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노동법 역사에서 3대 사건을 꼽아보자. 먼저 1953년도에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 이른바 노동3법의 탄생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최저임금법, 산업안전보건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이 줄줄이 새 살림을 차림으로써 지금은 노동관계법의 숫자가 무려 32개에 이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노동3법이 1997년도에 44세의 나이로 수명을 다하고 폐지된 후 다시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과 근로기준법으로 재 제정된 사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건들의 한 가운데에는 항상 개별적 근로관계법의 어머니 격인 근로기준법이 있었다.
근로기준법의 탄생
우리나라에서는 미군정시대인 1946년도에 이르러 처음으로 아동노동법규나 최고노동시간에관한법률처럼 개별적인 근로조건에 대한 보호 법규가 만들어졌다. 1948년도에 헌법이 제정되고 뒤이어 수립된 정부는 이를 기초로 국가의 법체계를 정비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6·25 전쟁을 맞아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에 다시 진행되었는데 이 때에 근로기준법도 근로조건에 관한 통합법전으로 선을 보이게 된다. 한편 미군정 시기처럼 근로조건별로 단행법을 만든 예는 독일이나 영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해고제한의 법리나 근로시간단축 등 법 개정 논의가 있을 때마다 이러한 방법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있어 왔다.
제정 근로기준법의 특성
우리의 근로기준법은 맥아더 군정의 노동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일본의 노동기준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따라서 그 당시의 산업사회를 생각해보면, 다소 이론적·이상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최초의 헌법에 이익균참권이 들어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법조계 어른들의 생각은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성향은 근로기준법을 제정한 입법의 주역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쟁의 여파로 국민생활이 곤궁해져서 사회보장이 절실히 필요한데도 정부에 돈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이러한 사회적 보호의 염원은 기업의 부담이 되어 재해보상, 유급주휴일, 유급 월차 및 생리휴가 등의 형태로 근로기준법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최초의 근로기준법은 좋은 의도에서 여러 가지 선진적인 제도를 마련하였지만 당시로서는 기업의 능력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법은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며 일부 사업주에게 아직도 그러한 전통이 계승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사회 보장 차원에서 제공된 여러 제도는 결국 임금체계만 복잡하게 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제도개선의 문제가 나오면, 보호의 수준을 높여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노동시장의 사정이나 실현가능성을 고려하자는 의견을 개혁적이지 못하다고 매도하시는 분들이 되씹어 봐야 할 경험이다.
1987년도의 민주화운동까지의 변천
우리나라는 산업화의 길을 걸으면서, 특히 1961년도부터 1987년도 상반기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그야말로 모든 역량을 투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본권을 양보해야 했고, 분배의 목소리는 제약을 받았으며, 집단적노동관계는 위축되었다. 1980년대까지도 정부가 노동조합에 대해 회계조사권을 행사하였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반해 개별적 근로관계 즉 근로기준법에 정한 근로조건은 상대적으로 향상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피면, 1961년도 개정에서는 해고예고제도와 퇴직금제도가 도입되었고, 1963년도에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제정되었으며, 1974년도 개정에서는 임금채권우선변제제도가 도입되었고, 1986년 말에는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다. 1980년도에 변형근로제가 도입된 것을 뺀다면 개별 근로자의 법정 근로조건은 꾸준히 강화되어 왔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경제발전에 따라 부분적으로나마 분배의 여력이 커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단적 노동관계를 억압함에 따라 높아지기만 하는 근로자의 불만을 줄여보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 25년에 걸쳐 이루어진 억압적인 노동정책 때문에 우리의 산업사회는 톡톡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1987년도에 있었던 민주화운동 이후 15년 이상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의 노사관계는 그 질서를 완성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민주화 운동 이후
1987년 6월29일 이후, 집단적 노동관계는 물론이고 근로기준법에 의한 보호도 비약적으로 강화된다. 먼저 1987년도 개정에서는 임금채권최우선변제제도가 도입되고, 1980년도에 공포분위기 속에서 도입되었던 변형근로시간제가 폐지되었다. 아울러 1989년도 개정에서는 법 적용범위를 넓히고, 임금채권 우선변제의 범위와 휴가일수를 늘렸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주당 근로시간을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한 것이다.
이 무렵에 노동부는 1주일은 40시간을 일하고 다음 1주일은, 44시간 넘는 부분에 대해 연장근로수당 없이, 48시간을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격주 5일 근로제를 시도한 적이 있다. 주당 44시간제의 도입 목적은 결국 휴일을 늘리자는 게 아닌가? 예상과는 달리, 경영계는 토요일에 4시간 근무를 위하여 냉·난방 등 시설의 가동이 경제적이지 못하다는 노동부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쉽게 찬성할 줄 알았던 노동계가 ‘6일 일하는 주의 토요일에 48시간을 일할 경우, 주당 기준시간인 44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에 대한 대가인 2시간분의 가산수당을 포기할 수 없다’는 논리로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사용자와의 합의가 없으면 1주일에 44시간을 근무하게 되어, 토요일에 4시간 동안 일하기 위해 출퇴근을 해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점’, ‘일단 토요일에 출근하면 연장근로를 하게될 가능성이 높아져서 근로시간 단축의 효과를 거둘 수 없는 점’과 ‘근로자측이 찬성하는 경우에만 추가로 가산수당이 없는 격주 5일 근로제로 갈 수 있다는 점’ 등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야말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노동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는데 그 후 노동계가 그 당시 주장하였던 것처럼 단체교섭을 통해 가산수당을 받는 조건으로 주 5일 근로제를 확산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아쉽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만약 그 때 노동계가 경영계와 합의를 하였다면 우리 사회는 격주 5일제가 빠르게 확산되었을 것이고, 이를 징검다리로 하여 지금쯤은 자연스럽게 주 5일 근로제가 정착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한편 1987년도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이, 1990년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이, 1991년도에는 사내근로복지기금법이 각각 제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개별적 근로관계에서 보호의 가짓수를 늘리고 강도만 높였지 전체적인 체계를 바꾸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다. 1953년과 그 40여년 후를 비교하면, 산업 현장은 상전벽해가 되었는데도 근로기준법은 그 옛날의 틀과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