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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11 사리뿟다는 초선의 정신들을 결정한다.
초선에는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의 법들이 있는 바, 그는 이 법들(16가지)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20)
●주석 20)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tyāssa dhammā anupada-vavatthitā honti)'라고 하셨다. 그는 차례대로 결정지었고 한정지었고 알았고 분명하게 알았다(vavatthitā paricchinnā ñātā viditā)는 뜻이다. 어떻게? 장로는 이 법들을 볼 때 [대상을 향하여] 기울이는 특징을 가진(abhiniropana-lakkhaṇā) '일으킨 생각(vitakka)'이 있음을 알았다. 그와 같이 [대상을] 계속해서 문지르는 특징을 가진(anumajjana-lakkhaṇa) '지속적 고찰(vicāra)', 충만하게 하는 특징을 가진(pharaṇa-lakkchaṇā) 희열(pīti)', 기쁘게 하는 특징을 가진(sāta-lakkhaṇa) '행복(sukha)', 산만하지 않는 특징을 가진(avikkhepa-lakkhaṇa)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citt-ekaggatā)'이 [있음을 알았다.]
닿는 특징을 가진(phusana-lakkhaṇa) 감각접촉(phassa)', 느끼는 특징을 가진(vedayita-lakkhana) '느낌(vedanā)', 인식하는 특징을 가진(sanjanana-lakkhaṇa) '인식(saññā)', 의도하는 특징을 가진(cetavita-lakkhaṇa) '의도(cetanā)', 분별해서 아는 특징을 가진(vijānana-lakkhaṇa) '알음알이(viññāṇa)'가 [있음을 알았다.]
하고자 하는 특징을 가진(kattukamyatā-lakkhaṇa) '열의(chanda)', 결심 하는 특징을 가진(adhimokkha-lakkhaṇa) '결심(adhimokkha)', 노력하는 특징을 가진(paggāha-lakkhaṇa) '정진(vīriya)', 확립하는 특징을 가진(upaṭṭhāna-lakkhaṇa) '마음챙김(sati)', 중립의 특징을 가진(majjhatta-lakkhaṇa) '평온(upekkhā)', 호의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하는 특징을 가진(anunaya-manasikāra-lakkhaṇa)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이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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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뽓타빠다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이들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긴다.
환희로운 자에게 희열이 생긴다.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은 경안하다.
몸이 경안한 자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그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그의 감각적 욕망의 인식은 소멸한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만이 있다.
이때에는 오직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미묘하고 참된 인식을 가진 자(者)만이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인식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인식은 공부지음에 의해서 사라진다.
이것이 공부지음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Dighanikāya9 뽓타빠다경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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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 불교이야기 60. 그와 같이 나아감(여서如逝)
1.
팔해탈八解脫에 대하여
디가 니까야의 DN15 마하니다나Mahānidāna (대인연경) 숫따의 7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본 광명사光明寺 분류 코드 129-1)
”아난다여, 여덟 가지의 해탈 나옴이 있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루빠(색色)가 루빠(색色)들을 본다, 이것이 첫째 해탈 나옴이다.
Rūpī rūpāni passati ayaṁ paṭhamo vimokkho.
자신의 루빠(색色)에 대한 알음 머뭄(상相)없이 밖의 루빠(색色)들을 본다, 이것이 둘째 해탈 나옴이다.
Ajjhattaṁ arūpasaññī bahiddhā rūpāni passati, ayaṁ dutiyo vimokkho.
실로 ‘청정하다’라고 벗어남(탈脫)이 있다, 이것이 셋째 해탈 나옴이다.
Subhanteva adhimutto hoti, ayaṁ tatiyo vimokkho.
널리 루빠(색色)에 대한 알음 머뭄(상相)을 초월하고, 화냄(paṭigha,진瞋)에 대한 알음 머뭄(상相)을 무너뜨리고(멸滅), 다양한 알음 머뭄(상相)을 맘(의意) 동작하지 않고(무작의無作意) ‘무한한 지음(작作)’이라는 작무변처作無邊處를 성취하여 살아간다, 이것이 넷째 해탈 나옴이다.
Sabbaso rūpasaññānaṁ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ṁ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ṁ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catuttho vimokkho.
널리 작무변처作無邊處를 초월한 후에 ‘무한한 알음 나옴(식識)’이라는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성취하여 살아간다, 이것이 다섯째 해탈 나옴이다.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ṁ samatikkamma ‘anantaṁ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pañcamo vimokkho.
널리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초월한 후에 ‘어떠한 것도 없다’라는 (어떠한 알음(지知)이 없는) 무소지처無所知處를 성취하여 살아간다, 이것이 여섯째 해탈 나옴이다.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chaṭṭho vimokkho.
널리 무소지처無所知處를 초월한 후에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를 성취하여 살아간다, 이것이 일곱째 해탈 나옴이다.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ṁ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sattamo vimokkho.
널리 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相處를 초월한 후에 상수멸相受滅을 성취하여 살아간다, 이것이 여덟째 해탈 나옴이다.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ṁ upasampajja viharati, ayaṁ aṭṭhamo vimokkho.
아난다여, 이들이 여덟 가지의 해탈 나옴이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 팔해탈八解脫을 순서대로도 나아가고, 역순으로도 나아가고, 양쪽으로도 나아가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동안에, 원하는 곳까지 나아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한다.
번뇌(루漏)의 다함(소진消盡)으로 번뇌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견해 담마(법法)에서 스스로 알음(지知)을 초월하고, 체험하고, 성취하여 살아간다, 아난다여, 이 수행자는 양쪽의 영역에서 해탈 나옴했다고 말해진다.
