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당집 제18권[1]
[조주 화상] 趙州
남전南泉의 법을 이었고, 북지北地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전심全諗이며, 청사靑社의 치구緇丘 사람이다. 어릴 적에 고향의 용흥사龍興寺에서 출가하여 숭산嵩山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경이나 율에는 취미가 없어 총림을 두루 돌다가 한 번 남전에 온 뒤로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으니, 거룩한 법연에 왔는데, 어찌 깨달음이 없었겠는가?
선사가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이 말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다.”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나아가려 하면 어긋나느니라.”
“나아가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그것이 도인 줄 압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나니, 안다면 허망한 깨달음이요, 모른다면 무기無記이다. 만일 나아가지 않는 도를 참으로 통달하면 마치 허공이 넓은 듯 트인 듯 되리니, 그 어찌 옳고 그름을 따지리오.”
선사가 이 말에 현현한 진리를 활짝 깨달아 마음이 보름달같이 밝아졌다. 인연에 따르고 성품에 맡기어 인생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괴나리봇짐과 지팡이를 벗 삼아 천하를 두루 돌았다.
선사가 어떤 좌주座主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가?”
좌주가 대답했다.
“『유마경維摩經』을 강합니다.”
“유마에게도 할아버지가 있는가?”
“있습니다.”
“누가 유마의 할아버지인가?”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할아버지라면 어째서 손자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가?”
좌주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학인이 부처를 이루고자 할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마음의 힘을 허비하는 것이니라.”
“마음의 힘을 허비하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부처가 되느니라.”
“밤에는 도솔천에 오르고 낮에는 염부제閻浮提에 내리는데, 마니주摩尼珠는 어찌하여 나타나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가?”
스님이 다시 물으니,
선사가 대답했다.
“듣지 못했는가?
‘비바시불毘婆尸佛 때부터 일찍이 유심히 살피었건만 지금까지도 묘함을 얻지 못했다’ 하였느니라.”
어떤 스님이 하직을 고하니, 선사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남방으로 가렵니다.”
선사가 말했다.
“3천 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기뻐하지 말라.”
스님이 말했다.
“학인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버들 솜, 버들 솜이니라.”
선사가 제1좌第一座에게 물었다.
“방 안에 조부祖父가 있는가?”
“있습니다.”
“불러다가 노승의 발을 씻게 하라.”
선사가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보였다.
“여기는 굴 안의 사자도 있고, 굴 밖의 사자도 있지만 오직 사자 새끼만은 없구나.”
이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손가락을 두서너 번 튀기니,
선사가 물었다.
“왜 그러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사자 새끼입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내가 사자 새끼라고 말한 것도 벌써 어긋난 것이었는데, 그대가 다시 발길질을 하여 무엇 하려 하는가?”
어떤 이가 물었다.
“이렇게 온 사람도 스님께서 제접해 주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제접하느니라.”
“이렇게 오지 않는 사람도 제접해 주십니까?”
“제접하느니라.”
“이렇게 오는 이는 제접하신다 해도, 이렇게 오지 않는 이야 어떻게 제접하시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그만두어라. 더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묘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어떤 것이 평상심平常心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호랑이와 살쾡이니라.”
“교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집 문을 드나들지 않느니라.”
“그러시면 그 사람을 너무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매우 좋은 평상심이로구나.”
대왕大王이 와서 선사에게 절을 하는데, 선사가 평상에서 내리지 않자,
시자가 물었다.
“대왕이 왔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땅에 내려서지 않으셨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그대들은 모르는가?
상등인上等人이 오면 승상繩床 위에서 제접하고, 중등인中等人이 오면 승상을 내려서 제접하고, 하등인下等人이 오면 3문門 밖에서 영접하느니라.”
선사가 어떤 좌주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무슨 일에 힘썼는가?”
“『열반경涅槃經』을 강講하였습니다.”
선사가 다시 물었다.
