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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7:1-14) 신의 손과 레드카드의 핸들링
오늘 이사야 17장 말씀중심으로 <신의 손과 레드카드의 핸들링> 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는 4-11절 까지만 함께 읽습니다.
‘신의 손과 레드카드의 핸들링’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마는 이번에 아르헨티나와 서독이 8강에서 맞붙게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무려 4:0으로 지게 됩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와 서독이 결승에서 붙게 되어서 아르헨티나가 3:2로 이겨서 월드컵에서 우승하게 됩니다. 8강전에서는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붙게 되었는데 바로 전에 포틀랜드 전쟁이 있었습니다. '포틀랜드'라는 장소를 제국주의 시대 때 영국이 무력으로 자기네 영토로 삼은 것을 아르헨티나의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포틀랜드를 회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가 지게 됩니다. 아르헨티나로서는 월드컵에서의 8강은 축구지만, 잉글랜드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하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마라도나가 잉글랜드 골문 앞으로 볼을 몰고 들어가다가 골문 앞에서 자기편에게 패스를 했는데, 그 패스한 것을 잉글랜드 수비수가 걷어낸다는 것이 그만 볼이 오버헤드킥이 되면서 골문 앞으로 센터링이 된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마라도나가 뛰어오고 잉글랜드의 골키퍼와 공중에서 볼을 쟁탈하게 되는데 이때 볼이 들어가 버렸어요. 심판이 골인으로 인정했습니다. 그 경기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마라도나가 볼을 손으로 쳐서 넣는 것을 다 봤는데 심판이 보지 못한 겁니다.
마라도나가 키가 작고, 키가 작으면 손도 짧지 않습니까? 골키퍼는 큰 사람이 심판이 보는 쪽으로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마라도나가 펄쩍 뛰는 것을 심판이 보지 못한 거예요. 골인이 된 것도 오심으로 판정이 되면 그냥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골인으로 인정이 돼서 2:1로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를 이깁니다. 그리고 그 핸들링 다음에 바로 4분 쯤 되어서, 무려 60m를 여섯 명의 수비수를 제치고 골키퍼까지 제쳤어요. 그리고 골을 넣었습니다. 월드컵 역사상 가장 멋진 골이라고 말하는 골이 나왔습니다. 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8강전에서 별게 다 나왔어요. ‘신의 손’이라는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단어가 나왔다고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리고 월드컵 역사상 가장 멋진 골, 60m를 여섯 명의 수비수와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는 마라도나의 골이 가장 멋진 골이라는 것까지 8강전에서 다 나온 셈입니다.
여러분! 이상한 것은 축구장이에요.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는 직립보행, 도구사용, 불을 이용할 줄 아는 것을 꼽는데 이 세 가지가 다 어디에서 연유됩니까? 직립보행으로부터 양손을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만물의 영장이 된 거예요. 그러면 축구장이 이상한 것은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해준 양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재밌잖아요? 심지어는 페널티 골 에어리어 안에서 공에 의도적으로 손을 대면 레드카드로 추방 됩니다. 공에 손대면 추방이 돼버려요. 아예 경기장 바깥으로 쫓겨나 버려요. 퇴장되어 버립니다. 옐로카드 경고도 아니에요, 레드카드가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8강전에서 우루과이와 가나 경기 때에 가나 선수가 헤딩한 것이 그대로 들어가게 생겼어요. 그런데 우루과이의 골게터 수아레즈가 손으로 막습니다. 핸들링을 한 거죠. 손을 댔어요. 그러고 나서 퇴장당합니다. 그런데 우루과이가 이겼더군요. 저는 그냥 하이라이트만 봤습니다. 골만 들어가는 하이라이트만 보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손대면 퇴장당합니다.
마라도나는 자기가 ‘신의 손’이라 하고 기자들이 쫓아다니면서 마라도나에게 이렇게 물어봤어요.
