 먹은 것도 모두가 그만큼 하여 몸의 뼈를 한데 쌓으면 비부라산(毘浮羅山)보다 더 크다.
비유하건대 마치 천하의 초목을 모두 베어서 두 치[二寸] 되는 산가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曾祖)를 센다 해도 오히려 다할 수 없으며, 또한 땅을 모조리 다 이겨 환(丸)을 만들어서 그 어머니와 증조모(曾祖母)를 센다 해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겁 동안에 나고 죽는 고뇌를 받으면서도 처음의 비롯됨을 얻을 수 없으므로 마음에 두려움을 내면서 모든 번뇌[結使]를 끊는 것이다.
마치 무상(無常)하다 함이 비록 치우친 소견이기는 하나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한 것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듯이 비록 됨이 없는[無始] 것도 그와 같다.
비록 이것이 치우친 소견이기는 하나 역시 이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중생을 제도하면서 싫증내는 마음을 내게 하기 때문에 비롯됨의 없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실로 비롯됨의 없음이 있다 한다면 무시공을 말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비롯됨이 없음이 진실한 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람을 제도하는 것인가?
【답】 진실한 법 안에서는 사람을 제도하면서도 법을 설할 만한 언어가 없다. 사람을 제도하는 이것은 모두 유위(有爲)이고 거짓된 법이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써 이 비롯됨이 없음을 말씀하신다.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말씀하기 때문에 받는 이도 역시 집착이 없게 되고, 집착이 없기 때문에 싫증내는 마음을 내게 된다.
또 숙명지(宿命智)로써 중생이 생사를 계속함이 끝이 없음을 보시나니, 이때에는 진실한 것이 된다. 또 혜안(慧限)으로는 중생과 법은 필경공임을 보시나니, 이 때문에 무시공을 말씀하신다.
마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중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항상하다는 관[常觀]이 진실하지 않다면 무상하다는 관[無常觀] 역시 진실하지 않으며, 괴롭다는 관[苦觀]이 진실하지 않다면 즐겁다는 관[樂觀] 역시 진실하지 않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항상하다[常]ㆍ즐겁다[樂]는 것은 뒤바뀐 것이고 무상하다[無常]ㆍ괴롭다[苦]는 것은 진리라고 말씀하신다.
중생들은 대개가 항상함ㆍ즐거움에 집착하고, 무상함ㆍ괴로움에는 집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무상하다는 진리와 괴롭다는 진리로써 이 항상하고 즐겁다 하는 뒤바뀜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함ㆍ괴로움을 말하며 진리를 삼으시면서도, 만일 중생이 무상함과 괴로움에 집착하면 무상함이나 괴로움 역시 공임을 말씀하신다.
비롯됨이 있음과 비롯됨이 없다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비롯됨이 있다는 집착을 깨뜨린다.
만일 비롯됨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면 다시 비롯됨이 없다는 것으로 공을 삼으니, 이것을 무시공이라 한다.
【문】 비롯됨이 있는 법[有始法]도 역시 삿된 소견이므로 마땅히 깨뜨려야겠지만, 무엇 때문에 단지 비롯됨이 없음을 깨뜨리는 것만을 말씀하는가?
【답】 비롯됨이 있다면 이것은 크게 미혹된 일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비롯됨이 있으면 처음에 받은 몸은 죄와 복의 인연이 없는데도 행복하거나 불행한 곳[善惡處]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죄와 복의 인연에서 태어났다면 처음 받은 몸이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죄와 복이 있다면 그 앞의 몸에서 나중의 몸을 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세간의 비롯됨이 없다면 이러한 허물이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보살은 먼저 이미 이 추악한 사견을 버리나니, 보살은 항상 비롯됨이 없음을 가지고 중생을 생각하는 일을 익히기 때문에 비롯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항상 인연의 법을 행하기 때문에 법에는 비롯됨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아직은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비롯됨이 없는 가운데 착오가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무시공을 말씀한 것이다.
또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이미 비롯됨이 있는 것을 깨뜨렸다면 공으로써 비롯됨이 있는 것을 깨뜨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리고자 하는 까닭에 무시공을 말씀한 것이다.
【문】 만일 비롯됨이 없는 것으로 비롯됨이 있는 것을 깨뜨렸다면, 비롯됨이 있는 것도 역시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다만 공만으로써 비롯됨이 없는 것을 깨뜨린다 하는가?
【답】 이 두 가지는 비록 모두가 삿된 소견이기는 하나 차별이 있다.
곧 비롯됨이 있다[有始]는 것은 모든 번뇌와 삿된 소견을 일으키는 인연이고,
비롯됨이 없다[無始]는 것은 자비와 바른 소견[正見]을 일으키는 인연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들이 무시이래로 세상의 고뇌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고, 몸으로부터 차례로 몸을 내어 상속하면서 끊어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곧 죄와 복의 과보를 알면서 바른 소견을 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비롯됨이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그것이 도를 돕는 [助道] 착한 법이지만, 만일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을 내면 곧 그것은 삿된 소견이다.
마치 항상하다[常]ㆍ무상하다[無常]는 소견과 같다.
비롯됨이 있다는 소견[有始見]이 비록 비롯됨이 없다는 소견[無始見]을 깨뜨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비롯됨이 없다는 것을 깨뜨릴 수는 없다.
비롯됨이 없다는 것이 결국에는 비롯됨이 있다는 것을 깨뜨리나니, 이 때문에 비롯됨이 없다는 것이 더 뛰어나다.
마치 착한 일이 착하지 않은 일을 깨뜨리고 착하지 않은 일이 착한 일을 깨뜨리는 경우,
비록 서로가 깨뜨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착한 일이 나쁜 일을 깨뜨리게 되는 것과 같으며,
마치 성현의 도를 얻으면 영원히 악(惡)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악한 법은 곧 그렇지 못하니, 세력이 미약하고 천박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비록 5역죄(逆罪)를 일으켜 선근(善根)을 끊고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아무리 오래 가야 한 겁(劫)을 지나지 않아서 인연에 의해 지옥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도의 과위[道果]를 이루는 것과 같다.
비롯됨이 없음과 비롯됨이 있음의 우열이 같지 않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롯됨이 없음의 힘이 크기 때문에 비롯됨이 있다는 것을 깨뜨리게 되다. 이 때문에 유시공(有始空)은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산공(散空)39)이라 했는데, 산(散)이란 따로따로 떨어지는 모양을 말한다.
