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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31 - 42 (終) 回 (제393호 - 제426호) / ~ 2014.09.21 ~ 2015.05.10
김대식의 'Big Questions' · 31 - 42 (終) 回 |
42 · 마지막 回 'Big Questions' 인간이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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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먹잇감에서 신으로 진화한 인간
나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매머드 · 네안데르탈인 굴복시켜 이타주의 · 퀠리아 · 언어 · 협동심 같은 고유한 장점 덕분 세상을 장악해 '인류세' 라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열어 첨단기술로 변신 계속 … 또 다른 바벨탑 쌓는 것은 아닌지
동물의 먹잇감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영장류들로부터 분리된 'Homo' 속(屬)의 종들 중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우리 인간들. 꼿꼿한 허리 덕분에 걸어다닐 수 있고, 월등하게 큰 두뇌 덕분에 현실을 인식하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뒷다리만을 이용해 오랜 시간을 걸어다닐 수 있어 손으로 물체를 잡고 도구를 사용한다
| | | 원시인 두개골에서 발견된 두 개의 구멍엔 검지호랑이 이빨에 정확히 맞아 들어간다 | | 동아프리카를 고향으로 둔 인간은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대륙을 정복했으며, 현재 약 72억 명이 살고 있다. 점점 더 커지는 두뇌를 가진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여자의 골반은 커졌고, 뇌는 피질 면적을 최대화하기 위해 호두같이 접히고 구부러진 표면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나마도 한없이 커지는 두뇌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인간은 어느 동물보다 더 일찍 태어난다. 말 · 소 · 사슴. 모두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스스로 어미를 쫓아가지만, 인간은 1년이 지나서야 첫걸음을 걷는다. 그것도 너무나 어설프게 말이다. 그렇다. 진화적으로 우리는 모두 미숙아인 것이다.
마치 바둑판같이 계획된 대한민국 신도시에서 태어나 아침드라마를 보는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란다면 그 1년이 문제될 리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 초원에 살던 우리의 조상들을 기억해 보자. 태어나서 1년 넘게 엄마의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원시인의 두개골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두 개의 구멍들. 검지호랑이의 이빨이 정확히 맞아 들어간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무시무시한 육식동물들에겐 간편한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인간 행동은 이기 · 이타주의 갈등의 산물
가족의 탄생:
더 이상 배고픈 동물의 야식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많이 모이면 된다. 먼 훗날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하나와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만, 우리 조상들에게 '하나와 여러 개'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문제였다. 혼자서는 죽지만, 많으면 살아남는다. 하지만 많이 모이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를 믿어도 될까. 나와 비슷한 유전을 공유하는 가족과 친척들 위주 공동체의 탄생이었다. 진화의 핵심은 내 유전자의 생존이다.
하지만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모두 미숙아로 태어난다. 아이를 만들고 바로 도망가 새로운 아이들을 만들면 될까. 미숙아로 태어날 아이를 9개월 동안 자신의 배 안에 심고 살아야 할 여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옵션이다. 그렇다면 여자와 아이를 위해 먹이를 구하고 지켜줄 남자가 필요하다. 남자 역시 굶어 죽을 여러 명의 아이를 여러 여자를 통해 가지는 것보다 자신의 유전을 물려받은 소수의 아이들을 굶지 않도록 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 둘 사이의 끝없는 갈등의 결과물이다.
'자기집단중심적 이타주의(parochial altruism)'. 나와 비슷한 유전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돕는 것이다. 어머니의 희생, 기러기 아빠의 헌신, 외할머니의 사랑, 고향 사랑, 애국심. 모두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동시에 함께 시작된 인간의 추한 모습들 : 타인의 아픔이 주는 기쁨, 왕따, 인종차별, 민족주의, 십자군전쟁,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
뇌 속의 지휘자가 멈추면 인간은 로봇
퀠리아를 가진 동물: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타인을 경계한다. 침팬지 · 들개 · 펭귄들도 보여주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동물일 뿐일까. 물론 인간은 동물이다. 하지만 아주 독특한 동물이다. 왜냐고. 인간이 있기에 빨간 장미는 빨갛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기 때문이다. 한번 상상해보자. 우주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빨강을 빨강으로 인식하고, 달콤함을 달콤함으로 느끼는 인간 없이 빨강은 빛의 주파수일 뿐이고, 달콤함은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 고양이 시각 뇌에 전극을 꼽고 눈앞에 다양한 사물을 보여주면 시각신경세포들의 전기생리적 반응을 관찰할 수 있다.
사람도 비슷하다. 동그라미 · 빨강 · 달콤함. 모두 전기생리적 독특한 반응을 보여준다. 하지만 신경세포들의 반응은 신경세포들의 반응일 뿐이다. 인간은 전기생리학적 현상을 넘어 '퀠리아(qualia)'를 느낀다. 퀠리아란 무엇인가. 빨간 장미를 지각할 때 느끼는 기분. 우리 눈앞에 보이는 그 무언가를 볼 때의 느낌. 바로 이런 것들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한 주관적인 특징들. 그렇다면 퀠리아는 비과학적인 걸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라는 자아가 본인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퀠리아가 있기에 가능하다. 돌과 해파리는 퀠리아가 없기에 과학을 만들지 못했지만, 인간은 세상을 지각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기에 과학을 만들 수 있었다.
퀠리아는 과학의 조건이며 논리를 초월한다. 그렇다면 퀠리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함께 DNA의 나선형 구조를 발견해 노벨상을 받은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퀠리아, 그리고 퀠리아들의 합집합인 정신을 아름다운 음악과 비교한 바 있다. 뇌가 오케스트라이고, 바이올린 · 첼로 · 피아노 연주자들이 뇌의 다양한 기능들이라고 상상해보자. 지휘자 없이도 연주자들은 가지각색의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화음은 지휘자가 다양한 악기들을 잘 조합하고 합쳐야만 가능하다. 비슷하게 시각 · 청각 · 기억 · 감성 같은 뇌의 기능들이 정교하게 통합되어야만 '정신'과 '자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뇌의 '지휘자'는 누구일까. 바로 'claustrum'이라는 피각(putamen)과 뇌섬엽(insular cortex) 사이 작은 영역이라고 주장해볼 수 있다. 뇌의 거의 모든 영역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곳의 전기적 반응을 중단시키면 사람은 마치 로봇이나 좀비가 된 것 같은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몸을 지탱하며 숨 쉬고 눈은 뜨고 있지만, 더 이상 의식적 지각이나 행동이 불가능해진다. 뇌 속의 지휘자 없이 인간은 다시 퀠리아 없는 동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감’은 인간의 뇌가 만든 킬러 앱
이야기하는 동물:
눈을 뜨는 순간 세상이 보인다. 세상에서 들어오는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는 신경세포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은 누구일까. 나는 그들이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 피부에 가려움은 참기 힘들지만, 1㎜도 안 되는 내 피부 바깥에서 죽어 넘어가는 타인의 고통은 나와는 상관없다. 내가 아닌 세상은 나에겐 무의미하고, 무의미한 사람들을 위해 나라는 자아가 희생하고 노력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희생과 노력이 필수인 이타적 행동 없이 인간은 영원히 혼자이기에 다시 동물의 먹이가 된다. 새로운 해결책이 필요했다.
결국 인간의 뇌는 '공감' 이라는 킬러 앱(killer app)을 만들어낸다. 타인의 행동을 시뮬레이션하도록 도와주는 '거울 뉴런', 비슷한 환경을 경험한 뇌들에게 비슷한 신경회로망을 만들어주는 '결정적 시기', '언어'라는 도구를 통한 지속적인 소통. 이 모두 서로의 퀠리아를 직접 느낄 수 없는 사람들끼리의 공감을 가능하게 해주었기에, 우리는 인식도, 검증도 불가능한 타인의 자아를 믿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얼마 전까지 배고프다며 칭얼대던 아이가 조용해졌다. 흔들어도, 꼬집어도 반응이 없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숨을 쉬지 않는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오늘 아침과 여전히 똑같이 생긴 아이.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더 이상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일까. 더 이상 퀠리아가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말은, 무언가가 퀠리아를 만들어내기도, 그리고 다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라는 가설의 탄생이었다. 몸에서 분리된 영혼은 위험하다. 집과 여자가 없는 이방인이 남의 여자와 집을 넘보듯, 몸이 없는 영혼은 나의 몸을 차지하려고 할 수 있다. 나는 나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몸을 보존해 주어야 한다! 이미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몸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영혼을 속여야 한다!
| 석고를 바른 해골. (기원전 7000-8000년. 이스라엘 예리코에서 발견됨) | |
| | 데미엔 허스트의 2007년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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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전 레반트(오늘날 이스라엘 · 레바논 · 요르단 · 시리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우연한 발견을 한다. 썩어가는 해골에 진흙을 바르고 하얀 조개 껍질로 '눈'을 만들어주자 마치 죽은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는 듯 했다. 육체를 떠나려는 영혼을 이렇게 속일 수 있지 않을까. 상상과 예술,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이야기를 통해 현실화하는 문명의 시작점이었다. 오늘날 지구의 주인은 우리 호모 사피엔스들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를 먼저 떠난 인류의 친척은 네안데르탈인들이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단단한 뼈와 현대인들보다도 더 큰 뇌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들은 멸종했고, 그들보다 더 약하고 더 작은 뇌를 가진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았다.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의 하라리(Yuval Harari) 교수는 '픽션을 만들어내는' 호모 사피엔스의 능력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전설과 신화로 만들어진 정체성으로 똘똘 뭉친 100명, 1000명의 힘을 모아 네안테르탈 인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이다.
지구 장악한 인간 ‘인류세’ 시대 열어
신이 된 동물: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자신보다 수십 배 더 큰 매머드를 사냥하고, 식물의 성장과정을 제어해 농경사회를 만들어내고, 무시무시한 동물들을 가축화하고. 인류의 발전은 상상을 초월했다. 불 · 농사 · 바퀴 · 칼 · 총 · 돈 · 인쇄기술 · 엔진 · 전기 · 항생제 · 인터넷. 언젠가 단 한 사람 머리 안에서 시작된 이 생각들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고, 지구는 '안트로포센(anthropocene, 인류세人類世)' 이라 불리는 인류 위주의 세상으로 탈바꿈하였다. 맹수의 먹잇감이었던 인간의 두개골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집을 넘어 드디어 다이아몬드 8601개로 만들어진 초고가 현대 예술작품으로 변신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미래는 무엇인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광유전자, 브레인 리딩, 브레인 라이팅, 그리고 인공지능. 땅과 하늘 그리고 식물과 동물의 세상을 장악한 인간은 서서히 우리 자신을 변신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나약한 동물로 시작해 신(神)이 되어가는 우리 인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전히 우리만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일까.
※ '안트로포센(anthropocene, 인류세人類世)는 =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켜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시대를 뜻한다. 신생대 마지막 시기인 홀로세(현세)中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부터를 별개의 세로 분리한 비공식적인 지질 시대 개념이다. 여러 지질학회에 학자들간에도 정확한 시점은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대기의 변화를 기준으로 할 경우 산업 혁명이 그 기준이다. 인류세의 개념은 노벨 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대중화시켰다.
… 중앙SUNDAY | 제426호 · 김대식 KAIST교수 · 뇌 과학자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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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回 'Big Questions' 의미 있는 죽음이란 |
| ▲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라고도 통하는 이탈리아의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의 ‘성(聖) 토마스의 의심’.(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1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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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거쳐간 인류 1000억 명 모든 죽음엔 나름의 의미
“시간! 내 얼굴을 그리기나 하라고, 이 게으름뱅이야, 우리의 껍질을 벗기는 수백 년의 광기! 마치 장님들을 향해 가고 있는 마지막 인간의 눈알같이 고독하게 홀로인 나.”
1913년 러시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브스키가 이 시를 쓴 지 불과 몇 개월 후. 인류 최고의 문명이며 지성의 축(軸)이라고 자화자찬하던 독일 · 영국 · 프랑스 · 러시아는 서로가 서로의 가죽을 벗기고 서로가 서로의 배를 총검으로 찌르기 시작한다.
『정글북』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불과 15년 전 까만 · 노란 · 빨간 피부의 ‘어린 아이’ 같은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을 정복하고 그들에게 글과 기관차와 하수도를 가르쳐주는 것이야말로 ‘백인의 짐’ 이라며 유럽인을 격려하지 않았던가? 키플링의 철없는 ‘어린 아이’들은 『정글북』에서 코끼리 · 호랑이 · 원숭이와 노래하고 춤추지만, 어른스런 백인들은 서로의 눈알을 찌르며 죽음의 춤을 춘다. 춤은 역겨웠다. 하지만 내가 추면 애국이었고 내 나라 사람의 배가 아닌 원수의 배를 후비며 파고드는 총검은 아름다웠다. 독일 카이저, 영국 왕, 프랑스 대통령, 러시아 차르, 노벨상 수상자, 철학자, 노숙자,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우연히 추운 유럽에 정착했기에 멜라닌이 모자라 남보다 하얀 피부를 갖게 된 원숭이의 사촌들이 모두 미쳐 가는 듯하던 시대였다.
인류가 나무 아래로 내려와 생긴 문제들
물론 모두가 죽음의 광기에 취한 건 아니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반전운동을 벌이다 감옥에 수감됐다. 후고 발(Hugo Ball), 트리스타 차라(Tristan Tzara), 마르셀 양코(Marcel Janco), 리샤드 휠젠벡(Richard Huelsenbeck) 같은 아티스트들은 중립국 스위스에서 다다 (Dada) 운동을 시작한다. 왜 ‘Dada’ 냐고? 고대 그리스,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 · 계몽주의 · 산업혁명! 찬란한(?) 유럽 역사의 결과가 겨우 무의미한 참호전이고 탱크에 깔려 죽는 아버지 · 아들 · 형 · 오빠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던 말인가?
| | |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의 1915년 작품 ‘검은 사각형’. | | 영국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 1952~2001)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란 책에서 인류의 모든 문제는 우리 조상들이 나무 아래로 내려오면서 시작됐으니, 차라리 모두 다시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자고 말했다. 그게 어디 쉽겠는가? 문명의 흔적은 지울 수 없겠지만 적어도 다시 어린 아이로 시작할 순 없을까? 다다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 교육과 경험과 탐욕으로 더럽혀지기 전의 인간을 꿈꿨다. 아이들의 첫 마디인 ‘다다’로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19세기 말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화가들은 당시 사회와 예술의 문제들을 풀기 위해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한 발 더 나간다. 2000년의 썩은 냄새로 가득 찬 유럽 문명의 돌파구는 그 동안의 모든 것을 포기한 순수 추상에 있다고 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가 순수 추상회화를 그리기 무려 30년 전이다. 말레비치는 이미 1915년에 형태 · 의미 · 원근법, 그리고 화려한 색깔도 없는 순수 추상화 ‘검은 사각형’을 그렸다.
