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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1권
19. 업인부(業因部)
[여기에는 다섯 가지 연(緣)이 있음]
19.1. 술의연(述意緣)
슬프구나, 무거운 장애에 헷갈려서 세 가지 수레[三車]를 버려두고 타지 않으며 고통의 바다에 빠져서 타서 문드러지는 데 몸을 맡기고도 피로해 하지 않으니,
마치 썩어 냄새나는 시체를 좋아하는 파리와 같고 흡사 불 속에 뛰어드는 나비와 같구나.
이것은 진설로 헷갈린 원인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선과 악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괴로움의 원인 짓기를 좋아하고 연(緣)을 띠라 업(業)을 일으켜 어려움과 고통스러움을 낱낱이 겪고 있으며 도탄(塗炭)을 갖추어 받는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태워지고 지져져서 그 고통이 그치지 않으므로 여래께서 크게 불쌍히 여기시어 차마 영원히 버리지 못하시고 그 괴로움과 즐거움의 원인을 나타내시어 중생들로 하여금 흔연히 싫어하게 하신 것이다.
19.2. 발업연(發業然)
[문] 어떤 것을 업도(業道)의 뜻이라고 말하는가?
[답]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업은 곧 자체(自體)의 모습[相]이므로 업도라고 말하고, 나머지 세 가지는 뜻과 서로 호응하는 마음이다. 또 저 업은 능히 도과(道果)를 장 지으므로 업도라고 말한다.
[문] 만일 업이 곧 도라고 하면 이것은 지옥 등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나머지 셋은 업도가 아니라고 하는가?
[답] 저 일곱 가지 업과 같이 이 세 가지는 능히 그 근본이 되기 때문에,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저 업과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업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법론(對法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모든 업의 차별에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이른바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과 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과 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과 비흑백무이숙업(非黑白無異熟業)으로서 모든 업을 잘 없애는 것이다.
흑흑이숙업이란 선(善)하지 못한 업을 말하는 것이니 물들고 더럽기 때문이요, 사랑할 수 없는 이숙이기 때문이다.
백백이숙업이란 삼계(三界)의 선업(善業)을 말하는 것이니 물들고 더럽지 않기 때문이요 사랑할 만한 이숙(異熟)이기 때문이다.
흑백흑백이숙업이란 욕계(欲界)의 잡업(雜業)을 말하는 것으로서 선과 불선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비흑백무이숙업으로서 모든 업을 잘 없앤다는 것은 방편도(方便道)와 무간도(無間道) 가운데 모든 무루업(無漏業)이니 방편도와 무간도로서 이것은 저 모든 업을 대치(對治)하기 때문이다.
비흑(非黑)이란 번뇌의 때[垢]를 여의었기 때문이요,
백(白)이란 한결같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무이숙(無異熟)이란 나고 죽음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요,
모든 업을 잘 없앤다는 것은 무루(無漏)의 업으로 말미암아 흑(黑) 등 세 가지 유루(有漏)의 업과 이숙의 습기(習氣)를 아주 뽑아 없애기 때문이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또 선남자야, 만약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업연(業緣)을 알지 못하면 한량없는 세상에서 나고 죽음의 바다에 흘러 전전할 것이다.
그는 비록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태어나서 팔만 겁을 삼더라도 그 복이 다하면 다시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또 선남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의 모화(模畫)는 뜻보다 더 나은 것이 없나니, 뜻은 번뇌를 그리고 번뇌는 업(業)을 그리며 업은 몸을 그리기 때문이다.’”
또 『아비담잡심업품(阿毘曇雜心業品)』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업은 능히 세상을 장엄하게 장식하여
나아가는 곳이 각기 다르고 사는 곳이 저마다 다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그 업을 생각하여
세상을 여의는 해탈법을 구하도록 하라.
몸과 입과 뜻의 업이 모여
존재하고 존재하는 가운데에 있다.
저 업이 모든 행(行)이 되어
갖가지 몸을 다 장엄하게 꾸민다.
몸의 업은 두 가지임을 알아야 하니
이른바 작(作)과 무작(無作)이요
입으로 짓는 업도 또한 이와 같고
뜻으로 짓는 업은 생각[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미륵보살소문경론(彌勒菩薩所聞經論)』에서 말하였다.
