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 초보꾼들의 암벽등반 (월간 산)
주영일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어느 토요일 아침, 매주 바위를 한다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인수봉으로 갔다. 우이동 도선사 주차장에서 기자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40~50대의 중장년 클라이머들. 산에 다니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만, 전문등반은 젊을 때 접하지 않으면 쉽게 익히기 어려운 분야라서, 젊은층에 비해 중장년층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이들은 특이하게도 4∼50대에 들어 암벽등반을 시작해 열정적으로 바위 오르기에 도전중인 용감한 늦깎이들이었다. 얼마 전, 김용기등산학교의 1년 과정 실전팀에 등록한 이들의 반수 이상이 장년층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몇 해 전부터 등산학교 수강생의 나이 제한을 없애면 서 많은 중장년층 동호인들이 등산학교에 입교하고 있지만, 이처럼 중장년층이 수강생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과연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함께 바위를 오르며 이유를 들어봤다. 오늘 모인 7명의 수강인원 가운데 40대 이상은 주영일(56), 김운태(53), 김영만(48), 문정규 (42), 차필성(41)씨 등 5명이었다. 이 가운데 제일 형님뻘인 주영일씨만 한국산악회 등산학 교 1기 출신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 실전팀 강좌에서 본격적인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즉 수강자의 반 이상이 초보자인 셈이다. 김용기등산학교의 실전등반으로 진행된 이날 산행은 인수봉의 중급 루트인 동양길과 크로니 길에서 진행됐다. 대슬랩 위의 루트 초입에서 장비를 챙긴 수강생들은 선등자인 김용기 교 장의 뒤를 따랐다. 차례를 기다렸다 루트를 오르는 수강생들의 몸짓은 이미 초보자의 어설 픔을 떨치고 제법 능숙한 후등자 수준에 올라 있었다. 올해 처음 개설된 이 1년 과정의 연구반은 4월부터 시작되었다. 벌써 반년이 지났으니 매주 한번씩 등반에 참가해도 20회가 넘는 실적이다.
이 정도면 웬만한 사람들은 등반실력이 쑥 쑥 커나갈 시기다. 하지만 이들은 불혹의 나이를 넘겨 등반을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 목해야 한다. 아무리 초보자라고 하지만 대학산악부 신입생과 같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사실 더욱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그들의 실력향상 정도가 아니었다. 늦었다면 늦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에 등반에 도전하게 된 동기와 등반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자는 그날 등반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며 늦은 시간까지 이들의 ‘바위 예찬’을 들을 수 있었다.
=자연 회귀 본능의 표현=
김운태수강생 가운데 최고참인 주영일씨는 “제가 바위 오르기를 선택한 것은 조금 더 근접한 곳에서 대자연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지요. 단풍놀이에 몰려드는 많은 인파가 모두 산악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네 계모임은 물론, 동창회, 회사 단합대회도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자연 돌아가려는 본능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 본능에 좀더 충실하고자 했던 것뿐입니다.”라며 암벽등반에 몰입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그가 말한 본능적 자연추구라는 원초적 동기는 수강생 모두가 근본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부 분이었다.
하지만 자연을 접할 수 있는 많은 아웃도어레저 가운데 하필 전문등반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중장년의 늦깎이 클라이머들의 대부분은 예전부터 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오던 이들 이다. 몇 십 년 동안 전국의 산을 안 가본 곳 없이 돌아다녔던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결국 이들이 자연에 조금 더 근접하기 위해 전문등반이라는 분야를 선택했다.