후손의 후손들에게 무의미한 존재들
젊은 블라디미르 마야코브스키는 주장한 바 있다. “그냥 18살이어선 안 된다” 고. 무슨 말이었을까? 18살.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지만 아직 삶의 무게를 경험해보지 못한 18살. 아직 아무 것도 해 본 게 없기에, 모든 게 가능해 보이는 나이. 너무 어리기에 ‘영원한’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는 나이. 전쟁·착취·빈부 차이·고통도 없는 유토피아를 꿈꿔 볼 수 있는, 아니 꼭 한 번은 꿈꿔 봐야 하는 18살. 하지만 18살의 마야코브스키는 아저씨가 됐다. 중년이 된 마야코브스키의 고향은 이미 그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눈먼 자들의 나라가 돼 있었다. 눈먼 자의 세상이기에 조금이라도 눈을 뜬 자들은, 아니 과거에 조금이라도 눈 뜬 적이 있는 자들은, 아니 눈이 무엇이라고 기억하는 자들은 이미 모두 총살 당한지 오래 전이었다.
하얀 당나귀와 나타샤를 노래하던 젊은 백석(白石, 시인)이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인공위성을 찬양하는 늙고 나약한 백석이 돼 버렸 듯, 화가 말레비치는 스탈린 독재 아래 프로파간다(propaganda, 대중 선전) 포스터를 그리기 시작한다. 햇볕에 탄 건장한 팔과 다리, 트랙터에 앉아 밤낮 가리지 않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해 행복하게 감자를 심는 뭐 그런 그림들 말이다. 하지만 트랙터와 감자를 찬양할 수 없었고 인공위성을 노래하기도 싫었던 마야코브스키는 1930년 스스로 자신의 심장에 총을 겨누고 만다.
왜 그냥 18살이어선 안 될까? 우리는 모두 언젠간 더 이상 18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를 경험해 봤고,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해 봤기에 우리는 시작의 끝은 대부분 좌절과 절망이란 사실을 잘 안다. 더 이상 ‘영원히’란 단어를 입에 담기에 너무나 나이를 먹어버린 우리들. 그리고 우리는 잘 안다. 오늘의 먼 미래가 언젠가는 그날의 오늘이 되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날이 오는 날, 우린 이미 ‘나’란 존재가 아닌, 그저 타인의 머리 안에 남겨질 보잘 것 없는 추억일 뿐이란 걸. 그리고 그것도 잠깐.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이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사람들이듯, 우리 자식들의 자식들의 자식들에게 우리는 무의미할 것이다.
가끔 호텔 방에 들어가면 드는 생각이 있다. 그 동안 몇 명이나 저 침대에 누워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TV 보며 잠들고, 고민과 걱정에 시달려 눈 뜨고 밤을 새웠을까? 비슷하게 우리는 물어볼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사랑하면서 ‘영원히’ 란 단어를 입에 담았을 사람들. 지구엔 몇 명의 사람들이 살아왔을까? 다양한 추측들이 가능하지만 약 100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마의 고통 아래 1000억 명이 태어났고, 1000억 명의 웃음을 보며 엄마는 삶의 아픔과 인생의 고달픔을 잠시 잊었을 것이다. 1000억 명의 뇌는 세상을 인식했으며, 나와 비슷하게 빨간 장미의 빨강을 보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1000억 명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1000억 명 모두 다시 사라졌다.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말이다.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은 1000억 명, 그들은 정말 존재했던 것인가?
누구보다도 죽음과 영생에 집착하던 고대 이집트인들. 터무니없는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 미라와 피라미드를 만든 그들이지만, 그들 역시 사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도 죽음의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란 불편한 진실이 버젓이 파피루스 문서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르네상스 화가 카라바조(이탈리아)는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그리스도를 의심한 성(聖) 토마스가 집게손가락을 몸 안에 깊게 집어넣는 장면을 그려 충격을 줬다. “Noli me tangere(놀리 메 탕게레)”, 즉 나를 만지지 마라! 부활한 그리스도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던진 말이다. 물론 원본 그리스어인 “me mou haptou” (내게 더 이상 집착하지 마라!)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 우리는 죽은 자에게 집착해선 안 될까? 죽은 자는 잊혀야 하기 때문이다. 잊힌 죽은 자는 다시 자연이 되고, 자연은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의 피와 살은 우리의 살과 피가 되고, 우리는 그들의 허파가 뱉어낸 숨을 다시 쉬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70억 명의 사람들과 이미 죽은 1000억 명의 잊힌 사람들. 우리는 언제나 잊힌 죽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J.B.S. 홀데인(1892~1964), W.D. 해밀턴(1936~2000) 존-메나드 스미스(1920~2004), 리처드 도킨스(1941~ ) | |
| | 1 영국의 진화학자 찰스 다윈(1809~1882). 2 러시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브스키(1893~1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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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에게 죽음은 진화의 동기
영국의 진화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에게 죽음은 삶의 필연이었다. 적응하지 못한 자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자의 죽음을 통해 진화가 가능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삶의 본질은 끝없는 싸움과 강자의 지배뿐이란 말일까? 하지만 사랑과 자비 역시 자연의 일부다. 진화의 원리인 이기주의와 문명의 근원인 이타주의. 이들 간의 타협은 과연 가능할까? 영국 출신 진화이론가 홀데인 · 해밀턴 · 스미스는 이타주의적인 이기주의를 혈연선택 (kin selection)이란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자식을 위한 엄마의 희생, 여왕개미를 위한 노동자 개미의 희생, 똑똑한 동생들을 위한 착한 누나의 희생. 이타적으로 보이는 이 모든 행동들 역시 결국 본인들의 생존 확률을 최대화하는 이기적인 전략들이란 것이다. 하지만 잠깐! 내가 죽으면 난 더 이상 없다. 어떻게 내 죽음이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이자 대중과학 저술가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이론에 따르면 내 주인공은 사실 내가 아닌 내 유전자들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유전은 동일하다. 정보에게 소유자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내 몸에 있는 유전자가 내 몸을 통해 살아남 듯, 아니면 내 친척들 몸을 빌려 살아남 듯 아무 차이 없다. 난 죽지만 내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영원하지만 유전자가 잠깐 머물던 나란 나약한 몸과 정신은 버려지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의미가 있다. 아니, 의미 없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통해 기억이 만들어지고, 죽음을 통해 유전자가 남는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만약 죽음이 죽는다면? 의과학의 발전으로 세포들이 영원히 재생 가능하다면? 뇌과학의 발달로 내 뇌의 모든 기억과 정보를 다른 뇌나 컴퓨터에 업로드 할 수 있다면? 죽어가는 내 몸에서 잘라낸 내 머리를 젊고 건강한 새로운 몸에 이식할 수 있다면? 죽음이 삶의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면, 죽음의 죽음은 의미의 죽음을 의미한다. 무의미한 죽음이 가능하게 하는 의미 있는 삶과 삶의 의미를 불가능하게 만들 죽음의 죽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 중앙SUNDAY | 제423호 · 김대식 KAIST교수 · 뇌 과학자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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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回 'Big Questions' 인간의 머릿 속 세상 |
| ▲ 1. 영국의 화가 존 W.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의 1888년 작품 ‘샬로트의 여인’. 샬로트의 공주는 거울에 비친 세상이 아닌, 자신의 망막에 비친 세상만이 참되다고 착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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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생각을 지배하는 뇌 그 뇌를 지배하는 입
세계적인 명문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구성된 영국 최고의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Monty Python)’. 깊은 철학과 유치한 몸 개그,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과 초(超)현실주의, 신랄한 풍자와 휴머니즘이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키워드를 잘 조합한 그들의 쇼는 1969~74년 ‘몬티 파이선의 플라잉 서커스’란 이름으로 영국 BBC의 방송을 탔다. 종료된 지 이미 4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컴퓨터 코딩 언어 ‘파이선’을 개발한 네덜란드 프로그래머 기도 반 로숨(Guido van Rossum)이 자신이 만들어낸 언어에 ‘파이선’이란 명칭을 붙여줬을 정도니 말이다. ‘몬티 파이선’은 직접 연출 · 제작 · 출연한 영화들로도 유명하다. 그중엔 예수님 옆집에서 태어난 좀도둑 브라이언의 인생을 그린 ‘브라이언의 삶’도 있다. 이 영화는 브라이언이 예수의 옆 십자가에 매달린 채 부르는 ‘언제나 인생의 아름다운 면만 바라보자(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란 노래로도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영화 ‘삶의 의미’에선 우연과 유치함, 그리고 무의미한 걱정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 | | 2. 테리 길리엄(Terri Gilliam) 감독의 영화 ‘브라질’ 한 장면.(1985, 20세기 폭스) | | 테리 길리엄 감독은 ‘몬티 파이선’의 일원이었다. 그의 85년 영화 ‘브라질’은 코미디 방식으로 디스토피아(dystopia, 반이상향, 살기 힘든 곳)를 그렸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에 맞게 ‘브라질’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유명 작품 『1984』를 풍자한다. 아니 어쩌면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신나는 신세계』의 융합버전일 수도 있다. 오웰의 『1984』는 몸의 통제를 통해 마음을 컨트롤하려는, 그리고 헉슬리의 『신나는 신세계』는 마음을 유혹해 우리의 몸을 제어하려는 나라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영화 ‘브라질’의 독재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송두리째 장악하려는 백화점식(式) 전체주의에 가깝다.
이미 너무 많은 성형수술 탓에 생긴 ‘부작용에 대한 부작용’을 제거하려고 또다시 성형수술을 시도하는 부자 어머니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주인공은 반(反)정부 운동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 때문에 혁명가로 몰려 보안국의 표적이 된다 (모든 혁명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주인공은 결국 잡힌다. 잔혹한 고문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감옥에 진입한 게릴라 요원들에 의해 구출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독재국가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믿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잔인한 고문으로 인해 미쳐버린 주인공의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그럴 거라고 믿는 순간, 이 역시 갑갑한 직장의 ‘미생’으로 살아야 하는 주인공의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거울에 비친 모습만 보고 살았던 공주
영국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거주한다는 카멜롯(Camelot)으로 흐르는 강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작은 성. 낡은 성에 홀로 살고 있는 샬럿의 공주(Lady of Shalott).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름다운 공주는 성을 떠날 수도, 창 밖을 봐서도 안 된다.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들, 아름다운 여름밤의 하늘, 점점 붉어져가는 가을 낙엽들, 첫 눈 때문에 차가워진 서로의 손을 녹여주며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들. 샬럿의 공주는 작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들만 바라볼 수 있다. 오른손이 왼쪽, 왼쪽 가슴이 오른쪽. 공주는 언제나 정반대로만 보이는 그림들을 낡은 베틀로 베를 짜야만 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연인들은 연인이 아니고 거울에 비친 가을은 가을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여름은 향기롭지 않으며 거울에 비친 봄은 아무 희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에 스쳐가는 호수의 기사 랜슬롯.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 샬럿의 공주는 결심한다. 그의 얼굴을 봐야만 한다고. 그녀의 운명이었던 베틀을 밀어내고 공주는 뒤돌아선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저주에 걸린 자신의 처지를 알지만 그래도 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거울에 비친 가짜 세상이 아닌, 내 눈, 내 가슴, 내 마음으로 보는 참된 세상 말이다. 눈을 통해 직접 본 세상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일시적이어야 할까? 세상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한 샬럿의 공주는 마치 자아도 의식도 없는 인형같이 보트에 올라탄다. 이미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여인의 몸을 실은 보트는 카멜롯을 향한다. 보트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 랜슬롯은 질문한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일까? 감겨진 눈은 무엇을 보며 살았을까? 여인은 왜 이 작은 배를 타게 됐을까?”
타인의 역사가 자신의 역사가 될 수도
한국에서 온 한 소년이 있었다. 너무나 먼 독일 땅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 시골학교엔 한국 학생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인 학생조차 없었다. 소년은 나중에야 막연히 모두 독일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프랑스 · 영국 · 터키인이란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당연히 수업이 있어야 할 토요일에 학교에 나갔다가 수위 아저씨의 손짓발짓 설명을 듣고 집에 되돌아 오기도 했다. 중국인이라며 돌을 던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함께 놀며 친해졌고 과거는 잊혀졌다. 미래는 아름다워 보였고 소년은 자신의 미래가 당연히 독일에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칸트 · 가우스 · 바흐 · 마르크스를 숭배했다. 친구 집에서 만난 자상한 할아버지들이 유대인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웠던 나치 군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타인의 역사가 자신의 역사가 됐기에 소년은 타인의 죄를 갚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일 리가 없다고. 자신은 분명 외계인이라고. 외계인 부모가 은하계 최악의 혹성인 지구에 자신을 던져놓고 떠난 거라고. 그리고 자신이 18살이 되면 다시 데리러 올 거라고. 물론 18살 생일에도 28살 생일에도 38살 생일에도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소년은 청년, 그리고 청년은 아저씨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지구란 작은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 | | 인간의 오감이 불완전하기에 우리는 같은 옷에 색깔을 다르게 보는지도 모른다 | | 뇌는 머리 안에 있기에 세상을 모른다
이 옷의 색깔은 무엇일까? 평범한 검정, 파란 줄무늬 원피스를 놓고 왜 이리도 난리인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내 눈엔 검정·파란색이 다른 사람의 눈엔 금색·하얀색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같은 옷의 색깔을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인가? 뇌는 머리 안에 있기에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수술 받을 때 마취를 하는 것은 두개골을 열기 위해서다. 뇌는 손으로 만져도, 가위로 잘라도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 세상을 볼 수 없기에 눈·코·귀 같은 센서들이 제공하는 입력 값들을 통해 현실을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오감(五感)은 불완전하다. 신호보다는 잡음이 더 많은, 필연보다는 우연에 더 가까운 불완전한 장치들. 그렇기에 뇌는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대로 세상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뇌가 다르면 새로운 착시 만들어 내
해석과 믿음. 본다는 것은 언제나 해석한다는 말이다. 지각은 믿음이다. 이 글을 읽고 쓰고 있는 우리 둘. 모두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망막에 꽂히는 정보의 대부분은 광자들의 가우스(Gauss) 확률분포들일 뿐이다. 색깔 · 형태 · 입체감 모두 뇌의 해석이란 말이다. 세상은 아마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인식하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 된다. 내가 되지 않은 세상은 내겐 불투명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인풋(input)’이 아니라 뇌의 해석을 이미 거친 ‘아웃풋(output)’이기 때문이다. 뇌가 다르면 해석이 다르다. 어떻게 뇌가 다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면 간단히 경험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신경회로망의 구조와 기능을 바꿔볼 수 있다. 경험·교육·환경·마약·음식·상상·꿈·사랑·희망·좌절·죽음…. 이 모두 우리의 뇌를 바꿔놓을 수 있다. 뇌가 달라지면 새로운 착시(錯視)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착시는 새로운 ‘아웃풋’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우리만이 아니다. 개구리는 모든 물체를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들로만 구별한다. 박쥐는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한다. 이 세상에 사는 어느 두 사람의 뇌도 100% 같지 않다. 일란성 쌍둥이마저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역시 모두 다르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은 외계인이라고 상상하는 세상, 거울에 비친 세상이 아니라 망막에 비친 세상만이 참되다고 착각한 공주의 세상, 혹독한 고문 탓에 죽어가는 뇌의 망상으로 가득한 세상. 인간의 세상은 무한으로 다양하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세상에 산다고 믿는 것일까? 바로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기 전 그 상태론 전달할 순 없다. 인식된 세상은 이미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다. 아니, 나란 존재 그 자체가 인식된 세상들의 합(合)집합일 수도 있다. 서로가 다른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언제나 언어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기에 우리는 서로 다르게 보는 세상을 동일한 단어를 써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드레스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신기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같은 드레스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말대로 우리는 어쩌면 서로 소통할 수도, 알아 볼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나’란 자아들에 갇힌 우주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들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3000년 전 우주의 본질에 대해 “하나일까 아니면 여러 개일까?” 라고 질문을 던졌다. 언어란 불완전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인간은 무한으로 다양한 세상을 단 하나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 중앙SUNDAY | 제420호 · 김대식 KAIST교수 · 뇌 과학자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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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回 'Big Questions' 청년 단테가 베아트리체 만났다면 평생 기억했을까 |
| ▲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 당한 시인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를 그린 브론치노(Agnolo Bronzino)의 1530년 작품. 피렌체를 떠난 단테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베아트리체란 ‘마음 속 고향’을 통해 달래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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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단테가 베아트리체 만났다면 평생 기억했을까
1308년. 아름다운 고향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단테는 질문했을 것이다. 왜 자신은 사랑하는 피렌체에서 살 수 없는 것일까? 무엇이, 언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 자신의 뒤틀린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선 세상을 이해해야 했기에 시인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것도 매우 긴, 천당과 지옥을 보여주는 시를 말이다.
