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아발다라보경 제4권
48.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과 두 가지 무아의 구경의 차별된 모습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自性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의 구경(究竟)의 차별된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은 모든 지위를 차례로 상속하면서 이 법을 분별하여 모든 불법(佛法)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불법에 들어가서는 여래께서 스스로 깨달은 지위에 이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과 두 가지 무아의 차별된 갈래의 모습이란, 이름[名]과 모습[相]과 망상(妄想)과 바른 지혜[正智]와 여여(如如)를 말한다.
만일 수행자가 수행하여 여래의 자각성취(自覺聖趣)에 들어간다면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을 벗어나고 현재법의 즐거움을 누리는 정수[現法樂正受]에 머물 것이다.
대혜야, 저 다섯 가지 법의 자성식과 두 가지 무아(無我)가 자기 마음이 나타낸 바깥 경계의 성품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망상 때문이니, 모든 성현(聖賢)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어리석은 범부에게는 망상이 생기고, 모든 성현에게는 생기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는 세속법[俗數]의 이름과 모습에 계착하여 마음이 따라 흘러서 흩어지며, 흩어지고 난 후 온갖 모습과 형상을 보므로 나와 나의 것이라는 견해에 치우치며, 묘한 물질[妙色]을 희망하고 계착한다.
계착하고 나면 무지(無知)가 덮고 가려 염착(染着)을 일으키며, 염착하고 나면 탐욕과 성냄으로 지은 업이 쌓이고, 쌓이고 나면 망상에 스스로 얽히니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과 같다.
생사의 바다와 모든 취(趣)의 광야에 떨어지는 것이 마치 우물의 도르래와 같건만, 어리석은 까닭에 환(幻)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이 자성(自性)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벗어난 줄을 알지 못하고, 온갖 진실하지 못한 망상을 일으킨다.
형상과 형상이 나타내는 것,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벗어나건만 자심(自心)의 망상으로 일으키고, 자재천(自在天)이나 시절(時節)이나 미진(微塵)이나 승묘(勝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어리석은 범부는 이름과 모습을 따라 유전(流轉)한다.
대혜야, 그 모습[相]이란 다음과 같다.
안식(眼識)이 비추는 것을 빛깔[色]이라 하고, 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으로 비추는 것을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ㆍ법(法)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를 모습[相]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망상이란 여러 가지 이름을 시설하여 모든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코끼리나 말이나 수레나 걸어 다니는 남자나 여자 등의 이름[名]과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바른 지혜[正智]란 저 이름이나 모습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지나가는 손님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모든 식은 생기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고 항상 있지도 않으니, 모든 외도나 성문이나 연각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바른 지혜가 있음으로 이름이나 모습을 세우지 않으나, 이름과 모습을 세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소견, 즉 건립과 비방을 버리고 벗어나며, 이름과 모습이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알면 이를 여여(如如)라고 한다.
대혜야, 여여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무소유(無所有)의 경계를 얻으므로 보살의 환희지(歡喜地)를 얻으며, 보살의 환희지를 얻고 나서 영원히 모든 외도의 나쁜 세계[惡趣]을 떠나 출세간의 세계에 바르게 머물고, 법상(法相)이 성숙하며, 환(幻)과 같은 모든 법을 분별하고, 법취상(法趣相)을 스스로 깨달아 모든 망령된 견해와 괴이한 모습을 여의며, 차례로 법운지(法雲地)까지 오르고 그 중간에 삼매(三昧)와 힘[力]과 자재(自在)와 신통(神通)을 열어서 편다.
여래지(如來地)를 얻고 난 뒤에는 갖가지 변화로 두루 비추어 나타내 보임으로써 중생을 성숙시키니, 마치 물에 비치는 달과 같다.
구경(究竟)에 10무진구(無盡句)를 잘 만족하고 갖가지 뜻으로 이해하는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법하며, 법신(法身)을 얻어 뜻으로 짓는 일[意所作]을 벗어난다.
이를 보살이 여여로 얻는 데에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자성이 다섯 가지 법에 들어간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각각의 자상종(自相宗)이 있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자성과 8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가 모두 다섯 가지 법에 들어간다.
대혜야, 저 이름[名]과 모습[相]은 망상자성(妄想自性)이다.
대혜야, 만약 저 망상에 의지해서 마음과 마음법이 생긴다면 이름이 동시에 생길 것이니, 마치 햇빛이 온갖 모습을 갖추었으나 각각 다르게 분별해서 가지는 것과 같다. 이를 연기자성(緣起自性)이라고 한다.
대혜야, 바른 지혜와 여여(如如)는 무너질 수 없으므로 성자성(成自性)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자기 마음이 나타내는 망상을 여덟 가지로 분별하니, 식장(識藏)과 의(意)와 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식신(識身)이다.
상(相)이란 진실하지 못한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므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두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어지면 두 가지 무아(無我)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대혜야, 이 다섯 가지 법이란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나 여래의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든 지위에 상속하는 차례이니, 모든 불법(佛法)이 다 이 속에 들어간다.
또 대혜야, 다섯 가지 법이란 모습[相]과 이름[名]과 망상(妄想)과 여여(如如)와 바른 지혜[正智]이다.
모습이란 처소(處所)와 형상(形相)과 색상(色像) 등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를 모습이라고 한다. 만일 저기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는데 병(甁) 등이라고 하면, 이것이 곧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을 이름이라고 한다.
여러 이름을 지어 모든 모습, 즉 병(甁) 등과 마음[心]과 마음법[心法] 등을 현시하면, 이것을 망상이라고 한다.
저 이름과 저 모습을 필경에 얻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覺]도 없고 모든 법에 전전함이 없어, 진실하지 못한 망상을 벗어나는 것을 여여라고 한다.
진실하고 결정적인 구경(究竟)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는 것, 이것이 진여(眞如)의 모습이니, 나와 모든 부처가 따라 들어가는 곳이다.
두루 중생을 위해 여실하게 연설하고, 저것을 시설하여 드러내 보여 정각에 들어가게 하며, 단절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게 하여 자각성취(自覺聖趣)를 따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외도나 성문이나 연각은 얻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를 바른 지혜라고 한다.
대혜야, 이를 다섯 가지 법이라고 하니, 세 가지 자성과 여덟 가지 식과 두 가지 무아와 모든 불법이 이 가운데 들어간다.
그러므로 대혜야, 스스로 방편을 세워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게 해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과 세 가지 자성
여덟 가지 식(識)과
두 가지 무아(無我)
이 모두가 마하연(摩訶衍)에 포함된다.
이름[名]과 모습[相]과 헛된 망상은
자성의 두 가지 모습이며
바른 지혜와 여여(如如)
이것이 바로 성취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