마치 모든 법이 화합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마치 수레는 바퀴살과 바퀴테와 끌채와 바퀴통의 여러 가지가 합쳐서 수레가 되지만,
만일 떨어지고 흩어져서 저마다 딴 곳에 있게 되면 수레라는 이름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5중(衆)이 화합한 인연 때문에 사람이라 할 뿐, 만일 5중이 따로따로 떨어지면 사람은 얻을 수 없다.
【문】 만일 그렇게 설명한다면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만을 깨뜨릴 뿐, 물질[色]은 깨뜨리지 못한다. 바퀴살과 바퀴테가 떨어져 흩어지면 수레라는 이름은 깨뜨릴 수 있되 바퀴살과 바퀴테는 깨뜨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산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5중이 떨어져 흩어지면 사람만을 깨뜨릴 수 있을 뿐 물질 중의 5중은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답】 물질 등도 이것은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깨뜨리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작은 티끌[微塵]이 화합한 것을 임시로 이름 붙여 물질이라 하기 때문이다.
【문】 나는 작은 티끌을 수용하지는 않는다.40)
지금 볼 수 있는 것으로 물질을 삼으며,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흩어져서 공이 된다 하는가?
【답】 설령 미진은 제외한다 해도 4대(大)가 화합한 인연으로 생겨서 볼 수 있는 물질이 나온 것이니, 역시 이것은 붙인 이름이다.
마치 사방의 바람이 화합하여 물위로 불면 거품 무더기가 생겨나듯이,
4대가 화합하여 물질을 이루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4대가 떨어져 흩어지면 물질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 이 물질은 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 및 4대가 화합했기 때문에 물질로 볼 수 있고, 모든 냄새ㆍ맛ㆍ닿임 등을 제외하면 다시는 다른 물질은 없게 된다.
지혜로써 분별하면 저마다 떨어지고 흩어져서 물질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물질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모든 법을 버리고 따로 물질이 있어야 함에도 다시는 다른 물질은 없나니,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존재하는 물질은 모두 4대(大)가 화합함으로 인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화합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가 이것은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이며 임시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흩어져야 한다.
【문】 물질은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흩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4중(衆)에는 물질이 없는데 어찌하여 흩어져야 한다는 것인가?
【답】 4음(陰)도 역시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나고 늙고 머무르며 무상(無常)하다고 보기 때문에 흩어져 공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때에도 달라지고 늙는 때에도 달라지며,
머무르는 때에도 달라지고 무상한 때에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3세(世) 가운데의 이 4중을 관해도 모두가 역시 흩어져 소멸된다.
또 마음은 반연할 바[所緣]를 따르고 대상이 없어지면 곧 소멸하며 대상이 무너지면 곧 스스로도 무너진다.
또한 이 4중은 일정하지 않으니, 반연을 따르면서 생기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불은 타는 것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나 만일 타는 경우를 여의면 불은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눈[眼]은 빛을 반연함으로 인해 안식(眼識)을 낳으나, 만일 반연할 바를 여의면 식(識)은 얻을 수 없다. 그 밖의 정식(情識)41)도 역시 그와 같다.
마치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나타(羅陀)42)에게 말씀하시되,
“이 물질[色衆]은 파괴되고 흩어지고 없어져서 아무것도 없게 되나니, 그 밖의 중(衆)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을 산공이라 한다.
또 비유하건대 마치 어린아이가 흙을 모아서 궁전[臺殿]이나 성곽ㆍ마을ㆍ문[閭里]ㆍ관청[宮舍]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쌀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밀가루라 하면서 애착하고 지키다가 해가 저물어 돌아가려 할 때 그런 마음을 모두 버리고는 밟아 무너뜨리고 흩어버리는 것과 같다.
범부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서 애착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만일 욕망을 여의고 모든 법을 본다면 흩어 무너뜨리고 버리게 된다. 이것을 산공(散空)이라 한다.
또 모든 법이 합치고 모이기 때문에 저마다 이름이 있다.
범부는 이름을 따르면서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고 물들고 집착하니,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법을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그 진실을 관찰해야 한다. 이름을 쫓아서는 안 되나니, 있거나 없거나 모두가 공하다”고 하신다.
마치 『가전연경(迦旃延經)』43)에서,
“쌓임의 진리[集諦]를 관찰하면 곧 없다는 소견[無見]이 없고,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관찰하면 곧 있다는 소견[有見]이 없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을 바로 산공이라 한다.
성공(性空)44)이라 함은,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 공하지만 임시의 업[假業]이 상속하는 까닭에 마치 공하지 않은 듯한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물의 성품은 스스로 찬 것[冷]이지만 불을 빌리기[假] 때문에 더워지며, 불이 그치고 오래 있으면 물은 곧 도로 차지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이 마치 물의 성품이 항상 찬 것과 같으며,
모든 법은 못 연(緣)이 화합하기 때문에 있음은 마치 물이 불을 만나 더워지는 것과 같다.
뭇 연이 적거나 없다면 곧 법이 없음은 마치 불이 꺼지면 끓던 물이 식는 것과 같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45),
“눈은 공하여 나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다. 왜냐하면 성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물질[色] 내지는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한 것과 같다.
【문】 이 경에서는 나와 내 것이 공함을 말했으니, 그것은 바로 중생공(衆生空)이 된다. 법공(法空)은 말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성공을 증명하겠는가?
【답】 이 가운데서는 성공만을 말씀하시지 중생공과 법공은 말씀하시지 않는다.
성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12입(入) 가운데에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이며,
둘째는 12입의 모양[相]은 저절로 공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문의 논[聲聞論] 중의 설명이다.
마하연(摩訶衍)의 법에서는,
“12입은 나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공하며, 12입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고 설명한다.
또 만일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다면 저절로 법공을 얻으니,
사람들은 대개 나와 내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만,
“나와 내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나도 없고 네 것도 없다”고 말씀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이 공한 줄 알아야 한다.
만일 나와 내 것이라는 법조차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머지 법이랴.
이 때문에 중생공과 법공은 결국에는 한 뜻으로 돌아가니, 이것을 법공이라 한다.
다시 성(性)이란 이름은 저절로 있는 것으로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니, 만일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지어진 법으로서 성(性)이라 부르지 않게 된다.
모든 법 가운데에는 모두 성품이 없다.
왜냐하면 온갖 유위의 법은 인연을 좇아 생겨나는데,
인연을 좇아 생겨난다면 곧 이것은 지어진 법이며,
만일 인연화합에 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법이 존재하지 않음[無法]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의 성품은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일컬어 성공(性空)이라 하는 것이다.
【문】 필경공이서 존재하는 바 없음을 일컬어 성공이라 한다. 그런데 어째서 거듭 말씀하는가?
