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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507-788
제3장 이데올로지 - L’idéologie 529-541
[서] [이데올로지 Idéologie 528-]
이데올로지는 꽁디약(Condillac, 1715-1780)으로부터 나온 철학을 지칭한다. 이 철학은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데올로지의 황금시대는 ‘프랑스 학술원(L'Institut de France)’의 창설과 더불어 1795년에 시작하여, 이 창설의 둘째 학술원인 ‘도덕 정치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fondée en 1795)에서 이다. 이 아카데미에는 일군의 꽁디약주의자들로 완전히 채워졌다. 이 그룹에는 볼네(Volney, 1757-1820), 가라(Garat, 1749-1833), 신부 시에이예스(l'abbé Sieyès, 1748-1836), 장그네(Ginguené ou Guinguené, [ʒɛ̃ɡ.ne] 1748-1816), 카바니스(Cabanis 1757-1808) 등이 속하고, 반면에 라로미기에르(Laromiguière, 1756-1837), 데스뛰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 1754—1836), 드제랑도(Degérando, 1772-1842)는 회원들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 편이었고,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Le coup d'État du 18 brumaire An VIII, 9 novembre 1799)에 우호적이었다. 그 집정관(총재, le consul, 1799-1804)[보나파르트 지칭]은 이들 가운데 여러 사람을 상원에 그리고 하원(법제 심의위원)에 지명했다. 멘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이 자주 말하곤 하는 마담 엘베시우스(Anne-Catherine Helvétius, 1722-1800)의 살롱에서, 즉 오뙤이(Auteuil, 거리 이름)의 회합에서 [총재 정치에] 편들기를 또한 강화하였다. 그런데 보나파르트가 자유론자가 아니었으며, 그가 이들이 꿈꿨던 혁명의 계승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데올로그들이 깨달으면서 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보나파르트는 국가안전에 대한 범죄에 관한 법룰에 대한 자신의 기획에 이들이 적대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들 오뙤이 불평분자들(les boudeurs d'Auteuil)을 법제의원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1803년에는 ‘도덕 정치과학 아카데미’ 자체를 없애버렸다. 제국 대학을 기초하는 법령들은 이데올로그들의 적대자들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 준비자들로서는 샤또브리앙의 친구인 퐁딴(Louis de Fontanes, 1757-1821), 추기경인 보세(Louis-François de Bausset, 1748-1824), 보날(Bonald 1754-1840) 등이다. 이데올로지의 당파는 이에 전적으로 반대 입장이었다. 크리스트교의 진수(Le Génie du Christianisme, 1802)(샤또브리아의 작품)가 스며드는 것을 반대하여, 이 당파는 18세기의 시대정신을, 마담 꽁도르세(Mme de Condorcet, 1764-1822)의 살롱과 마담 르브르똥(Mme de Lebreton, s.d.)의 살롱에서, 보존하는 공간을 만들어서 모였다. 이 당파는 1804년 빅토르 모로(Victor Moreau, 1763-1813)의 [봉기]음모를 지지했다. 그리고 1812년에 나폴레옹은 국가자문회의에서 이름을 부르면서, 모로를 말레(Claude-François Malet, 1764-1812)의 음모의 책임자이라고 고발했다. 나폴레옹은 말하기를 “제일 원인들을 미묘하게 탐구하면서, 법률들을 인간의 심장[심성]의 인식에 맞게 또한 역사의 교훈에 맞게 적용하는 대신에, 인민들의 법제정을 이런 토대들 위에 기초하기를 원하는 것이 이데올로지에서 이며, 즉 형이상학적 어둠에서 이다. 이런 인식과 교훈에게 우리의 아름다운 프랑스에게 겪게 한 모든 불행들을 부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낭만주의 제도에 반대하여 추론된 분석이다.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의 정신에 반대되는 스탕달(Stendhal, 1783-1842)의 정신이다. 이 정신으로부터 나온 코메디의 한편이 최근 출판되었는데, 반볼테르주의자와 철학의 적들을 연출하였다. (530)
이데올로지는 특히 종교적 복고주의에 적대적이다. 데스뛰 드 트라시(Antoine Destutt de Tracy, 1754—1836)는 뒤삐이(Dupuis, 1742-1809)가 쓴 모든 숭배들의 기원 또는 보편종교(L'origine de tous les cultes, ou la religion universelle(1795)에 대한 뒤피이의 ‘숭배들의 기원과 요약’에 대한 분석(Analyse de l'Origine de tous les cultes, par le citoyen Dupuis, et de l'abrégé qu'il a donné de cet ouvrage, 1799)이란 글에서 “신학은 세계가 어린 시절일 때의 철학이다. 그 철학은 이법의 시대의 철학에 의해 대체될 시기이다. 그 철학은, 나쁜 물리학[자연학]과 나쁜 형이상학처럼 상상의 작품이다. 이런 학문들은 무지의 시대에 상상과 더불어 태어났으며, 그 상상의 기초로 사용된다. 반면에, 다른 철학은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이데올로지는 18세기 철학과 실증주의 사이에서 연결점에 있다. (530) (47LLA)(59QLD)
제1절 데스뛰 드 뜨라시 Destutt de Tracy 530
