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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스러운 승리
(창 32:13-32)
오늘 이 본문 말씀 중심으로 '염려스러운 승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염려스러운 승리!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해서 이긴 장면. 너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씨름장면에서 참으로 염려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왜 이렇게 염려가 클 수 밖에 없느냐 하면, 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이 이야기를 우리가 기도의 아주 전형으로 생각을 합니다. 모범적인 기도의 전형으로 간주합니다.
적극적인 기도, 끈기있는 기도 그리고 배수진을 치고 후퇴가 없는 하나님과의 겨룸 그래서 기어코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내는 그런 기도.
그래서 이 야곱의 얍복강가에서의 하나님과 씨름의 마음가짐과 자세 이것이 바로 기도다 이렇게 생각하고 더군다나 싸움이 끝났을 때 다리를 절고 있었고 해가 뜹니다. 마치 전쟁영화에서 치열한 야간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고 정말 상처와 함께 승리를 경축해주기 위해서 인것처럼 태양이 떠오르는 웅장한 그런 느낌이 드는 장면이라서 교회사를 통해서 찬사에 찬사로 이어지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한번 물어 봤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한번 물어볼까요?
창세기 28장 15절에 보면 여러분 기억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런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너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20년 전에 라반의 집으로 가고 있는 가운데 들판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다.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땅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한번 물어봅니다.
야곱이 이렇게 환도뼈가 골절될 정도로 치열한 하나님과의 공방전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에서에게 야곱이 죽게 내버려 두셨을까? 또 하나님은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분이 오늘 씨름하고 있는 그분과 같은 분이라면,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씨름을 벌이셨을까?
이 씨름을 야곱이 먼저 한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이 와서 야곱에게 씨름을 겁니다. 시비를 걸어서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씨름을 걸어 오신 겁니다.
왜 걸어 오셨을까?
하나님은 그 약속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지키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거나 아니면 이제는 마음이 변해서 야곱을 에서의 죽이려고 하는 그 살기등등함으로부터 지키시려는 마음이 변하셔서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야곱이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려고 이렇게 치열한 싸움을 했어야 했을까?
여러분, 또 한번 물어봅니다.
도대체 만약에 하나님이 이겼다면 그럼 그 이김의 결과는 뭘까? 축복을 안주시는 걸까?
자, 하나님이 져서 야곱에게 축복을 줬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겼으면 야곱이 졌다면 하나님이 축복을 안주셨을까?
도무지 오리무중입니다. 이거 이렇게 쉽게 그냥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면 된다 이렇게 해버릴 본문이 아닙니다. 조금은 신중하게 생각을 하셔야 되요.
그냥 졸라서 축복을 따냈다고 하니까 그리고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새로운 신분을 주셨다. 복된 삶을 시작하게 하신다. 이렇게만 생각을 해갖고는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말. 이겼다는 동사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붙어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이 말.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그렇게 좋아요?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이 붙은 자들이 하나님께 행한 것을 여러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저는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이 순간에 영적인 유전자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흘러 들어갔다고 봐요.
그 영적인 유전자가 뭡니까? 하나님을 이기는 겁니다.
아주 단적으로 얘기해 볼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성전정화를 합니다. 성전정화를 할 때 그 성전을 정화하게 된 배경이 있지 않습니까? 대제사장들이 더러운 이익을 탐하면서 성전 자체를 더럽혀버렸습니다. 성전에 장사꾼을 끌어 모으고 거기서 커미션을 받아 먹으면서 성전 안에서 장사할 것을 허락하고 자기가 갖고 있는 제물 검사권을 남용해가지고 장사꾼들과 함께 이권을 챙기게 됩니다. 이것을 아시고 정화를 해버리십니다.
자, 이제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그대로 묵과해버리면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대제사장의 자리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자기의 이제까지의 복된 삶 돈 많이 벌고 유복한 그런 삶을 유지해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결국은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완전히 승리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광야 40년을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하나님이 역정을 내시면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고 20살 이상 되는 장년 전체를 다 사막에서 죽여 버리십니다.
목이 곧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이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이기고, 하나님의 사랑의 충고를 이기고, 자기 속에 있는 본능을 주장하고, 자기 속의 욕구를 주장하고, 자기들의 기준을 관철시키면서, 자기들이 기준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그 기준이 이루어지지 않고 충족되지 않게 되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이겨 먹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다 멸절당해버리고 맙니다. 이게 이스라엘 이예요.
가나안 땅에서는 어땠습니까?