“내가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는가?”
“예, 됩니다.”
그러자 선사가 다리를 뻗어 허공을 차고는 입으로 후하고 분 뒤에 물었다.
“이런 것도 『열반경』의 도리인가?”
“그렇습니다.”
이에 선사가 다그쳤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5백 역사力士가 똘똘 뭉치는 이치니라.”
선사가 시중하여 말했다.
“내가 30년 전, 남방에 있을 때 화롯가에서 무빈주화無貧主話를 들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구나.”
어떤 사람이 설봉雪峰에게 이 일을 들어 물었다.
“조주의 무빈주화란 어떤 것입니까?”
이에 설봉이 그를 걷어차서 쓰러뜨렸다.
선사가 어떤 노숙老宿에게 갔더니, 노숙이 말했다.
“노대인老大人께서는 어찌하여 머물 자리를 찾지 않으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어디가 내가 살 곳입니까?”
노숙이 말했다.
“노대인은 살 곳도 알지 못하시는군요.”
이에 선사가 말했다.
“30년 동안 말타기를 배웠는데, 오늘 나귀에게 채였도다.”
어떤 이가 물었다.
“교敎를 여의고 스님께서 결택해 주십시오.”
선사가 대답했다.
“그러한 사람이라면 되겠다.”
스님이 절을 하자마자, 선사가 말했다.
“좋은 물음이다, 좋은 물음이다.”
스님이 다시 말했다.
“화상께 여쭈옵니다.”
선사가 대답했다.
“오늘은 대답을 않겠다.”
어떤 이가 물었다.
“맑고 맑아 티가 끊길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이처럼 나그네 노릇이나 하는 놈은 붙이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에게 말하지 않겠노라.”
“어째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그것이 나의 가풍이니라.”
“어찌하여야 국왕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염불을 해야 하느니라.”
스님이 다시 말했다.
“거리의 비렁뱅이도 염불을 합니다.”
선사가 동전 한 닢을 주었다.
“어떤 것이 본분의 일입니까?”
선사가 그 학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그대 본분의 일이니라.”
“어떤 것이 화상 본분의 일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이것이 나의 본분의 일이니라.”
“어떤 것이 부처님께서 위로 향하는 일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내가 그대의 다리 밑에 있는 것이니라.”
“스님께서 어찌하여 학인의 다리 밑에 계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부처님의 위로 향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어떤 것이 외딴 방 안의 사람입니까?”
선사가 손을 벌리면서 말했다.
“다염전(茶鹽錢:용돈)이나 보시해다오.”
어떤 사람이 운거雲居에게 이 일을 들어서 물었다.
“조주가 그렇게 말한 뜻이 무엇입니까?”
운거가 말했다.
“80세의 노인이 과거장[場屋]에서 나오느니라.”
“잣나무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언제 성불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지면 성불하느니라.”
“허공이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잣나무가 성불하기만 하면 허공이 땅에 떨어진다.”
새로 온 스님이 자리를 펴자,
선사가 물었다.
“어디서 떠나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방향이 없습니다.”
선사가 일어나 그 스님의 등 뒤에 가서 서니, 스님이 방석을 잡고 일어서자, 선사가 말했다.
“퍽이나 방향이 없겠다.”
어떤 스님이 하직을 고하니,
선사가 물었다.
“외지에서 어떤 사람이,
‘조주를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화상을 뵈었다고 하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노승은 한 마리의 나귀 같은데, 그대는 어떻게 보았는가?”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선사가 새로 온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요즘 어디서 떠났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최근 남방南方에서 떠났습니다.”
“누구와 동행을 하였는가?”
“짐승과 동행했습니다.”
“멀쩡한 중이 어째서 축생들과 길동무를 했는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사가 다시 말했다.
“썩 좋은 축생이었구나.”
스님이 따져 물었다.