【답】 필경공이란 일컬어 ‘남음[遺餘]이 없는 것’이라 하며, 성공이란 일컬어 ‘본래부터 항상 그러한 것’이라 한다.
마치 물의 성품은 찬 것인데 불을 빌리기 때문에 더워지지만 불이 없으면 다시 식는 것과 같다.
필경공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언제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그런데 어찌하여 같다고 하는가?
또 모든 법은 필경공이다. 왜냐하면 성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성품이 공하다. 왜냐하면 필경공이기 때문이다.
또 성공은 대부분 보살이 행할 바이며, 필경공은 대부분 모든 부처님께서 행할 바이다.
왜냐하면 성공 안에는 다만 인연의 화합이 있을 뿐 진실한 성품이 없고, 필경공은 3세가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차별이 있다.
또 온갖 법의 성품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전체의 성품[總性]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성품[別性]이다.
전체의 성품이라 함은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래(無來)ㆍ무거(無去)ㆍ무입(無入)ㆍ무출(無出) 등이며,
개별적인 성품이란 불은 더운 성품이고, 물은 습한 성품이며, 마음은 분별하는 성품[識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사람이 모든 악한 일을 즐겨 짓기 때문에 나쁜 성품[惡性]이라 하고, 착한 일을 좋아해 쌓는 까닭에 착한 성품[善性]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십력경(十力經)』46) 가운데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세간의 갖가지의 성품을 아시며, 이와 같은 모든 성품은 모두가 공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을 성공이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무상한 성품[無常性]이 진실이라면 당연히 업의 과보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고 멸하여 과거는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니, 6정(情)도 역시 대경[塵]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인연을 쌓거나 익히지도 않으며, 만일 쌓거나 익히지도 않는다면 경전을 외거나 좌선(坐禪) 등도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무상한 성품은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무상한 것조차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항상한 모양[常相]이겠는가.
또한 괴로운 성품[苦性]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실로 이 괴로움이 있다면 물들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사람이 고통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면, 모든 쾌락에 대해서도 당연히 싫어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부처님 역시 괴로운 느낌[苦受]과 즐거운 느낌[樂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不苦不樂受]의 이 세 가지 느낌을 말씀하지 않았어야 한다.
또한 괴로운 가운데서 성을 내거나, 즐거운 가운데서 좋아하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서 어리석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하나의 모양이라면, 즐거운 가운데서도 성을 내어야 하고, 괴로운 가운데서도 좋아해야 할 것이나. 다만 이런 일만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이 괴로운 성품조차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즐거운 성품[樂性]은 허망하거늘 얻을 수 있겠는가.
또한 공한 모습[空相]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공한 모습이 있다면 죄와 복이 없고,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역시 지금의 세상과 뒤의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법은 서로 기다려[相待] 존재한다.
왜냐하면 만일 공함이 있으면 당연히 진실이 있어야 하고, 만일 진실이 있으면 당연히 공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한 성품조차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진실함이 있겠는가.
또 만일 나가 없다면[無我] 곧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또한 지금의 세상에서 뒷세상에 이르러 죄와 복을 받는 일도 없고,
또한 업의 인연과 과보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나 없는 성품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음을 아는데 하물며 나의 성품[我性]이랴.
또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는[無生無滅] 성품 역시 진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진실이라면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온갖 법이 항상하다면 죄도 없고 복도 없다.
만일 존재한다면 항상 있음[常有]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항상 없음[常無]이다.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남이 없고[不生],
존재한다면 잃을 게 없어[不失] 남이 없고 멸함이 없는 성품은 얻을 수 없다.
그러니 하물며 생멸의 성품이겠는가. 무래ㆍ무거ㆍ무입ㆍ무출 등의 모든 총체적인 성품 역시 이와 같다.
다시 모든 법의 개별적인 성품[別性] 이것 역시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불은 탈 수 있는 만들어진 물질[造色]과 능히 비추는[能炤] 두 법이 화합한 까닭에 일컬어 불이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두 가지의 법을 여의고 불이 있다면 달리 불의 작용이 있어야 하지만 달리 작용이 없다.
그러므로 불은 곧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이며 또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실로 불이라는 법이 없다면 어떻게 더운 것[熱]이 바로 불의 성품이라고 말하겠는가.
또 더운 성품은 온갖 연(緣)에서 생겨나니, 안으로는 몸의 감관[身根]이 있고 밖으로는 물질의 접촉이 있을 때 화합하여 신식(身識)이 생겨나 더운 것이 있음을 깨달아 안다.
만일 아직 화합하지 않았다면 곧 더운 성품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더운 것이 불의 성품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또 만일 불이 진실로 더운 성품이 있다면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불에 들어왔는데도 타지 않는가.
나아가 사람의 몸 속에는 불이 있는 데도 몸을 태우지 못하고, 공중의 불은 물로도 끄지 못하는가.
불에는 결정된 더운 성품이 없기 때문이고, 신통력 때문에 불이 몸을 태우지 못하는 것이다.
업의 인연으로 된 5장(藏)은 열을 내지도 않고, 신통력 때문에 물로도 없애지 못한다.
또 만일 더운 성품과 불이 다르다면 불은 곧 더운 것이 아니다.
만일 더운 것과 불이 하나라면 어떻게 더운 것이 바로 불의 성품이라고 말하겠는가.
그 밖의 성품도 역시 그와 같다. 이 전체의 성품과 개별적인 성품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이라 한다.
또 성공이라 함은 본래부터 공한 것이다. 마치 세간의 사람은 허망하고 오래지 않다면 이것을 공하다고 여기고, 수미산이나 금강과 같은 물건과 성인이 아는 바는 진실로 공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의심을 끊게 하려고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비록 견고하고 상속하면서 오래 머무른다 하더라도 모두가 역시 성품은 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인은 지혜로 비록 중생을 제도하면서 모든 번뇌를 깨뜨린다 하더라도 그 성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 역시 공하다.
또 사람들은,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는 모두가 공이지만, 단지 진여(眞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와 같은 것은 바로 진실한 성품이다”고 여기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런 의심을 끊어 주기 위해 다만 분별하시어,
“5중과 진여와 법성과 실제도 모두가 역시 공하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을 성공이라 한다.
또 유위의 성품[有爲性]에 세 가지 모양이 있으니, 나고[生] 머무르고[住] 멸하는 것[滅]이다.
무위의 성품[無爲性]에도 역시 세 가지의 모양이 있으니, 나지 않고 머무르지 않고 멸하지 않는 것이다.
유위의 성품조차도 오히려 공한데 하물며 유위의 법이겠는가.