“이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도의 일체 악한 법은 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일어난다. 세 가지(毒)에 의지하여 살생을 일으키는 자에게 있어서
만일 그가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라면 혹 가죽과 고기ㆍ돈ㆍ재물을 위한 까닭에 생명을 끊은 것이니,
이것을 탐욕에 의지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
만약 성내는 마음에 의해 일으켰다면 혹은 성내는 마음 때문에 원수의 집안 등을 살해한 것이니
이것은 성내는 마음에 의해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며,
만약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라면
혹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뱀이나 전갈 따위를 죽여서 그 중생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생기게 했기 때문에 비록 죽였지만 죄가 없다’고 하거나
혹은 말하기를
‘바라사(波羅斯) 등이 말하되
〈늙은 부모와 깊은 병에 걸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의 과보가 없다〉고 말하였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일으킨 것이다.
가령 삼독(三毒)에 의하여 도둑질을 한 사람이 만약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했다면 혹은 자신(自身)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혹은 음식 따위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니,
이것을 탐욕에 의하여 도둑질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할 마음을 일으켰다면 혹은 성내는 사람의 주변에 있는 것과 성내는 사람이 아끼는 그 물건 따위를 훔친 것이나,
이것을 성냄에 의하여 도둑질할 마음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할 마음을 일으켰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바라문(婆羅門)이 말한 것과 같다.
‘일체 대지(大地)의 모든 물건은 오직 다 나만의 소유이다. 왜냐 하면 저 국왕이 전에 나에게 보시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족성(族姓)에게 내가 수용(受用)했던 것을 빼앗겼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취하는 것은 바로 내 물건이므로 도둑질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세 가지 독(毒)에 의하여 삿되게 음행을 지은 사람이 만약 탐하는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켰다면 혹은 중생에 대하여 탐염(貪染)의 마음을 일으켜 여실(如實)하게 수행하지 못하는 등류를 바로
탐욕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며,
만약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켰다면 혹은 다른 사람이 지키는 생활의 바탕에 의하여 성내는 마음을 내어 삿된 음행을 저지르거나 혹은 원수의 아내나 첩(妾)을 간음하며, 혹은 원수 집안에서 사량하는 사람 등을 간음하면
이것을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켰다고 말하며,
만약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 이로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유하면 마치 절구통ㆍ잘 핀 꽃ㆍ잘 익은 과일ㆍ음식ㆍ강물과 도로(道路) 따위와 같은 것이어서 여인과 음행을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혹은 파라사(波羅斯) 따위나 사음모(邪婬母) 등과 같다고 하면,
이것을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한다.
또 세 가지 독에 의하여 거짓말을 한 사람도[이 세 가지도 알 만하다] 이와 같다.
이간질ㆍ악한 말ㆍ기어(綺語)도 모두 이와 같다.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란 탐결(貪結 : 탐욕의 번뇌)에 의하여 생겨나서 차례로 두 마음이 앞에 나타나나니,
이와 같은 것을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결(瞋結 : 성냄의 번뇌)에 의하여 생겨난다는 것은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치결(癡結 : 어리석음의 번뇌)에 의하여 생겨난다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탐욕과 성냄에서와 같이 삿된 견해에 있어서도 다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업도(業道) 중에서 어떤 것이 앞의 권속이며 어떤 것이 곧 뒤의 권속인 가?
[답] 만약 살생(殺生)의 방편을 일으켜 마치 기르던 양을 잡는 백정처럼
혹 어떤 물건을 주고 양을 사서 도살장으로 끌고 와서 처음에 칼로 한 번 내리치거나,
혹은 칼로 두세 번 내리쳐도 그 양의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 동안에 있었던 악업(惡業)을 앞의 권속이라 말하고,
따라서 어떤 칼로 내리쳤던 간에 그 목숨을 끊었으면 곧 그 생각을 할 때에 있었던 유작(有作)의 업과 무작(無作)의 업이 있을 경우
이런 따위를 다 근본업도(根本業道)라고 말한다.
그 뒤에 지은 바 몸으로 실천하여 지은 업을 바로 살생에 대하여 뒤의 권속업(眷屬業)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기어(綺語)에 이르기까지도 다 이와 같다.
그 밖에 탐냄ㆍ성냄ㆍ삿된 견해의 업 가운데에는 앞의 권속이 없나니, 처음 마음을 일으키는 그 즉시에 근본업도가 성취되기 때문이다.
또 몸과 입과 뜻의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도(業道)에는 모두 디 앞과 뒤의 권속이 있다.
어떤 의미인가?
