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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허허벌판에서 비맞기와 벼락맞기
본문: 시54:1-7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54편 말씀 중심으로 허허벌판에서 비맞기와 벼락맞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허허벌판에서 비맞기와 벼락맞기.
이전 동독에 속했던 지역에 에어푸르트라고 하는 독일의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 스토테른하임이라고 하는 한 마을이 있는데 언덕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허허벌판을 끼고 있는 마을입니다.
그 마을 한 가운데, 마을 한쪽에 루터스타인이라고 하는 돌멩이가 하나 있어요. 스타인이 독일어로 돌인데 루터스타인 하면 루터의 돌이 됩니다.
루터의 돌이라고 이름 붙여진 기념비가 하나 있습니다.
그 기념비가 세워진 그곳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루터의 돌이라는 별명이 붙었는가.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1505년 시절, 광부로 일하시는 아버지께 방문을 했다가 학교로 친구와 함께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그 스토테른하임이라고 하는 그 마을의 벌판에서 비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비를 피해서 나무 밑으로 들어가서 친구와 함께 비를 긋고 있다가 벼락이 떨어지면서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그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그 참담한 광경을보고 있던 루터가 성 안나여,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나를 지켜주시옵소서. 내가 이제 사제가 되겠나이다. 수도사가 되겠나이다.서약을 하고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그리고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고 그리고 수도사가 된 이후에도 그 벼락을 맞아 죽는친구의 모습을 마음에 기억하면서 항상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어떤 수도사보다도 자주 고해성사를 하는시간을 갖게 됐다고 해요. 누구보다도 많이 참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루터야, 좀 죄를 한꺼번에모아서 갖고 오면 안 되겠냐. 너무 그렇게 자주 와서 나한테 죄를 고백하지 말고 좀 모아서 갖고 오너라. 라고 얘기할 정도로 이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이 큰 문제였기 때문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기치를 내걸고 종교개혁을일으키게 된 그 발단이 바로 이 스토테른하임이라고 하는 벌판에서 일어났다.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스토테른하임이라고 하는 벌판에서 비를 맞았다.
그런데 그 비를 맞고 있었으면 벼락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에요.
비를 피하기 위해서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가 친구가 죽습니다.
이 루터의 사건을 무슨 루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루터의 심리학적 변화를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게 아니라 그냥 한번 비유적으로 갖고 와봅니다. 비유적으로.
비유적으로 갖고 와보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삶, 우리의 인생, 우리 하루하루 삶은 벌판에서 비맞기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는 것이에요.
비가 뭐냐? 벌판에서 비맞기라는 게 뭐냐?
허허벌판이라는 것은 비를 만나게 되면 비를 피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꼬박 맞을 수밖에 없어요.
인생의 벌판에서 내리는 비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에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모르고 있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참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는 것이 주님의 고백이었어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주어지는 모든 사소한 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어저께 하나님을 낚는 어부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면서 현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찌를 얘기했어요.
그 찌를 마음에 두지 말고 그 찌가 움직이게 되는 이유가 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물속의 물고기 같은 하나님을 찾아들어가라.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찌를 움직이십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비처럼, 장대비가 돼서 내리고 있는 벌판이에요. 벌판.
나무에게도 뜻이 내립니다. 집안에 키우는 강아지에게도 뜻이 내립니다.
산위에도 하나님의 뜻이 비처럼 내리고 바다에도 하나님의 뜻이 비처럼 내려서 물속에 수많은 물고기가 살고 해초가 삽니다.
하나님의 비가 장대비가 돼서 내려오는 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러므로 피조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장대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맞으면서 사는 자들이에요.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섭리를 장대비처럼 허허벌판에서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비를 맞듯이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며 살아갑니다.
오직 인간에게만은 특권을 주셨어요.
그 하나님의 장대비와 같은 섭리와 인도하심과 허락하심을 스스로 결단해서 받아들이도록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나무는 5월에 피는 꽃들은 그냥 하나님의 섭리를 선택 없이 받아들여요.
그러나 사람에게서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삶의 환경을 하나님의 섭리와 뜻으로 자기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수용하도록 결단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자유의지라고도 말하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환경들, 사소한 일까지도 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시는 것이다. 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요,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연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반대 입장에 서있는 겁니까?
그 비를 피하는 거예요.
비를 피해서 허허벌판에 나무 하나 발견하고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비를 피해버리는 것이에요.
주어지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고 내가 극복하려 하고 내가 개선하려 하고 내가 그것을 판단하며 거부하는 것입니다.
벼락 맞아요. 벼락 맞아요.
오늘 시편 54편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다윗이 십광야 수풀에 숨어있을 때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 십광야 수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바로 앞에서 그일라라고 하는 도시가 있는데 그 그일라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요.