그렇게 바알숭배와 이 가나안 땅의 우상들을 섬기지 말 것을 권면하고 때로는 매로 때리시고 인내하시고 무지무지 참고 이스라엘을 붙잡고 씨름합니다. 그런데 기어코 자기들 속에 있는 본능이 바알숭배를 따라 가면서 가나안 복지를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의 은혜를 이겨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다 이겼어요. 이게 이스라엘 이예요.
반면에,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봅니다.
두려움이 생기십니다. 육체의 고통이 예견됩니다. 벌써 마음 속에는 성취되고 있는 것이에요. 그 십자가의 비참한 형을 늘 보고 계시던 예수님으로서는 당시 십자가에 달리셔야 될 그 때 상황을 몸으로 마음으로 성취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괴롭습니다.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지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게 기독교의 기도예요.
아버지께 지는 겁니다. 하나님께 지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기면 안 됩니까? 왜 내가 이기면 안 됩니까? 왜?
죄 때문에 그래요. 죄로 정복되어 있는 내가 갖고 있는 소망과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긴다는 것은 죄가 이긴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오늘 야곱을 한번 봅니다. 이 야곱은 지금 얍복강가에 혼자 남아서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 두려운 것이에요? 에서가 죽일까봐 그래요.
왜 에서가 죽일 것 같이 느끼고 있습니까? 에서를 속였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아버지를 속여서 에서가 받게 될 장자가 받게 될 축복을 자기가 갈취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두려운 것이에요. 이 두려움을 하나님이 넣어 주신 것이지요. 이 두려움을 받게 되면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자, 죽을까봐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야곱처럼 죽지 않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먼저 보내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20절,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지금 씨름도 이 마음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분명히 죄 때문에 생겼습니다마는 자기의 죄를 보지 않고 내가 지금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가 살 궁리를 해나가는 겁니다.
죄를 보고 엎어지고 자복한다는 이야기는, 내 죄를 보고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죽어 마땅하다 라고 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두렵고 치가 떨리고 무섭기 한이 없지만 수용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 죄를 봤다면 형 앞에 나가서 "형! 내가 형 앞에 죽어도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는 그런 죄인이야. 형! 나를 죽여줘." 이렇게 나와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야곱은 그 죄 때문에 생긴 두려움으로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면 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기의 살 길을 추구해갑니다.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이고, 또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죽음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살 길을 찾는다는 것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말하고 한번 물어봅시다.
도대체 이 씨름에서 하나님이 이겼다면 그 하나님이 이긴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이 이겼다고 그러는데 도대체 야곱이 이겼다는 게 무슨 내용을 말하는 것인가?
아까도 질문했지만 그러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전혀 축복주실 마음이 없고 이전에 언약으로 주셨던 지켜주시겠다고 하시는 마음도 완전히 그 언약도 잊어버린 상태여서 야곱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가 야곱과 씨름을 해서 하나님이 져서 야곱에게 축복해주기로 그렇게 그저 항복하는 마음으로 축복을 해주신 것인가?
그럴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변개시키시고 야곱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가 축복을 해주신 것이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기시기를 원하셔서 씨름하셨는데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은 야곱의 복을 향해 뛰어나가는 이 기질, 그리고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복만 쳐다보고 나가는 이 기질, 자기의 존재됨에는 무관심하고 복을 향해 무조건 질주하는 이 기질, 그래서 끊임없이 발자국마다 죄를 짓고 있는 속이고 속고 빼앗고 갈취하는 이런 더러운 흔적들에 대해서 돌아보시기를 원하신 것이에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기신다는 것은 야곱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내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기를 바랬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그렇게 바알숭배를 흥왕하게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에게 바라셨던 마음, 광야에서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은 광야생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지기를 바라셨던 그 마음, 그래서 복지를 준비하고 계셨던 그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이기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것 하나뿐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의 기준을 내세우고, 내가 나의 살 길을 정하고, 내가 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축복을 향해 뛰어나가려고 하는 나 주도적인 삶을 끝내시려고 하나님이 씨름을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나가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살아왔고 이렇게 많은 것을 가졌지만, 니가 뛰쳐나가 복을 얻겠다고 한 그 시절, 형과 아버지를 속였던 그 죄악이 이제 니가 20년 동안 번 모든 것들을 일시에 다 날려버릴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무서운 죄악이 아니더냐?
이제는 그 자리를 돌아보고, 이제는 너 주도적으로 니가 지금도 예물을 앞서 보내면서 로비를 통해서 형의 마음을 무마하려고 하는 이런 나쁜 기질. 나로 말미암지 않는 생각들, 즉 니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계획의 이 근성을 뿌리 뽑아내야 되지 않겠느냐고 두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을 지키지 않으시려고 두려움을 주신 것도 아니고, 야곱에게 복을 거두시려고 두려움을 주신 것도 아니고, 약속은 약속대로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차질없이 그 복된 약속이 야곱에게 임하려면 나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이런 삶의 태도가 근절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인데 기어코 근절 못 시킵니다. 너무 야곱이 끈질거요.