무위의 성품조차도 오히려 공한데 하물며 무위의 법이겠는가.
이러한 갖가지 인연으로써 성품은 얻을 수 없음을 일컬어 성공이라 한다.
자상공(自相空)이라 했는데, 온갖 법에는 두 가지의 모양이 있나니, 전체의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이다.
이 두 가지의 모양이 공한 까닭에 일컬어 모양이 공하다[相空]고 한다.
【문】 어떤 것이 전체의 모양이고 어떤 것이 각각의 모양인가?
【답】 전체의 모양이란 마치 무상(無常) 등과 같다.
각각의 모양이라 함은 모든 법이 비록 모두 무상하다 하더라도 저마다 별개의 모양이 있는 것이니, 마치 땅은 단단한 모양이요 불은 더운 모양인 것과 같다.
【문】 먼저는 이미 성품[性]을 설명했고 지금은 모양을 설명하는데, 성품과 모양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실체에는 다름이 없으나, 이름에 차별이 있다.
성품을 설명하면 모양을 설명한 것이 되고, 모양을 설명하면 성품을 설명한 것이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불의 성품을 말하면 곧 그것이 더운 모양이고, 더운 모양을 말하면 곧 그것이 불의 성품인 것과 같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품과 모양에는 조금의 차별이 있다. 성품은 그 자체[體]를 말하고, 모양은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석가의 제자들이 금계(禁戒)를 받아 지니는 것은 바로 성품이고,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는 것은 그 모양이며,
범지(梵志)가 스스로 그 법을 받는 것은 성품이고,
정수리에 주라(周羅)가 있고 끝이 세 갈래인 지팡이[三岐杖]를 짚는 것은 그 모양인 것과 같다.
마치 불의 열기는 그 성품이고 연기는 그 모양이며, 가까운 것은 성품이 되고 먼 것은 모양이 되는 것과 같다.
모양은 일정하지 않아서 몸에서 출현하며, 성품은 그 실체를 말한다.
마치 황색이 금의 모양으로 보이지만 속이 구리인 경우 불에 태워 돌로 갈아 보면 돌의 성품이 아닌 것을 알게 되듯이,
사람이 공경하고 공양 할 때 그가 착한 사람인 듯 보인다면 이것은 모양이 되고, 욕설을 해대고 헐뜯으며 발끈 성을 낸다면 이것은 성품이 된다.”
성품의 모양과 안팎, 멀고 가까움, 처음과 나중 등에는 이와 같은 차별이 있다.
이러한 모양들이 모두 공한 것을 일컬어 모양의 공함[相空]이라 한다.
마치 말하기를,
“온갖 유위의 법은 무상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나고 멸하여 머물지 않는 까닭에 앞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있고, 이미 있었다가 도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인연에 속하기 때문이며, 거짓이면서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며, 무상한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로 화합한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등의 인연 때문에 온갖 유위법은 바로 무상한 모양이다.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내기 때문에 괴로운 몸[苦身]이라 한다.
4위의(威儀)가 괴롭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거룩한 진리[苦聖諦]이기 때문이며, 성인은 버리면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고 괴롭지 않은 때가 없기 때문이며 무상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괴로운 모양[苦相]이라 한다.
내 것[我所]을 여의기 때문에 공이고,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공이며,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처음도 마지막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이고 마음을 속이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성현은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모양 없고[無相] 지음 없는[無作] 해탈의 문이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온갖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온갖 마음의 작용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이라 하며,
모든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은 들어가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이것을 공이라 하는 것이다.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기 때문에 나가 없고,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가 없으며, 주인이 없기 때문에 나가 없다.
모든 법은 인연에서 생겨나지 않음이 없고, 인연에서 생기기 때문에 나가 없으며, 모양 없고 지음 없기 때문에 나가 없다.
임시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나가 없고, 몸에 대한 소견[身見]은 뒤바뀐 것이기 때문에 나가 없고, 나라는 마음을 끊으면 도를 얻기 때문에 나가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가 없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을 일컬어 전체의 모양[總相]이라 한다.
개별적인 모양[別相]이라 함은 땅은 단단한 모양이고 불은 뜨거운 모양이며, 바람은 움직이는 모양이다.
안식(眼識)이 의지하는 곳을 눈의 모양이라 한다.
귀ㆍ코ㆍ혀ㆍ몸 역시 그와 같으며,
식(識)은 깨닫는 모양이고,
지(智)는 슬기로운 모양이며,
혜(慧)는 사리 밝은 모양이다.
버리는 것은 보시하는 모양이고,
뉘우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모양은 계를 지니는[持戒] 모양이며,
마음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 것은 참는 모양이다.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정진하는 모양이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선정의 모양이며,
집착함이 없는 것은 지혜의 모양이다.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은 방편의 모양이고,
식(識)으로 생멸을 짓는 것은 세간의 모양이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저마다 모양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모양은 다 공한 줄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스스로의 성품이 공함[自相空]이라 한다.
그 밖의 이치는 성공(性空) 중에서의 설명과 같으니, 성품과 모양이란 그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모양이 공함[相空]만을 말하지 않고 자상공을 말하는가?
【답】 만일 모양이 공한 것만을 설명하면 법의 본체가 공임을 설명하지 못하나 자상공이라 하면 곧 법의 본체가 공임을 설명하게 된다.
또 뭇 법이 화합한 까닭에 하나의 법이 생겨나지만, 이 법 역시 공하다.
이와 같이 해서 낱낱의 법이 모두 공한 것이다.
이제 화합한 인연의 법은 모두 공하며,
온갖 법은 각각 스스로의 모양이 공하니,
이 때문이 자상공이라 하는 것이다.
【문】 만일 온갖 법이 저마다 자상이 공하다면 어째서 다시 설명하는가?
【답】 중생은 뒤바뀐 생각 때문에 하나의 모양[一相]ㆍ다른 모양[異相]ㆍ전체의 모양[總相]ㆍ개별적인 모양[別相] 등으로 모든 법에 집착하는데, 이것을 끊게 하기 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을 자상공이라 한다.
일체법공(一切法空)이라 했는데, 일체법(一切法)이란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 등을 말한다.
이 일체법은 모두 갖가지의 문에 들어가는데,
이른바 온갖 법의 존재하는 모양[有相]ㆍ
아는 모양[知相]ㆍ분별하는 모양[識相]ㆍ
반연하는 모양[緣相]ㆍ늘어나는 모양[增上相]ㆍ
원인의 모양[因相]ㆍ결과의 모양[果相]ㆍ
전체의 모양[總相]ㆍ개별적인 모양[別相]ㆍ
의지하는 모양[依相] 등이 그것이다.