아난다여, 이 양쪽 영역에서 해탈 나옴하면 양쪽 영역의 해탈 나옴보다 뛰어나고 앞서는 알음(지知)은 없다.”
2.
구차제정九次第定에 대하여
디가 니까야의 DN16 마하빠리닙바나Mahāparinibbāna? (대반열반경) 숫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본 광명사光明寺 분류 코드 218-1)
세존께서는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겠소, 소멸하는 담마(법法)들은 의도들(행行)이니, 게으르지 말고 성취하도록 하시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ti.
이것이 그와 같이 나아간(여서如逝) 분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Ayaṁ tathāgatassa pacchimā vācā.
그때 세존께서는 초선初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초선初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2선第二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2선第二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3선第三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3선第三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4선第四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4선第四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작무변처作無邊處에 입정入定하셨고,
작무변처作無邊處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식무변처識無邊處에 입정入定하셨고,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무소지처無所知處에 입정入定하셨고,
무소지처無所知處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입정入定하셨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상수멸相受滅에 입정入定하셨습니다.
Atha kho bhagavā paṭhamaṁ jhānaṁ samāpajji, paṭhamajjhānā vuṭṭhahitvā dutiyaṁ jhānaṁ samāpajji, dutiyajjhānā vuṭṭhahitvā tatiyaṁ jhānaṁ samāpajji, tatiyajjhānā vuṭṭhahitvā catutthaṁ jhānaṁ samāpajji, catutthajjhānā vuṭṭhahitvā ākāsānañcāyatanaṁ samāpajji, ākāsānañc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āpajji, viññāṇañc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ākiñcaññāyatanaṁ samāpajji, ākiñcaññ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samāpajj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jji.
아난다 존자는 아누룻다 존자에게 이같이 말했습니다 -
“아누룻다 존자여, 세존께서 반열반하셨습니다.”
“아난다 존자여, 세존께서는 반열반하신 것이 아니고, 상수멸相受滅에 계십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상수멸相受滅의 입정入定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입정入定하셨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입정入定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무소지처無所知處에 입정入定하셨고,
무소지처無所知處의 입정入定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식무변처識無邊處에 입정入定하셨고,
식무변처識無邊處의 입정入定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작무변처作無邊處에 입정入定하셨고,
작무변처作無邊處의 입정入定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4선第四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4선第四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3선第三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3선第三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2선第二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2선第二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초선初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초선初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2선第二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2선第二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3선第三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3선第三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제4선第四禪에 입정入定하셨고,
제4선第四禪에서 출정出定하신 후에 바로 세존께서는 반열반하셨습니다.“
Atha kho bhagavā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ṁ samāpajj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ākiñcaññāyatanaṁ samāpajji, ākiñcaññ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āpajji, viññāṇañc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ākāsānañcāyatanaṁ samāpajji, ākāsānañcāyatanasamāpattiyā vuṭṭhahitvā catutthaṁ jhānaṁ samāpajji, catutthajjhānā vuṭṭhahitvā tatiyaṁ jhānaṁ samāpajji, tatiyajjhānā vuṭṭhahitvā dutiyaṁ jhānaṁ samāpajji, dutiyajjhānā vuṭṭhahitvā paṭhamaṁ jhānaṁ samāpajji, paṭhamajjhānā vuṭṭhahitvā dutiyaṁ jhānaṁ samāpajji, dutiyajjhānā vuṭṭhahitvā tatiyaṁ jhānaṁ samāpajji, tatiyajjhānā vuṭṭhahitvā catutthaṁ jhānaṁ samāpajji, catutthajjhānā vuṭṭhahitvā samanantarā bhagavā parinibbāyi.
3.
팔해탈八解脫과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르침을 이해한다 – 이와 같은 상태는 있을 수 없다.
오온五蘊 루빠(색色)를 이해하지 못하고
팔해탈八解脫과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이해한다 – 이와 같은 상태는 있을 수 없다.
‘눈 있는 자들은 루빠(색色)들을 본다’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온五蘊 루빠(색色)를 이해한다 – 이와 같은 상태는 있을 수 없다.
오온五蘊 루빠(색色)를 ‘물질’이라 이해하고
‘눈 있는 자들은 루빠(색色)들을 본다’를 이해한다 – 이와 같은 상태는 있을 수 없다.
4.
오온五蘊 루빠(색色)는 ‘물질’이 아니고
관찰자가 관찰자의 눈, 귀, 코, 혀, 몸으로
관찰 대상의 루빠(빛,색色), 소리, 냄새, 맛, 닿음(촉觸)을 접촉(촉觸)하여
그 관찰 대상이 어떠하다고 (맞고 틀림에 관계없이) 알음(안냐aññā,지知)하는
알음 나옴(윈냐나viññāṇa식識)이다.
그 알음 나옴(윈냐나viññāṇa식識)을 조건으로
느낌(受), 알음 머뭄(상相), 의도들(행行), 알음 나옴(식識)으로 나아갈 수도,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상수멸相受滅에서는 느낌(受), 알음 머뭄(상相), 의도들(행行), 알음 나옴(식識)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온五蘊 루빠(색色)의 알음 나옴(윈냐나viññāṇa식識)은 오온五蘊의 다섯 번째 것과
같은 단어이고, 같은 의미이지만
또한 다르다고 알 수 있어야 한다.
가르침은 (행복이 아닌)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사성제四聖諦이고
현대 불교는 2600여년 전으로 돌아가 루빠(색色)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2023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