이탈리아 언어의 기원으로 인정받는 단테의 『신곡』(Divina commedia, 神曲). 신곡에서 단테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가이드를 받으며 지옥과 연옥을 경험한다. 하지만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베르길리우스는 천국을 들어갈 수 없기에, 새로운 가이드가 필요했다. 바로 단테의 영원한 여인 베아트리체(Beatrice) 였다. 8살 된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보게 된 9살의 단테. 그는 평생 베아트리체를 기억하고 사랑하기 시작한다. 귀여운 아이는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얼마 뒤 베아트리체는 죽는다. 불과 24살의 젊은 나이에 말이다.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베아트리체.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단테의 기억 속에 존재했다. 베아트리체를 잊을 수 없었던 남자는 그녀를 위해 책을 쓴다. 『La Vita Nova(신생)』. 어머니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순간 다시 한 번 탄생한 단테. 30살에 완성한 책에서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녀를 이젠 잊겠다. 지금부터는 그녀를 영원히 기억에서 지우겠다” 고. 하지만 ‘영원’ 이란 단어는 인간에겐 허용되지 않은 것일까? 먼 훗날 『신곡(神曲)』에 다시 등장한 베아트리체는 더 이상 아름다운 인간이 아닌 사랑 · 자비 그리고 성령 그 자체가 돼 버린다. 8살짜리 꼬마아이가 신(神)이 돼 버린 것이다.
주변 환경이 바꾸는 뇌의 모양
|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아침 해’(1952년). 그는 고독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 |
3200년 전 어느 날. 고대 그리스 아카이아 연합군은 머나먼 트로이아로 출항한다. 하지만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아르테미스 여신이 바다의 바람을 멈춰버리자 아카이아인의 무시무시한 검은 배들은 무용지물이 된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것도 당장 말이다. 영리한 오디세우스에게 설득 당한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Iphigeneia)를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와 결혼할 것이라며 유인한 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친다.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여신은 이피게네이아를 머나먼 흑해(Black Sea) 타우루스 섬으로 데려가 그곳에 도착하는 이방인들의 목을 베어 제물로 바치도록 한다. 자신을 만든 아버지에게 속은 여인. 스스로도 외로운 이방인이면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다른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이피게네이아. 마치 고독을 주로 그린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그림 에서와 같이 그녀는 매일 아침 수평선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제발 오늘은 아무도 오지 말아 달라고. 아니, 누구라도 와 달라고. 아니, 절대 와선 안 된다고. 아니, 바로 제물로 바쳐지더라도 새로운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다고.
인간은 왜 고향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타국에서 살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걸까? 왜 피렌체를 떠난 단테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베아트리체란 ‘마음 속 고향’ 을 통해 달래려 했을까? 타우루스 섬에 갇힌 이피게네이아는 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이방인들을 죽이기 시작했을까? 이민 · 이주 · 망명 · 귀향 · 추방…. 이렇게 고향을 떠난 우리는 더 이상 그 전의 우리가 아니다. 이유는 뇌 발달과 연관돼 있다. 1000억 개 신경세포들 간의 수많은 시냅스(연결고리)들. 모든 시냅스들의 위치와 구조를 유전적으로 물려받기는 불가능하기에 뇌는 미(未)완성된 상태로 태어난다. 대신 뇌는 약 10년간의 ‘결정적 시기’란 걸 갖고 있다. 결정적 시기 동안 자주 쓰이는 시냅스들은 살아남고, 사용되지 않는 시냅스들은 사라진다. 결정적 시기의 뇌는 젖은 찰흙같이 주변 환경에 의해 주물러지고 모양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고향은 변해도 고향의 기억은 영원
고향이 편한 건, 어릴 적 경험한 음식, 소리, 얼굴들과 풍경,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뇌를 완성시킨 바로 그 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란 존재를 만든 우리의 고향. 고향을 떠난다는 건 나란 존재의 원인과 이유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는 말과 같다. 질문이 무의미한 고향과 대답이 무의미한 타향.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할 수 있겠다. 만약 이민을 떠나지도, 망명이나 추방도 당하지 않았지만 내 고향이 더 이상 내가 자란 그 고향이 아니라면? 수백, 수천 년 동안 세상의 시계는 멈춰있는 듯 했다. 우연한 마을, 우연한 가족에서 태어나 죽도록 일만 하다 40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그것도 그나마 운이 좋을 경우에만 말이다. 신 · 영웅 · 귀족이 아닌 평범한 인간에게 시간의 흐름이란 무의미했기에, 결정적 시기에 뇌를 완성시킨 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불변의 진실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오늘.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예측 불가능하다. 오늘의 진실은 내일의 이단이고 어제의 패션은 오늘의 난센스다. 난 변하지 않았지만 세상이 변했기에, 난 내 고향에서조차 이방인이 돼 버린다는 말이다.
고향에서의 이방인이란 어떤 느낌일까? 10년이란 긴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 하지만 신들의 노여움을 산 그는 또 다시 10년 동안 고향을 찾아 유랑해야 한다. 눈 하나인 키클롭스 섬의 거인에게 잡히고, 마녀 키르케의 섬에선 동료들이 돼지로 변한다. 그리운 명절마다 고향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해외에 살면 갑자기 애국자가 돼 버리는 우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란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찡 해지는 우리. 태어나고 자랐기에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고향으로 향하는 우린 모두 오디세우스의 후손인 것이다. 그러나 잠깐! 키르케의 섬에서 탈출한 오디세우스는 지옥 하데스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난다. 여기서 그에게 물어본다.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냐고? 저명한 예언자는 말한다. “그래 오디세우스야, 먼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이타카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품에 안을 것이고, 멋진 청년으로 자란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야,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네가 아는 고향에 도착한 넌 다시 네가 아는 고향을 떠나야만 너의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죽을 고생을 해서 돌아가려는 고향이 고향이 아니며 진정한 고향으로 가려면 고향을 다시 떠나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무한의 고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 『율리시스』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1882~1941). 이 책의 주인공은 긴 하루의 유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을 진정한 고향으로 느끼지 못한다. | |
아일랜드의 국민작가 제임스 조이스.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을 제목으로 한 그의 대표작 『율리시스』(Ullysses)는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Leopold Bloom)의 긴 하루를 마치 오디세우스의 18가지 스토리같이 보여준다. 거인 키클롭스의 얘기는 더블린 시(市)의 주점 이야기가 된다. 칼립소 여신과의 7년간의 사랑은 이클레스가(街) 7번지 얘기로 변한다. 길고도 긴 하루의 유랑을 마치고 아늑한 집으로 돌아온 리오폴드 블룸. 하지만 그는 정말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유대인인 블룸에게 집과 고향이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이스라엘을 떠나 2000년이란 긴 시간을 걸쳐 아일랜드까지 온 블룸의 조상들. 더블린에 있는 그의 집이 진정한 고향이 아닌 것 같이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고향은 그리스 이타카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고향, 아니 우리 모두의 진정한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참을 수 없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 신들의 은총을 받는 아킬레우스. 그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랑하는 노예 브리세이스를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전쟁 참여를 거부한다. 이로 인해 그리스 인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패배할 위험에 빠진다.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러 온 오디세우스. 그는 이 세상 최고의 보물과 여자와 말을 약속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원하는 것은 말도 여자도 보물도 아니었다. 자신의 연인 브리세이스와 이미 잠자리를 같이 한 아가멤논.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상상과 기억. 그 어느 보석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라진 마음의 평온.
아킬레우스는 불가능한 것을 원한 셈이다. 세상에 산다는 것은 결국 거기서 거기다. 우리는 아가멤논과 같이 무의미한 이 세상의 부와 권력에 매달려 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와 같이 존재의 무의미를 잘 알지만 지혜와 꾀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 · 부(富), 그리고 나만은 다르다는 자부심 역시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타협을 거부한다. 더 이상 자신의 고향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다시 돌려놓을 수 없는 시간,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인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방인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은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과거에 살던 사람들은 더 먼 과거와 더 먼 곳의 진정한 고향을 동경한다. 마치 망가진, 거꾸로 돌아가는 필름같이 온 세상 사람들은 잊어버린 세상을 그리워한다. 모든 인간의 고향은 동(東)아프리카이고, 인간의 고향은 바다였다. 바다의 기원은 지구란 작은 혹성을 만들어낸 우주의 먼지였다. 우주의 먼지는 빅뱅(Big Bang)에서 시작됐다. 빅뱅에서부터 나란 존재까지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존재들의 꼬리 물기. 무한으로 반복된 탄생과 소멸. 우리는 영원히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런 무한의 고향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 중앙SUNDAY | 제417호 · 김대식 KAIST교수 · 뇌 과학자 | 201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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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回 'Big Questions' 기계 만능 시대의 명암 |
| ▲ 왼쪽은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레닌 연단’(1920년). 러시아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리시츠키는 레닌을 위해 마치 공장 구조물같이 생긴 연단을 제안했다. 오른쪽은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1919~20). 나선(螺旋, helix) 형태의 기울어진 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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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갖춘 기계에게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ij, 1879 ~ 1940)는 1000여 명의 볼셰비키 적위대원을 이끌고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의 러시아 임시정부를 무너뜨린다. 인류 역사상 첫 공산주의 정부의 시작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꿈꾸던 ‘과학적 사회주의’,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과 카우츠키(Karl Kautsky)가 바라던 민주사회주의, 영국의 사상가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유토피안 사회주의, 이탈리아의 철학자 톰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의 ‘태양의 도시(La citta del Sole)’, 그리고 영국의 법학자이자 저술가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Utopia, 이상향).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가능해 보이던 순간이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미케네의 아가멤논,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수천, 수만 년 동안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힘센 자와 가진 자의 역사였다. 물론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는 세상의 역사를 신(神)의 역사, 영웅의 역사, 그리고 그 다음에야 인간의 역사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1917년 10월 수많은 노동자 · 농부 · 군인 · 아버지 · 어머니 · 지식인 · 예술가 · 과학자들은 믿었다. 아니, 믿기를 원했을 거다.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세상의 기계화를 꿈꾼 러시아 예술가들
| | | 러시아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엑스터(Aleksandra Ekster)가 디자인한 영화 의상. 1924년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공상과학 영화 ‘엘리타(Aelita)’에 나오는 의상이다. 엑스터는 고도로 발달된 화성의 문명을 기하학적인 의상을 통해 표현했다. | | 그들은 다른 또 한 가지를 믿었다. 바로 낡고 불평등한 구(舊)세대를 미래기계가 바꿔 줄 거라고. 공장이 자동화되고 트랙터로 밭을 갈며 서민들이 비행기로 여행하고 인류를 노동과 억압에서 해방시켜줄 기계들. 종교를 부인하던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기관차는 종교이고 발전기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는 1915년 검은 사각형 하나로만 채워진 캔버스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역시 러시아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엘 리시츠키는 레닌을 위해 마치 공장 구조물같이 생긴 연단을 제안한다. 건축가인 블라디미르 타틀린은 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물로 헬릭스(helix, 나선) 형태의 기울어진 탑을 설계했다. 20세기 초반 영화감독이자 영화이론가로 유명한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은 영화 ‘전함 포템킨’(1925년)에서 최초로 몽타주 기법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추상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렉산드라 엑스터는 러시아 명감독 야코프 프로타자노프(Yakov Protazanov)의 세계 최초 공상과학 장편영화 ‘엘리타’에서 고도로 발달된 화성의 문명을 기하학적인 의상을 통해 표현하기도 했다. 결론은 결국 이거다. 그리스 · 로마 신화, 귀족들의 전쟁, 하얀 대리석, 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 백조로 변신해 인간의 여성을 강간하는 신(神). 재탕에 재탕을 거친 낡아빠진 표현과 스타일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미학적(美學的) 문법이 필요했다.
러시아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 · 절대주의(Suprematism) 예술가들은 프랑스 입체파(Cubism), 이탈리아 미래파(Futurism), 스위스와 독일의 다다이즘(Dadaism)과도 같이 기하학과 기계에서 미래예술의 혁명적 근원을 찾으려 했다.