이데올로그들은 자신들의 승리의 기간 동안에 혁명의 고통을 겪고 난 뒤인지라, 국민교육을 다시 조직화할 필요를 느꼈다. 이들은 중심적인 학교들의 형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데스뛰 드 뜨라시(Antoine Destutt de Tracy, 1754—1836)는 이데올로지의 기본들(Éléments d'idéologie)(4권)를 썼는데, 이데올로지(Idéologie, 1801), 일반문법(Grammaire générale, 1803), 논리에 대하여(De la logique, 1805), 의지에 관한 개론(Traité sur la volonté, 1815)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1806년에 썼으나, 1811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프랑스에서는 1819년에서야 발표할 수 있었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주석(Commentaire sur l'Esprit des lois de Montesquieu, 1819)에서, 그는 통치권의 정치권력의 보장만을 목표로 하는 그런 교육에 반대하였다. 그런 교육이 종교를 이용하고, 작가들과 교수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가장 높은 양식 교육을 해야 함에도 박식과 정확한 과학들에만 머물게 하고, 철학적 탐구를 배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라시는 소위 주장하는 종교와 수학의 교육적 가치들에 대해 전혀 감명을 받지 못하였다. 그가 몽테스키외에 관해서 쓰면서 “종교의 작가가 그 종교를 맛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널리 퍼질 수 있기 위해 행해야 할 것을 찾아가는 것은 내가 보기에 아주 무용하다. 나는, 개화된 민족들에게서는 그것으로부터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이루지 못한다고 감히 생각한다”. 수학의 연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 연구는 인간의 정신을 정의롭게 하기에 더 이상 알맞지 못하다. 수학은 오류(l’erreur)로부터 [안전하게] 보장되게 하는 것을 배울 기회를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수학은 오류에 적게 종속되며 더 많이 추상적인 관념들을 추론하는 한에서, 그 기회를 더 적게 제공한다. 오히려 트라시는 물리학과 자연과학에서 특히 화학에서 선량한 정신을 형성할 수단을 보았다. (531)
그가 비판하는 교육의 잘못, 그것은 특히 산만하다는 것이다. [“]학문들의 분과들은 서로 서로 낯선 것 같다. 각각의 분과는 개별적 확실성의 원인을 갖는 것 같다. ... 모든 분과들은 각 분과들의 초기원리들 이후에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갈래로 남는다.” 넓은 의미에서 이데올로지의 기능은 통일성(l'unité)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데올로지는 트라시의 의도 상으로 보면, 제일철학과 동일하다. 이 제일철학은 실재적인 것 일반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개별대상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은 진실한 논리학과 동일하다. 이 논리학은 추론하는 것을 실천하는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하는 수단에 대한 사변적 연구이다. 또한 그것은 꽁디약의 분석과 동일하다. 이 분석은 논리학의 과학적 부분과 동일하다. 반대로 이데올로지는 형이상학과 매우 잘 구별된다. 이 형이상학은 “우리를 교육시키는데 있어서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 상상의 기술”일 뿐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데올로지가 통일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인간적 관점의 통일이고, 판단하고, 말하고, 의지하는 세 작용들의 근원들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문법학, 도덕학의 기술들이 이 근원들에 대해 이미 실천적 규칙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작용은 인간 활동의 어떤 부분에서도 이들 작용들의 외부에 있지 않다(전집, 1825, 3권 338-348쪽). (531)
이로부터 이데올로지의 기본들(4권)의 다섯째 부분들이 나온다. 소위 말하는 [첫째] 이데올로지학(Idéologie)은 인간의 [인식 기능] 역량들과 그 역량들의 구분에 대한 연구이다. [둘째] 문법학은 기호들(signes)의 연구로서, 담론을 목적으로 삼는다. [셋째] 논리학은 판단에서 확실함의 수단들에 전념한다. [넷째] 의지와 그 결과에 대한 개론은 도덕과 경제를 포함한다. 결국 다섯째 부분은 모든 자연 과학들과 추상과학들의 기본[요소]들을 연구한다(전집, 1825, 3권 350쪽 이하). (531)
[이데올로지]
소위 말하는 이데올로지학은 꽁디약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지만, 아주 다른 영감에서 나온 인간 [인식]능력들에 대한 분석이다. 이데올로그들이 매우 자주 주장하듯이, 꽁디약과 그 자신들 사이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트라시는 [인식] 역량들의 기원을 찾는 “발생학론자”가 아니다. 그래서 트라시 속에서 꽁디약의 감각론(Traité des sensations, 1754)에 대한 환원적 분석을 찾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는 꽁디약에 대해, 서로 거꾸로 된 두 가지 비난을 한다. 통일을 필요로 할 때 구별했다는 것, 통일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통일을 했다는 것이다. 꽁디약은 역량들의 분할을 남용해서 의지를 주의로부터 분리했다. 주의는 의지의 결과일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판단을 비교로부터 분리했다. 의지가 판단에 귀착하는 데 말이다. 그런데 상상 또는 반성은 우리 역량들의 사용 용도일 뿐이며, 그가 그렇게 믿었듯이 특별한 역량들이 아니다. 꽁디약은 여전히 잘못하고 있는데, 오성(l'entendement)의 이름으로 감성, 기억, 판단을 재통합하려는 점이다. 그는 이것들을 한데 묶어서 의지에 대립시킨 점이다(전집, 1권 146쪽). (532)