“어찌 긍정할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긍정할 수 없거든 길동무를 내게 돌려다오.”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어떤 스님이 절을 하자, 선사가 말했다.
“잘 가라.”
스님이 질문을 하니, 선사가 말했다.
“또 시작이구나, 또 시작이구나.”
“학인이 남방으로 가려는데, 설봉이 만약 조주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오리까?”
선사가 대답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우니라.”
“도대체 조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직접 조주에서 왔으나 말을 전하는 사람은 아니니라.”
그 스님이 설봉에 이르니 과연 그와 같이 묻자, 그 스님이 낱낱이 위와 같은 일을 들어 대답하였다. 이에 설봉이 말했다.
“군자는 천 리 밖에서도 호흡이 맞느니라.”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지 않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어떤 것이 학인의 스승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구름은 산에서 나올 기세이나 물은 개울로 흐르는 소리를 내지 않느니라.”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이것이 그대의 스승인데, 묻지 않았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말했다.
“아직도 노승보다 1백 걸음이 모자라느니라.”
“반듯하게 둥글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반듯하게 둥글지 않느니라.”
“그럴 때에는 어찌 해야 합니까?”
“반듯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느니라.”
선사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 불佛 자 하나를 나는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도 사람들을 위해 지도하십니까?”
선사가 말했다.
“부처니라, 부처니라.”
“한 등불로 1백의 등불을 켠다는데, 한 등불이란 어떤 등불입니까?”
선사가 신 한 짝을 걷어차고는 또 말했다.
“만일 작가作家라면 그렇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것이 본래의 사람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노승을 알게 된 뒤로는 그냥 이 놈이었을 뿐 다른 것이 아니었느니라.”
“그렇다면 화상과는 생소하겠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1천 생뿐만 아니라 설사 1만 생을 지나도 노승을 만나지 못할 것이니라.”
선사가 위산潙山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위산이 시자를 불러 평상을 가져오게 하자, 선사가 말했다.
“주지가 된 뒤로 아직까지 진짜 선사를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물었다.
“갑자기 만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천 균鈞의 활은 다람쥐를 위해 쏘지는 않느니라.”
어떤 사람이 물었다.
“부처님들께도 스승이 있습니까?”
“있다.”
“어떤 것이 부처님들의 스승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아미타불이시니라.”
선사가 또 말했다.
“부처님은 곧 제자니라.”
어떤 스님이 장경長慶에게 물었다.
“조주가 그렇게 아미타불이라 한 말씀은 지도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꾸짖는 말입니까?”
장경이 대답했다.
“만일 두 끝에서 알려면 끝내 조주의 뜻을 보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조주의 뜻은 무엇입니까?”
장경이 손가락을 한 번 튀겨 소리를 내었다.
진주鎭州 대왕大王이 선사의 상당을 청하니, 선사가 상당하여 곧 경을 읽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물었다.
“스님께 상당법문을 청했는데, 어째서 경을 읽으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불제자가 경을 읽는데, 안 되는 일이 있는가?”
또 언젠가 선사가 상당하여 경을 외우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경은 외워서 무엇 하시렵니까?”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경을 외운다고 했기에 다행이지 자칫하면 깜박 잊을 뻔하였도다.”
“어떤 것이 현현한 것 가운데서도 현현한 것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 스님이 아직 있었더라면 올해 70세가 되었을 것이니라.”
“어떤 것이 현현한 가운데의 한 구절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이 아니니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인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걸치지 않은 것을 몹시 좋아하는구나.”
“가섭迦葉 상인上人의 옷은 누가 입어야 제격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7불佛이 공연히 세상에 나타나시니, 도인道人이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온 적이 있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차나 마셔라.”
그리고는 다른 스님에게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온 적이 없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차나 마셔라.”
또 다른 스님에게 물었다.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화상께서 그것을 물어 무엇 하시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차나 마셔라.”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가 여기에 있은 지 몇 해나 되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5, 6년은 됩니다.”