마치 사람이 마음을 일으켜서 이 중생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가 그로 인하여 다시 다른 중생의 목숨을 끊는 것과 같으며,
마치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중생을 살해(殺害)하면서 곧 남의 물건을 빼앗으며,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가 또 그 아내를 간음하며,
이와 같은 마음을 내다가 도리어 그의 아내를 시켜서 스스로 남편을 죽이게 하거나,
또 갖가지로 싸우고 혼란스런 말로써 그의 친속(親屬)들의 화합을 깨뜨리며
때 없이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그 물건 가운데에 탐내는 마음을 내어 그 사람에 대하여 다시 성내는 마음을 내고,
그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까닭에 이와 같이 삿된 견해를 내며,
삿된 견해를 증장(增長) 시켜 그의 목숨을 끊으며, 또한 그의 아내와 아들ㆍ딸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차례로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도를 구족(具足)하나니,
이와 같은 따위의 업을 앞의 권속이라고 말한다.
온갖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도도 모두 다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착한 업도를 여의면 방편(方便)이 아니요 착한 업도를 수행하면 그것이 바로 방편인 것이다. 근본을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요 또한 방편을 아주 여의기 때문이다.
방편이라고 말한 것은 마치 저 사미(沙彌)가 구족계[大戒]을 받으려고 하여 장차 계율 도량에 나아가 여러 승려들의 발에 예배하고 곧 화상에게 청하여 세 가지 옷을 받아 지니고 처음 한 번 아뢰고 두 번 아뢰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것은 다 앞의 권속이라고 말하고, 세 번째 아룀으로부터 갈마(羯磨)를 마칠 때 까지 그 사이에 일어나는 작위의 업(業)과 그 생각을 할 때의 무작위(無作爲)의 업 따위는 모두 근본업도라고 한다.
다음에는 네 가지 의지함에 대하여 설명하고 나아가 받은 바 착한 행위를 버리지 않는 데에 이르기까지의 몸과 입이 지은 업장과 무작위의 업인 이와 같은 따위는 다 뒤의 권속이라고 말한다.
[自述] 이상에서 비록 경륜(經綸)을 인용하여 업(業)의 원인이 되는 여러 가지를 밝혔으나 때가 이르러 죄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경중(輕重)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을 인용하여 업이 같지 않음을 분별하리라.
여기에 따로 네 가지 예(例)가 있으니
첫째는 사물을 가지고 뜻을 대립시키는 것으로 여기에 네 가지가 있고,
둘째는 가볍고 무거움이 같지 않음에 여덟 가지 기 있으며,
셋째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같지 않은 것에 또 여덟 가지가 있고,
넷째는 『살바다론(薩婆多論)』에 의하면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이 같지 않음에 또 여덟 가지가 있다. 때에 임박하여 죄를 판단할 적에 모두 다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첫 번째는 대상물질은 중하고 뜻은 가벼우며 어떤 것은 대상물질은 가볍고 뜻은 중하고 어떤 것은 대상물질도 중하고 뜻도 중하며 어떤 것은 대상물질도 가볍고 뜻도 가벼운 것이다.
첫째로 대상물질은 중하고 뜻은 가볍다고 한 것은 악한 마음 없이 부모를 죽인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요,
둘째로 대상물질은 가볍고 뜻은 중하다고 한 것은 마치 악한 마음으로 축생(畜生)을 죽인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며,
셋째로 대상물절도 중하고 뜻도 중하다고 한 것은 마치 지극히 악한 마음으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죽인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요,
넷째로 대상물질도 가볍고 뜻도 가볍다고 한 것은 마치 경솔한 마음으로 축생을 죽인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는 이와 같은 악업에도 또한 여덟 가지 경중(輕重)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어떤 것이 그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방편(方便)은 중함이 있는데 근본과 이루어진 것은 가벼운 것이요,
둘째는 근본은 중함이 있는데 방편과 이루어진 것은 가벼운 것이며,
셋째는 이루어진 것은 중함이 있는데 방편과 근본은 가벼운 것이요,
넷째는 방편과 근본은 중함이 있는데 이루어진 것은 가벼운 것이며,
다섯째는 방편과 이루어진 것은 중함이 있는데 근본은 가벼운 것이요,
여섯째는 근본과 이루어짐은 중함이 있는데 방편은 가벼운 것이며,
일곱째는 방편과 근본과 이루어짐이 다 중한 것이요,
여덟째는 방편과 근본과 이루어짐이 다 가벼운 것이다.
사물은 한 가지이건만 마음의 힘 때문에 가볍고 중한 과(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마치 열 가지 선한 업도(業道)와 같아서 거기에도 세 기지 일이 있다.