결국에 꽁디약은 특히 서로 서로 생겨나게 하는 일련의 역량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초보적[원초적]이고 독립적인 역량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적합한 곳이다. (전집, 1권 97). 예를 들어 그에게 있어서 감각은 판단에 앞서서 오며, 판단은 욕망을 조건 짓는다. 이렇게 그가 믿었는데, 유일한 출발점이 순수하고 단순한 감각작용이라는 것이고, 그 감각작용은 우리의 고유한 상태이외에 아무 것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고, 또한 어떤 연관도 포함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어림도 없다[모자라는 게 많다]. 우선 감각들(les sensations)은 뒤섞임 없이도 동시적일 수 있고, 그 동시성은 무매개적으로 지각된 연관이다. 게다가 기분 좋거나 또는 기분 좋지 않거나 하는 무매개적 감정(le sentiment)은 우리의 감각과 느끼는 우리의 역량 사이에 연관의 감정을 포함하고, 판단에 앞선 어떤 욕망을 부추길 수 있다. 따라서 감각, 판단, 욕망은 똑같이 원초적이다. (532)
이런 관점들에서 보면, 구체적이고 무매개적 관찰을 환원분석의 다소 자의적인 결과들에 대립시키는 경향성이 있다. 다음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트라시 자신의 이 경향은 그의 친구 카바니스(Cabanis)의 경향성과 비슷하다. 카바니스는 우리의 판단과 성향에 관한 신체[물리적인 것]의 직접적인 영향을 제시하는데, 그는 꽁디약의 분석이 가르쳐 준 순수하고 이상적이고 내재적인 발생에는 거의 만족하지 못하였음이 틀림없다. 트라시의 태도는 몇몇 문제들에서 특별나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문제들은 우리가 보았듯이 꽁디약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난점들로 제공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본능이다. 꽁디약에 따르면 본능의 발생은 루소에게는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카바니스와 트라시에게서 본능은, 소화작용의 운동만큼이나 유기체화 작업의 직접적 결과물이다. 특히 본능은, 꽁디약에게는 매우 복잡한 것일지라도 멘 드 비랑을 놀라게 했던 방식으로, 저항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외적지각의 문제를 해결한다. 저항의 감정을 우리의 의지적 운동이 만나게 되는데, 그때는 의지적 운동이 물질에 적용될 때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근육을 축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근육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해 감정에 의해 경고 받는다. … 곧바로 이 수 많은 경험들은, 우리의 감정의 현존이 사람들이 물질이라 부르는 것의 저항에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가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면서 느끼는 덕목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느끼는 이 덕목과도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 만일 우리의 의지가 어떠한 물체에도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스스로 물체들의 현존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전집, 4권 212-220). (533)
사람들은 여기서 꽁디약 비판의 깊은 이유와 이면을 보게 된다. 그 분석에 반발하는 원초적 사실들에 대한 탐구는 철학에서 미미하지만, 단순 물체들을 다루는 화학에서는 당연하다. 사람들은 영국 심리학에서 동일한 정신의 예들을 앞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브(Daube, 1763-1847)의 일반문법 입문에 쓰이는 이데올로지 시론(1803)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이데올로그들에게서도 변형된 감각의 꽁디약류의 주제에 대한 반박들을 발견한다. 그[도브] 또한 꽁디약 주제에 역량들의[각각의] 독창적 특성을 대립시킨다. 예를 들어 주의(l'attention)를 보자. 주의는 활동성과 선호에 관한 것이다. 이 주의는 수동적인 감각으로 환원할 수 없다. 기억(la mémoire)을 보자. 기억은, 기억을 동반하는 과거의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현재일 뿐인 감각의 형식일 수 없다. 결국에 만일 너비와 견고함 같은 성질이 동시에 감각작용들이고 또 물체의 성질들인 모순적인 특성을 지닌다면, 사람들은 너비와 견고함과 같은 성질들을 가지고 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 차이들 앞에서 항상 분석의 동일한 멈춤이다. (533)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트라시는 감성의 환원할 수 없는 4가지 양태를 인정했다. 즉 원(의지)하다, 판단하다, 느끼다, 추억하다(se souvenir). (533)
둘째 양태에 속하는 판단은 문법학과 논리학에 결부되어 있다. 이데올로지의 의미에서 문법학은 의미화 작용에서 기호들(signes)의 연구이다. 17세와 18세는 단어를 관념의 기호로서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이어서(예를 들어 로크) 판단으로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판단은 단어들의 종합[집합]인 한 명제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트라시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단어가 원초적으로 담론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 첫째 기호는 이미 판단을 진술하는 감탄사(l'interjection)이다. 그러고 나서 속사(l'attribut)는 주어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감탄사는 동사가 되었다. 언어의 본질적 요소는, 마치 스토아학파의 명제 이론에서처럼, 명사와 동사로 남는다. (534)