“노승老僧을 본 적이 있는가?”
“뵈었습니다.”
“어떻게 보이던가?”
“한 마리의 당나귀 같았습니다.”
“어디서 한 마리의 당나귀 같다고 보았는가?”
“법계法界에 들어가서 뵈었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가거라. 노승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동산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니, 동산이 대신 말했다.
“물도 먹고 풀도 먹는 곳에서 뵈었습니다.”
어떤 이가 물었다.
“밝은 달이 허공에 달렸을 때에는 누구나 다 알지만 방 안의 일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출가했었기 때문에 생계를 꾸리지 않았느니라.”
학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현재를 위함이 아니십니다.”
선사가 대답했다.
“내가 내 병도 고치지 못하는데, 어찌 남의 병을 고칠 수 있으랴?”
“그러면 찾아오는 사람이 의지할 곳이 없겠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의지하려면 방석을 땅에 놓고, 의지하지 않으려면마음대로 여기저기로 헤매어라.”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오대산五臺山에서 왔습니다.”
“문수文殊를 보았는가?”
“문수는 뵙지 못했지만 한 마리의 수고우水牯牛는 보았습니다.”
“수고우가 무슨 말을 하던가?”
“예.”
“무어라 하던가?”
이에 그 스님이 대답했다.
“‘초봄이 아직 추우니, 바라옵건대 존체의 기거에 만복萬福하옵소서’ 했습니다.”
선사가 어느 날,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승이 종일토록 너와 토론을 하려 한다. 네가 만일 지면 호떡을 사서 노승에게 주고, 노승이 지면 너에게 호떡을 사 주리라.”
아이가 말했다.
“좋습니다. 스님께서 먼저 주장을 내세우십시오.”
선사가 말했다.
“비열한 것으로 종宗을 삼으면 토론해서 이기지 못한다. 노승은 한 마리의 당나귀 새끼이다.”
아이가 말했다.
“저는 당나귀의 똥입니다.”
선사가 말했다.
“그러면 네가 나에게 호떡을 사 주어야겠다.”
아이가 말했다.
“아닙니다, 화상이시여. 화상께서 저에게 호떡을 사주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스승과 제자가 다투다가 판단이 나지 않으니, 선사가 말했다.
“이런 일은 나라의 일과도 같다. 관가官家에서 판결을 내리지 못하면 시골 늙은이를 불러다가 판결하는 법이다. 여기에 3백 명 대중이 있으니, 판결할 사람이 없다고는 못하리라.
대중은 노승을 위해 주인과 손님을 가려 보라.
두 집 가운데에 어느 집에 길이 트였는가?”
대중이 아무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자, 선사가 말했다.
“모름지기 안목을 갖춘 선사라야 하겠구나.”
그런 지 3일 뒤에야 사미가 비로소 깨닫고 호떡을 사다가 화상에게 공양하였다.
예전에 어떤 관장官長이 스님을 억눌러 자기에게 절을 하라 하였는데, 마조馬祖의 제자인 낭서郞瑞 화상이 끝내 거절하자, 관장이 화가 나서 때려 죽였다.
어떤 사람이 일을 들어 선사에게 물었다.
“서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죽음을 당하였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가 목숨을 아꼈기 때문이니라.”
용화龍華가 이 일을 들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아낀 것은 어떤 목숨인가?”
그 스님이 대답이 없으니, 용화가 대신 말했다.
“나에게 성을 내지 마십시오.”
어떤 이가 물었다.
“바야흐로 그러할 때에는 어찌하여야 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생공生公은 10년 동안 죽을 지경을 참았지만, 노승은 잠시도 참을 수 없다.”
선사가 사미를 불렀다. 사미가 대답하니, 선사가 말했다.
“차를 달여 오너라.”
사미가 대답했다.
“차를 달이기는 어렵지 않으나 누가 마십니까?”