‘당신이 첫 번째 골을 넣은 게 당신 손으로 넣은 것 아니냐? 손으로 넣은 게 확실하지 않느냐?’라고 했더니, 그 때 마라도나가 한 얘기가 ‘내가 머리나 발로 공을 넣은 것은 아니지만, 그 손은 신의 손이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재밌는 사람이에요. 키도 작달 만 해서 ‘신의 손이 골을 넣었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축구장에 나타난 신의 손. 손을 대면 안 되는 축구장에서 신의 손이 나타나서 골을 넣었다는 겁니다. 이 유머와 농담과 장난기 섞인 단어 속에, 신앙인이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반드시, 반드시 그리고 또 반드시 지켜야 할 영적인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축구장에서는 손을 대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축구장 안에 손이 나타나는데 이게 바로 신앙인의 삶이에요. 신의 손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다시 한 번 아람과 앗수르의 얘기가 나옵니다. 12절 이하는 앗수르에 대한 얘기이고, 우리가 읽은 4절 앞부분은 아람에 대한 얘기예요. 아람과 앗수르는 앞에서 나왔었는데 다시 언급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북 왕국이 망한 이유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북 왕국은 왜 망했는지 아느냐?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얘기를 해주고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입니다. 남 왕국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을 지금 비교하는 겁니다. 비교하려면 공유되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되잖아요. 공유된 계기가 뭡니까? 앗수르예요.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에 대해서 북 왕국은 어떻게 대했으며, 남 왕국 유다는 어떻게 대처했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망하고, 개인이 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면 그 이유가 뭔 줄 아느냐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우리가 읽은 부분에 17장 7-8절 보면,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본다.’ 라는 말과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라는 말을 합니다. 즉, 이 7절, 8절은 남은 자들을 말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 심판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멸망의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남은 자들이 어떻게 할 것이냐?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볼 것이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하는데 남은 자 뿐만이 아니죠.
그때 망하게 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분을 의식하고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뜻인데, 8절의 말씀이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동안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와 태양상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 만든 일을 관심했다는 것이에요. 내 손으로 만든 것을 사랑했고, 내 손을 대고 일을 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들을 숭배했다는 겁니다. 결국 근본적으로 말하면 손대면서 살았다는 거예요. 그 습관이 내가 내 손으로 만든 것들을 좋아하고, 내 손으로 일을 잘 만들기를 원하고 내 손을 대면서 살았던 그 죄악 된 습관이, 앗수르가 쳐들어오려고 하는 위협 앞에서 아람을 끌어들였다는 겁니다. 아람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에요. 앗수르라는 위기, 위협 앞에서 내가 또 내 손으로 핸들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선민의 삶은 축구장이예요. 내가 손대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때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가 이렇게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손으로 지으셨어요. 하나님의 손, 신의 손이 나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뒤에 계시겠지요. 그런데 나는 그 하나님을 안 보고 내가 내 손을 대면서 또, 내가 손대는 일을 바라보고 삽니다. 내가 손을 대려니 앞을 보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계시든지 하나님을 못 보게 되는 겁니다. 내 손으로 만들고 내 손을 대는 일에 관심하다 보니까, 마음으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못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림을 한 번 그려 보세요. 내 뒤에서 하나님이 신의 손으로 나를 지으셨어요. 그런데 나는 또 하나님을 등지고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에 관심하며 삽니다. 자식을 손을 댑니다. 사업에 손을 댑니다. 내 미모에 손을 댑니다. 일에 손을 대고, 사람관계를 개선해 보겠다고 전화하고 하면서 내가 핸들링을 합니다. 이게 다 축구장 안에서 핸들링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드카드가 주어진 것이 심판이었습니다.
