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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노인은 오늘도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다. 시골길 같이 허름한 언덕길 한 켠에 주차해둔 낡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는 순간, 자기도 이제 넘어간다는 듯 산등성에 걸터앉은 오후의 가을 해가 유리창을 통해 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늘 있었던 일인데 오늘따라…? 잠시 손을 멈추고 해와 마주했다.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80년을 훌쩍 넘게 살아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밀려왔다 사라져 간다. 한 마디로 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奇蹟)이었다.
해방 몇 해 전에 태어났으나 그 당시의 모습과 사정은 기억하지 못 하지만 너나없이 모두가 어려웠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떠올린다. 그리고는 세월에 떠밀려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겨우 철이 들었나 싶었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던 애들 속에서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지게 작대기를 들고 총검술 훈련을 받던 큰 형님 · 삼촌들이 연이어 전장(戰場)에서 돌아오지 못한 집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형제처럼 가까웠던 친구들이 가지고 놀던 불발포탄이 터져 시뻘건 피를 가슴팍에 적시면서 죽어갔던 모습은 지금도 선하다. 정전(停戰)이 되고 나서 한참 뒤까지 하루 세끼 희멀건 보리죽으로 겨우 연명해 온 것만도 행복했다.
그래도 성적은 괜찮았기에 대처(大處)의 중학교와 사범학교를 나왔다. 선친(先親)은 자신이 8남매인데다 자신도 8남매를 거느린지라 일찍부터 자립(自立)정신을 가르쳤다. 중학교를 마치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상급학교를 보낼 것인지를 정했다. 그의 동생 하나는 고등학교를 가기 싫다고 하자 “그래?” 하시면서 집안 농사를 거들게 했는데 오뉴월 타는듯한 볕에 나락 논을 하루 매 본 다음 아버지 앞에 꿇어앉아 “아부지, 공부 할랍니더” 하여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자립했다.
스무 살에 시골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는 기고만장(氣高萬丈)했다. 주위의 부러운 눈총도 받았고 인기도 있었으며 김 노인 선친의 어께에 저절로 힘이 실렸던 시절이었다.
이때 만난 것이 4·19였다. 낮에는 선생이었지만 밤에는 야간대학생이었기에 무리에 섞여 데모에도 참가했다. 사회가 어지러웠다. 연이어 일어난 5·16 혁명으로 교사란 직업 때문에 연기 받았던 것을 반납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당시 문란해졌던 사회질서가 바로 잡히는 과정에서 논산훈련소에서도 정식 메뉴대로 되돌리는 통에 호되게 무릎이 까져 가며 받은 훈련 덕분에 군인정신과 애국심을 배웠다.
볏집 지붕에 전등도 없는 최전방에서 ‘대한민국 제일의 애국자는 최전방의 일등병’이란 소리와 ‘○○○부대 장병님들, 이 추위에 얼마나 고생많으십니까’ 하고는 바로 넘어오라는 이북 초소확성기에서 나오는 달콤한 유혹의 소리를 함께 들으며 칼날 같은 추위를 견디고 하얀 달빛을 벗삼아 보초를 서가며 정한 기간을 채웠다.
2
김 노인이 하루일을 마친다고 하지만 뭐 직장이나 정해놓고 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시기에 기침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담당 의사가 기관지(氣管支)가 약하다는 이유로 “공기 좋은 곳에 사시라”고만 권유를 했다. 아마도 승선(乘船)시절 한주일 사이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며 365일 밤낮을 현대문명의 덕분이라 할 수 있는 냉방(冷房) 바람을 쐬며 지낸 것이 호흡기 기관을 상하게 했던 게 분명했다.
‘공기 좋은 곳!’, 그럴싸한 곳은 많았다. 그러나 먹고 살기가 그렇고 애들 교육 등 더 시급한 문제가 있어 쉽사리 옮길 수가 없어 포기하고 지냈지만 늘 불편함에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다.
퇴직 후 느지막에야 우연히 알게 된, 도심의 산속, 자연부락에 철거민들이 살았던 자그만 스레트지붕의 무허가 집을 하나 구해서 고쳤다. 지하수가 좋고 산속이라 조용하고 공기가 좋아 안성마춤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이라 당호(堂號)도 손수 만들어 걸었다.
사실이었다. 3년 정도 혼자서 수도승(修道僧) 모양 살아 보니 언제 사라졌는지 기침도 가슴앓이도 없어지고 혈색도 좋아졌다. 끊었던 술병(病)이 다시 도졌지만 그래도 끄떡없었다.
지금도 그는 자연환경 보호라는 말에 크게 감동한다. 정말 자연이 가져다 주는 힘이 얼마나 신기하고 중요한지를 몸으로 직접 겪은 그에게는 백번도 더 지당한 말씀이었다.