선사가 입을 움직이니, 사미가 말했다.
“차 마시기 퍽이나 힘드시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들어 장남漳南에게 물었다.
“그에게 차를 끓이게 하여 차를 얻어 마시려면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이에 보복保福이 대답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어찌하여 관음觀音을 배우지 않았던고?”
어떤 사람이 노파老婆에게 물었다.
“조주로 가는 길이 어디요?”
노파가 대답했다.
“곧장 눈에 보이는 길로 가시오.”
“서쪽으로 가라는 것입니까?”
“아니오.”
“동쪽으로 가라는 것입니까?”
“아니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선사에게 이야기하니, 선사가 말했다.
“노승이 직접 가서 감정해 보리라.”
그리고는 선사가 직접 가서 물었다.
“조주로 가는 길이 어디오?”
노파가 대답했다.
“곧장 눈에 보이는 길로 가시오.”
선사가 길을 돌아와서 그 스님에게 말했다.
“노승이 이미 감정했느니라.”
원주院主가 상당 법문을 청하니, 선사가 자리에 올라 여래범如來梵을 제창하자, 원주가 말했다.
“아까 상당 법문을 청했는데, 이것은 여래범이 아닙니까?”
선사가 말했다.
“불제자가 여래범을 제창해서 안 될 일이 있는가?”
“입을 열면 한 구절입니다. 어떤 것이 반 구절입니까?”
선사가 얼른 입을 열었다.
삼봉三峰이 선사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좌上座는 어째서 머무르지 않는가?”
선사가 도리어 물었다.
“어디에서 살면 좋겠습니까?”
삼봉이 앞산을 가리키니, 선사가 말했다.
“이는 화상께서 사실 곳입니다.”
선사가 사미沙彌의 신분으로 있을 때, 남전을 부축해서 호제胡梯에 오르다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옛사람은 세 가닥의 보배 층계[三道寶堦:煩惱道, 業道, 苦道]로써 사람을 제접했는데, 화상께서는 어떻게 제접하십니까?”
이에 남전이 그대로 사닥다리를 오르면서 말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니라.”
선사가 이 일을 사형에게 이야기하니,
사형이 물었다.
“그대는 알겠는가?”
선사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이에 사형이 말했다.
“칠, 팔, 구, 십이니라.”
남전이 동병銅甁을 가리키면서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안과 밖의 어디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안팎이 모두 깨끗합니다.”
남전이 다시 선사에게 물으니, 선사가 걷어차 버렸다.
선사가 남전에게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도는 물건 밖의 것이 아니요, 물건 역시도 밖의 것이 아니다’ 하니, 어떤 것이 물건 밖의 것이 아닌 도리입니까?”
이에 남전이 때리자, 선사가 말했다.
“잘못 때리지 마십시오.”
남전이 말했다.
“용과 뱀을 가리기는 쉬우나 납자의 눈을 속이기는 어려우니라.”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한 겨울은 몹시도 추우니라.”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운거雲居에게 이야기하고는 물었다.
“조주가 그렇게 말한 뜻이 무엇입니까?”
운거가 대답했다.
“겨울에는 있고, 여름에는 없느니라.”
그 스님이 다시 이 일을 선사에게 이야기하고는 이어 물었다.
“운거가 그렇게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
이에 선사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석교石橋의 남쪽, 조주趙州의 북쪽
그 중간에 관음觀音이 있고, 미륵彌勒도 있다.
조사께서 신발 한 짝을 남겨두신 뒤로
오늘까지 찾아도 찾지 못하네.
조당집 제18권[2]
[자호 화상] 紫胡
남전南泉의 법을 이었고, 구주衢州에서 살았으나 행장을 보지 못해 생애를 기록하지 못한다.
선사가 유철마劉鐵磨를 감정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듣건대 유철마가 있다던데, 그대가 아닌가?”
철마 비구니가 대답했다.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왼쪽으로도 돌고, 오른쪽으로도 도느니라.”