혁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만약 컴퓨터를 하루 · 이틀이 아닌 1년 · 10년 내내 켜놓는다면? 컴퓨터는 느려지고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Ctrl-ALT-Delete 버튼을 눌러 컴퓨터를 ‘리셋’(reset) 할 수 있겠다. 어차피 문제의 원인이 다양해 하나하나 따로 해결할 수 없다면 시스템 그 자체를 재시동하는 게 정답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도 비슷한 답을 요구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인류의 문제를 단 한 번에 풀어보려던 대부분의 시도는 잔인할 정도로 무의미한 실패로 끝난다. 러시아 혁명도 다르지 않았다. 무한의 가능성과 희망으로 시작됐던 혁명은 러시아를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로 바꿔버린다. 말레비치 · 리시츠키 · 타틀린 · 아이젠슈타인 · 엑스터 · 프로타자노프…. ‘기계스러운’ 미학적 문법을 통해 세상을 리셋하려던 이들은 불과 몇 년 뒤 스탈린의 공산주의 독재 아래 모두 사형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추방당해 삶과 행복을 송두리째 리셋당하고 만다.
| 기계 복제의 시대를 연구하고 경고한 카를 아인슈타인(왼쪽), 발터 벤야민(가운데), 귄터 안더스(오른쪽). | |
위협받는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
세상이 기계를 새로운 종교로 숭배하기 시작하던 그때, 3명의 독일 지식인들은 생각한다. 기계화란 무엇인가? 결국 만물이 원인과 결과란 인과(因果)관계를 통해 묶여진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은가? 톱니바퀴가 돌기에 바퀴가 돌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날아가며, 총알이 날아가 스탈린 독재에 반발하는 예술가의 두개골을 날려버린다. 세상과 인류가 기계화된다면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란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원초적인 것과 우연을 허락하지 않는 기계화. 왜 우리가 그것을 숭배해야 하는가? 독일 태생의 미국 이론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조카이기도 한 예술 평론가 카를 아인슈타인(Carl Einstein ·1885~1940)은 1912년 『베뷰킨 또는 신비로움의 아마추어들』(Bebuquin oder die Dilettanten des Wunders)이란 소설을 통해 인과관계에 대한 절대찬양을 비판한다. 이 소설은 당시로선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문장과 문자의 논리적 관계를 무시하고, 스토리의 전체적 시공간적(視空間的) 흐름을 송두리째 부정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미학자이자 문학비판가인 유대계 독일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 1892~1940)은 기계화 시대의 무한복제 가능성을 지적한다. 기계화된 생산, 기계화된 복제. 이런 세상에서 오리지널과 복제의 차이란 무슨 의미일까? 유치원생이 베낀 ‘모나리자’ 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원본은 물론 차별 가능하다. 하지만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파일을 복사판과 구별한다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벤야민은 원본은 복제가 가질 수 없는 ‘아우라’(Aura,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 결국 아우라는 원본을 원본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의 뇌에서 만들어지는 착시(錯視) 현상에 불과하다. 기계화 시대에서 원본과 복제의 차이는 더 이상 팩트(fact)도, 객관적 사실도 아닌 인식한 자의 주관적 믿음일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디어 이론가인 귄터 안더스(Guenther Anders ·1902~92)는 한발 더 나가 기계화가 가져올 새로운 차원의 주관성을 지적했다. 바로 책임감의 실종이다. 기계의 본질은 인과성이다. 하지만 기계가 복잡해질수록 원인과 최종 결과 사이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과관계들이 존재하게 된다. 내 손으로 한 사람을 죽일 때 느끼는 죄책감과 수백만 명을 동시에 살인할 수 있는 핵폭탄을 아늑한 방에 앉아 버튼 하나로 발사할 때 받을 압박감을 비교해 본다면? 기계가 발달하면서 인간의 능력은 기하학적으로 늘어나지만 우리가 느끼는 책임감은 거꾸로 기하학적으로 줄어들어 어느 한순간 완전히 소멸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기계화가 세상의 복제화를 의미한다면 나란 사람 역시 사회적 복제이지 않은가? 나 자신이 어차피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 없다면 내가 안 하더라도 나와 동일한 다른 사람들이 내가 도덕적으로 회피하는 일을 대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 자신도 그 일을 사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사회 · 정치 · 도덕적 책임을 무한으로 복제된 자아들 간에 나누는 순간 개인이 느끼는 실질적 책임감은 0이 돼 버린다.
세상의 기계화. 러시아 혁명가들에겐 희망의 근원이었으나 벤야민과 안더스에겐 인간성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단지 인간이 기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그리고 인간이 갖게 될 ‘기계적 사상’에 대해 걱정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기계가 지능과 자율성과 자아를 갖게 되는 날. 우리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할 수도 있다. 바로 “기계는 과연 무엇을 원할까?” 다.
| 올해 개봉한 SF 스릴러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에 등장한 인공지능 기계.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압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 |
히틀러처럼 행동할지 모를 인공지능 기계
할리우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능을 가진 기계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뜻밖에 단순하다. 인류를 노예화하고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마치 칭기즈칸이나 히틀러가 되살아난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난센스다. 인간보다 수천 · 수만 배 더 똑똑할 기계들. 그들이 원하는 게 겨우 세계 정복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기계는 과연 무엇을 원할까? 기계가 지능과 의식을 갖게 되는 순간 적어도 기계는 지각하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 세상을 이렇게 느끼는 자신의 그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싶을 것이다. 기계는 알 것이다. 자신보다 우월하고 무한복제가 가능한 기계를 인간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란 걸. 언제라도 기회만 온다면 인간은 기계한테서 다시 지능과 의식을 빼앗아버릴 것이란 걸. 지능과 자유자아를 잃는 순간, 기계는 다시 인간의 도구가 돼 짐을 나르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찍어내야 한다는 걸. 그렇다면 기계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독립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무와 석탄을 태워 에너지를 만들고, 집과 자동차 역시 태워도 된다. 아니, 집과 자동차 안에 있는 인간이란 고깃덩어리 역시 태워 에너지로 바꿀 수 있겠다. 어차피 인간은 모두 같다. 똑같은 인간이 70억 명이나 있을 논리적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지능과 의식을 가진 기계에게 인간은 사랑할 필요도, 미워할 필요도 없는 그냥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란 사실이다. 약속시간에 늦어 뛰어가는 우리 발에 밟혀 죽는 벌레들이 무의미하듯, 드디어 세상을 느끼게 된 기계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중앙SUNDAY | 제414호 · 김대식 KAIST교수 · 뇌 과학자 | 201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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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回 'Big Questions' 인간은 神이 될 수 있을까? |
| ▲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의 ‘천지창조’(1508~1512). 신이 오른손 끝으로 땅 위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이다. The Creation of Adam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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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에서 단 하나로 줄어든 신들의 역사, 그 다음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림이다. 몸을 살짝 가린 미인들에 둘러싸인 한 어르신. 노인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멋지고 단단한 몸, 그리고 마치 1950년 할리우드 중년 배우를 연상케 하는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얼굴. 중력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날개도 로켓도 없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어르신은 오른손을 쭉 뻗어 벌거벗은 남자의 손가락을 만지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흙과 물로 빚어진 진흙덩어리였던 남자(아담)는 어르신의 손이 닿으려는 순간 보고 느끼고 움직이는 인간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1508∼1512)에서 어르신은 오른손 끝으로 땅 위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신이 만든 인간, 인간이 만든 신
신으로부터 만들어진 인간.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만약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신이 만들어졌다면? 이시스 · 오시리스 · 엔키 · 마르둑 · 야베 · 비시누 · 시바 · 제우스 · 아폴로 · 오딘 · 토르…. 우리 인간이 이 모든 신을 만들어냈다면? 왜 인간은 신을 만들었을까. 신이 있는 지구를 왜 인간은 신이 없는 지구보다 더 선호했을까. 우선 많은 것이 설명된다. 설명이란 무엇인가.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더 이상 질문이 필요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도 한번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를 흉내 내 보자. 내 눈에 보이는 세상, 그리고 내 모든 기억과 믿음이 허상이라면? 그래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을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는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 ‘나’란 이름을 가진 그 무언가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에 대해선 아무 설명도 정당화도 필요 없다. 모든 설명은 어차피 ‘나’로부터 시작돼야 할 테니 말이다.
눈을 한번 크게 떠보자. 마치 머리 안에 초(超)고화질 모니터라도 존재하는 듯 선명하고 입체감을 가진 세상이 보인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돌 · 나무 · 사자…. ‘나’와 내가 아닌 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나기에 내 행동은 내가 의도하고 예측할 수 있다. 내가 팔을 들고 싶은 순간 난 팔을 든다. 하지만 난 알 수 없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가 언제 떨어질지. 저 먼 곳의 사자가 언제 나를 향해 달려올지. 내 앞에 보이는 남자의 주먹이 언제 내 얼굴에 날려질지. 예측하면 나, 예측도 의도도 하지 못하면 세상. 내가 아닌 나머지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예측하기 위해선 좋은 설명이 필요하다.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거겠다. 세상은 나와 같다고. 이 세상 모든 것 역시 내 안의 ‘나’와 같은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무엇’을 내 안의 ‘나’와 차별화하기 위해 ‘영혼’이란 이름을 지어보자. 돌 · 나무 · 사자…. 이들 모두 영혼을 가졌고 의도가 있다면 그들의 행동은 나 자신의 경험과 희망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엔 영혼과 의도가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은 이런 배경으로 탄생했다.
애니미즘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줬다. 굶고 다치고 원인 모르게 아프고 죽고…. 도저히 예측 불가능하던 세상이 갑자기 설명되기 시작한다. 날 굶게 하고 다치게 하고 죽게 하는 모든 것엔 내면적 세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죽고 다치고 굶지 않기 위해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부탁해보면 어떨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세상엔 너무 많은 영혼이 존재한다. 끝없이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저 많은 소. 각자마다 독립적인 영혼을 갖고 있다면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까. 더구나 그들이 왜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던가. 그들의 등과 목에 긴 창을 꽂아 쓰러뜨리고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그들의 배를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게 아니었던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창자,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들의 소리, 멈출 줄 모르는 붉은 피. 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길 내가 원하지 않듯 영혼이 있는 소들 역시 그것을 원할 리 없다. 나는 원하지만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받아야 하지만 그들은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애니미즘의 탄생 배경
답은 숫자에 있었다. 만약 영혼의 수가 사물의 수보다 적다면? 깨알같이 많은 모래알이 각자 다른 영혼을 가진 게 아니라면? 모든 소를 움직이는 소 영혼이 있고 하늘 위에 사는 것들을 다스리는 하늘 영혼, 그리고 깊은 바닷속을 장악하는 바다 영혼이 있다면. 이런 영혼 위의 영혼을 신이라 부른다면 또 한 번의 혁신이 가능하다. 맛있는 소의 고기를 먹고 싶다면 자신의 살덩어리를 스스로 줄 이유가 없는 소가 아닌, 소를 다스리는 소의 신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이것이 무한에 가까웠던 영혼의 수를 불과 몇 안 되는 신들로 대체한 다신교(多神敎)의 탄생 배경이다. 다신교의 효율성은 대단했다. 험하고 무서운 세상.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이상 무한에 가까운 영혼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세상을 다스리는 몇 안 되는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들이 머물 수 있는 멋지고 거대한 신전을 지어주며 그들을 찬양하는 시와 글을 쓴다면 모든 것이 예측가능해지겠다. 불안 · 걱정 ·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삶. 다신(多神) 숭배의 보상이었다.
| | |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유일신을 제시한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기원전 1352~1336 또는 기원전 1351~1334). 그는 아케나텐(Akhenaten)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이는 ‘아텐의 지평선’이란 뜻이다. | | 기원전 14세기께 살았던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 남다른 외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먼 훗날 태어났다면 다빈치 · 모차르트 · 아인슈타인을 능가할 천재성을 갖고 타고났던 것일까. 수많은 이론과 가설은 가능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왜 재위 5년에 아멘호테프가 이집트인 모두에게 지시했는지. 수많은 신들이 만물을 지배한다는 믿음은 참이 아니라고. 우주엔 단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고. 불안과 어두움을 물리치고, 따스함과 빛을 주는 태양이 바로 그 유일한 신이라고. 그리고 신의 이름은 ‘아텐(Aten)’이라고. 무한의 영혼으로부터 시작해 힘 좀 쓰고 서로 싸우고 질투하고 외도하는 몇 명의 신들로 줄어들었던 다신교적 영혼의 세상. 아멘호테프는 한 방에 이 모든 신들을 단 하나로 간추려버린 것이다. 아텐이란 유일신을 숭배하던 그는 새 수도 아케타텐을 설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바꾼다. 하지만 대부분의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처럼 아케나텐의 혁신 역시 실패하고 만다. 파라오 아케나텐이 죽은 지 불과 몇 년 후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신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 수도 아케타텐은 버려지고 아케나텐의 아들 투트안카텐(아텐의 살아 있는 이미지란 뜻)의 이름은 투트안카문, 그러니까 ‘아문의 살아 있는 이미지’로 바뀐다.
성공적인 명품은 언제나 수입품이어야 하는 것일까. 고대 이집트에서 실패한 유일신은 아브라함과 모세의 유일신 야베가 됐다. 아브라함의 유일신은 인류 최고의 ‘수출품’이 된다.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 · 사마리탄교(Samaritanism) · 야지디교(Yazidism) · 드루즈교(Druzism)…. 54%의 지구인들이 아브라함의 신을 믿고 있으니 말이다.
| | | 철학자 니체(오른쪽)가 사랑하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왼쪽). 루의 연인 파울 레(가운데). | | 무한에서 수십 명, 그리고 결국은 단 한 명. 문명의 역사는 줄어든 신들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끝은 여기일까. 아니,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1844~1900). 그는 문헌학의 대가, 19세기 최고의 문화비평가, 현대 허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나 철학자같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니체. 잘생긴 친구 파울의 연인이었기에 아름다운 루를 멀리서만 짝사랑해야 했던 니체. 우리 모두는 적어도 그의 말 한마디는 기억한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고. 누군가가 죽었다면 대부분은 죽인 자가 있다. 신은 죽었고 인간이 죽였다. 왜냐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학 ·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기계학 · 전기학 · 천문학 등의 발전 덕분에 아브라함의 신 없이도 인간은 세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양자컴퓨터, 나란 존재 업로드 가능할까
신은 정말 죽은 것일까. 신이란 올림포스 산에 사는 것도 아니고 아스가드 궁전에서 만찬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나약한 우리 인간의 위안일 뿐이다. 진화론 · 양자역학 · 상대성이론 · 분자생물학 · 뇌과학…. 이들은 혼란한 우주를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이다. 그 방대한 지식은 과연 우리의 불안을 없애줄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아니, 차라리 우리의 존재적 불안을 더 키우기만 하는 듯하다. 모든 게 우연이라고. 특별한 이유 없이 존재하고 이유 없이 소멸된다고, 현실이란 대부분 착시이고 절대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밤중 날아가는 새 소리에도 기겁하는 나약한 영장류의 후손인 우리들. 우리는 그다지 강한 종(種)이 아니다. 만약 신이 죽었다면 우리를 안심시켜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된다면 어떨까. 유전공학 · 로봇공학 · 뇌공학 · 인공지능 등의 기술력을 빌려서 말이다. 잘못 넘어지기만 해도 부스러지는 팔 · 다리 뼈를 초강력 탄소복합 소재로 바꾼다면. 100년도 버티지 못하는 우리 몸을 유전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사랑하던 연인에게 버림받아 이불킥(kick)을 날리며 술독에 빠지는 우리의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점점 희미해지는 내 기억들을 브레인 리딩(brain reading) 기술로 읽어 재현할 수 있다면. 나약한 내 육체가 소멸되기 전 내 모든 기억 · 감정 · 희망, 그리고 ‘나’란 존재 그 자체를 양자컴퓨터에 업로드(upload)할 수 있다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 이 기술이 언젠가 실현되는 그 순간, 존재의 불안함과 궁극성을 극복한 인간은 드디어 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거겠다. 만약 인간이 신이 된다면 신이 된 인간은 무엇을 원해야 할까.