` 데스뛰 드 트라시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구축물은 착각에 빠진 구별을 근거로 하고 있다. 만일 삼단 논법의 격들(figures)과 식들(modes)이 복잡한 규칙에 따라 여럿이라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긍정명제들와 부정명제들, 일반명제들와 개별명제들을 구별한 것이다. 그런데 트라시에 따르면, 부정적인 것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명제는 관계를 진술하고, 부정은 관계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들도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속사의 외연은 항상 주어의 외연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명제에서 보자: 인간은 한 동물이다. 이 한 동물(un animal)이란 인간 종이라는 한 동물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트라시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삼단논법의 매카니즘과 더불어, 동일한 명제들로 이루어진 추론들의 결론과는 다른 형식적으로 쓰인(vi formae) 모든 결론을 배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제시하는 것은, 실재적 추론이 외연(extention)의 연관들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 사이에 내포(contenance)의 연관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외연연관이란 사람들이 미리 준비된 많은 수의 작은 전형들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고, 이에 비해 내포연관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관념들의 직접적인 검토에 의해서만 각 경우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추론은 하나의 관념이 둘째 관념을 포함하고, 둘째는 셋째를 포함하고, 셋째는 넷째를 포함하고 등등으로 표현한다. 추론이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유일한 수단은 규칙에 도움을 청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관념을 검토하는데 있다. 그런데, 만일 트라시가 말한 관념(l'idée)이 정신의 자의적인 구축작업이 아니고, 오히려 관념의 확실성이 다른 관념들의 연쇄 고리에 의존하고 동시에 그 고리가 매달려 있었던 첫째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추론은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난점 앞에 있게 된다. “그래서 이 검토가 또는 이 진술이 완전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느끼고 있다. 이것이 완전하기 위해서, 아마도 우리들 관념들 중의 한 관념에 관하여, 우리들 눈 바로 앞에서 우리가 이미 형성했던 모든 관념들을 다시 통과하게 해야 할 것이리라. 또한 그만큼이나 이 관념들이 그 자체적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쇄되고 연결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트라시의 논리학은 18세기에 애호했던 생각에, 즉 자연적 계열과 분류작업(la classification)의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 논리학은 모든 오류를 “우리들 관념의 영속적이고 지각할 수 없는 변이(variété)”라고, 여러 의미로 있을 수 있는 개인적 변양들(des variations)이라고 간주한다. 그런데 이 변양들은, 실재적인 것의 여러 접속들(les articulations)을 재생산해야 할, 일련의 관념들 속에 인위적인 것과 임의적인 것을 도입한 것이다. 이 논리학에서는, 꽁디약과 마찬가지로 트라시도 대수학적 변형에 참조하지 않고, 오히려 화학적이고 자연적인 분류에 참조하였다. (535)
이데올로지의 기본들(Éléments d'idéologie, 1801)의 넷째 색션에서는 의지와 그 효과들에 대한 논의를 구성한다. 이에 대해 트라시는 제1부에서 묘사하고, 다른 부분들을 썼다. 제1부는 의지론이며, 이것은 도덕론이다. 이것은 행동의 규칙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의 기원의 연구에, 즉 우리 존재의 진실한 조건들과 더불어, “게다가 어떤 법칙도 강제함이 없이”, 욕망들의 부합과 대립에 대한 연구에 관한 것이다(전집, 3권 372쪽). 제1부에서 트라시는 특히 사랑에 관한 장을 썼다. 이 사랑은 동일한 주제에 관해서 쓴 스탕달(Stendhal)에 차이가 없지 않다. 제2부에서는 의지의 효과들에 관해서이며, 그것은 경제학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우리의 필요들(besoins)에 대비하려는 행동의 소질에서 고려된 우리의 행동의 귀결들에 대한 검토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뿐만 아니라, 조합, 협업, 가정 등과 같은 사회의 여러 상태들이 개인에게 작동하는 방식과 대중에게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트라시는 각각에게 장점과 단점을 더 잘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거대한 프로그램을 완수하기보다, 오히려 경제학자 세이(Say, 1767-1832)에게서 빌려온 교환, 생산, 가치, 산업, 화폐, 부의 분배와 소비에 관한 고찰에 그친다. (535)
결국 이 책 이데올로지의 기본들의 제5부에서는 모든 물리[자연]과학과 추상과학의 근본적 용어들에 근거하게 된다. (535)
제2절 카바니스 Cabanis 535