그러니까 다윗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블레셋사람을 물리치고 그일라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그일라에 있다고 하는 소식을 사울 왕이 듣고 내려온다고 하자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일라사람들이 나를 사울에게 넘겨줄까요? 안 넘겨줄까요?
그때 하나님께서 넘겨줄 것이다.
그일라를 구해줬는데도 불구하고 그일라사람들이 배반을 합니다. 다윗을 넘겨주려고 밀고를 해요.
이때 다윗이 피한 곳이 십광야입니다. 십광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요.
십광야에 있다는 사실이 사울의 귀에 들어가자 사울 왕이 쫓아오고 다윗이 그 십광야에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바로 그 배경을, 도망을 가려고 하는데 블레셋군대가 또 쳐들어오자 중앙에서 사울 왕에게 전갈이 와요.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왕이시여 빨리 와서 이 난국을 수습해주세요.
그래서 다윗을 쫓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가게 됩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오늘 시편 54편이 쓰여진 것이에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오늘 이 표현들이 약간 불경스럽다 할 정도까지 그리고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라고 느낄 만큼 표현들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표현들이 나타납니까?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이시니이다.
그리고 5절 보면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신다. 이런 말 합니다. 악으로 갚으신다.
하나님께서 악으로 악인에게 갚으십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의 기준을 세우셔서 악인을 심판하실지언정 악인에게 하나님이 악으로 갚으십니까?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행위 중에 악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그리고 내 원수에게 누구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도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도 아니고 내 원수에게 하나님이 악으로 갚으시고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주님이 성실하셔가지고 기껏 하는 일이 내 원수를 멸하시는 겁니까?
자, 이렇게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됐어요.
그러면 다윗이 이 시를 지은 똑같은 사건, 그 사건에서 사울이 뭐라고 얘기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다윗이 십광야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발한 자들에게 사울 왕이 뭐라고 하느냐면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바로 앞에 그일라에서 그일라사람들이 사울 왕에게 다윗을 넘겨주려고 밀고 할 때 또 사울 왕이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러니까 다윗을 내 손에 넘기셨도다.
다윗은 다윗대로 하나님은 나를 돕는 하나님이고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이다.
사울은 사울대로 하나님이 다윗을 내 손에 넘기셨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나에게 다윗이 숨겨진 곳을 밀고하였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럼 누구의 하나님일까요?
내 하나님입니까? 내 원수의 하나님입니까?
원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원수지요.
그럼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누구의 하나님인 걸 가려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에요.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
3절에 낮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한 자들이 바로 하나님에게도 원수에요.
그러면 사울도 여호와하나님이 다윗을 나에게넘기시고 내 편이 돼서 다윗을 밀고한 자들을 여호와께서 복 주실 것임을 선언하고 다윗은 다윗대로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으로 내생명을 지키시고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말하고 있는데 누가 진짜 하나님편이요 하나님이 누구의 편일까?
어떻게 가려내겠습니까?
내 앞에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두지 아니하였음이다가 기준이라는 거예요.
내 앞에 하나님을 둔 자가 있고 두지 아니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도 하나님얘기하고 다윗도 하나님얘기 하는데 누가 하나님을 앞에 둔 자고 하나님을 두지 않은 자인가를 어떻게 우리가 구분하겠습니까?
사울과 다윗을 보면 알아요.
지금 다윗이 뭐하고 있어요?
10년 동안의 도망자세월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쫓겨 다니면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3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죽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다윗이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라고 느끼면서 시기심이 발동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앞에 두지 아니한 자에요. 다윗은 하나님을 앞에 둔 자에요.
그러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무엇이?
사울에게 하나님이 왕권을 주셨습니다. 사울이 원한 것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고 꿈꾼 것도 아니에요. 요즘 말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주셨어요.
주신 왕권이 다윗이 쳐들어와서 뺏은 것도 아니고 뺏겠다는 것이 아니고 뺏으려는 마음도 먹지 않고 있는데 사울이 자기의 왕권을 지키려고 다윗을 향해 칼질을 합니다.
이제 정의를 내려요.
누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은 사람이냐?
자기 삶의 기반을 자기 스스로 확고하게 하려고 행동하는 자, 그 행동 속에는 남을 해치는 것까지 포함을 시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삶을 확고하게 다지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지 않는 자요,
허락하시는 삶 속에서 장대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지 않는 자요.
비를 피하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섭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이 삶의 환경을 피하고 거부하고 내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가려고 나무 밑에 들어가는 자, 비를 피하는 자, 섭리의 비를 피하려는 자.
그리고 결국 사울은 벼락을 맞게 됩니다. 그 최후가 비참한 심판의 최후를 맞게 됩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떻습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하나님께 따질 수도 있어요.
하나님, 우주를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허락지 아니하시면 떨어지지 아니하는 그런 주권의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울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까?
골리앗을 맞서듯이 맞설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 왕, 사울 왕에게서 장대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뜻을 본 것입니다.