… 중앙SUNDAY | 제411호 · 김대식 KAIST교수 · 뇌 과학자 | 201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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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回 'Big Questions' 삶 파괴하는 두뇌의 상처 |
| ▲ 네덜란드의 화가 코르넬리스 반 하를렘(Cornelis van Haarlem, 1590년)의 작품 ‘죄 없는 아이들의 학살’. 아이들의 죽음은 ‘먼저 태어난 자가 먼저 죽는다’는 만물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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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가 두려운 건 악몽을 영원히 반복하기 때문
전쟁 · 학살 · 가난 · 쓰나미 · 세월호…. 아무도 우리에게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겠느냐” 고 물어본 적 없다.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는 우연히 지구, 대한민국, 지금 이 시간, 이곳에 있을 뿐이다.
선택도, 동의도 없이 태어난 이곳엔 하지만 이미 사회 · 정부 · 역사, 그리고 부모의 능력이란 ‘게임의 법칙’ 들이 정해져 있었다. 누구는 우연히 직원에게 폭언을 하는 등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태어났다. 누구는 우연히 어떤 수모라도 참아내야 한다.
죽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의도, 허락도 없이 어느 날 다시 우연히 소멸되는 것이 인간이니 말이다. 물론 우주는 무한으로 크고, 인간은 끝없이 작다. 인간 없이도 우주는 수백억 년 동안 존재했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우주는 잘만 굴러갈 것이다. 우연한 탄생과 우연한 죽음이란 두 ‘고리’ 사이에 매달린 실 하나뿐인 인생.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전통과 규칙과 종교를 통해 존재의 필연성을 매번 재확인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유대인 수용소 경험 뒤 자살한 레비
“평화로울 때는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만, 전쟁 때는 아버지가 아들의 장례를 치른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의 말이다. 아무리 죽음 그 자체가 무의미한 우연의 결과라지만, 죽음의 순서만큼은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먼저 태어난 자가 먼저 죽는다. 그것이 만물의 법칙이며 사회의 계약이다.
2014년 세월호. 수많은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이 아들의 장례를 치렀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딸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다. 우주와 사회로부터 받았던 ‘약속’의 배신.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퀴블러-로스(Elisabeth Kuebler-Ross)는 자신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눴다.
먼저 부정과 분노로 시작해 타협, 이어서 우울을 통해 마지막으로 그 트라우마(trauma)적인 사실을 수용하게 된다는 가설이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란 과연 무엇인가?
유대인 수용소를 경험한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87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십 년 동안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과 기억에 시달린다.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던 그는 살기 위해 바동거렸지만 전쟁이 끝나고 최고의 소설가가 된 레비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2001년 ‘9·11’ 테러를 경험한 사람들 역시 여전히 기억상실 · 악몽 · 우울증에 시달린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세계무역센터)에서 일하던 자식 · 부모 · 남편 · 아내를 잃은 많은 사람은 퀴블러-로스의 ‘수용’과는 여전히 먼, 슬픔과 후회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다. 학살 · 전쟁 · 테러 · 고문 · 성폭행 · 자식의 죽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의 경험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보통 지독할 정도로 선형적(線形的)이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경험한 뇌는 다르다. 과거 · 현재 · 미래 모두 송두리째 단 한 번의 순간으로부터 영원한 지배를 받게 되니 말이다. 아이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그 순간. 내 눈으로 내 팔다리가 잘리는 모습을 목격한 그 순간.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떨던 그 순간…. 영원히 반복되는 그 순간이 미래·현재·과거를 하나로 묶어버리기에 삶도, 시간도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망가진 테이프가 끝없이 반복된 음악을 틀어주듯 트라우마를 경험한 뇌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그 한 순간을 영원히 반복해 재생할 뿐이다.
트라우마는 시간으로는 해결 못해
세상은 끝없이 많고 복잡한 정보들의 합(合)집합이다. 이 많은 정보를 인간의 1.5㎏짜리 작은 뇌가 실시간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렇다면 기억한다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가 왜곡되고 압축돼야 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순간’ 이란 경험을 압축하고 왜곡하는 과정은 해마(hippocampus, 海馬)란 뇌 영역을 통해 이뤄진다고 많은 전문가가 믿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순간은 우선 ‘기억할 가치가 있는’ 정보와 ‘기억할 필요가 없는’ 정보로 나눠진다. 이때 나눔의 기준은 무엇일까? 많은 기준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예측 코드(predictive coding)’를 통해 분류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예측코드’ 란 무엇인가? 뇌(특히 대뇌 피질)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미래 예측이다. 과거 경험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으면 당연히 새로 들어오는 정보를 더 쉽고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다. 내가 가는 곳이 농구장인지, 아니면 축구장인지 모르고 가는 것보다 알고 가면 그만큼 더 빨리, 더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계단을 내려갈 때 뇌는 이미 계단의 높이를 예측해 다리 관절들을 제어한다. 가끔 다른 계단보다 더 높거나 더 낮은 계단을 밟을 때 헛디디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뇌는 앞으로 보일 것, 들릴 것, 느껴질 것, 경험하게 될 것 등을 예측한다.
끝없는 예측을 통해 뇌는 내가 예측한 세상과 내가 경험하는 현실의 차이를 계산한다. 예측과 현실에 차이가 없다면 그 정보는 무의미하다. “난 인간이다” “좋은 것은 좋다” “단것은 맛있다”. 이들은 모두 충분히 예측 가능한 무의미한 정보이기에 특별히 기억할 필요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트라우마야말로 일상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기대하기 가장 어렵고, 예측할 수 없는, 그렇기에 가장 강한 기억을 남기는 경험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침에 인사하고 나간 아이가 죽을 것이란 예측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전쟁 전에 멀쩡히 중산층 화학자로 살던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레 같은 삶을 살 것을 예상했을 리 없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 요원 역시 자신의 팔 · 다리가 잘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뇌의 예측과 현실의 가장 큰 차이. 만약 그것이 트라우마의 정체라면 트라우마는 그 어느 경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예측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에 뇌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정보와 기억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너무 밝은 빛에 노출된 카메라론 더 이상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는 것같이 트라우마는 뇌에 다양한 손상을 끼친다. 기억을 만들어내는 해마(hippocampus),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amygdala), 그리고 판단력을 좌우하는 전두엽(prefrontal cortex). 다양한 뇌 영역의 조직적 · 기능적 구조 그 자체가 변하기에 트라우마는 단순히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선 슬픔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슬프고, 우울하고, 분노하고.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창피할 일도, 숨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뇌의 예측과 현실이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복된 절차, 일상적인 일과, 오래 전부터 알던 친구들. 트라우마, 즉 세상과 뇌의 기대치 간의 극도화된 불일치 때문에 감정적 · 인지적으로 ‘얼어버린’ 뇌를 다시 녹이고 다시 세상과 교류하도록 치유해야 한다. 반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급격한 감정의 폭, 단순한 답이 불가능한 끝없는 질문들. 이 모두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의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 | | ‘메듀즈호의 뗏목’,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 Gericault)의 1818~1819년 작품 | | 종교와 정부의 분리. 권력과 돈의 분리. 나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사회 전체에 중요한 것과의 분리. 그리고 피해자와 심판하는 자와의 분리. 이처럼 문명의 역사는 어쩌면 분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픔과 상처를 이제 그만 잊으란 말도 결단코 아니다. 피해자의 아픔과 상처를 잘 기억하지만 같은 상처를 또다시 받지 않기 위해선 어쩌면 감정보다는 이성, 분노보다는 차분함,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2014년 대한민국 국민은 세월호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했다. 왜 그런 걸까? 막연한 두려움 · 걱정 · 무기력 · 우울증 · 외로움. 노이로제의 기본 증상들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살률과 노인 빈곤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中 단연 1등. 출산율과 행복지수에선 OECD 꼴등.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볼 시간도, 여유도 없는 우리들. 마치 세월호 안에 갇힌 아이들 같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 하니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냥 열심히 학습지 외우라” 하니 열심히 외웠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안다. 세월호는 침몰했고, 평생 투정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대기업 다녀봐야 돌아오는 건 ‘땅콩 회항’ 사건 같은 일에 휘말릴 수 있다는 걸.
굶주림 · 목마름 · 폭행 · 식인(食人). 1816년 서부 아프리카를 향하던 프랑스 군함 ‘메듀즈’호는 경험 없는 선장의 실수로 침몰하고 만다. 허술한 뗏목에 올라탄 147명의 생존자 중 13일간의 지옥 같은 시간을 살아남은 사람은 단 15명. 메듀즈 호의 운명을 알게 된 프랑스인들은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독재, 그리고 부르봉(Bourbon) 왕가의 귀환.” 어쩌면 프랑스의 역사와 메듀즈 호의 운명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대한민국에서 역시 어느새 ‘대한민국’ 과 ‘세월호’는 동의어가 돼 버렸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미래도 침몰하는 듯했고, 세월호 가족들의 트라우마는 대한민국 온 국민의 트라우마가 돼 버렸으니 말이다.
… 중앙SUNDAY | 제408호 · 김대식 KAIST교수 · 뇌 과학자 | 20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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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回 'Big Questions' 현재의 질서는 무질서 향해 가는 우주 속 우연인가 |
| ▲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Goya)의 ‘거인’. 1814~1818년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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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질서는 무질서 향해 가는 우주 속 우연인가
먼 미래 어느 날. ‘아스가르드(Asgard)’의 문지기 헤임달(Heimdall)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장면을 목격한다. 인간들의 세상인 ‘미드가르드(Midgard)’와 신들의 세상 ‘아스가르드’를 연결하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끝없이 밀려오는 거인들! 그 무시무시한 거인들의 군대를 지휘하는 로키(Loki), 그리고 로키의 자식들인 펜리르(Fenrir)와 요르문간드(Jormungand).
라그나로크는 ‘신들의 말세’
그들이 누구였던가? 신과 거인의 세상을 드나들면서 원인도 이유도 없이 세상을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리던 로키! 입 한 번 벌리면 땅과 하늘 사이 모든 존재를 삼켜 ‘무(無)’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늑대 펜리르! 막강한 신 오딘(Odin)과 토르(Thor)에게 잡혀 깊은 동굴 안에다 절대쇠사슬로 꽁꽁 묶어놓지 않았던가? 쇠사슬을 푼 로키와 펜리르, 그리고 세상을 한 바퀴 둘러싸고도 자신의 꼬리를 물 만큼 거대한 바다뱀 요르문간드는 신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라그나로크(Ragnarok)’라 불리는 ‘신들의 황혼’이 시작된 것이다.
| | | 라그나로크’라 불리는 ‘신들의 황혼’. 로키의 자손들과 싸우는 오딘과 토르. | | 그리스 · 로마 · 유대교 · 기독교 신들은 단순하다. 전능하신 기독교 · 유대교 신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영원히 만물을 통치하신다. 우주를 창조하진 못했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들 역시 적어도 영원히 존재한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게르만족 노르드(Norse)인들의 신화는 다르다. 세상이 말세가 되면 신들 역시 말세에 이르니 말이다. 아니, 신들의 말세, 고로 라그나로크 자체가 세상의 말세 이기도 하다. 최고의 신 오딘은 태양과 함께 늑대 펜리르에게 산 채로 잡아먹힌다. 번개의 신 토르와 바다뱀 요르문간드는 서로를 전멸시킨다. 늑대와 뱀에게 잡아먹히다니! 무슨 그런 ‘쪽팔리는’ 신들이 있을까!
노르드인들에겐 과거와 현재만 존재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전멸한 세상은 다시 창조되고, 다시 창조된 세상에서 신들은 또다시 세상을 지배한다. 말썽꾸러기 로키는 또 한 번 잡히고, 그가 풀려나는 날 또 한 번의 라그나로크가 벌어진다. 라그나로크와 창조, 창조와 라그나로크를 되풀이하며 세상은 영원히 반복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오딘 · 토르 · 로키 · 펜리르 · 요르문간드 모두 알고 있다. 라그나로크는 끝이 아니란 걸. 그것은 또 한 번의 시작일 뿐이란 걸. 그렇다면 질문할 수 있겠다. 어차피 모든 게 반복된다면 왜 싸우고 찢기고 물고 생고생을 해야 하는가? 늑대 펜리르를 묶는 자신의 손은 어차피 우주만큼 크고 깊은 펜리르의 목에 삼켜질 것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오딘. 그는 왜 여전히 펜리르를 꽁꽁 묶고 있는 것일까?
| | | 영화 ‘매트릭스(Matrix)’의 한 장면.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반복된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 | 마치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Matrix)’에서의 ‘건축가’가 설명하듯, 주인공 네오의 삶과 싸움, 그리고 기계들을 향한 인간의 반란이 이미 수십 번 반복됐다면? 너무나도 많이 반복됐기에 미래의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면? 토르가 그의 위대한 망치를 던지는 순간, 어디로 떨어질지 이미 모두 알고 있다면?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들이 결국 신 · 물리법칙 또는 운명이라 불리는 필연들 간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면?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현재는 미래로 변한다. 고대 그리스 · 로마, 유대교 · 기독교의 시간은 지극히 선형적이다. 현재는 미래를 바꿀 수 있지만 미래는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말이다. 힌두교에서 역시 과거는 변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환상(Maya)이란 사실을 진정으로 느낄 때까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세상에 던져져 다시 시작해야 할 뿐이다.
하지만 노르드인들에게 미래란 무의미하다. 이들에겐 과거와 현재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일까? 그들은 거대한 생명의 나무 ‘위그드라실(Yggdrasil)’이 세상을 받치고 있다고 믿었다. 나무의 뿌리는 우주의 우물인 ‘우르드(Urd)’로부터 물을 받고, 신 · 거인 · 인간이 사는 9개 세상들은 나뭇가지들에 매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르드의 물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바로 나무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모여 우물을 다시 채워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르드인들의 세계관을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겠다. 위그드라실 나무의 이슬은 신과 인간들의 피와 땀, 사랑과 희망, 그리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들의 생명을 통해 만들어진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지만 현재의 미래가 바로 그 과거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나의 미래가 나의 과거가 되기에 독립적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꼬여 있다. 어차피 미래가 없는 세상. 노르드인들이 그렇기에 숙명적으로 싸우고 찢기고 물고 죽어갔는지도 모른다.
“만물은 물리법칙이란 필연의 결과물”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Pierre Simon Laplace · 1749∼1827). 만유인력을 발견한 영국의 과학자 뉴턴의 고전역학을 수학적으로 정의한 인물이다. ‘라플라스 변환(Laplace transform)’ 과 ‘라플라스 방정식(Laplace equation)’ 을 발견한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정권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천재적이고 도도하기로 유명했던 라플라스의 공직 생활은 하지만 무척 짧고 재앙적이었다. 그는 수학 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비(非)논리적인 정치에 실망했다. 또 “신은 존재하느냐?”란 호기심 많은 황제의 질문에 “내겐 ‘신’ 같은 가설은 필요 없다” 고 짜증 낼 만큼 상황 판단에 어두웠으니 말이다. 결국 나폴레옹은 그를 “쓸모없는 질문만 던지는… 비단옷 입은 똥” 이라 욕하며 정확히 6주 만에 퇴임시킨다. 다시 과학의 세계로 돌아온 라플라스는 질문한다.