의사인 삐에르 까바니스(Pierre Jean Georges Cabanis, 1757-1808)[쉰하나]는 데스뛰 드 트라시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와 도덕의 연관(Rapports du physique et du moral de l'homme 1802)(이하 연관)을 구성하는 12편 중에서 전반부 여섯 편은 1795년과 1796년에 프랑스 학술원에서 읽혔다. 전반부에서는 이 시대의 매우 생생한 희망에 대해, 즉 도덕 과학들을 구성하려는 희망에 대해 응답한다. 이 도덕과학이 물리과학과 확실하게 동등하게 하기 위하여, 독단으로부터 독립적인 도덕론에, 그리고 개인적 행복에 대해 추론적인 탐구에 속하는 도덕론에, 충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게다가 이 개인적 행복이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분해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바니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18세기에 받아들였던 습관으로 인해 (특히 엘베시우와 꽁디약과 더불어, 이 두 사람이 생리학을 너무도 몰라서) 인간 인식 역량의 연구를, 살아있는 신체와 이 역량 사이의 연결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했고, 그 습관은 이 물질[생명체]에서부터 확실성에 도달하는 모든 희망을 금지 시켰다. “몇몇 현상들의 설명을 위해 감행된 가설들의 모호함은 이러한 과학들에게 불확실한 성격을 각인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여기서 현상들은 첫눈에 보아서도 물리적 질서에 낯설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학설로서 진실한 물체인 것처럼 여기는 현상들의 현존(existence 존재) 자체가, 게다가 분별력 있는 자들(des esprits 정신들)에 의해 폐지되었다는 것을 당연히 놀라지 않았다.” 따라서 카바니스에게서 그 분석을 생리학에 연결하는 결합이란, 그 결합에 부족한 확실성을 분석에 맞추어서 대조해야 한다. 그 결합은 어떤 방식으로든 유물론을 위한 형이상학적 문제의 해결은 아니었다. 서문에서 그가 말하기를, “이 저술이 몇몇 학설을 전복하는 것을 목표 또는 결과로 삼는 것을, 그리고 자연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앞의 학설과는 다른 학설들로써 제일원인들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 또는 결과로 삼는 것을, 몇몇 사람들은 걱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 독자는 이 작품의 흐름에서, 우리가 그 원인들을 마치 우리의 탐구들의 영역 밖에 위치된 것처럼 간주하고, 또 마치 인간이 삶과 더불어 받아들였던 조사연구의 수단들에서 영원히 박탈당한처럼 간주하는 것을 자주 볼 것이다.”(인간의 신체와 도덕의 연관(1802)(1830년판 18쪽) 이것이 18세기의 어조에 속하는 불가지론이다. 이 어조는 여러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꽁트에게 전달될 것이고, 또한 꽁뜨는 인간 역량의 분석을 하며 생리학을 한 장으로 만들 것이다. (536)
카바니스의 작품 속에는 매우 중요한 실증적 부분이 있다. 그것은 6편들인데, 제4편에서 제10편까지, 나이[세대]별, 성별, 기질별, 질병별, 풍토별에 대한 지적 도덕적 영향에 관해서 이다. 나는 이 부분을 제껴 둘 것이지만, 이 부분은 본질적 관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히 세부적으로 풍부하게 다룰 가치가 있다. 이 관념은 우리 [인식] 역량들(facultés)의 기능작용 측면에서 내적 인상들에 의해 행해진 역할이 중요하다. 카바니스는 (마치 멘 드 비랑처럼) 사유 속에 유기체적 감각들의 침입을 잔인하게 체험했던 한 환자이다. 꽁디약은 이것을 총체적으로 무시했다. 꽁디약주의자들에게서는 이 오해가 본능에 관한 그들의 이론의 불충분과 연결되어 있었다. 본능에서 이들은 반사적[반성적] 판단을 보았다. 그런데 카바니스에게서는 본능은 외적 인상과는 독립적으로 있는 모든 내부적인 충력들을 지칭한다. 이것은 마치 신생아가 젖 빠는 운동, 특히 종의 재생에서 [인습으로] 묶여 있는 자발적 행동은, 카바니스가 보기에 결정적 사실이다. 이 사실은 유기체적 감각성의 현존을 폭로한다. 본능은 내적 기관들에 의해 얻어진 인상들의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이 분석가들에 따르면 관념과 도덕적 결정론이 외적 인상의 결과인 것과 같다. (537)
이 구별이 감각성(la sensibilité)의 개념을 변형시킨다. (연관 제10편, 제2섹션, 제4절 노트). 이로써 사람들은 감응성(l'irritabilité)을 감각성과 분리해왔다. 감응성이란 무의식적 성질을 의미하며, 근육섬유질이 압축에 의해 자극에 응대하는 것을 말한다. 감응성이 운동을 그 자체로 고려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감응성이 본능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예를 들어 심지어는 소화에서 일어나는 한 기관의 기능 작용과 같은, 운동의 유기조직화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운동들은 그 운동들의 체계상 반사작용의 운동에 비교할 수 있고, 마치 반사작용을 앞서는 외적 인상들이 있듯이, 그 운동은 느껴진 내적 인상을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다음 차례로 이 평행론(카바니스가 자기 주제에 부여한 유일한 증거)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믿듯이, 의식이 감각성의 예외적이고 구별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가정한다. 또한 의식이 생겨나기 위해서 인상이 자아에 의해 감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감각성은, 자아가 어떠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중요하고 규칙적인 수많은 기능들을 결정한다. 카바니스는 이런 실험[경험]들을 생각한다. 근육을 지배하는 신경이 절단 된 후에, 이 실험들은 근육의 자극이 예전과 동일한 운동을 거기서 생겨나게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는 또한 감지되지 않는 영향을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아래에서 피의 순환과 소화에 일어나는 유기체적 변화들이 갖는 그 감지되지 않는 영향 말이다. 의사이며 연금술사인 반 헬몬트(Van Helmont, 1614-1698)처럼, 감각성의 여러 중추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중추들의 각각이 일종의 부분 자아를 갖는다.