첫째는 방편이요, 둘째는 근본이며, 셋째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모(父母)ㆍ사장(師長)ㆍ화상(和尙)과 덕이 있는 사람에게 부지런히 예배하고 공양할 때 먼저 마음으로 문안하고 그 말이 부드러우면 이것을 방편이라고 말하고,
만약 이렇게 하기를 마치고 능히 생각한 마음을 잘 닦고 기뻐하며 후회하지 않으면 이것을 이루어진 것[成己]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할 때 오로지 거기에만 집착하면 이것을 근본이라고 한다.
열 가지 선(善)도 이미 그렇지만 열 가지 악(惡)도 또한 그러하다.
세 번째는 열 가지 업도에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상ㆍ중ㆍ하이다.
혹은 방편이 최상이고 근본이 중간이며 이루어짐이 가장 아래인 것이요,
혹은 방편이 중간이고 근본이 최상이며 이루어짐이 최하인 것이며,
혹은 방편이 최하이고 근본이 최상이며 이루어짐이 중간인 것이다.
[이것이 서로 이리저리 얽혀 있어 여덟 가지가 되나니, 앞의 것과 견주어 보면 알 수 있다.]
네 번째는 『살바다론(薩婆多論)』에 의하면 방편ㆍ근본ㆍ성취와 유심(有心)ㆍ무심(無心)이 짓는 것이다.
[서로 이리저리 얽혀 여덟 가지가 되는데 앞의 것과 견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래로부터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에 의지하므로 업을 일으키는 데 다소의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지옥에 나아가 착하지 못한 것을 일으키는 것을 밝힌다.
『비담론(昆曇論)』에 의하면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다섯 가지 업도가 있다.
첫째는 악한 말[惡口]이요, 둘째는 기어(綺語)이며, 셋째는 탐냄이요, 넷째는 성냄이며, 다섯째는 삿된 견해이다.
그 가운데 악한 말ㆍ기어ㆍ성냄은 그가 고통을 받을 때에 세 가지 현행(現行)하는 것이 있다.
악한 말로 옥졸(獄卒)을 꾸짖기 때문에 악한 말이 현행하나니, 곧 이 악한 말은 때에 맞지 않고 법을 어기고 바르지 못하면 즉시 기어에 떨어진다.
그 때 일어나는 분노(忿怒)가 바로 이 진에(瞋恚)이다. 이 세 가지 착하지 못한 것이 지옥의 현행이다.
만약 탐욕의 업과 삿된 견해에 대하여 논하면 그것을 성취하여 마음 속에 간직하였으나 현행하지 않는 일이 있으니, 그것이 추잡하고 평범하며 번뇌를 끊지 못하기 때문에 탐욕과 삿된 견해를 성취하여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 곳의 남녀(男女)는 각각 늘 고통을 받지만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삿된 일을 행함이 없기 때문에 이 탐심의 현행이 없다.
항상 고통을 받음으로써 마음과 의식이 어둡고 둔하여 인과(因果)가 있고 없음을 추구하지 못할 따름이다. 때문에 또한 삿된 견해의 현행도 없는 것이다.
그 밖에 살생ㆍ도둑질ㆍ거짓말ㆍ이간시키는 말의 그런 곳에서는 한결같이 이런 것들이 없으므로 현행하지 않는다.
[문] 만약 지옥에 탐욕과 삿된 견해의 업도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이 이 두 가지를 성취한다고 말하는가?
만약 번뇌의 심법(心法)을 끊지 못한 이래로 비록 현행하지는 않더라도 그 성질은 항상 성취되어 있으나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지(支)의 색업(色業)과는 같지 않다.
이것은 거칠게 법을 지어야 발동(發動)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리나 짓는 곳이 없으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런 까닭에 『잡심론(雜心論)』에서 말하였다.
“지옥에서는 서로 죽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살생의 업도가 없고
재물을 받는 일이 없기 때문에 도둑질의 업도가 없으며
여인에게 집착하거나 받아들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삿된 음행의 업도도 없다.
다른 생각으로 말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도 없고,
항상 여의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으며,
고통에 핍박을 당하기 때문에 악한 말이 있고,
때에 맞지 않는 말을 하기 때문에 기어(綺語)가 있으며,
탐욕과 삿된 견해는 성취는 되나 현행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귀신과 축생(畜生)의 세계에도 열 가지 악업이 다 있지만 몸과 입의 일곱 갈래 악한 율의(律儀)는 없음을 밝힌다.
[문] 지금 축생의 세계는 말을 할 줄 모른다.
그런데 비록 음성이 있다고 해서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이 성취되는가?