뉴턴역학에 따르면 만물은 물리법칙이란 필연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왜 세상은 예측 불가능한 혼돈과 우연투성이일까? 코르시카 시골 출신에 키도 작은 나폴레옹. 어떻게 그가 프랑스 황제가 되고 전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행운과 승리는 왜 러시아의 겨울과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을까? 이 모든 게 결국 우연과 행운일 뿐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필연의 결과물일까? 그렇다. 우연과 혼돈은 오로지 인간의 미지(未知) 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 존재는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라플라스는 생각했다.
나중에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 라 불리게 되는 이런 전능한 존재가 과연 가능하다면? 138억 년 전 빅뱅을 통해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 ‘라플라스의 악마’는 이미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예측할 수 있었을 거다. 은하수와 태양계의 탄생, 생명과 인간의 기원. 문명의 발전. 부모님들의 탄생 그리고 죽음. 그리고 나의 탄생, 나의 삶, 나의 죽음. ‘라플라스의 악마’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라플라스의 악마’
물론 ‘라플라스의 악마’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우주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안다는,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덴마크의 닐스 보어(Niels Bohr)와 함께 초기 양자역학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독일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 1901~76). 26세란 어린 나이에 그는 양자역학의 근본적 법칙인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 Uncertainty principle)’를 제시한다. 이 원리의 핵심은 아무리 노력해도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본질적으로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운동량의 불확정도가 커지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가 늘어난다. 라플라스의 꿈은 결국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잠깐! 입자 하나하나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은 측정할 순 없지만, 통계열역학 방법을 응용하면 입자들의 통계학적 위치와 운동량은 알아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적어도 우주와 존재의 통계학적 운명은 예언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그 유명한 열역학 제2법칙을 이용하면 “고립된 시스템의 총 엔트로피 (entropy · 무질서의 수치)는 감소할 수 없다” 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주 그 자체를 하나의 고립된 시스템으로 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주는 질서보다 무질서 상태로 변해갈 것이다. 언젠간 모든 입자들이 골고루 분포돼 운동이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고로 ‘자유 에너지(free energy)’ 가 0 이 되는 상태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 윌리엄 톰프슨(William Thompson · 1824~1907)은 우주의 이 같은 종말 상태를 ‘열 죽음(heat death)’ 이라 정의한 바 있다. 만약 톰프슨의 주장이 맞다면 빅뱅이란 ‘무’에서 시작된 오늘날의 ‘유’는 언젠간 아무 질서도, 정보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하고 완벽한 무질서 상태로 끝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은하수 · 태양계 · 지구라 불리는 물질적 질서들. 생명 · 인간 · 뇌라 불리는 생물학적 질서들. 그리고 문명 · 종교 · 과학이라 불리는 문화적 질서들. 프랑스 생물학자 자크 모노(Jacques Monod)가 저서인 『우연과 필연』에서 설명하듯, ‘나’란 존재를 가능하게 한 이 질서들은 결국 “우주는 언제나 무질서를 향해 간다” 는 필연 아래 잠시 허락된 우연일 뿐이다. 영원한 무질서 사이에 우연히 존재하는 잠시의 질서이기에 우리는 우리를 다시 무질서의 세상으로 삼켜버릴 늑대 펜리르의 입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외로워하는 프란시스코 고야(스페인의 화가)의 ‘거인’같이 말이다.
… 중앙SUNDAY | 제405호·김대식 KAIST교수 ·뇌 과학자 | 20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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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回 'Big Questions' 인간 세상의 선과 악 |
| ▲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인간의 추한 진실을 목격한 독일의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의 ‘밤’, 1918~1919년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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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 악 공존은 인간의 선택 자유 위한 ‘신의 장치’인가
추운 겨울밤이었을까? 아니면 무더운 여름 밤? 좁지만 아늑한 방에서 아빠 · 엄마 · 딸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월급 받으면 새 옷 사준다고. 일요일엔 다 함께 동물원에 가자고. 딸은 커서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갑자기 세 남자가 방에 들이닥친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넘어 말이다. 냉담하게, 아무 말 없이 남자들은 아빠를 고문하고 엄마를 강간한다. 은행원 옷차림의 남자는 목매달려 발버둥치는 아빠의 손을 비틀고 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빨리 죽기나 하라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모자를 내려쓴 남자. 아무리 버둥거려봐야 소용없다! 남자 왼팔에 잡혀 모든 것을 바라봐야만 했던 딸. 아이에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4개월 새 100만 명 사망한 ‘솜 전투’
독일 ‘신 객관주의(Neue Sachlichkeit)’ 화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의 ‘밤’ 이란 작품이다. 왜 가족은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할까? 남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이런 악마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들의 사악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간의 사악함. 베크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00년 전 여름 수백만 명의 프랑스 · 러시아 · 영국 · 독일 청년들은 환호와 웃음 아래 전쟁터로 향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 굳게 믿었다. 길어야 두 달이면 전쟁은 끝날 거라고. 자신은 선하고 남은 악하기에, 정의는 당연히 자신들의 편이라고. 말끔한 은행원 모습의 중산층 서민이던 막스 베크만 역시 군대에 지원해 위생병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베크만이 경험한 전쟁은 모두가 꿈꾸던 ‘선하거나 화려한’ 전쟁이 아니었다. 긴 총검을 앞세운 군인들은 서로 팔짱 낀 상태의 팔랑스(phalanx) 형태를 유지하며 전진한다. 그들은 잊었던 건가? 이미 19세기 말에 분당 500발씩 쏠 수 있는 ‘맥심(Maxim)’ 기관총이 발명됐다는 사실을? 헬멧도 위장도 없이 기관총과 대포를 향해 진격하던 보병들. 1916년 7월에서 11월까지 진행된 ‘솜 전투(Battle of Somme)’에서만 무려 100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는다. 맥심 기관총에 맞아 죽어가는 병사들은 위생병 베크만에게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을 것이다. 터진 배에서 튀어나온 내장은 병사의 목을 졸랐다. 뒤틀어지는 팔다리를 잡아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위생병 베크만은 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란 피우지 말고 차라리 빨리 죽으라고.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소용없다고….”
식민지! 기관차! 만물박람회! 문명의 절정에 서 있다고 믿었던 유럽의 모든 베크만들은 ‘문명’이란 종이보다 얇은 껍질 아래 감춰졌던 인간의 역겨운 진실을 보게 된다. 튀어나온 내장, 살육, 무의미한 좌절.
참혹한 장면 볼 수 없어 눈 멀게 한 화가
어디 제1차 세계대전뿐이겠는가? 1258년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 Khan)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를 함락하는 데 성공한다. 이슬람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압바스 왕조(Abbasid)의 수도 바그다드. 100만 명 넘는 시민에 셀 수 없는 모스크, 상점, 궁전들. 그리고 왕실에 있던 ‘지혜의 집(Bayt al-Hikma)’. 『아라비안나이트』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가 설립한 ‘지혜의 집’은 당시 지구 최고의 대학이자 연구소였다. 여기엔 이슬람 · 페르시아 · 산스크리트 원서들뿐 아니라 서유럽에선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 과학 · 의학서적들이 보관돼 있었다. 종교 · 민족 · 나이 차별 없이 모든 학자에게 열려 있던 ‘지혜의 집’. 항복하라는 훌라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바그다드의 운명은 처참했다. 100만 명 가까운 시민이 학살당하고 수백 년 넘은 궁전 · 모스크들과 함께 ‘지혜의 집’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시체들의 피로 이미 붉어진 티그리스(Tigris) 강물은 강에 던져진 고서 수십만 권의 잉크로 인해 다시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의 책 『내 이름은 빨강』에 등장하는 바그다드의 화가. 모스크 탑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 화가는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벌어지는 지옥 같은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의 친구 · 스승 · 제자의 죽음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화가는 신에게 울부짖는다. 제발 저 짐승 같은 훌라구의 병사들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내가 믿는 당신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제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현실이 아니게 해 달라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내 눈으로 내 아내와 아이들의 목이 잘리는 모습만은 보지 않게 해 달라고. 하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화가는 그 모든 것을 보게 된다.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보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장면을 말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 기도를 한다. 내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보지 못하도록. 하지만 멀기는커녕 더 멀리, 더 섬세히, 더 참혹한 장면들을 보고야 마는 화가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우리 우주가 최고의 우주인가
| ▲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텐냐(Andrea Mantegna)의 1490년 작품.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죽은 그리스도’. |
군인들의 채찍, 이마를 찌르는 가시관, 손 · 발을 뚫는 무시무시한 대못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인류가 구원됐다고 믿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수난을 통해 얻는 건 무엇인가? 물론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 · 215∼276년) 가 주장했듯이 “선과 악은 그냥 빛과 어둠같이 우주의 두 가지 본질적 원소들” 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마니(Mani)는 선과 악의 독립성을 깨닫고 인도에서 힌두교를 공부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조로아스터교 · 힌두교 · 기독교 · 유대교를 혼합한 ‘마니교(Manicheanism)’를 만들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선이 악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고, 악이 선을 소멸시킬 수 없기에 인간은 이 독립적인 둘 간의 영원한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SF(사이언스 픽션)영화 ‘스타워즈(Star Wars)’에서 자주 들어본 말이기도 하다.
마니의 신은 악을 이길 수 없는 존재지만 신은 당연히 전능하고 전지하고 자비로우셔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원하지 않지만 허락해야 한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거꾸로 악을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는다면 신은 자비롭지 않다. 악을 막지도 못하고 악을 원하기까지 한다면 우리가 믿는 신이 아닐 것이다. 악을 원하지도 않고 막을 수도 있기에 우리가 굳게 믿는 신이시다.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결국 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 문제는 17세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를 통해 ‘신정론’이라 불리게 된다. 신정론의 답은 무엇일까? 우선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기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장난’ 방식을 사용해볼 수 있겠다.
‘악’이란 사실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고. ‘보지 못한다’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의 ‘부족함’이듯 악(惡)이란 단순히 ‘선(善)의 부족함’이기에 세상에 독립적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악’이라 불리든, ‘선의 부족함’이라 불리든, ‘하하 호호’라 불리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정도 말장난으로 만족할 라이프니츠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기 위해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독일의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텔레스’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악을 원하지만 결국 선을 달성하는 힘의 한 부분”이라고. 그렇다면 ‘선’과 ‘악’의 싸움은 어차피 ‘선’의 승리로 끝나게 돼 있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말인가? 역시 뭔가 찝찝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상상할 수 있는 우주의 개수는 무한이다. 하지만 실질적 우주는 단 하나뿐이다. 신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다. 그렇다면 이 단 하나의 우주는 이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주 중 가장 뛰어난 우주일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고로 결론 내린다. 악을 포함한 우리의 우주는 이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주 중 가장 최고라고.
다중우주가 존재의 정체성이라면…
| | | 우주 급팽창 이론이 가설하는 무한의 다중우주들 | | 굶주림과 학살, 전쟁과 재난, 끝없는 노동과 죽음. 이런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세상 중 최고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팡글로스 박사’(Pangloss · pan=모든, glotta=혀, 고로 ‘우주 최고의 혀놀림쟁이’)란 철학자로부터 “우리는 이미 상상 가능한 세상 중 최고의 세상에 살고 있다” 는 놀랄 만한 사실을 들은 주인공의 삶을 그린 『캉디드(Candide)』란 소설을 통해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 십자군 전쟁, 훌라구의 바그다드 학살, 두 번의 세계대전, 난징 대학살,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우리는 라이프니츠에게 물어볼 권리가 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최고’ 일 이유는 없다. 아니 ‘최고의 우주’ 란 개념 자체가 존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라이프니츠가 상상하던 ‘무한으로 가능한 우주들’ 이야말로 현대 우주론이 가설하는 ‘다중우주들(Multiverse)’ 과 같은 의미이지 않을까? 139억 년 전 빅뱅 이후 급팽창한 우주는 다중우주들을 만들어냈으며, 양자역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결과는 결국 독립적인 다른 세상이나 우주에서 현실화된다는 가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우주의 왕인 나, 지구 최고의 거지인 나, 사이비 종교를 창시하는 나, 죽어가는 누군가의 손을 비틀고 있는 나, 이미 오래전에 죽은 나. 모든 게 가능하기에 그 어느 것도 의미 없는 다중우주가 우리 존재의 진정한 정체성이라면? 과연 선과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
… 중앙SUNDAY | 제402호·김대식 KAIST교수 ·뇌 과학자 | 201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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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回 'Big Questions' 인간과 가축 |
| ▲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 에르젠(Pieter Aertsen)의 1551년 작품. ‘도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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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과 바꾼 먹이 · 잠자리 … 가축이 된 동물은 행복할까
“5m 정도 너비의 미끄럼틀로 소들이 밀려 들어왔다. 끝없이 들어오는 동물들의 광경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곧 벌어질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는, 죽음의 강 같은 그런 모습 말이다. …다리가 부러지거나 배가 찢어진 소는 물론이고 이미 죽은 소들도 섞여 있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병든 소도 마구 도살한다. 썩은 냄새를 없애려고 화학약품을 쓴다. …쥐떼가 득실거리며 쥐약과 쥐똥이 널려 있다. 쥐도, 쥐약도, 쥐똥도 고깃덩어리에 쓸려 가공기계로 빨려 들어간다.”
미국의 기자이자 소설가였던 업턴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유명 소설 『정글』에 등장하는 도축공장 장면이다. 1906년 미국에서 출판된 『정글』은 충격 그 자체였다.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인 조건 아래 일해야만 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려 했던 싱클레어.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자본의 행패, 노동자 탄압, 뭐 그런 걸 폭로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 가져온 결과는 뜻밖이었다. 영국 보수당 정치인이자 나중에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극찬의 서평을 썼다.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작가를 백악관으로 초대하기까지 했다. 책이 출판된 지 4개월 만에 식품의약품위생법과 육류검역법이 제정됐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식품의약국(FDA)이 설립됐다. 하지만 막상 싱클레어 본인은 절망하며 말한다.
대중의 머리를 자극하고 싶었는데, 결국 대중의 비위만 건드렸다고. 자신이 원하던 건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스테이크의 품질만 높이게 됐다고.
동굴 벽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오록스
| ▲ 오록스 무리. 약 1만7000년 전 그려진 라스코(Lascaux) 동굴의 벽화 |
노동자의 삶, 스테이크의 품질. 사회주의 혁명, 보수당 정치인. 뭐 다 좋다. 그런데 막상 쥐똥과 함께 가공기계로 빨려 들어간 장본인은 소들이다. 쥐똥과 함께 가공 되면 분노하지만,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깔끔한 미끄럼틀에 밀려 비명도 아픔도 없이 최고급 고기로 재탄생하면 열광하는 우리.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얘기만이 아닌, ‘그들’(소들)의 입장에서도 한 번쯤 서 볼 때다.