자아의 의식과 무의식적이고 자아로부터 박탈된 감각성 사이에 카바니스가 도입한 이원성(la dualité)은 멘 드 비랑의 출발점의 하나였다. 그리고 카바니스가 이 대립을 표현하는 방식(연관 제3편, 제4절), 외적인상의 불연속에 마주하여 내적 기관들 활동의 연속성은 비샤(Bichat, 1771-1802)의 두 생명들(les deux vies)의 이원성을 생각하게 한다. 비샤에서처럼 멘 드 비랑에서도, 이 이원성은 단지 환원될 수 없는 자료(une donnée)이다. 그러나 카바니스에게서 일종의 일원론(le monisme)이 있다. 그 일원론에서 그는, 마치 소화를 위의 기능이라 하듯이, 이와 똑같이 사유를 두뇌 기능으로서 간주하였다. “만일, 마치 동물의 체온이 임파선과 정자와 다른 것처럼, 사유가 본질적으로 동물의 체온과 다르다면, 사유하는 기관들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또 동물 체계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들 미친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개별적인 힘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할까?”(연관 제11편, 제1절). 다소 잘 표현된 그의 전제는 자연의 통일성의 전제이다. 비유기적이거나 살아있거나 다양한 물체는 동일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의 다양한 표출들, 즉 물리적, 생명적, 의식적 표출들은 요소들이 조합하는 여러 다른 방식에 기인한다. 따라서 물리적인 것(le physique, 신체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le morale)은 완전히 동질적인 사물[사항]들이다. 전자가 후자에 미치는 영향은 유기체 기관들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미치는 영향의 특별한 경우이다. 따라서 연관 제11편의 「도덕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미친 영향(L'influence du morale sur le physique)」에서, 그는 두뇌가 유기체 나머지 기관에 미치는 작동 영향을 다루고, 순수 생리학적 틀에서 저작의 나머지 부분도 전체처럼 유지한다. 카바니스는 일원론자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자연주의적 낙관주의에 동조자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자기 진보의 필연적이고 충족적인 조건들을 지니고 있다. “물리적인 것”[신체적인 것]은, 그가 마치 데카르트주의에 속하는 것처럼, 이상적인 것이 제거되었어야 할 혼동의 원인이다. 그것은 원리들을 포함하지만, 그 원리들 없이는 우리 성향들(nos penchants)과 우리 지성이 방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카바니스에 의하면, 분석가들의 큰 잘못은 인위적 추상작업을 통하여 도덕적인 것을 분리했다는 것이다. 만일 꽁디약이 모든 정신적 작용[조작]으로 변형된 감각작용을 만든다는 것이 합당하다 하더라도, 그는 감각작용을 따로 떨어진 자료(une donnée)로서 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뜻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 그 자료에게 하나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연관 제10편, 제2섹션, 제11절). 감각작용들은 서로 서로 독립적이면서 모든 유기적 기관들의 다른 기능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47LLG) (57QLF)
제3절 이데올로지의 영향 L'influence de l'idéologie 539
이데올로그들 가운데에는 위대한 사상가는 없었다. 그들은 평범한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낭만적 분위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18세기 말의 가장 쓸데없는 전통들을 보존하면서, 윤기 없는 문체로 가끔은 과장된 문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데올로지는 하나의 학설이라기보다 [시대를 가늠하는] 하나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스탕달(Stendhal, 1783-1842)의 전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정신은 그 시대 인간들의 세계관이었다. 이 세계관은 관찰자와 실재성 사이에 어떤 보편적 원리라도 개입시킬지라도 자기 스스로 보호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마주하여 자기 시선의 차거움을 정당하게 판단하기 위하여, [당시에] 떠오르는 계시주의와 낭만주의를 생각[숙고]하는 것인데, 이 두 사상은 역사에서,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또한 그만큼이나 철학에서도, 개인들과 사건들을 마치 보편적 실재성의 찰나들과 표시[기호]들처럼 판단하는 것이다. 이 실재성은 찰나들과 표시들에 의해 표출되고 실현된다. 그것은 마치 각각이 작은 메시아(un petit Messie)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다. 