그것이 십수 년을 넘기고 보니 그 집과 이미 든 정(情)을 끊지 못해 시내에 거주하면서 놀이터로 삼고 아침을 마치면 할멈이 싸 준 도시락 가방을 들고 출근, 글도 쓰고 글씨도 쓰며 컴퓨터와 놀기도 하고, 손바닥만한 텃밭에 채소도 화초도 가꾸며 하루를 즐기다 해거름 녘, 출출할 때가 되면 퇴근(?)을 하는 것이 일상(日常)이 돼버린 것이다.
가방 속은 올 때와 갈 때가 다르다. 맥반석이 녹아 있다는 지하수가 한두 병, 빈 도시락, 텃밭에서 딴 오이 · 상추 같은 야채들 등 다양했다. 언젠가 들은 ‘가방끈이 짧다’는 소리가 싫어 그의 가방에는 모두 긴 끈이 달려있다. 이래저래 가방끈은 길면 편하다. 들기가 거북하다 싶으면 어께에 둘러메면 된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일이나 사물에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게 마련이다.
3.
사람의 일생이란 필연(必然)에 의해서 보다 우연(偶然)에 따라 더 많이 결정된다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그랬다. ‘등 따시고 배부르다’느니, ‘1등 신랑감’이라느니 하는 교사 생활을 팽개치고, 무슨 역마살이 끼었던지 쌍놈으로 취급하던 선원(船員)의 삶을 택했다. 우선은 가난에서 얼른 벗어나야 겠다는 과욕에다, 젊음이 있었기에 더 넓은 세상, 새로운 호기심을 찾아 멋도 모르고 겁도 없이 나선 것이었다.
그래도 성실과 근면함이 살아 있어 무진장한 삶의 터라 여겼던 원양어선(遠洋漁船)을 거쳐 큼직한 화물선 선장(船長)까지 올랐다.
오대양 육대주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래도 말[語]은 좀 알아야 제대로 행세를 할 수 있고, 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죽으라고 영어와 일본어 사전을 찾으며, 마치 미친사람처럼 혼자 씨부리며 익힌 덕분에 한때는 어느 외국항에서 처음 입항하는 한국과 일본선박들의 입항신고는 도맡아 해주기도 했다.
참말로 세상은 넓고 기이하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죽을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음의 문턱도 여러 번 넘나들었다. 방금 옆에서 얘기하던 사람이 빠져 바다에 뜬 시체로 건져 올리기도 했고, 멀쩡한 사람을 쥐새끼 버리듯 바다에 던져 버릴 궁리도 했었다. 반면에 여럿의 생명도 구했다.
아픈 동료를 데리고 아프리카 오지를 가로질러 찾아간 안과(眼科) 병원이 정형외과뿐이라 도살장을 방불케 하는 수술실에서 응급처치, 어쨌는지 모르나 아프다고 마치 짐승같이 울부짖던 동료를 남겨두고 돌아설 때 제발 가지 말고 하룻밤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던 그의 한쪽 눈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바다 위에서의 삶을 공포스럽게 만든 것은 거친 파도와 폭풍 같은 자연적, 외부적 상황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갇힌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뇌와 고독, 솟구쳐 오는 인간의 본능은 때로는 급변하는 기상이변보다 예측하기 힘들었고 두렵게 다가오곤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개인의 처절하고 끈질긴 인내와 노력들 역시 책임자에게는 무거운 짐이었고 두터운 장벽이었다.
끝도 없이 탁 트인 바다가 사방이 꽉 막힌 육지의 산속보다 더 답답했다. 선교(船橋 : Bridge)에서 당장이라도 배가 뒤집혀 가라앉을 것만 같은 험악한 해상(海狀)을 마주했던 젊은 키잡이(조타수)의 헛소리를 듣고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용왕님! 누구시든 좋습니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나를 믿고 물밑 선실에서 잠자는 선원들과 그 가족들은 지켜주소서.’
그 절박한 순간의 간절한 기구(祈求)에는 아무도 응답이 없었다. 그 순간순간에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자신의 판단에 따른 조치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종교를 믿지 않는다. 설사 불확실한 것일지라도 그 순간의 판단이 그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대서양 한복판을 항해 중, 온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어지름증(症)으로 쓰러졌으나 다행히 영국해군의 도움으로 낯선 이국(異國)의 병실에서 아픔보다 더한 고독과 싸운 적도 있었다.
모기! 보일 듯 말 듯 하고 귀찮기는 했지만 하잖케 여겼던 고것이 그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 모기가 인류역사에서 저지런 만행을 책으로 폭로한 작가 티모시의 말처럼, 그들이 옮기는 말라리아[虐疾: 학질]! ‘인류가 출연하고 약 5천만 년 동안, 모기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전 인류 사망자 수의 절반에 달할 약 530억 명으로 추청된다.’는 말이 정말이었다.