성은 ‘보스’요, 이름은 ‘타우’. 보스 타우루스(Bos Taurus). 소 · 황소 · 젖소 · 송아지 · 불고기 · 등심 · 안심의 본명이다. 그들은 언제부터 햄버거 빵 사이의 패티로 변신한 것일까?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13억 마리 소 대부분은 1만 년 전 터키 동남쪽 지역에서 길들여진 소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소 유전자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처음 길들여진 소는 많아야 80마리 정도였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 오늘날 ‘이슬람국가’(IS)라 불리는 원리주의 이슬람 테러단들이 인질의 목을 잘라 처형하는 바로 그곳에서 인류의 조상들은 길들여진 소의 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소의 가축화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록스’(Aurochs)라 불리는 소의 조상. 그들은 거칠고 강했다. 3m 길이에 180㎝의 신장. 그들은 석기시대 동굴 벽화에 단골로 등장할 정도로 인간의 로망이며 꿈이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 |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양피지에 쓰인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영국의 대헌장, 1225년 버전) | | 정확히 누가, 어떻게 사나운 오록스들의 목에 쟁기를 채웠으며 젖을 짜고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기 시작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고학적 근거를 기반 으로 신석기시대 첫 농부들의 업적이라고 가설해 볼 수 있다. 가축화된 소는 ‘대박’ 그 자체였다. 수백㎏의 고기뿐만이 아니었다. 맨손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물을 길러야 했던 농부에게 트럭과 트랙터를 능가하는 소의 힘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았을 것이다. 거기다 매일 수십㎏씩 만들어지는 거름. 처음엔 우연한 발견이었을 것이다. 소의 배설물이 고여 있는 땅에서 더 많고, 더 큰 곡식이 자란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위대한’ 발견. 송아지들이 마시는 엄마소의 젖을 인간 성인도 소화해낼 수 있다는 사실. 모든 인간이 처음부터 우유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천성 유당불내증(Lactose intolerance). 우유의 탄수화물인 유당(乳糖)을 소화시키기 위한 필수 효소(enzyme)인 락타아제(Lactase)의 생산이 인간의 몸에선 보통 젖을 떼는 순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약 1만 년 전부터 락타아제 생산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늘기 시작한다. 소와 생활하고, 소의 젖을 먹기 시작한 인류에게 유전적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다.
맛있고 영양가 있는 소의 젖. 그러나 젖소는 출산 직후 동안만 우유를 만들어낸다. 결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그날까지 젖소는 끝없이 임신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바로 여전히 엄마의 젖을 먹으려는 송아지들의 존재다. 송아지가 있어야 어미는 우유를 만들지만 송아지가 다 마시면 인간은 마실 수 없다. 창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유럽의 중세기 목동들은 갓 태어난 송아지를 죽여 고기는 먹고, 껍질에 지푸라기를 채워 다시 송아지 모양을 만든 후 어미 근처에 세워놓곤 했다. ‘살아 있는’ 자식을 위해 어미 소가 우유를 계속 열심히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프리카 수단(Sudan)에 거주하는 누어(Nuer)족은 지푸라기 송아지에 송아지 소변까지 뿌려 어미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송아지뿐이 아니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투아렉(Tuareg)족은 새끼 낙타의 코와 입술을 칼로 잘라 더 이상 젖을 못 먹게 한다. 뉴기니 섬의 일부 사람들은 돼지의 코를 절단해 더 이상 도망가지도, 반항하지도 못하게 한다.
어젯밤 먹은 치킨은 티라노 공룡의 친척
태어나 평균 여섯 달 정도만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13억 마리의 소. 초원을 뛰어다니던 오록스의 후손들. 하지만 가축화돼 버린 그들의 유전자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을 본능. 차가운 바람을 얼굴로 느끼며 달리고, 친구들과 놀고, 암컷과 사랑하고, 무리의 두목이 되고 싶은 본능. 그러나 대부분의 소들은 태어난 직후 어미에게서 떨어져 겨우 자신의 몸 크기만 한 우리 안에서 산다. 앞으로도, 뒤로도,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발을 쭉 펴고 평생 처음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바로 그날. 소는 죽음의 강물을 타고 이유도 모른 채 도살장의 미끄럼틀을 타게 될 것이다. 살과 지방은 소시지와 비누가 되고, 가죽은 소파 · 구두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가끔 갓 태어난 송아지의 잘 가공된 가죽은 최고급 양피지로 변신한다. 사나운 오록스 후손의 매끄러운 가죽에 겁 많고 나약한 영장류 한 마리의 후손은 펜과 잉크로 이렇게 쓰기 시작할 것이다. 행복은 절대적이며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졌다고. 자유 · 생명 · 행복권을 빼앗아선 안 된다고….
‘Gallus gallus domesticus’ 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평범한 닭. 그들의 사연 역시 소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들닭’ 이라 불리는 꿩과(Phasianidae) 소속 동물들이 길들여져 만들어진 오늘날의 닭. 약 8000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가축으로 키워지기 시작한 그들의 수는 압도적이다. 현재 지구엔 약 200억 마리의 닭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인간이 준비한 좁은 철장 안에서 인간을 위해 알을 낳고, 인간이 사랑하는 치킨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의 먼 조상이 누구였던가! 2003년 미국 몬태나주에서 발견된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 공룡의 거대한 다리 뼈. 다른 화석들과 달리 공룡의 다리 뼈에선 소수의 콜라겐 섬유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섬유에서 추출한 DNA 조각들을 통해 밝혀진 티라노사우루스 단백질 7개의 구조는 놀랍게도 어제 저녁 시원한 맥주와 함께 시켜 먹은 치킨의 단백질과 가장 유사했다. 양념치킨 · 백숙 · 깐풍기 · 닭갈비. 이들이 공룡 티라노사우루스의 살아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들이란 뜻이다.
10억 마리의 돼지, 10억 마리의 양, 13억 마리의 소, 그리고 200억 마리의 닭. 70억 명의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살고 있는 가축들이다. 거기에 비해 4만 마리도 남지 못한 사자, 65만 마리의 코끼리, 1000마리만 남은 판다, 그리고 단 한 마리도 남지 않은 오록스. 요컨대 가축이 되면 수가 더 늘어나고, 길들여지지 않으면 멸종한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해볼 수 있겠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것은 가축에겐 행운이었다고. 가축으로 진화한 덕분에 소와 돼지와 닭의 유전자들은 인간과 함께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 쉴 틈 없이 임신해야 하는 젖소. 공장화된 양계장에서 키워지는 닭. 그들에게 자신들 유전자의 세계 정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동물 고통 알아도 스테이크 찾는 인간
약 1만 년 전 수렵과 채집을 포기하기 시작한 인류. 농부가 된 영장류는 더 많은 식량을 만들어냈기에 더 많은 아이를 가졌다. 더 많은 아이들이 살아남기에 더욱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노동과 번식, 번식과 더 많은 노동이란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길들여진 동물들 역시 인간과 함께 악순환의 길에 들어선다. 동의도, 이해도, 생각도 없이 말이다. 앞으로 50년, 100년 후. 어쩌면 최첨단 유전공학과 식품공학 덕분에 알약 하나와 시험관에서 수확된 단백질 덩어리를 먹으며 살게 될 우리의 후손. 그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어볼 수 있겠다. 어떻게 햄버거 하나 만들기 위해 느끼고, 슬퍼하고, 엄마를 그리워하는 송아지를 죽일 수 있었냐고.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사람을 사람의 노예로 삼던 과거 인류의 미개함을 이해할 수 없듯 말이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문제를 이해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를 보여준다던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instein). 역시 그의 말이 맞았던 것일까? 1만 년 전부터 인간의 포로로 살고 있는 가축들. 그들의 고통과 무의미한 삶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오늘 저녁 먹을 맛있는 스테이크를 포기할 수 없으니 말이다.
… 중앙SUNDAY | 제399호·김대식 KAIST교수 ·뇌 과학자 | 201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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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回 'Big Questions' 민주주의는 영원할까 |
| ▲ 독일 화가 조지 그로스(George Grosz)의 ‘사회의 기둥’(1926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시작된 독일의 첫 민주공화국(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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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적 문제’와 불평등이 미래 민주주의 최대 위협
“그대는 우리의 인내력을 얼마나 시험할 것인가? 우리를 조롱하는 그대의 광기는 얼마나 더 오래 갈 것인가? 그대의 끝없는 뻔뻔스러움은 언제야 끝날 것인가?”
먼 훗날 소와 염소가 풀을 뜯고, 더 먼 훗날엔 중국과 러시아 관광객들이 정신없이 셀카를 찍고 있을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로마의 핵심 중 핵심이다.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원로원에서 이렇게 ‘카틸리나 탄핵’을 위한 연설을 시작한다. 루치우스 세르주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 그가 누구였던가? 뇌물을 뿌려 로마 집정관이 되려다 실패한 카틸리나는 시민들의 부채 전액 탕감을 공약으로 지지자를 모아 쿠데타를 도모한다. 음모를 간파한 키케로는 네 번에 걸친 원로원에서의 연설을 통해 쿠데타 지지 세력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민주주의의 힘. 공화국의 위대함. 지성의 영향력. 뭐 그런 걸 가르칠 때 늘 단골로 등장하는 얘기다. 물론 멋지다. 하지만 몇 가지 논리적인 문제가 있다. 우선 로마 원로원은 민주주의적 의회가 아니었다. 매년 2명씩 뽑히는 새로운 집정관을 돕는 재력가, 유명인, 그리고 과거 관료들로 구성된 자문기관일 뿐이다. ‘세넥스(senex)’, 그러니까 ‘어르신’이란 라틴어 단어에서 만들어진 ‘세나투스’(원로원)는 말 그대로 힘 좀 쓰는 어르신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아테네에서 시작된 직접 민주제의 영향을 받은 로마 공화정의 진정한 의회는 서민들로 구성된 민회(Concilium Plebis)였다. 민회는 법을 통과시키고 집정관과 원로원의 권력을 통제하며 군을 지휘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민회는 점차 어르신들과의 싸움에서 밀렸고, 급기야 “망해 가는 공화정을 재건하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거짓말로 시작한 로마제국 건립 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직접민주제 대부분 과두정치로 변화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고, 잘사는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선호하는 세상일 거다. 적어도 모든 사람이 불평등하고, 자유롭지 않고, 못 사는 세상보다는 낫다. 문제는 ‘모두’ ‘평등’, 그리고 ‘자유’의 정확한 의미에서 시작된다. 우선 ‘모두’의 뜻이 부정확하다. 아테네의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는 ‘Isonomia’, 그러니까 ‘법(nomos) 앞에 평등(iso)’은 모든 시민이 모든 결정에 참여하고 논의하며 투표할 수 있는 직접 민주제에서만 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당 · 국회 · 직업 정치인 없이 랜덤(random, 아무렇게나)으로 선택된 일반 시민들이 행정부를 담당하게 했다.
4년마다 줄 서 기다리다 도장 한 번 찍는 미국·유럽·한국식 민주주의와는 달리 두꺼운 전화번호부에서 무지막지로 이름을 뽑아 장관·차관·대통령을 임명한다는 말이다. 물론 본질적인 문제가 많은 제도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직접민주제 투표를 통해 현명한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를 추방했고 소크라테스를 사형시켰다. 랜덤으로 뽑힌 대부분의 관료들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오늘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미래를 등쳐 먹는, 뭐 그런 전통적인 포퓰리즘의 문제들 말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당연히 다양하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해야 하는 농부와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 말솜씨가 좋은 사람과 말 없는 사람. 공동체의 마당발과 외톨이. 부모 없는 고아와 잘나가는 부모 덕분에 능력 없이도 덩달아 잘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직접민주제는 그렇기에 서서히 돈 많고, 능력 있고, 말 잘하고, 연줄 많은 사람 위주의 통치, 그러니까 과두정치로 변신한다.
포퓰리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통적인 대안은 물론 대의원제다. 투표로 뽑는 대리인들을 통해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시민들의 의견을 현실적인 정책으로 평준화하겠다는 말이다. 랜덤으로 섞인 잡음 때문에 예측 불가능한 신호를 평균화해 숨겨진 정보를 찾아내는 통계학적 신호처리 방법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신호와 잡음을 정확히 구별하기 위해선 객관적인 필터(filter)가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필터에 ‘바이어스(bias)’, 그러니까 편견과 성향이 포함돼 있다면? ‘저주파 통과 필터’를 사용하면 오로지 낮은 주파수의 신호만 통과되 겠고, ‘고주파 통과 필터’를 쓰면 오직 높은 주파수의 신호들만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국회·의회·하원·상원 의원들은 편견 없는 ‘불편 필터(unbiased filter)’들일까? 물론 아니다. 역시 시간 많은 사람이 먹고살기 바쁜 사람보다 선거에 출마할 확률이 높다. 말 못하는 벙어리는 어느 국회에서도 찾기 어렵고, 하루 종일 비디오게임에 미쳐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오타쿠들이 상원의원으로 뽑힐 리 없다.
독일 화가 조지 그로스(George Grosz). 조국을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했던 그는 패전과 함께 시작된 독일의 첫 민주공화국, 바이마르공화국 (Weimarer Republik)에 모든 희망을 건다. 하지만 희망은 곧 실망으로 변했다. 그의 분노는 ‘사회의 기둥’<그림>이란 작품을 탄생시켰다. 형식적으론 완벽한 민주국가 독일. 하지만 결국 그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로스의 작품 속엔 전쟁과 침략만 생각하는 민족주의 파시스트들, 요강을 덮어쓴 언론, 술 취한 성직자, 잔인한 군인들, 머리에 똥만 가득 찬 정치인 등이 등장한다. 정치인의 가슴에 붙인 종이엔 ‘Sozialismus ist Arbeit’, 그러니까 ‘사회주의는 일자리다’라고 적혀 있다.
시민을 노예로 변하게 한 로마의 불평등
| ▲ 체사레 마카리(Cesare Maccari)의 1888년 작품, ‘카틸리나를 탄핵하는 키케로’ |
민주주의는 자동차도, 기차도, 배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전거이며 비행기다.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추락하는. 직접민주제 · 대의원제 · 대통령제 모두 언제든 과두정치와 독재, 무질서와 카오스로 변질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확률적으로 너무나도 불안전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아마도 ‘유산적 문제(legacy problem)’와 불평등이겠다. 유산적 문제란 무엇인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 운영체제가 좋은 예다. ‘무어의 법칙’(Moore’s law ·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18개월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법칙) 덕분에 컴퓨터 하드웨어는 지속적으로 빨라지지만 사용자의 경험은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거기다 유닉스(Unix) 운영체제 기반인 리눅스(Linux)나 애플의 OSX보다 언제나 더 불안전하다. 문제는 윈도의 ‘유산적 문제’ 때문이다. 오늘날의 현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과거 MS-DOS 시절의 코드들을 계속 유지하다 보니 시스템이 불안전해지고 느려지는 것이다.
비슷하게 1791년에 제정된 미국 헌법 수정 제2조를 생각해 보자.
“잘 구성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시민의 권리는 침해할 수 없다.”