스탕달식 “자기도취”(l'égotisme)는 다소 신중한 열정들에 의해 놀라게 하는 것을 더 이상 내버려 주지 않듯이, 이데올로지의 분석도 논리에서든 또는 도덕에서든 모든 것을 행할 원리를 - 이 원리들이 실재성을 파악하지도 못하기에 - 이용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른 측면에서, 종교는 개인의 모습을 바꾸어서 나오게 해야 하는 점에서 보편적 학설의 기저(le substrat)이기도 하지만, 종교는 진솔한 개인에게서 그리고 쥘리앙 소렐(Julien Sorel)에서 지배효과의 수단이다. 만일 파름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 1839)의 파브리스(Fabrice)는 자기의 쾌락과 자기의 이익에 맞게 자신을 봉사 한 후에, 자신에게 마지막 위안을 요구한다면, 그 때에 그는 위안을 이용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위안의 도구로 쓰일 것이다. 스땅달은 사람들이 종교라고 불렀던 본질을 더 이상 믿지 않았고, 그의 작중인물 파브리스는 워터루 전투에 참여했는데도 그 전투를 믿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리의 제자리걸음에서, 일련의 장군들의 말 행진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욕구에서, 역사가들이 그 전투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쥘리앙 소렐은, 신학연구생들의 온순한 야망에서도 그리고 파리 정치의 활발한 놀이(게임)에서도, 종교를 마치 사물자체처럼 결코 만나지 못했다. 마치 꽁디약이 감각 속에서 일종의 미분적 내용물을 - 이 미분의 적분이 인간 인식능력 전체를 산출한다 - 찾았던 것처럼, 스땅달의 소설은 개인의 정열과 감정 속에서, 사회 또는 종교라는 거대한 집합 속에 내재하는 실재적인 모든 것을 찾는다. (539)
프랑스 이데올로지는 프랑스가 그런대로 잘 못 받아들인 것인데, 반면에 외국인들에게, 특히 자유 국가 또는 자유 당파들에게 어떤 광채를 발휘했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많은 이데올로그들의 친구, 특히 트라시의 친구였다. 그는 트라시와 더불어 거의 20년이나(1806-1826) 편지를 교환했으며, 이로써 쉬나르(Chinard, 1881–1972)에 의해 제퍼슨과 이데올로그들(Jefferson et les idéologues, 1925)가 출판되었다. 제퍼슨은 또한 트라시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주석(Commentaire sur l'Esprit des lois de Montesquieu, 1819)을 번역하고 출판했다. 그리고 그는 1818년 트라시에게 이렇게 편지를 했는데(제퍼슨과 이데올로그들, 184쪽), “나는 이 책 이데올로지의 기본들(Éléments d'idéologie)이 우리 학생들, 우리 국민들의 교본이 되기를 바란다. 또 이 책이 우리가 많은 오류를 범했던 과학에게 우리나라에서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540)
이탈리아에서 꽁디약은 한 제자, 이탈리아 철학자인 소아베(Francesco Soave, 1743–1806)를 발견했다. 그는 꽁디약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파르마(Parma)에서 만났다. 소아베의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Istituzioni di logica, etica e metafisica, 1791)은 몇 가지 점에서 꽁디약의 교육을 변형한 것이다. 그는 반성을 감각의 판명한 인식의 근원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데스뛰 드 트라시에 앞서서 그는 촉각이 아니라 저항의 감각작용이 외적 세계의 존재를 믿게 하는 근원이라고 주목했다. 지오이아(Melchiorre Gioia, 1767–1829)는 이탈리아 경제학자이며, 그의 자유사상 때문에 여러 번 추방되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경제학 원론(Elementi di filosofia, 1818) 속에 본능에 관한 트라시와 꽁디약의 주제들을 도입했다. 그는 꽁디약 학설의 단순주의[단순화한 경향]을 포기했으며, 마치 관념들의 형성 작업에서 감각작용의 분명한 역량들처럼 판단과 반성의 지위를 알게 했다. 로마그노시(Gian Domenico Romagnosi, 1761–1835)는 이탈리아 법률행정가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1827년에 성스런 정신은 무엇인가?(1827)를 출간했다. 이 책은 이데올로지와 약간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는 소위 말하는 감각작용 이외에도 논리적 의미와 연관들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의미는 판단과 반성과 혼동되지 않는다고 한다. 실용주의에 앞서서 전개한 그는 관념의 진리를 관념의 대상과 닮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관념과 대상 사이에 필연적인 대응 법칙에 의해 정의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델피꼬(Melchiorre Delfico, 1744-1835)는 자유주의자(un liberal)이다. 