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최고 권위의 칼빈 성경 주석!!
기독교 최고의 주석 그 중심에 ‘칼빈 주석’이 있다
칼빈 주석을 보지 않고 성경을 논할 수 없다!
칼빈 500주년 기념 정식 계약본 - 새로운 현대어 번역
규장 칼빈 주석 시리즈 신약 4
규장 칼빈 주석의 특징
만대의 교회의 근간이 된 표준적인 교리 체계에 기반한 깊이 있는 성경해석
저자의 뛰어난 영적 통찰력, 명확하고 간결한 성경해석, 실제적 목회 적용성이 돋보이는 주석
내용면에서는 진리와 은혜를 겸비하였으며 형식면에서는 간결성과 용이성을 갖춘 주석
이해하기 쉬운 새로운 현대어 번역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역자 주
이 책을 읽어야 할 대상
목회자 : 성경 본문을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연구하여 설교하기 원하는 목회자
신학생 : 분명한 신학적 토대하에서 건실히 성경을 연구하기 원하는 신학생
리더 및 평신도 : 성경공부를 깊이 하기 원하는 리더 및 평신도
[규장 칼빈 주석시리즈 소개]
개신교의 슬로건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이다. 종교개혁은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서 항상 말씀으로 개혁해가고 있는가? 그래서 어제의 종교개혁 지침서였던 칼빈 주석을 한국 교회 앞에 새롭게 번역 출간함으로써 오늘 우리의 신앙개혁과 교회개혁의 디딤돌로 삼으려 한다. 규장은 칼빈 주석 조사와 연구, 정식 계약 추진, 번역 준비 작업에 3년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규장 칼빈 주석은 현대 영어판 가운데 권위 있는 미국 Eerdmans 출판사의 파커(T. H. L. Parker) 역본을 정식 계약을 맺어 출간한다. 파커는 영국 더럼대학교의 명예신학 교수로서 평생을 칼빈 연구에 매진한 칼빈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그는 칼빈 주석의 의미를 현대어로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정밀한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규장은 칼빈 주석의 여러 역본 중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 가장 용이하다는 판단 아래 파커의 현대 영역본(英譯本)을 선택했다. 규장의 칼빈 주석은 신약 13권, 구약 42권, 총 55권으로 계속 출간될 예정이다. 규장의 칼빈 주석 번역은 우리말 표현이 허락하는 한 칼빈의 어조와 어투를 살리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했다. 특히 칼빈 주석의 대중화를 위해 어려운 신학 용어, 신학자 이름, 고대 문헌, 그리스 신화 등에 대해 ‘역자 주’를 상세히 달아주었다. 그래서 규장에서 발간하는 칼빈 주석은 성경 본문을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명확하게 연구하여 설교하기를 원하는 목회자, 신구약 석의를 분명한 신학적 토대하에서 건실히 연구하기를 원하는 신학생, 성경공부를 깊이 하기를 원하는 평신도 모두에게 적합하도록 면밀히 준비되었다.
규장칼빈주석시리즈 제4권《칼빈 주석 요한복음 1》을 먼저 펴낸 이유
규장에서는 칼빈 주석 중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목적을 선명히 드러내주며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는 요한복음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독자에게 유익하겠다는 판단 아래 ‘규장 칼빈 주석 시리즈’ 제4권인 《요한복음 I》을 먼저 번역 출간하게 되었다. 칼빈도 공관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싶다면, 먼저 요한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규장칼빈주석시리즈 신약 1-3권은 <공관복음 주석>이 될 것이다.
천 년 이상 말씀에서 벗어나
왜곡된 길을 걸어가던 교회를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도록
방향을 전환시킨 종교개혁의 완성을 이룬 주석!
“루터가 성경 번역의 왕이라면, 칼빈은 성경 주석의 왕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릇이 사도 바울이었다면,
계시의 암흑시대인 중세에 하나님 말씀에 밝은 빛을 비추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릇이 칼빈이었다.
그의 주석에는 성경 본문의 해석 가운데 종교개혁 신앙의 요체들이 잘 스며 있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 항상 표현된다.
그 이전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건전한 교리 체계에 기반한 성경 해석의 전범(典範)을 보여준다.
‘하나님 말씀! 오직 성경!’을 종교적 슬로건으로 외치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답게, 성경을 성경답게 주석하는 전범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 무지가 만연한 시대에 칼빈은 민초들에게까지
‘규명되고 해석된 하나님 말씀’, 곧 좌우에 날선 검(劍)을 쥐여주었다.
칼빈은 악조건의 건강 상태로 무수한 질병을 얻었지만,
바쁜 목회 일정의 틈을 내어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석 집필에 매진하였다.