[답] 그것들이 성냄을 일으킬 때에 내는 소리는 다르다.
비록 말은 하지 못한다고 해도 역시 입으로 짓는 업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였다.
“축생들의 음성(音聲)도 구업(口業)이 성취되는가?
[답] 비록 말의 분별은 없다고 하지만 마음을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그 또한 업이 된다고 말한다.
또한 열 가지 업을 다 갖추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그것은 대부분 용왕(龍王)들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사람의 의지(意志)를 분별하기 때문에 열 가지 업도를 갖춘 것이다.
그 밖의 어리석고 우둔한 축생들은 다만 몸의 업 세 가지와 뜻의 업 세 가지의 도합 여섯 가지 업만을 갖추었고 나머지 네 가지는 갖추지 않았으니, 입으로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겁초(劫初)에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축생에 의거한다면 그것은 다 열 가지 악업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인간 세계에서 죄의 행업을 일으키는 자에 대하여 말한다.
인간 세계에는 곧 네 가지 천하(天下)가 있으니, 남쪽의 염부제(閻浮提)와 동쪽의 불우체(弗于逮)와 서쪽의 구야니(拘耶尼),이 세 방향의 사람은 악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모두 열 가지 악업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은 가볍고 남쪽은 가장 무거우니, 악한 율의를 받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북쪽의 울단월(鬱單越)에 대하여 그 죄를 논하면 그 지방에는 오직 네 가지 착하지 못한 업만 있으니
첫째는 기어(綺語)요, 둘째는 탐욕이며, 셋째는 성냄이요, 넷째는 삿된 견해이다.
여기에는 노래가 있기 때문에 기어가 있고 탐욕ㆍ성냄ㆍ삿된 견해 따위는 성취되기는 하나 현행하지는 않는다.
[문] 북쪽에서는 음욕의 일을 실행하는데 어째서 삿된 음행의 업도가 없다고 말하는가?
[답] 그곳에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배필(配匹)을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록 음욕의 일이 있어도 서로 능욕하고 빼앗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삿된 음행이 없다.
[문] 이미 음욕을 실행함이 있으면 곧 탐욕이 현행한 것인데 어찌하여 다만 성취하기만 할 뿐 현행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 그들이 음욕의 탐냄을 일으키는 것은 풍속으로 규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자주 현행(現行)하더라도 성인께서 죄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이 탐욕의 마음이 일으킨 음욕만으로는 아직 죄업이 되지 않는 것이어서 고통의 과보를 끌어들이지 않거늘, 더구나 속 마음으로만 일으킨 탐욕이 어찌 저 세간 부부들이 탐하여 사랑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과 같겠는가?
[문] 북쪽의 사람들에게 이미 노래 등이 있다면 그것은 법에 맞지 않는 것이므로 곧 거짓말일 터인데 어찌하여 거짓말의 업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저 사람들은 순박하고 정직하여 간사함과 거짓을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일 마음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이 아니다.
저들에게는 일천 살의 수명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목숨을 살해하는 일이 없고,
그 곳의 옷과 음식은 그 땅에서 나는 멥쌀과 나무에서 생기는 보배 옷으로서 저절로 나오는 데다 주인이 지키거나 관장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도둑질이 없으며,
그 곳 사람들은 온화하고 유순하기 때문에 이간질하는 말이나 악한 말 따위의 업이 없다.
그러므로 『잡심론(雜心論) 에서 말하였다.
“올단월에는 네 가지 착하지 못한 업도(業道)가 있다.
수명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살생이 없고,
재물을 사랑함이 없기 때문에 도둑질이 없으며,
여인을 잡되게 사랑함이 없기 때문에 삿된 음행도 없고,
남을 속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이 없으며,
항상 화합(和合)하기 때문에 이간질이 없고, 유순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거친 말이 없다.
그라나 노래하고 찬탄함이 있기 때문에 기어(綺語)가 있다.
만약 뜻으로 짓는 업도에 대하여 논한다면 비록 성취하기는 하지만 현행하지는 않는다.”
다섯 번째는 하늘 세계에서 죄행을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이 욕계(欲界) 여섯 하늘에는 살생과 도둑질 따위가 있다.
거기에 비록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이 있기는 하지만 몸과 입으로 짓는 일곱 가지 악한 율의(律儀)는 없다.
그러므로 『잡심론』에서 말하였다.
“욕계 여섯 하늘에는 열 가지 업도가 있으나 불율의(不律儀)는 여의였다.
