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박갑순
집 안 곳곳에 있다. 장롱에도 화장대에도 책상에도. 봄가을, 여름, 겨울용 등 계절별 색상별 질감별 형태별 종류도 다양하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쓰기 시작한 모자는 언젠가부터 내 신체 일부가 되었다. 모자에 중독된 사람처럼 예쁜 모자를 보면 소유욕이 발동한다. 그렇게 사들인 모자가 50여 개다.
흰머리 염색할 시기를 놓쳤거나 갑작스러운 외출을 해야 할 때 모자만큼 요긴한 게 없다. 외출 준비에 사용하는 한 시간 중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래서 예정에 없는 갑작스러운 외출은 하지 않는 편이다. 부득이한 외출 시엔 평상복 위에 카라 꼿꼿한 바바리코트 하나 걸치면 감쪽같이 멋쟁이가 되듯, 부스스한 머리카락 위에 척 얹으면 그만이다. 모자를 벗지 않는 한 귀가할 때까지 그대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모자가 참 잘 어울린다며, 어디에서 그렇게 예쁜 모자를 구했냐고 침이 마르는 사람들은 모자 속 내 허물을 짐작이나 할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허물이 많은 사람과 허물이 적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거미줄처럼 엮어진 관계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흉과 허물을 내보이며 살기 마련이다. 허물이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구분도 얼마나 적게 노출하며 사는가의 격차일 뿐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더 큰 허물을 지닌 사람이 작은 허물 지닌 사람의 결점을 들추어 흉을 본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서 사용하는 모자. 이 모자를 타인의 허물을 가만히 덮어주는 용도로 사용했어야 했다.
차분하게 봄비 내리는 날, 철이 바뀔 때 옷을 정리하듯 모자를 정리하면서 꽤 정성을 들인다. 겨울 모자를 정리하다가 문득, 내 허물은 보지 못하고 상대의 허물을 지적했던 날이 떠오른다.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의 모자를 벗기는 우를 범했다. 어쩌면 그에게는 머리에 달라붙도록 쓰는 니트 소재의 비니로 꾹 덮고 싶은 허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는데 단체의 직을 수행하던 때라 용납이 되지 않았다. 공공의 입장을 내세우며 내 주장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원들이 매월 납입하는 회비를 한 푼이라도 아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지출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외출할 때 머리를 깨끗하게 감아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고, 감지 않은 머리카락을 모자로 대충 덮고 외출하기도 하는 자신의 허물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소 손실이 있더라도 눈감아 주거나, 대충 넘겨도 될 일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한다. 그의 허물이 물의를 일으킬 만큼의 손실을 입히는 일도 아니었는데, 단체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도 아니었는데, 공적 사무 처리라는 입장만 내세우며 각을 세웠던 자신이 한없이 촌스러워 보인다. 이상한 모자를 쓰고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한 꼴이었다.
나는 모자를 살 때 다른 어떤 물건을 고를 때보다 진심을 다한다. 직접 써보지 않고는 구매하지 않는다. 남의 허물을 탓할 때는 그보다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거울 앞에서 여러 번 써 보고 산 모자를 집에 와서 다시 써 보고 후회하는 심정이랄까.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편한 관계로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다. 모자를 억지로 벗겨서 상대의 감추고 싶은 모습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일은 옳지 않다. 어쩌면 허물은 들추는 것이 아니고 덮어주는 것이 아닐까. 모자를 멋을 부리는 용도로만 사용할 게 아닌 것 같다. 상대의 허물이 보일 때 그 허물을 보지 않도록 머리 전체를 감싸고 턱밑에서 끈으로 매어주는 보닛을 챙겨야 할 성싶다. 예기치 않게 남의 허물이 크게 보일 때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모자 스타일인 베레모로 시크하게 마음 스타일링을 해야 하겠다.
나는 모자 중에서 데일리로 코디하기 좋은 버킷햇을 가장 좋아한다. 가끔 얼굴 작아 보이게 하는 벙거지를 쓰기도 한다. 내 허물을 깜찍하게 감싸주는 모자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나로 인해 상처 입었을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모자를 뒤집어서 손을 넣어 본다. 아직도 꽁꽁 얼어 있는 그의 마음이 잡힌다. 늦었지만, 사죄하는 마음을 전한다. 맞잡은 손이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