저 사울 왕이 나를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세운 왕이다.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왕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시련인 줄 알고 받아들이고 도망합니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죽이지 않습니다. 세 번이나. 세 번이나. 왜?
하나님의 섭리가 세운 왕인 것을 믿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고스란히 다 맞는 거예요. 다 맞는 겁니다.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이시니이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도와서 기껏 도운 결과가 도망자입니까?
왜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사울 왕의 손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십니까?
이게 구원이라 할 수 있고 돕는 거라 할 수 있어요?
근본적으로 나를 쫓아오는 사울 왕을 죽여주셔야지.
그러나 다윗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세운 저 사울 왕이 나를 쫓아온다는 이 현실을 도망을 가면서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다.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낙헌제로, 낙헌제라는 건 뭡니까?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거예요.
낙헌제. 기쁠 樂자입니다.
기쁨을 드리는 것이에요. 나의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는 자들의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사울도 똑같이 여호와하나님을 부릅니다. 어떻게 부릅니까?
자기가 자기의 삶을 구축하고 공고히 하기 위하여 액션을 취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자기 멋대로 갖다 끌어 붙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어지고 있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수용하며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이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는 자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악으로 갚는다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악으로 갚는다는 얘기는.
사울 왕이 나를 원수로 취급해요.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요. 성실하신 하나님, 誠實이 여러분, 뭐지요?
한자로? 말씀 言변에 이룰 成자에 열매 實자에요.
그걸 그대로 풀이하면 되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주신 게 있어요. 그걸 하나님이 이루실 거예요.
그걸 하나님이 이루셔서 열매가 맺혀지면 그게 사울에게는 악이에요.
하나님이 악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나와 사울이 원수지간에 있기 때문에
내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주어지는 내게 허락하시는 최선은 내 원수에게는 저절로 최악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악을 행하시는 게 아니에요.
사울에게 악을 행하시는 게 아니라 내게 최선을 주시는 것이 상대적으로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최악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에요.
저 사람이 왜 나를 원수로 취급을 할까?
결국 하나님께서 나에게 최선을 베푸실 텐데. 왜?
성실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십자가를 통해 확증해주신 그 사랑, 내가 삶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표현해내겠다는 겁니다.
내가 외아들까지 너희에게 주면서 사랑한 내 사랑을 표현해내겠다는 약속이 십자가에요.
어떡하든지 내가 너희를 사랑하겠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합니까?
내가 갖고 있는 세상의 기준이 있어요.
에이, 하나님 이건 사랑이 아닌 거 같은데요. 이런 식으로 주셔야지요. 저런 식으로 주셔야지요. 이게 뭡니까?
나무 밑에 비를 피하러 들어가는 겁니다.
벼락 맞아요, 여러분. 그게 벼락맞는 장소에요. 그게.
하나님의 섭리의 장대비가 내려서 지금의 현실이 주어졌어요.
감사제와 낙헌제를 드리세요.
그대로 수용하는 겁니다.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는 거예요.
내가 그 비를 피하려고 액션을 취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나면 그 수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되어있으면 십자가 붙잡고 주어지는 현실에 대한 내 판단이 제로가 되어서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돼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거하실 수 있으면 하나님의 이어지는 은총의 역사, 창조적인 인도하심이 계속 진행될 것이에요.
우선은 감사제와 낙헌제로 현실을 장대비를 맞듯이 어디서?
허허벌판에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허허벌판에서 장대비를 맞듯이 지금의 현실을 고스란히.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건 누가 나를 걸고넘어지건 누가 나를 지금 사기를 쳤건 그대로 수용하며 감사해버리세요.
자식의 문제건 돈 문제건 건강의 문제건 무조건 낙헌제와 감사제로 수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들,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주어지는 현실을 장대비를 들판에서 맞듯이맞는 대신에 나무 밑을 찾아서 피하려고 도망 다니는 사람들, 어떡하든지 내가 스스로 내 삶을 공고히 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그리고 불평불만인 사람들, 다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현실이 어떠신지 저는 몰라요.
그러나 한 가지 알아요.
어떤 모양의 현실이든지 하나님의 섭리의 장대비입니다.
그리고 비를 피하려하지 마시고 감사를 드리며 그 비를 고스란히 다 맞고 수용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안에 들어가시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들이 크고 비밀한 일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계속 진행이 될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고 내 스스로 내 삶을 걱정하게 만드는 이 죄악된 하나님을 앞에 모시지 않는 나를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자로 고백하는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은 허허벌판에서 장대비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비를 맞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피하려하지 말게 해주세요.
지금 주어진 현실이 어떠하든지 감사제를 드리며 낙헌제를 드리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을 믿으며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시며 이어지는 크고 비밀한 창조적인 섭리들을 펼쳐나가시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오늘도 그러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에서 장대비를 피하게끔 만드는 나의 죄악된 모습을 죽은 자로 확인하는 아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