‘우상을 내 손으로 만들었는데 내 손으로 만든 것을 숭배한다.’라는 말이 바로 사람의 죄악의 습관 중에 하나님의 멸망을 불러들이는 첫 번째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앞을 바라보면서 내 손을 대면서 핸들링을 통해 내 삶을 정말 핸들 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심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 왕국 유다는 어떻게 앗수르라고 하는 공유된 위협에 대처했느냐? 히스기야 왕 때입니다. 열왕기하 18,19장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이렇게 대처를 합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 장군인 랍사게가 쳐들어와서 온갖 모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댑니다. 그 모욕의 핵심 부분에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도울 것이라고 히스기야가 말 할 텐데,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너희를 돕느냐? 우리가 이제까지 쳐들어오는 동안에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돕겠니?'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이 때 백성들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이 너희는 랍사게든지 앗수르의 군대가 뭐라고 모욕을 하고 뭐라고 우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더라도 한 마디도 대답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말라고 해놓고 뭐라고 합니까? ‘나는 이제 성전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말을 하지 않게 되면 말입니다. 흥분이 되고 화가 나고 겁이 나고 공포에 질리게 될 때, 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생각이 멈춰버린다는 걸 말합니다. 마음에 침묵을 명한 겁니다. 이게 죽는 거예요. 이게 제로 되는 겁니다. 한 마디도 안 하는 거예요. 서로가 한 마디도 안 하는 거예요.
‘야, 저 자식들 말이지 차라리 우리가 죽자.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살아서 뭐하겠어? 차라리 죽기를 각오고 싸우자 이거야. 자식들 불러다 놓고 이런 모욕을 당하고 살 순 없다. 아빠가 나가서 전쟁 할 테니까 너도 돌멩이 주워 와서 전쟁에 참여해라.’리고 별의 별 말을 다 할 것이에요.
‘우린 이제 죽었네. 살았네. 김치를 담아놨는데 다 익어서 제일 맛있을 때인데 김치도 못 먹고 죽어가겠네.’라고 별의 별 말이 다 나올 것 아닙니까? 그런데 침묵을 명합니다.
‘입 다물어라. 한 마디도 하지 마라.’라고 한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기는 산헤립이 가지고 온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 이방 민족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들으셨지요. 하나님! 저들에 대해서 신의 손을 대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위에 높여주세요. 모욕당하고 있는 이름을 만방에 높여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내용을 한 번 가만히 보세요.
나 살려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저들이 나에 대해 모욕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산헤립 군대 185,000명이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서 다 멸절당하고 산헤립은 줄행랑을 쳐서 본국으로 돌아가서 신하들에게 반역을 당해서 죽습니다. 신의 손이 임했습니다. 히스기야 왕과 남 왕국 유다 백성들은 핸들링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가 쳐들어 왔다고 하는 그 상황에 대해서 축구장인 줄 알고 그 위기의 상황이 축구공인 것처럼 생각해서 손을 대지 않습니다. 선민의 삶은 축구장이에요. 신의 손이 임하는 겁니다. 신의 손이.
선민의 삶이 축구장인데 발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의 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이 닿으면 안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배우자의 문제가 생겼습니까? 자식의 문제가 생겼습니까? 다 내 삶이라는 축구장 안에서 일어난 축구공입니다. 축구공이 내 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축구공으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리는 것이에요. 등 돌려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 손으로 껴안는 겁니다. 우리의 양 손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앗수르 같은 축구공에게 손을 대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때 돌아서서 하나님을 껴안으라는 거예요.
히스기야 왕과 남 왕국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의 랍사게가 와서 온갖 모독을 하며, 이제 일촉즉발의 위기,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자기들이 대처 방안을 생각하지 않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아람 군대를 끌어들여서 연합군을 형성해서 대처하려 하지 않고 손대려고 하지 않고 핸들링 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두 손으로 하나님을 껴안습니다. 그 상황에 손대지 않고 하나님을 껴안습니다. 그림을 그려보세요.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가슴에 폭 묻혀서 하나님의 허리를 꼭 껴안습니다. 하나님을 껴안을 때 하나님의 양손이 드디어 신의 손이 앗수르를 손대십니다. 바로 이거예요. 이거!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구장에서는 진짜 발로 뛰잖아요. 공을 발로 만집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를 들면 모세가 소명을 받는 기사에서 우리가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이지만, 출3:5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말이 나오고, 요21:18절에 베드로에게도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얘기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선민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삶은 날아다니는 축구장이에요.