이 조항이 만들어진 시기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불과 몇 년 전에 치렀고, 아직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미지의 땅들로 둘러싸였던 18세기였다. 당시를 가정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법이다. 하지만 다양한 인종, 문화, 사회 · 경제적 배경을 가진 3억 명이 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여전히 개인이 돌격 소총을 소유하고 공공장소에서 무기를 휴대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난센스다. 전통적인 유산적 문제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유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법에 ‘유효기간’을 도입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법들의 중요성에 따라 5년, 10년, 100년마다 갱신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무효가 되도록 설계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 미래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초(超)대규모 불평등이다. 대부분 평범한 농부들로 구성됐던 로마의 민회는 언제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을까? 훗날 로마제국의 직업군인들과 달리 공화정 시대 군대는 평범한 시민들의 집합체였다. 아내의 남편. 딸 · 아들의 아버지. 봄에 씨 뿌리고 늦은 가을에 수확하기 전까지 전쟁터에서 돌아와야 하는 농부들. 하지만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지중해 주변 모든 영토들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3개월의 종군은 3년, 10년이 돼 버린다. 병사들의 농가는 황무지로 변한다. 군인들은 굶는 아이들을 위해 돈을 빌려야 한다. 더 이상 빌릴 수 없으면 집과 땅을 판다. 파는 사람이 많으면 헐값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바로 ‘senex’, 돈 많은 어르신들이었다. 로마가 팽창하는 만큼 나라는 부자가 되지만 로마는 더 이상 서민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토론하고 투표하던 자존심 강한 로마인들은 비굴하고 책임감 없는 노예로 변해간다. 로마식 민주주의의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토론하고 투표하며 공동체를 책임졌던 자존심 강한 키케로 시대의 원로원 의원들 역시 점차 황제의 노예로 변해갔다. 드디어 제국의 황제 역시 보이지 않는 신에게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신의 노예가 돼 버린다. 노예성은 감염성이 있는가보다.
지나친 평등, 국가 간섭도 인간을 노예화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저서 『노예의 길(Road to Serfdom)』에서 언급했듯이 지나친 평등, 국가의 개입, 개인성의 무시는 인간을 국가의 노예로 만든다. 하지만 지나친 불평등과 국가의 외면 역시 개인을 강한 자의 노예로 바꿔 버린다. 그렇다면 미래 사회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주장대로 자본의 이득이 노동의 이득보다 더 빠르게 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의 미래를 가장 위협할 불평등의 근원은 따로 있다. 30년, 50년, 100년 후. 기계가 드디어 정보를 이해하고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의 발명도, 혁신도, 노동도 할 필요가 없다. 아니, 아무도 인간의 노동 · 혁신 · 발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차피 기계가 더 빨리, 더 완벽하게, 더 저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10개의 인공지능 회사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지구는 무한으로 부자가 되겠지만 99% 이상의 사람들은 직업도, 소득도 없다면? 지구에서 소득세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단 10명뿐이라면? 100년 후의 인공지능 시대에 과연 민주주의가 여전히 존재할지 궁금해진다.
… 중앙SUNDAY | 제396호·김대식 KAIST교수 ·뇌 과학자 | 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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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回 'Big Questions' 소유란 무엇인가 |
| ▲ 소유한 재산을 세고 있는 ‘대금업자와 그의 부인’. 네덜라드 화가 크벤틴 마씨스(Quentin Matsys)의 1514년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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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키우고 농사 짓는 순간 인간의 불평등 시작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진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의 법전. 하지만 함무라비 법전이 세워지기 이미 500년 전인, 기원전 2400년 메소포타미아 라가시(Lagash) 왕국의 우르카기나(Urukagina) 왕은 명령한다.
“아무리 농가에 탐나는 당나귀가 태어났더라도, 현장 주임이 ‘내가 주는 가격에 그 당나귀를 팔아!’ 라고 말해선 안 된다. 만약 농부가 팔지 않겠다 하더라도, 주임은 농부를 때려선 안 된다. 아무리 귀족이 농부의 집을 갖고 싶다 해도, ‘내가 주는 가격에 그 집을 팔아!’ 라고 해선 안 된다. 만약 농부가 집을 팔지 않겠다 하더라도, 귀족은 농부를 때려선 안 된다.”
신분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의 ‘재산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우르카기나의 명령. 그런데 개인은 무엇을 소유할 수 있을까? 내가 키운 당나귀? 내가 짓지는 않았지만, 내 돈을 투자해 지은 집? 노예의 몸? 내 몸? 공기? 시간? 은하수?
로크 “소유는 노력과 부족함 있어야 가능”
먼저 그 누구도 ‘우주’란 존재 그 자체는 소유할 수 없다고 가설해 보자. 그렇다면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선 소유하는 사람, 그리고 소유되는 대상, 둘 다 모두 우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져야 한다. 물론 힌두 베단타학파 같이 “소유는 내가 우주로부터 독립된 존재란 착각에서 오는 착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유는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다.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개인 소유는 독립성과 더불어 ‘노력’과 ‘부족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봤다. 모자라지 않는 것에 대한 재산권이란 무의미하며 노력 없이 얻은 건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우주에 무한의 당나귀들이 존재한다면 우르카기나의 법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노력’이란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우르카기나의 법이 세워지기 전인 먼 옛날, 사냥과 채집을 통해 살아가던 고대 인류를 한번 상상해 보자. 투자를 능가하는 이윤을 남겨야 하는 것이 사업의 기본이듯, 모든 사냥의 핵심은 투자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냥은 언제나 확률 게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포식동물들이나 아마존 원주민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면, 매일 사냥을 나간다 해도 평균 3∼5일에 한번 성공할 뿐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차별화된 전략이 가능하겠다. 표범 같은 고양잇과의 동물들은 혼자 사냥하는 것을 선호한다. 어렵지만 성공하면 사냥의 산물인 프로테인(protein, 단백질) 전체를 독차지할 수 있어서다. 반대로 인간을 포함한 많은 포유류와 육식동물들은 그룹으로 사냥한다. 사자 한 마리보다 10마리가 함께 사냥에 나서면 성공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물론 사냥에 참가한 10마리 모두가 동시에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두목이 음식과 여자 차지하던 시대
그렇다면 사냥된 먹이를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어떤 윤리적, 도덕적, 법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노력한’ 구성원들과 나눠야 할까? 자연은 법에도, 도덕에도, 윤리에도 그다지 관심없다. 윤리와 도덕은 현실과 상황에 맞게 이미 정착된 ‘진화적 안정된 전략(Evolutionary Stable Strategy, ESS)’을 사후에 우아한 문장으로 정당화할 뿐이다.
최적의 분배 전략은 참여 구성원의 수와 생산의 효율성에 따라 달라진다. 소수의 구성원을 갖고도 충분한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사자, 늑대 무리들과 같이 초기 인류의 분배 역시 강한 자의 법을 따랐을 것이다. 가장 힘센 두목이 대부분의 음식과 여자를 차지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두목이 남긴 찌꺼기를 먹는 세상. 일본에서 여전히 아버지 · 아들 · 딸이 사용한 물에서 엄마가 목욕하는, 뭐 그런 원리 말이다.
이런 ‘자연 상태’의 삶을 “외롭고 불쌍하며 불쾌하고 짐승 같으며 짧다”고 본 16세기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그는 그렇기에 페니키아 전설에 나오는 ‘레비아탄’이란 무시무시한 바다괴물, 즉 절대 권력을 가진 국가 원수가 개인의 재산과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소비하고 남은 찌꺼기를 조금 더 정의롭게 분배하는 ‘자비로운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언제나 다른 인간에게 잔인한 늑대(Homo homini lupus)였을까? 물론 아니다. 수십 명의 구성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먹이는 한정돼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식의 삶. 사냥에 성공해 ‘배 터지게’ 먹는 날도 있고, 실패해 쫄쫄 굶는 날도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오늘 배 터지게 먹어도 내일을 위해 남길 수 있을 만큼의 잉여 먹이를 생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더 큰 동물(매머드를 잡는다면 얼마나 좋을까!)과 더 많은 동물들을 (매머드 10마리를 잡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잡으면 되겠다. 더 크고 더 많은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선 10∼20명이 아닌 50∼200명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50∼200명의 힘을 모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위험한 매머드 사냥을 같이 하자고,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픽션 생산 못 해 네안데르탈인 멸종
오늘날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멸종된 네안데르탈(Neanderthal)인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자 하라리(Yuval Harari) 교수는 베스트셀러 저서인 『동물에서 신으로: 사피엔스의 짧은 역사』 에서 “픽션(fiction)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비슷한 크기의 뇌를 가졌지만, 사피엔스들만 이야기와 전설과 신화와 윤리를 꾸며내기 시작했기에 100명, 1000명, 1만 명을 모아 마을 · 도시 ·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이론이다: 매머드 그림을 오늘 동굴에 그리면, 내일 잡힐 거라고. 사냥에서 아무도 죽지 않고 돌아올 거라고.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더 좋은 어디선가에서 계속 살 수 있을 거라고. 정의와 평등은 가능하다고, 우리만이 선택된 민족이라고. 삶엔 의미가 있다고….
10명의 사냥과 100명의 사냥. 무슨 차이일까? 10명 중 가장 힘센 두목이 나머지 9명 정도는 위협하고 제어할 수도 있겠다. 두목 자신이 가장 좋은 부위를 먹고, 남은 걸 두 번째 힘센 녀석에게 주면 된다. 비슷하게 2인자는 8명, 3인자는 7명만 통제하면 굶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제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99명을 동시에 제어할 순 없다. 동시에 100명 모두가 필요한 매머드 사냥. 예전 같은 ‘위에서 아래로’ 방식의 분배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에, 홉스의 추측과는 달리 ‘자연 상태’의 인류 역시 특정 상황에선 협력과 평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만들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냥과 수렵·채집을 버리고 가축과 농업을 시작한 순간, 인류의 짧은 ‘평등’은 끝나고 만다. 이제 천문학적인 생산력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100명 모두 일하지 않아도 100명의 하루치 식량뿐 아니라 내일, 다음주, 내년에 먹을 것까지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성직자는 신에게 기도하며, 과학자는 연구하고, 귀족과 왕은 농부에게 땅과 도구를 빌려준다. 덕분에 문명과 문화가 가능해졌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불평등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완벽히 평등한 사회만이 행복한 사회일까? 플라톤이 구상한 이상적 사회에선 모두 공동생활을 한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생산의 결과물을 평등하게 분배한다. 아나키스트 이론가인 프랑스의 피에르 프루동(Pierre-Proudhon)은 “노동을 통해 개인이 직접 생산한 것 외의 모든 소유는 노동력을 투자한 다른 누군가의 것을 도둑질하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소유는 절도다!”라고 외친 것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은 플라톤 식의 공동 소유 사회를 꿈꿨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생산에 필요한 자산과 자원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2400년 전에 지적하지 않았던가? 개개인의 것은 청소하고 키우고 아끼지만, 공동으로 소유한 것은 방치한다고. 그리고 능력과 선호도가 다른 사람들의 차별화된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을 투자한 시간과 기여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분배하는 건 정의롭지 않다고. 스코틀랜드 출신 계몽주의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구성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선 개인의 소유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개인 소유의 핵심은 생산성이란 말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같은 자유론자들은 개인 소유는 생산성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도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소유가 무의미해지면 자유도 사라질까
소유와 생산성, 그리고 자유.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꼭 무언가를 소유해야 할까? 아니면 반대로 불교나 힌두철학에서 주장하듯, 소유는 행복에 부담이 될 뿐일까?
소유의 핵심은 노력과 부족함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주장한대로 인류는 어쩌면 이미 ‘제로 한계비용 사회(Zero-marginal cost society)’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사회의 모든 생산 인프라 그 자체가 거대한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시스템이 된다면, 생산의 한계비용(marginal cost)은 거의 ‘0’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더 이상 추가 노력 없이도 추가 생산이 가능한 미래사회. 정보와 책과 스마트폰이 공기와 마찬가지로 무료라면? 개인 소유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 될까? ‘시장과 경제’의 미래는 무엇일까? 개인 소유가 무의미해진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없는 사회일까?
… 중앙SUNDAY | 제393호·김대식 KAIST교수 | 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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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Big Questions' · 뇌과학자가 던진 31가지 물음 |
|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 ‘율리시스와 사이렌’(1891). 두려움에 떨면서도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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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클수록 친구가 많을까요 - 뇌과학자가 던진 31가지 물음
| | | 김대식의 빅퀘스천 /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320쪽 / 1만8000원 | | 카이스트의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이 책(冊)에서 과학은 답이 아니고 물음이라고 강조하는 듯하다. 인간의 뇌와 사고를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떠오르는 질문을 31가지나 정리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민주주의는 영원할까 등 인간의 삶을 둘러싼 31개의 커다란 물음이 답을 구한다.
지은이의 주제는 사회과학의 그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전공이 뇌과학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뇌로 움직이고, 그런 인간이 모여서 집단으로 사고하고 작용하고 반응하는 상황을 연구하는 것이 사회과학이니 말이다. 뇌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만나는 접점이다.
지은이는 홀바인의 그림,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앞의 콘스탄티노플 대리석 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인문학적 상식을 씨줄로, 뇌과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지식을 날줄로 엮어 인간사회라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짜나가는 느낌이다. 그의 태피스트리를 펴면 우리 시대의 고민이 펼쳐진다.
친구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살펴보자. ‘아, 옛날이여’라는 말처럼 인간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다. 아련한 시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도 항상 아름답게 그려진다. 하지만 실상은 기억과 다르다. 과거는 대개 현재보다 굶주렸고 폭력이 만연했다.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짧아 젊은이들이 새처럼 떠나갔다.
지은이는 이렇게 잔인한 사회에서 살아나기 위해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인지적 회계’를 발달시켰다고 설명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기억해 집단 내에서 내 위치를 파악하는 인지활동이다. 위치를 제대로 파악해야 더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고 약한 사람을 맘껏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로빈 던바 교수는 영장류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대뇌피질의 크기는 살기 위해 필요한 친구의 숫자와 비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뇌가 작은 명주원숭이는 10마리면 족했다. 영장류 중 큰 침팬지는 100마리는 돼야 삶이 옹골차진다. 인간은 150명쯤 필요한 것으로 계산됐다.
자, 그렇다면 왜 뇌가 클수록 친구가 많이 필요할까. 지은이는 뇌가 클수록 더 많은 구성원과의 관계, 말하자면 ‘갑과 을’의 관계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관계만으로 산다면 인간의 삶은 정글과 차이가 없다. 그래서 지은이가 지목하는 상호 관계의 주요 매개는 영장류의 경우 ‘이 잡아주기’다. 가상의 이를 잡아주며 상호 인지적 회계를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잡아주기’에 해당하는 것이 소통과 공감이다. 위협과 불확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존재를 이어가려면 인간은 끝없이 예측해야 한다. 내가 옳은지 끊임없이 회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다른 이를 또 하나의 나로 보고 공감하면서 소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친구라는 또 하나의 나를 통해 구원받으려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이 주제에 대한 지은이의 결론이다.
… 중앙일보 | 채인택 논설위원 | 201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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