하지만 전문 등반은 체력이 기본이 되어야하고 확보기술과 등반기술을 익혀야 하는 등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가에게 직접 지도를 받거나 등산학교를 수강하는 방법밖에 별 다른 수가 없다. 그러나 몇 해 전 등산학교들의 나이제한 철폐이전까지만 해도, 중장년층에 대한 전문등반교 육의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공개적인 강좌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주영일씨는 그 때를 ‘사회적 통념의 벽을 넘지 못했던 시기’라 정의했다. “등반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배우기 힘듭니다.” “그 연세면 슬슬 워킹이나 하면서 산에 다니시지 왜 이런 위험한 것을 배우려고 하십니 까.” 아무리 등반을 배우려는 열의가 있어도 이런 저런 이유로 접근 자체가 거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수강인원이 자꾸 줄어들고 전국에 등산학교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며 일순간에 나이 제한이 풀려버렸다. 중장년층에게도 전문등반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등산학교를 나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4~5주의 과정을 마치고 인수봉이나 선인봉을 한번 오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갈 수 있을 정도의 등반기술을 갖추려면 더 많은 노력과 등반기회가 있어야 했지만 여의치 산악회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도 나이 어린 선임자들의 눈치가 보여 내키지 않았다. 뒤늦게 들어와 폐를 끼치는 것도 같고, 이미 뼈대가 굳어진 조직체에 새롭게 적응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혼자 다니기에는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등반기술을 배우긴 했지 만 갈고 닦을 터전이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젊은이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낀 세대’의 비애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용기 등산학교 실전팀 1년과정 수강생의 절반이 40~50대=
중장년층의 공통적인 전문등반 입문 동기가 ‘자연회귀본능의 실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 다지만, 사실 개인적인 사연의 비중이 더 큰 사람들도 많았다. 집안의 불행을 잊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암벽을 배우기 시작한 분도 있었고, 10여 년 전 잠시 맛봤던 암벽등반의 묘미 를 잊지 못해 뒤늦게 암장을 찾기도 했다.
혹은 정말 따라다닐 곳이 없어서 매주 이 강좌에 몰두하기도 하고, 그야말로 우연히 다른 사람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따라나섰다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분도 있었다.
그야말로 백인백색의 이유다. 이렇듯 등반을 시작한 개인적 동기는 달라도 이들 늦깎이 클라이머들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젊은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시간과 노 력을 기울인다는 것. 누구보다도 열심히 등반에 참가함은 기본이고 주중에도 실내 암장을 찾는다. ‘남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한다는 운동이지만 조금씩 실력이 늘어나는 재미 에 푹 빠져 있다는 귀띔이다. 장비에 대한 투자도 엄청나다. 안전과 직결된 중요한 요소인데다, 장비의 성능이 등반능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다보니 과감하게 최신 장비를 선택한다.
등반을 마치고 배낭을 챙기 며 보니 최신 암벽장비 전시회에서나 보았던 장비들이 수두룩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장비를 마련하려면 경제적으로 부담스럽지 않느냐”물었더니, 김운 태씨는 “나이가 들어 모자라는 힘과 기술을 보완하려면 이렇게 장비에 투자하는 수밖에 방 법이 없다.”며 씽긋 웃는다. 그가 오늘 등반에서 보여준 날렵함이 장비 때문만은 아니었을 텐데도 말이다. =육체와 정신 건강에 뛰어난 효과= 문정규 암벽등반을 계속하다보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중장년층에게 치명적인 스트레스와 과체중의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차필성씨의 경우, 6개월 동안 매주 암벽등반 한 것 외에는 특별히 운동을 하거나 식이요법을 하지도 않았지만 체중이 9kg이나 빠졌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운태씨도 8kg 감량과 함께 거의 정상의 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들은 측정 가능한 건강상의 수치보다 더욱 큰 선물이 정신적 건강의 회복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등반중에는 잡념이 끼어들 수 없고, 온몸을 불규 칙적으로 움직이며 극한의 상태까지 몰아가다 보면 스트레스가 깨끗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집중력도 좋아졌다고 한다. 또한 주영일씨는 바위를 만지며 손발을 쓰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정신까지 맑아진다고 주장했다. “저처럼 50대 후반에 접어들면 주변 친구들이나 선배들 가운데 정신이 흐려져 고생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등반하면서부터 오히려 정신이 더욱 또렷해짐을 느낄 수 있 습니다. 손발의 지압과 동작 등으로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뇌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 입니다.
실제로 제가 느끼는 것이니 효과는 보장하지요.” 차필성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암벽등반은 중장년층에게 어떤 보약보다도 효험이 뛰어난 스포츠다. 그러나 적절한 교육과 지속적인 등반활동이 보장되었을 때만 약효가 유효하다. 반드시 자신과 파트너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여러 기술을 습득하고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전문등반 자체가 도전의 대상인 만큼 용기를 낸다면 누구나 입문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는 많은 중장년의 늦깎이 클라이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글: 월간 산, 김기환 기자 (2002년 10월호 월간 산, '화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