비록 하늘을 해치지는 않지만 다른 세계를 해치나니, 아수라를 해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또한 손과 발을 끊어도 다시 나며 만약 머리를 베어버리면 곧 죽는다. 이렇게 계속해서 마침내는 열 가지 업도가 다 있게 되며,
또한 박복한 여러 하늘들은 생활을 도울 만한 것이 부족하여 서로서로 훔치기 때문에 도둑질의 업이 있다.
혹 어떤 하늘은 자기가 받는 것은 박하다고 하면서 다른 하늘의 미녀를 간음하기 때문에 삿된 음행이 있으며, 나머지 일곱 가지 업은 글에 나타나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 가지 선의 분별에 의한다는 것은 『비담론(毘曇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저 지옥의 세계에는 오작 의지(意地)인 세 가지 선한 업도만 있다.
그러나 다만 성취하기만 하고 현행하지는 않는다. 북쪽 지방도 또한 이와 같다.
그 밖의 모두는 다 열 가지 선행을 갖추었으니 글에 나타나 있으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색계천(色界天)과 무색계천(無色界天)에 대하여 『비담론』에 의하여 논하자면 선하지 않은 업이 없다.
그 이치에 의거해 말하면 여기에도 가볍고 미미한 세 가지 업의 불선(不善)은 있으니, 이른바 그 의지(意地)에는 삿된 교만 따위가 있다.
몸과 입의 업과(業過)는 초선천(初禪天)에서와 같다.
바가범왕(婆伽梵王)이 여러 범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여기에 머물러 살아라. 나는 너희들로 하여금 늙고 죽음을 다 여의게 하리라. 그러니 너희들은 구담(瞿曇)이 있는 곳에 갈 필요가 없다.’
흑치(黑齒)비구가 그에게 가서 물었다.
‘초선삼매(初禪三昧)는 어떤 삼매에 의지하여 생겨나며 어떤 삼매에서 멸하여 없어집니까?’
범천왕이 대답하였다.
‘내가 바로 범천들 가운데서 제일 존귀하다.’
흑치비구가 말하였다.
‘나는 범왕의 높고 낮음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초선삼매는 어떤 삼매에 의해서 생겨나며 어떤 삼매에 의해서 소멸하는가를 물었을 뿐입니다.’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곧 흑치존자를 붙잡아 가지고 대중 앞으로 끌고 나와 그 존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초선삼매는 어떤 삼매로부터 생겨나고 어떤 삼매로부터 소멸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차마 범천 대중들 앞에서 나를 손상시키고 욕되게 되는가?’”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아첨하고 간사하며 착하지 못한 번뇌이다.
“부처님도 너를 해탈시킬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기어(綺語)요 악한 말이다. 상계( 上界)에는 오직 이런 아첨과 간사함만이 있어서 몸과 입의 경마한 착하지 못한 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하여 추악하게 거스리거나 손해를 보이지 않고 천상에 태어나는 자는 일찍이 선정을 닦아 욕계의 추악한 탐욕과 성냄 따위를 여의었기 때문에 그 과보를 받고 다시 선정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번뇌가 있다 해도 이것은 오직 어리석음뿐이니, 도(道)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과 교만 등을 일으켜 선행(善行)의 법을 즐겨 닦아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따위의 번뇌는 결정코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물에 손해를 끼치지도 않고 서로 어기거나 해치지도 않는다.
가령 『비담론』에 의하면 상계(上界)의 번뇌는 바로 착하지 못한 것[不善]이 아니요, 무기(無記)라고 말한다.
이 미세한 탐욕 따위는 능히 깨끗한 마음을 더럽힐 수 있는데, 아무리 이 무기의 본제가 바로 더러운 것이라 해도 과보로 생긴 색심(色心)과 괴로움ㆍ즐거움ㆍ위의(威儀) 따위와는 같지 않은 희고 깨끗한 무기이기 때문에 『아비담론(阿毘曇論)』에서는 이것을 더러워진 무기라고 말한다.
업(業)을 윤택하게 하여 태어남을 받게 하는 것이니, 만약 이 번뇌가 업을 윤택하게 하지 않는다면 업의 종자는 타버려 영원히 과보를 끌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상계의 중생들은 마땅히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나, 이것이 업을 윤택하게 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문] 상계의 번뇌가 이미 업을 윤택하게 하고 태어남을 윤택하게 하여 과보를 얻는다면 무슨 까닭에 비기(非記 : 無記)라고 하는가?