그는 1796년 [보나파르트에 의한]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해방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모방감각에 관한 탐구(Ricerche sulla sensibilita imitativa, 1813)를 썼으며, 유기체적 완전성에 관한 두 편의 회고록(1814-1818)을 썼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을 “모방 동물”(un animal imitateur)이라 정의했고, 모방 속에서 지적 도덕적 진보의 원인을 깨닫게 했다. 이탈리아 철학자인 보렐리(P. Borrelli, 1782-1849)는 1824년과 1825년에 두 권의 책, 사유의 자연 철학입문(Introduzione alla filosofia naturale de pensiero, 1824)과, 사유 발생의 원리들(Principii della genealogia de pensiero, 1825)를 출판했다. 그는 꽁디약에 반대하여 세 가지 인식 역량들의 환원불가능성을 옹호했다. 감각작용이란 사유의 단순한 기회원인이며, 판단이란 차이에 대한 지각작용이며, 의지란 감각작용으로부터 구별된 것이 판단이듯이 판단으로부터 구별된 효과(원)인이다. (541)
비관주의 시인인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i, 1798–1837)가 행한 이데올로지와 친근성이 있는 사유는, 이 학설(이데올로지)이 비관주의와 이상한 인접성이 있음을 밝혔다. 그의 철학적 일기인 지발도네(Zibaldone di pensieri, 1817-1832) 속에서 레오파르디는 자신이 이데올로그들과 밀접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자들(I nuovi credenti)와 취소 또는 철회(Palinodia)에서는 “새로운 신앙자들”(nouveaux croyants) 즉 전통주의자들에 대해 생생한 풍자를 행했다. 그런데 이탈리아 이데올로그들, 특히 베리(Pietro Verri, 1728–1797)와 지오이아(Gioia, 1767–1829)는 쾌락이 유일한 선이라고 인정하고, 동시에 쾌락은 고통의 끝남에서만 있다고 인정했다. 게다가 베리는 고통과 괘락의 성격에 관한 담론(Discorso sull'indole del piacere e del dolore, 1773)를 썼다. 이로부터, 쾌락들이란 드물다는 것에 관한, 그리고 쾌락들의 착각적(illusoire 환상적)인 성격이라는 것에 관한, 레오파르디의 모든 비관주의적 주제가 나오고, 이와 동시에 인간에게서 진리를 발견하게 하면서, 인간을 비활동적이고 열정 없는 이기주의자로 만드는 철학적 분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에 관한, 그리고 자발적이고 본능적인 삶의 착각들(환상들)에로 회귀의 필연성에 관한, 그의 비관주의적 주제도 나온다. (541) (10:10, 47LLH) (11:09, 57QLF)
* 참고문헌 Bibliographie 541
F. Picavet(1851-1921), Les Idéologues, 1891
G. Gusdorf(1912-2000), Introduction aux sciences humaines, 1960, p. 271-331.
I.
Destutt de Tracy(1754—1836), Oeuvres complètes, 1924-1925.
Ch. Chabot(s.d.), Destutt de Tracy, Moulins, 1895.
II.
Oeuvres philosophiques de Cabanis, pres. par Cl. Lehec et J. Cazeneuve, 2 vol., Paris, 1956.
Dr C. A. Pierson(s.d.), 프랑스 혁명 다음날에 의학연구 개혁의 선구자(Un précurseur de la réforme des études médicales au lendemain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1946).
*
1754 데스뛰 드 트라시(Antoine Destutt de Tracy, 1754—1836), 전집(Oeuvres complètes, 1924-1925
1851 삐까베(François Picavet, 1851-1921), 이데올로그들: 1789년 이래 프랑스에서 관념들의 역사와 과학 철학 종교 이론들의 역사에 관한 시론(Les Idéologues. Essai sur l'histoire des idées et des théories scientifiques, philosophiques, religieuses, etc. en France depuis 1789, 1891)
1857 샤보(Charles Chabot 1857–1924), ENS, 철학교수자격, 리용대, 논문은 많은데, 뜨라시에 대한 글은 없다.
1912 귀스토르프(Georges Gusdorf, 1912-2000), 인간과학의 입문(Introduction aux sciences humaines, 1960)
1915 카즈뇌브(Jean Cazeneuve, 1915-2005) 프랑스 사회학자. ENS출신 철학교수자격통과 하버드 대학에 문학박사.
1921 르엑(Claude Lehec, 1921–1968), 철학자, 트라시 작품 편집자, 더 이상의 정보가 없다.
?-? 샤보(Ch. Chabot, s.d.), 데스뛰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 1895)
?-? 삐에르송(Dr. Carl Antoine Pierson. s.d.), 프랑스 의사. 프랑스 혁명 다음날에 의학연구 개혁의 선구자(Un précurseur de la réforme des études médicales au lendemain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1946). (47LLH) (재정리, 57QLA)
(12:04, 57Q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