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피카소의 (출생지이자 휴양지
말라가 & 작품 100점 감상)/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
https://blog.naver.com/jydecor/223122383124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피카소의 작품 100점 감상하기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
-피카소가 돌아 오고 싶어 했던 도시
말라가에서의 추억으로 그린🦅 비둘기,
🐮 투우 그리고 🔷청색 그림들
https://youtu.be/jZEUZEWfdcY
00:00 시작 피카소가 얼마나 말라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
00:35 인사 너무 밝게 인사드려서 . . .ㅠ.ㅠ 다른 부분과 안어울리는 점 이해 해 주세요.
제가 분위기 파악을 잘 못했습니다. 😅😅
01:43 🦅 피카소와 비둘기
04:38 🐮 피카소와 투우
06:27 🧺 피카소와 파란색 (청색)
** 02:43 💥 = 오디오 오류 😭😭 "나는 죽으면 메르세드 광장에 묻히고 싶소"
저의 덜렁거리는 손길로 오디오 파일이 저의 의지와 반대로
지워져 버린 듯 합니다.
●화가 피카소의 출생지이자 최고의
휴양지 말라가 [걸어서 세계속으로]
| KBS 2021.09.11 방송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 세계 (1881~1973)
현대 미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20세기
서양 미술 최고의 거장. 피카소 이후 예술가들 중에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의 창시자로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불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단일 시점과 원근법을 무시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동시에 구현한 혁신적인
작품으로 회화의 역사를 바꿨다.
또한 그는 하나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고
평생 동안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했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도자기, 판화 작품 역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아흔두 살의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80여 년간
창작 활동을 했고 오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화가이자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다.
피카소의 재능은 출중하여 열세 살 때 이미 아버지의
실력을 넘어섰다.
아버지는 피카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교육을 위해 이사를 가는 것은 물론이고
전시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1895년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여 순수예술학교에
입학했다.
1897년 마드리드 왕립 예술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고 박물관에서 벨라스케스,
고야, 엘 그레코 등 옛 거장들의 그림을 스스로 공부했다.
1899년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며 뚜렷한 개성과 자유분방한
표현이 돋보이는 프랑스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00년 자신의 작품이 프랑스 파리의 전시회에
걸린 것을 계기로 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와 함께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다.
2개월간 머물며 후기 인상파, 상징주의, 아르누보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그림에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카사게마스는 실연을 당해 우울해 하고 있었다.
피카소가 잠시 바르셀로나를 떠나 있는 동안 카사게마스가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피카소는 큰 상심에 빠졌다.
친한 친구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림 스타일에
큰 변화가 온다.
이른바 ‘청색 시대’로 이 시기부터 피카소는 자신의
색깔을 찾기 시작했다.
파란색과 회색, 청록색 톤으로 늙은 작부, 거지, 부랑아,
알코올 중독자 등 어둡고 불행한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소개된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은 청색 시대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00년 이후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04년 파리에 정착했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사는
몽마르트르의 허름한 아파트에 거처를 정했다.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냈고 화가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의 존재는 입체파로 나아가기 직전 피카소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점차 차가운 청색 톤 그림은 서서히 줄어들고 주황색과
분홍색 같은 따뜻한 색을 사용한 그림이 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장미 시대’ 라고 하며 피카소는 친한 친구이자
아방가르드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영향을 받아
유랑 서커스 단원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1907년 그의 초기 걸작 〈아비뇽의 여인들〉을 발표했다.
아프리카 조각과 고대 미술을 연상시키는 왜곡된 얼굴과
신체, 도발적인 여인들의 포즈는 화단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피카소는 한동안 이 그림을
감춰 두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입체파가 탄생하기 직전의 에너지가
응축된 역사적인 작품이었다.
이 무렵 피카소는 1906년에 만난 조르주 브라크와의 협업을
통해 입체파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다.
두 사람은 세잔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세잔은 소재나 주제보다 사물의 형태에 초점을 두고
모든 사물을 기본적인 조형으로 해석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입체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을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분해하고 그것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어 냈다.
이때 전통적인 원근법과 시점 등은 철저히 무시되고
여러 시점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구성해 놓았다.
입체파 미술에서는 형체, 사물의 조합 방식, 공간 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색을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입체파의 경향을 더 세분화할 때는 입체파 초기인
1907~1911년의 경향을 ‘분석적 입체파’,
1912년 이후부터 선보인 각종 오브제와 종이 등을
작품에 활용한 ‘종합적 입체파’로 구분한다.
1920년대 이후 초현실주의의 예술관을 받아들여
작품 세계를 넓혔다.
초현실주의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시인 앙드레 브르통 등 초현실주의 핵심 인물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사상을 작품에 반영했다.
특히 1930년대 에로틱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주제와 표현이 눈에 띄는 작품들을 다수 발표했다.
1936년 스페인에서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공화파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진영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프랑코를 지원하던 독일 나치는 바스크의 수도였던
게르니카에 폭격을 퍼부었고 그로 인해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생겼다.
피카소는 이 사건에 크게 분노했다.
1937년에 공화파 정권으로부터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 관에 전시할 그림을 의뢰받은 상태였던
피카소는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대작 〈게르니카〉를 발표했다.
죽은 아이들과 불길에 휩싸인 주택, 부서진 동물의
머리를 흑백 톤으로 그린 이 그림은 스페인에
공화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스페인으로 보내지
말라는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미국과 뉴욕을 떠돌다가
1981년에야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파리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종전 후에는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피카소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의 참상을 그린 〈한국의 학살〉,
〈전쟁과 평화〉 등을 발표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0년대 이후 세계 미술의 중심이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옮겨가고 순수 추상 미술이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그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대 미술을 상징하는 인물로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피카소는 평생 수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들 중 일부는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마리-테레즈
월터와 도라 마르를 그린 다수의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아흔두 살인 1973년, 피카소는 마지막 연인이자
두 번째 아내인 자클린 로크의 곁에서 사망했다.
피카소를 빼놓고는 현대 미술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는 20세기 미술사를 지배했다.
놀라운 재능을 바탕으로 활동 초기부터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80여 년에 이르는
작품 활동 기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도자기, 조각, 무대 디자인 등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작품 제작에 몰두했을 만큼 열정이 넘쳤다.
특히 조각 작품은 그가 죽은 이후에 대거 공개되었는데
현대 조각의 흐름을 바꿀 만큼 혁신적이었다.
입체파를 창시하여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연 그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의 동시대 작가들뿐만 아니라,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5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2위. 〈꿈〉
9위. 〈누드와 푸른 잎사귀와 흉상〉
11위. 〈파이프를 든 소년〉
14위. 〈고양이와 있는 도라 마르〉
24위.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
53위.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
59위. 〈피에레트의 결혼〉
60위. 〈앙헬 페르난데스 데 소토의 초상〉
62위. 〈정원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
? 66위. 〈요, 피카소〉
75위. 〈검은 팔걸이의자에 누워 있는 누드〉
78위. 〈창가에 앉아 있는 여인〉
91위. 〈튤립이 있는 정물화〉
94위. 〈라팽 아질에서〉
95위. 〈책 읽는 여인〉
출처 :시나브로 원문보기▶ 글쓴이 :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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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s://cafe.daum.net/kimhub/RXiv/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