[답] 상계의 번뇌는 비록 또 업을 윤택하게는 하지만 오직 총보(總報)만을 얻어서 태어남을 받을 뿐이요, 이 의혹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의 과보를 바로 감지(感知)하지 않고 또한 괴로움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무기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계의 착하지 못한 번뇌가 감득(感得)하는 총보(總報)와 별보(別報)의 괴로움과는 같지 않다.
가령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위의 두 세계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삿된 견해는 모두 불선(不善)이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저 논에서 말한 것과 같나니,
“사람이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하고 목숨이 다할 때에 임하여 욕계(欲界)와 색계의 중음(中陰)을 보고는 곧 삿된 견해를 내어 열반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위없는 법을 비방하나니, 거기에 선하지 못한 업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이 논에서 말하였다.
“저 상계의 삿된 견해는 바로 고통이 되는 인연의 도리(道理)이다. 상계를 그 지위에 의거하여 판단하면 중생의 마음은 미세하여 일으키는 의혹도 미세하다.
대부분 업(業)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라고 말한다.”
또 통론(通論)에 의거하면 그 가운데 거친 사견(邪見)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해서 착하지 못함을 성취한다고 한 것은 『비담론(毘曇論)』에서도 말한 것이니, 그 의미는 먼저의 판단에 해당하는 것이고
『성실론』에서 논한 것은 그 뜻이 뒤의 판단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망리론(望理論)』에 의거하면
“저 미세한 번뇌는 다 이치를 어겨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것은 다 착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성실론』에 의하면
“착하지 못한 악업(惡業)은 삼계(三界)를 통하여 일어나지만 오직 많고 적음의 더하고 덜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自述] 여기까지는 다만 범부세계에 나아가 모든 죄장(罪障)이 몸과 입에 의하여 법을 발생시킨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만약 성인에 대하여 논하자면 마치 수다원(須陀洹) 등이 관념을 벗어나고 생각을 잃어 용렬하게 마음으로 경솔하면서도 미미한 착하지 못함을 일으켜서 악한 서원 따위를 내어 탐욕의 결(結 : 번뇌)을 갖추게 되는 것과 같다.
탐욕과 성냄이 비록 강하나 한 조각은 다른 평범한 무리들이 오직 탐욕과 성냄만을 바로 일으키기만 할 뿐, 다시 생각하여 살피지 못해 삿된 견해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나 또한 살생과 도적질 따위의 마음은 일으키지 않는다.
가령 『비담론』에 의하면
“권속(眷屬)을 얻어 주먹을 가하는 등의 일에 경미(輕微)한 불선업(不善業)이 있다”고 한 것과 같으며,
또 『성실론(成實論)』에 의하면
“마음 속에 착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설령 몸과 입을 발동하지만 업의 과보는 성취하지 않나니,
마치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이 달아오른 철판에 떨어지면 아무리 물이라 해도 도리어 마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19.3. 죄행연(罪行緣)
[自述] 이것은 성인께서 뒤의 복행설(福行說)에 나아가기 위하여 먼저 밝힌 것이다.
죄의 행위가 있다고 말한 것은 다만 이 죄의 행위는 망견(妄見)이 경계에 물들어 나니 남이니 하고 고집스럽게 결정짓고, 어기고 순종하는 것에 집착함으로써 곧 자신과 남으로 하여금 모두 악한 업을 생취하게 한다.
이런 까닭에 경전에서 말하였다.
“탐욕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하여금 괴롭게 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나라는 마음이 있고 또한 견해를 얻은 것이 있으면 이 사람은 탐욕 때문에 장차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 밖에 비록 다른 경계가 없지만 그 미혹한 정(情)에 맞는다고 해서 억지 견해로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 속에서 경계를 보고 온갖 탐욕과 성냄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꿈과 맞다고 해서 사실이요 거짓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치상으로는 실제의 경계가 없는 오직 감정의 허망한 견해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꿈 속에서는 착한 일이 없는데도 그것을 착하다 하고, 성내는 일이 없는데도 성을 내며, 두려운 일이 없는데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삼계의 중생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무명(無明)의 잠[眠] 때문에 꼭 성낼 일이 아닌데도 성을 낸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아무리 별도의 경계가 없다 해도 저 미혹한 정(情)과 어 울리면 망견(妄見)이 더러움을 일으키며, 마음 밖에 아무리 지옥 따위의 모습이 없다 해도 악한 업이 이루어졌을 때엔 망견으로 괴로움을 받는다.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염마라(閻魔羅) 사람은 곧 중생이 아닌데도 죄인이 그것을 보고 이들을 중생이라고 생각하여 손에 달아오른 철감(鐵鉗)을 잡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악한 업이 이미 다 없어져서 목숨을 마치고 난 뒤에는 염마라의 옥졸(獄卒)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저 옥졸은 곧 중생수(衆生數)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기름과 심지가 다하면 등불이 없어지는 것처럼 법이 다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여 다시는 염라(閻羅)의 옥졸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염부제(閻浮提)의 햇볕이 이미 나오면 어둠이 없어지는 것처럼,
악한 업이 다할 때에 염라의 옥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사나운 눈과 악한 업을 한 중생의 모습 같은 무서운 색(色)이 다 없어진다.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벽을 부수면 그림도 또한 따라서 없어지는 것처럼
염라 옥졸의 두려운 모습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글로써 인증하면 중생들이 악한 업으로 해서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망령되게 지옥을 보는 것이다.