비구니가 말했다.
“전도顚倒되지 마십시오.”
이에 선사가 때렸다. 남전이 그 비구니를 대신하여 말했다.
“이러한 방편에 익숙합니다.”
선사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부터의 일은 형상이 아닌데 방편으로 이를 부처라 한다. 중하中下의 사람은 시비를 다투지만, 상등上等의 선비는 굴욕을 당한 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30년 동안 자호紫胡에서 살면서 두 끼니의 밥과 죽으로 해서 기력이 떨어졌으므로 날마다 산에 올라 서너 바퀴 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대들은 알겠는가?”
선사가 밤중에 “도적이야, 도적이야” 하고 외치니, 대중이 모두 달려왔다. 이때 선사가 승당僧堂 뒤에서 한 스님을 보자 멱살을 거머잡고 외쳤다.
“도적을 잡았다. 도적을 잡았다. 유나維那를 불러오너라.”
그 스님이 말했다.
“저는 도적이 아니라 아무개입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넌 틀림없이 도적이다. 단지 그대가 자백을 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들어 장남에게 물었다.
“자호가 도적을 잡았다고 외친 뜻이 무엇입니까?”
장남이 대답했다.
“그러한 파타(波咤:신음소리)를 긍정하여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다시 석문石門에게 물었다.
“자호가 도적을 잡은 뜻이 무엇입니까?”
석문이 대답했다.
“긍정하면 미친놈이고, 긍정하지 않으면 자호가 너를 때릴 것이니라.”
[육긍 대부] 陸亘 大夫
남전 화상의 법을 이었으며, 직접 남전의 심계心戒를 받았다.
대부가 남전에게 물었다.
“제자의 집에 한 조각의 돌이 있었는데, 밟기도 하고 앉기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다듬어서 불상佛像을 만들었는데, 여전히 앉을 수 있습니까?”
남전이 대답했다.
“되고 말고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안 되지, 안 되지요.”
이에 대해 운암雲巖이 말했다.
“앉으면 부처요, 앉지 못하면 부처가 아니다.”
동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앉지 못하면 부처요, 앉으면 부처가 아니다.”
이에 남전이 말했다.
“한 글자를 떼어다가 두 글자에 보태면 불법이 크게 퍼지는데, 떼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으니, 남전이 대신 말했다.
“지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니라.”
대부가 남전에게 대중을 위하여 설법해 주기를 청하니,
남전이 대답했다.
“노승에게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인가?”
대부가 여쭈었다.
“화상에게 어찌 방편이 없으시겠습니까?”
남전이 대답했다.
“대부는 지금 그에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말하시는 게요?”
다른 때에 대부가 남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상이시여, 매우 부사의하오니 이르는 곳마다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남전이 말했다.
“지금까지 물은 것은 모두가 대부의 분상分上에 속하는 일입니다.”
대부가 또 척투(擲投:주사위)를 들어 올리고서 남전에게 물었다.
“이렇게 해도 되지 않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으니, 이대로 믿어 버릴 때는 어떠합니까?”
남전이 척투를 들어 던지면서 말했다.
“말라빠진 해골바가지를 열여덟 방망이 때린다.”
어떤 이가 이 일을 들어 말하였다.
“말라빠진 해골을 열여덟 방망이 때린다 한 뜻이 무엇입니까?”
석상石霜이 대답했다.
“그대가 반을 말하라. 내가 반을 말하리라.”
“스님께서 전부를 말씀하십시오.”
석상이 말했다.
“그대가 두렵구나.”
어떤 스님이 이 일을 들어 장경에게 물었다.
“남전이 그렇게 말한 뜻이 무엇입니까?”
장경이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옛사람을 밝힐 일이 아니니라.”
그리고는 또 말했다.
“하나의 경품[彩:도박, 놀음]에 두 개의 주사위[塞]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