【문】 무엇을 온갖 법의 존재하는 모양[有相]이라 하는가?
【답】 온갖 법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한 것도 있으며, 안도 있고 바깥도 있다.
온갖 법은 마음이 있어 생겨나기 때문에 존재한다[有]고 한다.
【문】 법이 없는 가운데서 어떻게 존재하는 모양을 말할 수 있는가?
【답】 만일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있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법이 없다고 할 뿐이다.
만일 실로 무법(無法)의 상태가 있다면 곧 명칭이 유(有)가 될 뿐이다. 이 때문에 온갖 법의 있는 모양을 설명하는 것이다.
아는 모양[知相]이라 했는데,
고법지(苦法智)ㆍ고비지(苦比智)로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알고,
집법지(集法智)ㆍ집비지(集比智)로 쌓임의 진리[集諦]를 알며,
멸법지(滅法智)ㆍ멸비지(滅比智)로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알고,
도법지(道法智)ㆍ도비지(道比智)로 도의 진리[道諦]를 안다.
그리고 세속의 착한 지혜로는 괴로움[苦]을 알고, 쌓임[集]을 알고, 사라짐[滅]을 알고, 도(道)를 알며,
또한 허공(虛空)과 비지연멸(非智緣滅)47)을 아니, 이것을 온갖 법의 아는 모양이라 한다.
이 아는 모양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
분별하는 모양[識相]이라 함은,
안식(限識)은 빛깔[色]을 알고, 이식(耳識)은 소리[聲]를 알며,
비식(鼻識)은 냄새[香]를 알고 설식(舌識)은 맛[味]을 알며,
신식(身識)은 닿임[觸]을 알고, 의식(意識)은 법(法)을 안다.
그리고 눈[眼]을 알고 빛깔을 알고 안식을 알며,
귀[耳]를 알고 소리를 알고 이식을 알며,
코[鼻]를 알고 냄새를 알고 비식을 알며,
혀[舌]를 알고 맛을 알고 설식을 알며,
몸[身]을 알고 닿임을 알고 신식을 알며,
뜻[意]을 알고 법을 알고 의식을 아나니,
분별하는 모양이라 한다.
반연하는 모양[緣相]이라 했는데,
안식 및 안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빛깔을 반연하고,
이식 및 이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소리를 반연하며,
비식 및 비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냄새를 반연하며,
설식 및 설식과 상응하는 모들 법으로는 맛을 반연하며,
신식 및 신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닿임을 반연하며,
의식 및 의식과 상응하는 모든 법으로는 법을 반연한다.
또 눈을 반연하고 빛깔을 만연하고 안식을 반연하며,
귀를 반연하고 소리를 반연하고 이식을 반연하며,
코를 반연하고 냄새를 반연하고 비식을 반연하며,
혀를 반연하고 맛을 반연하고 설식을 반연하며, 몸
을 반연하고 닿임을 반연하고 신식을 반연하며,
뜻을 반연하고 법을 반연하고 의식을 만연하나니,
이것을 반연하는 모양이라 한다.
늘어나는 모양[增上相]이라 했는데, 온갖 유위의 법은 저마다 늘어나며 무위의 법[無爲法] 역시 유위법에 대해서 늘어나고 커지나니, 이것을 늘어나는 모양이라 한다.
원인과 결과의 모양[因果相]이라 했는데, 온갖 법은 각각 원인이 되고 각각 결과가 되나니, 이것을 원인과 결과의 모양이라 한다.
전체의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이라 했는데, 온갖 법 가운데에는 전체의 모양과 각각의 모양이 있다.
마치 말[馬]은 바로 전체의 모양이고, 흰색은 바로 개별적인 모양인 것과 같다.
또한 마치 사람은 바로 전체의 모양이고, 만일 하나의 귀가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전전(展轉)해서 모든 것에는 전체의 모양과 개별적인 모양이 있나니, 이것이 전체의 모양과 각각의 모양이다.
의지하는 모양[依相]이라 했는데, 모든 법은 저마다 함께 서로가 의지하게 되는 것으로,
마치 들과 나무와 산과 하천은 땅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등 이와 같이 온갖 것은 저마다 서로가 의지하게 되나니, 이것을 의지하는 모양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하나의 법의 문의 모양은 온갖 법을 포섭한다.
다시 둘의 법의 문은 온갖 법을 포섭하나니,
이른바 형상 있고 형상 없는 법[色無色法],
볼 수 있고 볼 수 없는 법[可見不可見法],
대함이 있고 대함이 없는 법[有對無對法],
번뇌 있고 번뇌 없는 법[有漏法無漏法],
지어지고 지어지지 않은 법[有爲法無爲法],
안팎의 법[內法外法],
관찰과 대상의 법[觀法緣法],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법[有法無法] 등,
이와 같은 갖가지 두 개의 법문의 모양이 있으며,
그리고 셋ㆍ넷ㆍ다섯 내지는 한량없는 법문의 모양이 있어 온갖 법을 포섭한다.
이 모든 법이 다 공함은 먼저 설명한 바와 같으니, 일체법공이라 하는 것이다.
【문】 만일 모두가 공하다면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의 갖가지 이름을 말하는가?
【답】 범부들은 공한 법 가운데서 무명(無明)으로 뒤바뀌어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갈애[愛] 등의 모든 번뇌를 내게 된다.
이 번뇌로 인하여 갖가지의 업을 일으키고,
갖가지의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갖가지의 갈래[道]로 들어가며,
갖가지의 갈래로 들어가기 때문에 갖가지 몸을 받으며,
갖가지의 몸을 받기 때문에 갖가지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게 된다.
마치 누에가 아무 이유 없이 제 몸에서 실을 내어 스스로를 휘둘러 감고는 결국 삶아지는 고통을 받는 것과도 같다.
성인은 청정한 지혜의 힘 때문에 온갖 법의 본말이 모두 공하다고 분별하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 집착하는 곳을 말해주나니, 이른바 5중ㆍ12처ㆍ18계 등이 그것이다.
그대는 다만 무명 때문에 5중 등을 내어서 스스로가 짓고 스스로가 집착하고 있을 뿐이니, 만일 성인이 다만 공만을 말한다면 도를 얻지 못한다.
곧 인(因)하는 바도 없고 싫증을 내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문】 그대는 온갖 법이 공하다 하는데 그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온갖 법은 저마다 자상(自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땅은 단단한 모양이고 물은 축축한 모양이며, 불은 더운 모양이고 바람은 움직이는 모양이며,
마음은 식별(識別)하는 모양이고 지혜는 아는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온갖 법은 저마다 스스로 그의 모양에 머무르고 있거늘 어찌 공하다 하는가?