[문] 지옥을 보는 이에겐 눈에 보이는 옥졸과 호랑이ㆍ이리 따위가 다 망견이라 하더라도 그 지옥에 염라가 있어서 모든 죄인들을 판결한다면, 그 경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없다고 말하는가?
[답] 그가 지옥의 주인(염라)을 보는 것도 또한 바로 망견이다.
그것은 바로 죄인의 악업이 마음을 훈습함으로써 마음을 변하게 하여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허망되게 보지만 실은 지옥엔 염라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론(唯識論)』에서 말하였다.
“지옥에는 지옥의 주인이 없는데 지옥의 중생들은 자연스럽게 업에 의하여 지옥의 주인과 갖가지 고통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마음에 견해를 일으켜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바로 밤이다. 이것은 바로 낮이다’라고 하거나
혹은 악한 업 때문에 개를 보고 새를 보며 더러는 산이 억누르는 것을 본다고 한다.”
이 글로써 증명하면 선과 악이 마음을 훈습하여 그 마음으로 하여금 다르게 보게 하지만 실제의 지옥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 밖에 지옥이 없지만, 악한 업이 성취되었을 때에 억지로 스스로 망령되게 보는 것이다.
[문] 이 고통의 업보(業報)는 이미 선한 일이 아닐진대 어찌 바른대로 선(善)을 말하여 익히게 하지 않고 하필이면 감정에만 맞추어 괴로움의 업을 말하는가?
[답] 선과 악, 인(因)과 과(果)는 그 법이 반드시 서로 대치되는 것이다.
만약 그 탐욕 등이 바로 허물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시 따위가 곧 선한 것임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만약 세 갈래 악한 세계가 바로 괴로움이라고 선설(宣說)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천상 등의 즐거움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범부의 죄행(罪行)을 설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싫어하고 선한 데로 돌아가야 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근기가 둔한 사람이라면 이 괴로운 업을 듣고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낼 때에 곧 세상의 즐거움을 금하고 이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어 온갖 복업을 닦을 것이다.
만약 끈기가 예리한 사람이라면 이 고통스러운 업을 듣고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낼 때에 곧 해탈(解脫)을 구하고 이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어 도관(道觀)을 잘 닦아 곧 미혹한 가운데 세상을 벗어나는 인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일체의 번뇌가 다 바로 부처님의 종자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괴로운 업을 알고 그 근본을 싫어하여 여의는 것은 선을 일으키는 인연인 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것을 말해야 한다.
만약 이 악한 업의 죄행을 말하지 않으면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늘 실행하여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비록 정견(情見)에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허물의 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 밖에 따로 업의 고통이란 없는 것이니, 오직 경계가 없는 줄만 알면 마음의 본제는 항상 깨끗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비록 탐욕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법에 탐낼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고,
비록 진에(瞋恚)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법에 성낼 만한 것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비록 어리석음의 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모든 법은 어리석지도 않고 막힘이 없다는 것을 알며,
비록 중생들에게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지는 두렵고 무서운 괴로움을 보인다 하더라도 지옥ㆍ아귀ㆍ축생 등의 모습이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로써 죄행(罪行)의 원인과 결과는 오직 마음일 뿐이요, 그 외에는 없는 것임을 증명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하고 감정에 맞추어 방편적으로 반드시 업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으로서 두 문[兩門]은 바로 실교(實敎)에 나아가 죄의 실체가 진실함을 말하면 따로 깨뜨릴 것이 없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죄가 된다고 결정지어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곧 어리석은 사람이 진설을 미혹하여 망령되게 알고 있음을 특별히 밝힌 것이니, 그런 까닭에 반드시 죄행의 뜻을 결정지어 설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