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일상 톡톡] 일요시사 칼럼
글렌필드 수영장과 KB 치킨의 바삭한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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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을 가르던 가벼운 날개짓 끝에
온몸의 묵은 무거움이 비로소 내려앉는다
글렌필드 수영장 온수의 김이
시니어 두 사람의 굳은 관절을 부드럽게 감아쥐고
스파를 마치고 나온 붉은 피부 위로
글렌필드 저녁 바람이 투명하게 스쳐 지나간다
마주 선 '지금'과 '여기', 두 시니어의 개운한 발걸음 소리
마침 길 끝에서 고소한 식욕을 돋우며 다가오는 KB 치킨의 간판,
KOREAN BEST CHICKEN이라는 글자 아래
5년 전 현역 시절 지금과 여기의 치열했던 일터의 초상이 가만히 겹쳐진다
주방에서 땀을 흘리며 직접 요리 일을 해내다 손을 털고 반겨주는 사장님
은퇴의 나이에 새로 시작한 사업을 부부가 함께 연구하고 벼려내어
어엿하게 단골들의 입맛 궤도 위에 올려놓은 그 당당한 손길 속에서
타향에서 꺾이지 않고 제 삶을 자박자박 일궈낸 이민자의 고결한 핏줄을 본다
주문한 Soy Garlic Chicken의 짭조름한 마늘 향과
Sweet Spicy Chicken의 달콤한 양념 냄새가
테이블 위로 모락모락 따스한 김을 올린다
갓 튀겨낸 순살 치킨 한 조각이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삭~ 하고 부서지는 껍질의 소리 뒤로
속 살의 부드럽고 촉촉한 온기가 고국의 혀 끝을 깨운다
그 곁에 김을 내뿜는 빨간 떡볶이 한 그릇,
쫀득하게 치아에 감기는 떡과 고추장의 깊은 양념 속에서 녹는다
젊은 날 신당동 떡볶이 골목 연탄불 앞에서 나누어 먹던 매콤하고
알싸한 옛 추억들이 붉은 소스 위로 은은하게 파문을 일으킨다
"여기, 어서 들게, 갓 튀긴 치킨은 식으면 맛이 달아나지"
"지금, 자네 말대로 음식이나 인생이나 다 때가 있는 법이지"
젓가락 끝에 걸린 간장마늘 치킨의 고소함과
매콤달콤한 떡볶이의 쫀득함이 입안에서 번갈아 어우러질 때
단짠과 단매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오묘한 맛의 조화 속에서
시니어 두 사람은 세상과 사람 사는 이치를 새삼 확인한다
혼자 있어도 맛이 나지만
서로 다른 것이 만나 겹쳐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인생의 깊은 풍미를
한국의 맛은 여전히 맵고 달고 톡 쏘며 가슴을 뛰게 한다
나이는 흘러 수영장 물살처럼 지난 세월 뒤로 넘어가 버렸지만
그 시절 고국의 맛을 느끼는 혀 끝의 감각만은 청춘의 그것과 다름없다
음식을 나누는 것이 어디 배만을 채우는 일이었던가
서로의 깊은 시선이 가만히 교차하는 순간
순살 치킨 한 조각을 떡볶이 양념에 살짝 찍어 삼킬 때
30년 타향살이의 고단함은 갓 튀겨낸 기름 소리처럼 가볍게 날아가고
두 시니어는 어느새 철없고 눈부셨던 어린 시절의 소년들로 돌아가 있다
창밖은 저녁 빛으로 붉게 물들어 가고
마지막 남은 치킨 한 조각과 떡볶이 떡 하나를
두 시니어는 가만히 반으로 나누어 매만진다
"자네 쪽 떡볶이가 떡이 하나 더 걸린 것 같네"
"이 사람아, 내 마음이 자네에게 더 가 있는 덕이지"
나지막하게 터지는 두 사람의 훈훈한 웃음소리
반으로 나누어 쥔 바삭한 치킨 조각 위로
타향에서 부딪히며 살아온 날들의 고소한 온기가 노릇하게 익어간다
오늘 저녁 지금과 여기가 배부르게 채운 것은
접시 위에 담긴 한 끼의 음식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치킨과 떡볶이를 번갈아 나누며 가만히 내어놓은 것은
낯선 땅에서 서로의 어깨를 토닥여주던 오래된 우정의 체온이었다
치킨집 문을 열고 나오는 길,
글렌필드의 저녁 공기는 수영장의 온수보다 더 알맞게 따스하고
두 시니어의 발걸음은 수영을 막 마치고 나왔을 때보다 훨씬 경쾌하다
지나온 세월의 수평선 너머로 저녁 노을이 고요히 물들 때
바삭한 치킨 향을 품은 두 시니어의 가슴속에
오늘 하루를 오롯이 누린 소박하고 풍성한 만족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