【답】 성공(性空)과 자상공(自相空) 안에서 이미 설파했으나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모양[相]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모양이 아니어야 한다.
마치 소(酥)와 꿀과 아교[膠]와 밀[蠟] 등은 모두가 땅의 모양[地相]이지만, 불과 만나면 스스로 그의 모양을 버리면서 축축한 모양[濕相]으로 바뀌고,
금ㆍ은ㆍ동ㆍ철도 불과 합치게 되면 역시 스스로 그 모양을 버리면서 물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과 같으며,
또 물이 추위를 만나면 얼음이 되면서 땅의 모양으로 바꾸어지는 것과 같다.
또 사람이 취하거나 잠이 들거나, 무심정(無心定)에 들거나, 얼음 속에 있는 물고기 같은 경우는 모두가 심식이 없다.
그 마음의 모양을 버리어 지각(知覺)이 없음이 마치 지혜는 아는 모양[知相]이지만,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어가면 곧 지각이 없이 스스로 아는 모양을 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때문에 모든 법은 정해진 모양[定相]이 없다.
또 만일 모든 법이 정해진 모양이라 하면 이 역시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치 미래의 법의 모양은 현재에는 이르지 않아야 하고,
만일 현재에 이르게 되면 미래의 모양을 버리게 되며,
만일 미래의 모양을 버리지 않고 현재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현재요 미래의 과보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현재가 과거로 들어가면 현재의 모양을 버리는 것이며,
만일 현재의 모양을 버리지 않고 과거로 들어간다면 과거가 바로 현재라는 이러한 허물이 있게 된다.
그러니 모든 법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는 줄 알게 된다.
또 만일 무위의 법이 반드시 있다 한다면 마땅히 별개의 모양이 있어야 한다.
마치 불은 스스로 더운 모양이 있어 다른 것으로 인하여 모양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무위의 법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없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그대가 미래 세상 안의 비지연멸(非智緣滅)의 법으로써 한다 해도 이것은 유위의 법이면서 유위의 모양은 없다.
만일 그대가 비지연멸의 이것이 소멸하는 모양[滅相]이라고 여긴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상하여 소멸하기 때문에 이것을 소멸하는 모양이라 할 뿐, 비지연멸 때문에 소멸하는 모양이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갖가지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만일 정해진 모양이 있다면 공하지 않게 할 수 있겠지만, 정해진 모양이 없음에도 공하지 않다 한다면 이 일은 옳지 못하다.
【문】 마땅히 실제로 존재하는 법은 공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범부와 성인은 아는 바가 각각 달라서 범부의 아는 바는 그것이 허망하지만 성인이 아는 바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성인의 지혜에 의거하는 까닭에 허망한 법을 버리는 것으로, 허망한 법에 의지하여 허망한 것을 버릴 수는 없다.
【답】 범부의 아는 바를 깨뜨리므로 성인의 지혜라 한다.
만일 범부의 법이 없으면 성인의 법도 없으니,
마치 병이 없으면 약도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기를,
“범부의 법을 여의면 다시는 성인의 법은 없으며, 범부의 법의 진실한 성품[實性]이 곧 성인의 법이다”고 한다.
또 성인은 모든 법에서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나니, 이 때문에 성인의 법은 진실하지만,
범부는 모든 법에서 모양을 취하고 또한 집착하기 때문에 범부의 법은 허망한 것이 된다.
성인은 비록 그것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모양을 취하지 않나니,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모양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
범부의 지위에서는 법에 집착하여 분별하면서,
“이것은 성인의 법이다. 이것은 범부의 법이다”고 하지만,
만일 성현의 지위에 서면 분별하는 바가 없다.
다만 중생의 병을 없애주기 위하여,
“이것은 거짓이고, 이것은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은 거짓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며, 속박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한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분별함이 없으면 청정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또 만일 법이 모두가 공하지 않다면 설명하지도 않아야 한다.
희론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모양이므로 역시 설명하지 않아야 하나니,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의지할 바도 없으며, 공하고 모양이 없고 조작이 없으면 진실한 법[眞法]이라 한다.
【문】 만일 온갖 법이 공하다면 역시 이것도 진실인데 어찌하여 진실 된 것이 없다고 하는 가?
【답】 만일 온갖 법이 공하다면 가령 법이 있다 해도 벌써 온갖 법 안에 들어가서 타파되었다. 만일 법이 없다면 따지지 말 것이다.
【문】 만일 일체법공(一切法空)이 진실이라면 부처님은 3장(藏) 가운데에서 무엇 때문에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는 법을 많이 말씀하셨는가?
마치 경48)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곧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을 위하여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는 법을 설해 주리라.
무엇이 제일의공인가?
눈[眼]이 생기되 온 데도 없으며, 없어지되 또한 가는 데도 없으며,
다만 업(業)이 있고 업의 과보가 있을 뿐이며, 짓는 이[作者]도 얻을 수 없나니,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안에서 만일 생겨나되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고 멸하되 역시 가는 곳도 없다 한다면, 이것은 항상 있는 것이고,
항상 있는 법이면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상(無常)한 것이며,
단지 업과 업의 과보가 있을 뿐 짓는 이를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성문의 법 중의 제일의공인데 어떻게 일체법공이라 하는가?
【답】 나[我] 이것이 온갖 번뇌의 근본이다.
먼저 5중(衆)에 집착하여 나를 삼고 그런 뒤에는 바깥 물건에 집착하여 내 것[我所]으로 삼는다.
내 것에 속박되기 때문에 탐욕과 성을 내고, 탐욕과 성을 내는 인연 때문에 모든 업을 일으킨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짓는 이가 없다면 온갖 법 안의 나를 타파한 것이다.
만일 눈이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고 멸하되 역시 가는 곳도 없다 한다면 눈은 무상하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만일 무상하다면 그것은 곧 괴로운 것이고, 괴로우면 곧 나와 내 것이 없으며,
나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온갖 법 가운데서 마음에 집착함이 없고,
마음에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곧 번뇌[結使]가 생기지 않는다.
번뇌가 생기지 않거늘 어째서 공함을 말하겠는가.
이 때문에 3장(藏) 가운데에서는,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 함을 많이 말씀하시면서,
온갖 법이 공하다는 것은 많이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 중생은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 함을 듣는다 하더라도, 모든 법에 대하여 희론하기에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법의 공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나가 없으면 또한 내 것도 없나니, 만일 나가 없고 내 것이 없다면 이것은 곧 공의 이치에 들어가게 된다.