왜 날아다닙니까? 사람들이 볼 때에는 날아다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바람 같으신 하나님, 루아크의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 그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확 붙들 때, 이때 하나님이 발도 함께 감아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을 껴안아서 우리 두 손으로는 하여간 이 세상 상황에서 어떤 문제가 주어지든 누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든지 간에 그건 다 축구공이에요. 그렇다고 진짜 축구장에서처럼 발로 뛰어도 안돼요. 발도 손도 다 하나님을 껴안는 겁니다. 발로 감고 손으로 껴안는 겁니다. 그러면 신의 손이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신의손이.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 속에서 신의 손이 나타난다는 것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인 돼요? 이 땅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원인이 없는 평강을 내 마음이 잉태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내가 껴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지 않고 자식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식 문제라는 공이 왔어요. 불안해요. 불안한 마음으로 쫓겨 가면서 내가 손을 댑니다. 우린 대부분 그렇게 해요. 걱정이 되는 마음에 쫓겨 가면서 손을 대요. 사업의 문제든 가정의 문제든 부모와의 문제든 형제들 간의 문제든 지인들과의 문제든 인간관계든 돈 문제든 건강 문제든, 일단 걱정과 근심과 분노와 미움과 이런 감정에 의해서 쫓기면서 손을 댑니다.
‘이게 이래서는 안 되겠지? 걱정 되네.’라고 하면서 만집니다. 그런 마음으로 쫓기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마음에 딱 생각한다는 게 뭐에요? 등 돌리는 겁니다.
지금 내게 날라 오고 있는 축구공에 대해서, 자식 문제라는 축구공, 돈 문제라는 축구공에 대해서 등 돌려버리는 것이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일단 죽는 거예요. 죽고 나면 그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서 등 돌려서 죽은 자가 된 채로, 하나님을 껴안고 있다 보면 이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이유가 설명 되지 않는 내 마음의 평강이 잉태되게 됩니다. 내 마음에 평강이 잉태가 된 뒤로는 이제 부터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거예요.
마음에 평강이 가득한데, 걱정에 쫓기는 것이 아니고 근심에 쫓기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에 쫓기는 것이 아니고 미움에 매여서 질투에 매여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음에 평강이 가득한 상태가 되면, 그 때부터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고, 그 때부터 하는 행동이 신의 손이 나를 장갑으로 끼고 움직이십니다. 물론 사람들이 볼 때는 내가 움직입니다. 내가 말하는 거예요. 내가 내 생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 세상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원인이 없는 평강을 잉태한 뒤로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원인이 왜 없겠어요? 하나님을 만났으니까 평강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원인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마땅히 걱정해야 되고, 마땅히 근심해야 되고, 마땅히 인상써야하고, 마땅히 화내야 합니다. 그런데 평강한 거예요.
바로 이 일을 해주는 것이 십자가사건 아닙니까?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은 자임을 기억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십자가에서 다 죄 사함을 받았잖아요?
예를 들어 자식 문제가 주어집니다. 자식 문제가 주어졌을 때 걱정이 되잖아요. 그러면 그 걱정은 왜 됩니까? 자식 문제에 대해 내가 선악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호불호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선악과의 문제가 다시 살아난다니까요. 우리가 이제까지 지은 죄를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심으로 다 씻었다 하더라도, 또 다시 이 현실의 삶에서 상황이 주어지고 문제가 주어지면 우리는 또 원죄를 반복한다는 겁니다.
‘이 상황이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판단을 내리니까 걱정이 생기고, 불안이 생기고, 공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저 사람은 코가 왜 매부리코냐?'라고 괜히 미워하는 거예요.
그 사람 매부리코 되는데 뭐 보태준 것 있습니까? 그런데 괜히 마음에 판단을 하는 겁니다. 이게 원죄를 또 반복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대해서 죽으라는 겁니다. 불교의 마음을 갈고 닦아 수련해서 죽는 것이나 타 종교의 요가와 같은 수련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해요. 그건 길이 아니니까. 혹시 마음은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을 붙잡으면 십자가의 주님의 사건은 약속이 있어요. 십자가의 주님을 붙잡으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죽은 자임을 알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걸 멈추게 되면 하나님이 임하시겠다는 겁니다.