결국 이게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겠어요?
선택받은 백성들 가운데 이러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기억하세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의 activity가 다 어떨 때 나타납니까?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나타납니다.
성경은 이방인들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서에서 아주 조금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전부 선택받은 백성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을 이긴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이긴 자들이 결국은 광야에서 다 죽어버리고 하나님을 이긴 자들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이겨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을 받게 된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스라엘 야곱의 자손 속에 아주 면면히 흘러가는 하나님을 잊어 먹으려는, 나에게서 생긴 소망과, 나에게서 생긴 욕구와 내가 생각하는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을 잊어 먹으려고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해서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내겠다고 기도하는 이런 근성 이것이 아직도 교회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무엇입니까?
축복에 대한 나 주도성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나 주도성이 뭐에요? 내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계획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
여러분,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요? 몰라요.
주님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십자가의 고통을 내가 당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분은 죄가 없는 분이에요.
내가 뭣 때문에 십자가 고통을 당해야 됩니까? 이 십자가가 아니면 아버지께서는 구원하실 능력과 지혜가 없으신 것입니까? 그 고통을 앞두고 이리 생각해봐도 저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면 그 방법 밖에 없으셨을까? 왜 외아들인 나를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실까?
하나님이셨지만 육체를 입고 계신 분이셨기 때문에 고통을 앞에 두고 너무나 많은 생각이 오고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그 하나님 앞에서 모든 떠오르는 생각과 의문과 예견되는 고통 앞에서 지십니다. 아버지가 이기세요.
도저히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아버지가 이기세요.
사도바울이 기도합니다. 몸에 가시가 있습니다. 전도를 하는데 정말 학자들의 말대로 간질병이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립니다.
예수님 전하다가 이게 무슨 꼴입니까? 사도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이런 간질병을 앓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세 번 기도했다고 해요.
세 번 기도했다는 얘기는 여러분, 세 번이 뭘까요?
한번에 한 시간씩? 아니, 한번에 길게 잡아 다섯 시간씩? 아니에요.
유대 풍습상 한번에 40일씩 세 번 작정기도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야곱이 하룻밤을 세워가며 기도한 것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이 육체에 가시를 안고 살고, 하나님께 져서 하나님의 은혜에 져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나를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져서 이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기면 안 돼요.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죄성은 자녀를 위한 기도도, 남편을 위한 기도도, 나 지신을 위한 기도도 모두가 다 죄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 놓습니다. 죽어도 안 놓습니다.
이 죽어도 안 놓는 야곱의 근성이 이스라엘로 내려가면서 결국 지금의 유대인들, 예수님 무덤 있잖아요. 왜? 하나님을 이겼으니까. 내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겨 먹었으니까.
축복해주셨다고 그래요. 이 축복이 뭐겠습니까? 야곱이 규정한 축복.
나를 죽이려고 하는 에서의 형으로부터 목숨을 건져야 된다. 그것은 야곱이 기도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미리 앞서서 약속해주셨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네가 지금 가고 있는 그 땅으로 돌아오도록 내가 인도할 것이다.
야곱은 지금 혼자서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죄를 봤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나의 죄를 보고 출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기시도록하나님 앞에 지는 겁니다.
기독교인이 누굽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 뜻을 아랑곳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인내를 무시하고 살아가는데 기독교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져서 지금의 이 상황 이대로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인 것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내 주장, 내 기준, 내 바람을 내세우면서 끊임없이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는 자, 하나님께 지는 자가 결국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께 자기의 주장을 가지고 이기는 자가 세상에 먹힌 자가 되고 야곱처럼 마지막에 험악한 인생을 살게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070205)
✝기도
하나님! 이기려면 내 속의 욕망을 이기고 내 속의 죄를 이겨야지, 이기려면 사탄을 이겨야지 왜 하나님을 이깁니까?
이스라엘. 이게 과연 좋은 이름일지 한번 깊이 묵상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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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희 교회(대형교회) 작년 표어가 "무릎으로 승부하자"였습니다. 일만명 가까운 성도가 일년내내 이 본문으로 주님과 겨루워 이기자하며 기도했었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참으로 얼마나 무서운 기도를 하고 있었나 싶습니다. 모든성도가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순모임 등등에서 주님을 이기겠다고 목이 터져라 기도했다니...주여, 이제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내 속의 죄와 욕망들을 먼저 이기게 하는 기도를 하게 하옵소서..
indeedpapa님 덕분에 야곱의 승리를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