【문】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업이 있고 과보가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만일 업이 있고 과보가 있다면 그것은 곧 공한 것이 아니다.
【답】 부처님께서 설법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신(神)이 영원하다고 고집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짓는 이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단절되었다고 고집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업이 있고 업의 과보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만일 사람이,
“짓는 이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
점차로 아주 없다는 소견 안에 떨어지게 되면, 그를 위해서도,
“업이 있고 업의 과보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5중(衆)은 업을 일으키면서도 뒷세상에까지 이르지 않거니와,
이 5중의 인연(因緣)은 5중을 내면서 업의 과보를 받으며 상속하기 때문에,
“업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와도 같나니, 몸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인연이 상속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약을 먹으면 아이의 병이 낫게 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아서 금세와 후생의 5중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죄와 복의 업의 인연은 상속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5중의 인연으로부터 뒷세상의 5중의 과보를 받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법의 모양을 구하면서 하나의 법에 대해 있다ㆍ없다ㆍ항상하다ㆍ무상하다는 등으로 집착한다.
법에 집착함으로써 자기의 법에는 애착을 내고 다른 이의 법에는 성을 내면서 악업을 일으키므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법은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하면 법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애착하게 되는 법에 번뇌[結使]를 내기 때문이다.
번뇌를 내게 되는 이것이 곧 무명(無明)의 인연이다.
만일 무명이 생긴다면 어떻게 그것이 진실이겠는가. 이것이 법공(法空)이다.
또 중생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세간에 집착하는 이이고,
둘째는 출세간(出世間)을 구하는 이이다.
출세간을 구하는 이에게는 상ㆍ중ㆍ하가 있다.
상이라 함은 영리한 근기[利根]로써 큰 마음을 내어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이이고,
중이라 함은 증간의 근기[中根]로써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이이며,
하라 함은 둔한 근기[鈍根]로써 성문의 도를 구하는 이이다.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이를 위해서는 6바라밀과 법의 공함을 설명하고,
벽지불을 구하는 이를 위해서는 12인연(因緣)과 혼자 수행하는 법을 설명하며,
성문을 구하는 이를 위해서는 중생의 공[衆生空]함과 4제의 법을 설명하게 된다.
성문은 생사(生死)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므로 중생의 공함과 4제의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들어도 모든 법에 대하여 희론을 하지 않나니,
마치 포위된 가운데서 어떤 사슴이 독화살을 맞고는 오로지 그곳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면서 다시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벽지불은 비록 늙고 병들고 죽음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조금은 매우 깊은 인연을 관찰하고 또한 조금은 중생을 제도하게 되나니,
마치 무소가 포위된 가운데에 있으면서 비록 독화살을 맞았다 하더라도 아직도 그의 새끼를 돌보면서 사랑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비록 늙고 병들고 죽음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고 궁구하여 다하면서 12인연에 깊이 들어가며, 법의 공함을 통달하고 한량없는 법 성품에 들어간다.
비유하건대 마치 흰 향상[白香象]이 사냥꾼의 포위 안에 있으면서 비록 쏜 화살에 맞았다 하더라도 사냥꾼을 돌아보며 마음에 두려워함이 없으면서 자신에게 딸린 무리들을 거느리고 편안히 걸어서 떠나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3장 가운데서 법공(法空)을 많이 말하지 않았다.
혹 어떤 근기가 영리한 범지(梵志)는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하면서 늙고 병들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갖가지의 법의 모양에 집착하기도 하므로 이들을 위한 까닭에 법공을 설명하나니,
이른바 선니(先尼)49) 범지는 5중(衆)이 곧 진실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또한 5중을 여의고서 그것이 진실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또 억지를 써가며 말하는 어떤 범지에게 부처님은 대답하시되 “나의 법 안에서는 있다,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늘 너는 무엇 때문에 논하는 것이더냐? 있다, 없다는 것은 바로 희론의 법이며 번뇌[結使]가 생기는 곳이다”50)고 하셨다.
그리고 『잡아함(雜阿含)』 중의 『대공경(大空經)』51)에서는 중생공(衆生空)과 법공(法空)의 두 가지 공을 말씀하셨고,
『나타경(羅陀經)』52) 안에서는,
“물질[色衆]은 부서지고 분산되어서 아무것도 없게 된다” 함을 말씀하셨으며,
『벌유경(筏喩經)』53) 안에서는,
“법조차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고 말씀하셨고,
『바라연경(波羅延經)』54)과 『이중경(利衆經)』55) 안에서는,
“지혜로운 이는 온갖 법에서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만일 법을 받아들이거나 집착하면 희론이 생기지만, 만일 의지한 바가 없으면 논할 바도 없다”고 하셨다.
모든 도를 얻은 성인들은 모든 법에서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나니. 만일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없으면 온갖 소견을 여의게 된다.
이와 같이 3장 가운데 곳곳에서 법공(法空)을 말씀하셨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을 일체법공이라고 한다.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衆)ㆍ계(界)ㆍ입(入) 가운데서 나라는 법과 항상하다는 법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불가득이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인연 가운데서 법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은 마치 다섯 손가락 가운데서 주먹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법과 인연은 마침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하는 것인가? 지혜의 힘[智力]이 적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인가? 진실로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인가?
【답】 모든 법은 진실로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지혜의 힘이 적어서가 아니다.
【문】 만일 그렇다면 필경공(畢竟空)이나 자상공(自相空)과도 다름이 없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불가득공을 말하는가?
【답】 만일 사람이 위에서 말한 모든 공에서 아무것도 없다 함을 들으면 마음에 두려움을 품으면서 의심을 낼 것이므로 이제는 그 공이 되는 까닭을 말하고,
그것을 구하고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을 말해 주어 이런 의심과 두려움을 끊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불가득공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나는 처음 발심해서부터 부처를 이루기까지, 그리고 시방의 부처님은 모든 법 가운데서 진실을 구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불가득공이라 한다.
【문】 어떤 일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인가?
【답】 온갖 법과 무여열반(無餘涅槃)까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이 불가득공을 얻으면 3독(毒)ㆍ4류(流)ㆍ4박(縛)ㆍ5개(蓋)ㆍ6애(愛)ㆍ7사(使)ㆍ8사(邪)56)ㆍ9결(結)57)ㆍ10악(惡) 등의 모든 악하고 더러운 번뇌를 얻지 않게 되며 도무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불가득공이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이 불가득공을 수행하면 어떠한 법의 이익을 얻는가?
