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의심이라는 한 덩어리 뿐”
<47> 부추밀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①-4
[본문] 그대는 부디 척량골을 굳게 세워서 이러한 거취를 짓지 마십시오. 이러한 거취를 짓는다면 비록 잠깐 동안은 냄새나는 가죽 부대를 머물게 하여 곧 구경의 경지를 삼으나 그러나 심식(心識)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이 마치 아지랑이와 같습니다.
비록 그렇게 하여 심식이 잠깐은 멈춘다지만 마치 돌로써 풀을 눌러놓는 것과 같아서 불각에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곧바로 최상의 깨달음을 취해서 구경의 안락한 곳에 이르고자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도 또한 일찍이 이러한 무리들에게 잘못 배운 바가 되었습니다. 뒷날 만약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일생을 헛되게 보낼 뻔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심식 한순간도 멎지 않아
마음 본질 명백히 알고 공부해야
[강설] 척량골을 굳게 세운다는 말은 좌선을 할 때에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한다는 뜻과 아울러 참선을 함에 있어서 올바른 견해를 굳게 지니고 삿된 견해에 흔들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 올바른 견해란 이 몸뚱이를 좌선을 한다는 명분으로 가만히 앉아 망상만 어지럽게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다.
몸은 앉아 있으나 심식(心識)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날아다니는 것과 같게 해서는 참선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설사 이 몸 이 마음을 잠깐 동안은 머물러 둘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마치 돌로써 풀을 눌러두는 것과 같아서(如石壓草) 금방 다시 올라온다는 것이다.
사람의 심식이란 억지로 눌러둔다고 해서 눌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아니한다. 마음의 본질을 명백하게 알아서 그 본질에 맞게 공부를 해야 한다.
대혜선사 자신도 처음에는 묵조선을 만나 망상과 싸우느라 허송세월을 하였으나 뒤에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불법을 바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선불교에는 이 서장이라는 참선교과서가 800여년 전 고려 보조(普照)선사 때부터 있어 왔으나 아직도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이 몸뚱이를 구속하여 참선이라고 여기고 세월을 보낸 것으로 업을 삼는 좌선이 유행하고 있다.
대혜선사가 말한 “만약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일생을 헛되게 보낼 뻔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라는 말을 늘 상기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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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배종훈 |
[본문] 그러므로 구업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러한 폐단을 힘써서 구원했더니 요즘에 와서 조금씩 잘못된 줄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곧바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이 한 생각(一念子)을 확 터뜨려야 바야흐로 생사를 깨달아 알 것입니다.
그것을 비로소 “깨달아 들어간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마음을 두어 확 터뜨리기를 기다리지는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터뜨릴 곳에다 둔다면 영겁에도 터뜨릴 때가 없을 것입니다.
[강설] 대혜선사는 묵묵히 앉아 번뇌망상과 노는 참선을 배척하기 위해서 온갖 비난과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간화선이란 앉고 서고 걸어다니는데 상관없이 의심의 덩어리가 하나로 드러나야 한다. 또 자신이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분별할 수 없이 오로지 의심이라는 한 덩어리 뿐이어야 한다.
만약 분별이 된다면 화두를 든다고 할 수가 없다. 즉 간화선은 정중일여(靜中一如),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며(寤寐一如), 생사일여(生死一如) 등의 단계를 거쳐서 다시 이 한 생각(一念子)을 확 터뜨려 버린 폭지일파(爆地一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간화선에서 설정해 놓은 깨달음의 경지는 이와 같다.
이 <서장>이라는 책은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선사가 묵조선을 배척하고 간화선을 주창하면서 마련한 간화선 제일교과서이므로 간화선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위와 같은 원칙에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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