적도 부근의 나이즈강 하류의 한 가운데서 그 오리지날 학질(瘧疾) 때문에 동료들이 40도의 고열로 헛소리를 지르며 쓰러질 때는 김 노인 자신도 제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지 못한 적도 있었다.
남미(南美)의 어느 항(港)에서는 대리점 직원을 사칭하고 올라온 멀쩡한 신사(紳士)가 싸인할 것이 있다며 연 가방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이밀고는 금고를 열라고 해서 사시나무 떨 듯 하며 몽탕 털린 적도 있었다. 그가 돌아가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몸이 얼어붙었던 기억도 선명하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넓직한 대로를 걷다가 팔에 건 옷속에 칼날을 숨긴 강도들에게 떠밀려 발가벗길 위기에 지나가던 행인의 도움으로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쳐 위기를 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용케도, 아니 기적적으로 구사일생했다.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을 깊이 알면 알수록 어렵고 두렵다는 말이 있듯이 갈수록 그는 바다가 겁이 났다. 그만두었다. 다시 육상에 발을 디딘 그는 마치 신작로에 나선 어린애와 같았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여행사를 해 보자는 이의 권유로 시작했다. 해외여행이 허락된지 몇 해 안 되던 때였다. 김 노인 만큼 세계 약 60여개 나라를 다녀본 경험자가 당시로선 드물었다.
각종 모임에서 단체로 나서는 해외여행붐이 있었다. 항공기나 선박의 이용, 낯선 외국, 일본 · 동남아 · 유럽 등의 문물은 승선시절에 많이 겪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 사이사이에 그가 알고 겪은 일들을 얘기함으로 고객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밤세워 준비한 내용은 전혀 그렇질 못했다. 처음 가보는 외국의 음식과 잠자리 등의 문화도 관광의 한 분야라는 의미에서 수배한 것들은 ‘경비를 아끼려고 그랬다.’는 이유의 불평으로 되돌아 왔다. 어딜가나 “김치” 내놔라는 요구는 그래도 애교였다.
같은 여행사끼리의 경쟁은 더 가관이었다. ‘먼저 본 넘이 임자’란 사고방식으로 꽉찬, 마치 법이 없는 정글과 같았다. 멀쩡하게 좌석표까지 받았는데 막상 비행기에 오르려는데 자리가 없다고 거절 당했을 땐 ‘야! 이 쌔끼들아!’하는 고함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가 공항기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최소한의 기본 질서도 윤리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회의장에서 마주 앉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음으로 가린다. 결국 손을 들었다. 그의 양심이 살아남을 자리가 없었다.
퇴직 후에는 평소 익혔던 컴퓨터 기능을 살려 장애인과 고령자를 대상으로 십수 년 동안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강의를 했다. 윈도우가 성행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급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기 위해서 필요했기에 8순이 넘는 나이에도 두 손가락만으로 자판을 고르는 모습은 아름답기조차 했다.
한편 지체(肢體)가 부자유한 청소년이나 어른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깨우쳐 줘야 한다는 의욕이 저절로 솟아나기도 했었다. 보람을 강하게 느낀 세월이었고 인생을 정리하는 때에 좋은 보시(報施)였다고 자부해온 시절이었다.
4
지구 한쪽에서 또 전쟁이 터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의 삶에는 전쟁 아닌 것이 없다. 반드시 총칼을 들고 상대방과 맞서며 현대식 미사일 포탄이 난무하는 전장(戰場)에서 죽고 죽이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전쟁이고 삶의 현장이 곧 전장(戰場)이 아닌가. 생존을 위한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대결,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복잡하고 냉혹한 대립, 자연과의 힘겨운 싸움. 병마와의 투쟁. 이들도 엄연한 전쟁이며 이 전쟁들은 죽는 날까지 인간을 따라 다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불경(佛經)에서 말했듯이 태어남과 죽음은 계속될 것이고, 더불어 이들 전쟁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있을런지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의사도 내 자신도, 아니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그저 살아 있는 동안은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들께 감사하고 오늘 이 순간에 충실하며 내 자신과 가족들에게 보다 더 자상하자.
80여 년의 삶을 엮고 이어온 이 기적은 내가 만들어 낸 것도,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도 아니다. 내 운명의 뜻이었음을 통찰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므로 여한(餘恨)을 남기지 않도록 내 인생과 화해(和解)를 하자. 그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일이요 업(業)이다.”고 결론지었다.
그래도 이만큼 해온 것도 장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대견한 마음으로 다독이며 김 노인은 힘껏 시동을 걸었다. 그를 일깨워 준 해는 먼저 산을 넘어가고 없었다. 발 아래 펼쳐진 도심은 하나 둘 불빛을 밝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글은 2023년도 노계 박인로 기념사업회 공모전데 출품했던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