【답】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얻고 4사문과(沙門果)ㆍ5근(根)ㆍ5무학중(無學衆)ㆍ6사법(捨法)ㆍ7각분(覺分)ㆍ8성도분(聖道分)ㆍ9차제정(次第定)ㆍ10무학법(無學法)을 얻는다.
이와 같은 것들을 얻는 것은 바로 성문의 법이며, 만일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곧 6바라밀과 10지(地)의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추게 된다.
【문】 위에서는 온갖 법과 열반까지도 얻을 수 없다고 말했거늘 이제는 무엇 때문에 계율ㆍ선정ㆍ지혜와 10무학법까지를 얻는다고 하는가?
【답】 이 법은 비록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불가득공을 돕기 때문에 역시 얻을 수 없다[不可得]고 한다.
또 받아들임도 없고 집착함도 없기 때문에 이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무위(無爲)의 법이 되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하며,
성제(聖諦)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하고,
제일의(第一義)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성인은 비록 모든 공덕을 얻더라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는 까닭에 얻었다고 여기지 않지만 범부들은 크게 얻는다고 여긴다.
이것은 마치 사자(師子)가 비록 짓는 일[所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은 특별하게 생각지 않음에도 다른 중생들이 보면 희유(希有)하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이치를 불가득공이라고 한다.
무법공(無法空)과 유법공(有法空)과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라 했는데,
무법공이란 어떤 사람은,
“무법(無法)은 법이 이미 소멸된 것을 말하고, 이 소멸된 법까지도 없기 때문에 무법공이라 한다”고 말한다.
유법공은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있는 법[有法]이 없고, 이 있는 법까지도 없기 때문에 유법공이라 한다.
무법유법공은 무법유법의 모양을 취하여도 얻을 수 없나니, 이것이 무법유법공이다.
또 없는 법과 있는 법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에 무법유법공이다.
또 수행하는 이가 모든 법의 생기고 소멸함을 관하면서 문이 있고,
문이 없을 때에 생기는 문[生門]에서는 기쁨이 생기게 되고,
소멸하는 문[滅門]에서는 근심이 생기게 되지만,
수행하는 이가 생기는 법[生法]의 공함을 관찰하면 곧 기뻐하던 마음이 소멸하게 되고,
소멸하는 법의 공함을 관찰하면 곧 근심하던 마음이 소멸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생함으로도 얻는 바가 없고 소멸함으로도 잃는 바가 없다면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법유법공이라 한다.
또 18공(空) 가운데서 처음의 세 가지 공은 온갖 법을 깨뜨리고 나중의 세 가지 공도 역시 온갖 법을 깨뜨린다.
곧 유법공은 온갖 법이 생길 때와 머무르는 때를 깨뜨리고,
무법공은 온갖 법이 소멸할 때를 깨뜨리며,
무법유법공은 생기고 소멸하는 것을 한꺼번에 같이 깨뜨린다.
또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와 미래의 법이 공함을 바로 무법공이라 하고,
현재와 무위의 법이 공함을 바로 유법공이라 한다.
왜냐하면 과거의 법은 소멸되고 멸하여서 없는 데로 돌아가며,
미래의 법은 인연이 아직 화합하지 못해 아직 생겨나지 못하고 아직 있지 못하고 아직 나오지 못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에 무법(無法)이라 하며,
현재의 법 및 무위의 법을 관찰해 알건대 현재에 존재한다면 이것을 유법(有法)이라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공하기 때문에 무법유법공이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위의 법은 나고[生] 머무르고[住] 소멸됨이 없으니, 이것을 무법이라 한다.
유위의 법은 나고 머무르고 소멸하니, 이것을 유법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공함을 무법유법공이라 한다”고 한다.
이것이 “보살은 내공(內空)에서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이르기까지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25)
범어로는 adhyātmaśūnyatā.
26)
범어로는 bahirdhāśūnyatā.
27)
범어로는 adhyātmabahirdhāśūnyatā.
28)
곧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이다.
29)
문맥상은 ‘자신이 도둑질을 한 것을 두려워해’라고 해야 할 듯하다.
30)
범어로는 śūnyatā-śūnyatā.
31)
범어로는 śūnyatā-śūnyatā-samādhi.
32)
범어로는 mahāśūnyatā.
33)
범어로는 Mahāśūnyatā-sūtra.
34)
범어로는 paramārthaśūnyatā.
35)
범어로는 atyantaśūnyatā.
36)
범어로는 Saptasūryopamāsūtra.
37)
범어로는 Kolopamasūtra.
38)
범어로는 anagraśūnyatā.
39)
범어로는 avakāraśūnyatā.
40)
곧 미진(微塵)에 관한 이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41)
정(情)이란 6근(根, indriya)을 말한다. 따라서 나머지 정식(情識)이란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이다.
42)
범어로는 Rādha.
43)
범어로는 Kātyāyanasūtra.
44)
범어로는 prakrṛtiśūnyatā.
45)
Samṛddhisūtra의 교설을 가리킨다.
46)
범어로는 Daśabalasūtra.
47)
범어로는 apratisaṃkhyānirodha.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3무위(無爲) 가운데 하나로,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라고도 한다. 법이 생겨날 만한 대상을 결여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지혜로써 얻은 멸(滅)이 아니기 때문에 비지(非智) 혹은 비택멸(非擇滅)이라 하는 것이다.
48)
곧 Paramārthaśūnyatāsūtra를 가리킨다.
49)
범어로는 Śreṇika.
50)
Dīrghanakhasūtra에서 설해지고 있는 내용이다.
51)
범어로는 Mahāśūnyatā-sūtra.
52)
범어로는 Rādhasūtra.
53)
범어로는 Kolopamasūtra.
54)
범어로는 Pārāyaṇasūtra.
55)
범어로는 Arthavargīyāṇi sūtrāṇi.
56)
사(邪)란 범어로는 mithyātva. 곧 ‘허망한 것,’ ‘진실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8사(邪)란 8정도와 대비되는 것으로 mithyādṛṣṭiㆍmithyāsaṃkalpaㆍmithyā-vācㆍmithyākarmāntaㆍmithyājīvaㆍmithyāvyāyāmaㆍ mithyāsmṛtiㆍmithyāsamādhi 등이다.
57)
결(結)이란 범어로는 saṃyojana. 곧 ‘결박’을 의미한다. 아홉 가지란, anun- ayaㆍpratighaㆍmānaㆍavidyāㆍdṛṣṭiㆍparāmarśaㆍvicikitsāㆍīrṣyāㆍmāt-sarya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