히스기야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랍사게가 계속 떠들고 칼과 창을 들이대려고 하는 상황에서 입을 딱 다물고 히스기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껴안듯이.
지금 성전에 들어갈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나와서 뭔가 준비를 하고 대처를 하고 핸들링을 해야 될 때입니다. 그런데 북 왕국 이스라엘이 핸들링하려고 아람 끌어들였다가 곧 바로 레드카드 받았다는 거예요. 내 자식 문제 내가 핸들링 하죠? 레드카드 곧바로 주어집니다. 내 사업 문제 내가 핸들링 하지요? 핸들링이 뭐에요? 손을 대서 움직이고 조작하고 시작하는 것을 핸들링이라고 해요.
영어사전 한번 찾아보세요. 핸들링이 무슨 뜻인가? 내가 손대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게 핸들링하지요? 내 사업인데 내가 핸들링하지 누가 핸들링 하느냐? 곧바로 레드카드 날라 갈 거예요. 기다려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사업이라고 하는 축구공 앞에서 절대로 손대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죽어버립니다.
‘잘 된다. 못 된다.’
일이 잘 될 때도 마음에 빠지지 말고, 못 될 때도 마음에 빠지지 말아요. 판단하고 생각하면 다 원죄를 반복하는 거예요. 지금 잘 된다고 잘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원죄를 반복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한 마디도 안했던 남 왕국 유다 사람들처럼 마음의 생각조차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오직 하나님만 껴안아요. 하나님만 생각해요. 이때 마음에 평강이 주어집니다. 평강이 주어지잖아요?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처녀잉태가 뭐였지요? 임마누엘이라고 했어요. 처녀 잉태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메시아를 처녀가 잉태합니다. 메시아가 누굽니까?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평강의 왕을 내가 잉태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에요. 임마누엘과 원인 없는 평강의 잉태가 붙어 다닌다 이거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까? 원인 없는 평강이 주어집니다. 원인 없는 평강이 주어졌습니까? 이제부터 신의 손이 나타납니다. 내가 움직이지만 나는 장갑일 뿐입니다.
언젠가 말씀 드렸잖아요. 소매치기가 장갑 끼고 소매치기 했습니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소매치기의 장갑을 수갑 채워 갑니까? 아니지요. 소매치기가 움직인 겁니다. 저는 장갑이에요. 마음의 평강이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고 나면, 이제 이 세상일에 대해서 핸들링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내 두 손으로는 하나님만 껴안고 있는 거예요. 주님만 껴안고 있습니다. 십자가만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드디어 하나님이 핸들링하십니다. 하나님의 손, 신의 손이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기억하십시다.
신의 손과 레드카드의 핸들링.
인생은 축구장입니다. 그런데 날아다니는 축구장입니다. 내 발로 걸어 다니는 게 아니에요. 바람이신 하나님을 껴안고 날아다니는 축구장입니다. 손대면 레드카드 받습니다. 신의 손으로 내 삶의 맺혀지는 열매를 오늘 하루도 주렁주렁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의 번제를 인생에 활용하는 방법은 제목을 기억하는 겁니다. 하루 종일. 내일은 내일 제목을 기억하시면 돼요. 오늘은 오늘의 제목만 기억하면 됩니다. 레드카드 받으시면 안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내 삶을 축구장으로 만들어 주시고 손대지 말라 하시고 당신의 손, 신의 손으로 내 삶을 빚어나가시려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의도 앞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굴복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십자가의 굴복만이 우리를 진정한 복된 복지의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기가 막히는 삶을 살게 하시는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십자가 붙잡고 북 왕국 이스라엘의 삶이 아닌 남 왕국 유다의 삶이로되 남은 자의 삶을 살게 하시는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