그가 병상에 누워서도 주석 작업에 매진하는 것을 본 주위 사람들이 좀 쉬어가며 하라고 권하자
칼빈은 “하나님께서 나의 게으름을 어떻게 보시겠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칼빈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단호한 자세를 이렇게 밝혔다.
“주여, 나의 심장을 주께 드리나이다. 신속히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_ 한국어판 편집자의 글 중에서
[한국어판 편집자의 글]
만대의 교회를 위해
말씀의 초석을 놓은 주석!
중세 기독교는 ‘암흑시대’(Dark Age)였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한 온갖 미신적 관행과 전통, 성인聖人과 성상聖像 숭배가 하나님 말씀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제들조차도 성경에 무지한 자가 많았고 성경을 강해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춘 자도 드물었다. 그러니 일반 민초들이 라틴어 성경을 읽고, 성경 본문의 의미를 해독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과제였다. 이러한 계시의 암흑시대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기치를 높이 든 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이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 국민들이 모국어로 성경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성경이 영어로, 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칼빈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혀주는 신구약 거의 전권의 주석을 출간하였다(칼빈은 1539년부터 1564년까지 에스겔서 21-48장, 요한이삼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성경 전체의 주석을 썼다). 지금부터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학문성을 유지하면서 신구약 전체를 포괄하는 주석은 칼빈 주석이 거의 유일하였다. 따라서 칼빈 주석이 교회 역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300년 이상 성경 본문의 의미 규명에 있어서 칼빈 주석의 절대적 도움을 받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 말씀’, ‘오직 성경’, ‘오직 성경’을 종교적 슬로건으로 외치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답게, 성경을 성경답게 주석하는 전범典範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완전 축자영감’을 신학적 주요 명제로 주창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완전 축자영감된 성경답게 해석하는 견본을 보여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칼빈은 온갖 미신적 전통과 헛된 종교 관행이 교회를 휩쓸어버린 시대에, 성경이 의문부호가 아니라 밝혀진 의미로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전달되도록 하였다. 종교적 무지가 만연한 시대에 칼빈은 민초들에게까지 ‘규명되고 해석된 하나님 말씀’, 곧 좌우에 날선 검劍을 쥐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루터가 성경 번역의 왕이라면 칼빈은 성경 주석의 왕이다.”
칼빈은 그 시대에 성경 주석을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릇이었다. 그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능통했다. 그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원고 없이 헬라어, 히브리어 성경만을 놓고 설교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교부신학敎父神學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헌에도 정통하여 수사적修辭的 표현에 탁월하다. 법학을 전공하여 법리法理에 능한 그는 논리 전개 또한 치밀하다.
칼빈 주석의 특징
칼빈 주석의 특성에 대하여 합신合神의 신복윤 교수는 이렇게 언급했다.
“칼빈은 성경 주석의 천재였다. 그의 성경 주석들은 그 독창성과 깊이, 명료성과 건전성에서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그는 성경해석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본질적인 조건들, 즉 문법 지식, 영적 통찰력, 건전한 판단, 실재적인 재치들을 보기 드물게 결합시켰다. 그는 성경의 뜻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기자들의 상황에 자신을 던져 넣어서 당시의 영적인 이익을 위하여 성경 기자들의 사상을 재생시키며 적응시켰던 것이다. 교리적인 공평성, 재치와 요령을 자랑하는 해석, 광범한 학문, 심원한 기독교적 경건, 이런 것들은 칼빈의 주석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다.”
칼빈은 먼저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주석을 썼다. 그래서 자신의 주석이 그 혼탁한 시대에 교회를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주석을 일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 위에 세워진다. 그런데 그 말씀이란 건전하게 해명된 말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칼빈의 주석은 칼빈 자신이 직접 쓴 것도 있지만, 대체로 구약 주석은 그가 강의한 것을 모아서 편집하였고, 신약 주석은 그의 비서들을 시켜 받아쓰게 한 다음 그 원고를 교정해서 출간한 것이다. 소선지서 원고를 정리할 때는 48시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고 한다. 칼빈이 성경 주석을 집필할 당시 그가 안정적이고 편안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악조건의 건강 상태로 무수한 질병을 얻었지만 바쁜 목회 일정의 틈을 내어 오직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석 집필에 매진하였다. 교회 역사가 시드니 휴튼은 칼빈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칼빈은 아주 병약했는데, 금식과 연구 때문에 몸이 더욱 약해졌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칼빈의 업적은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힘겨운 것이었다. 특히 자주 앓아눕고 몸이 약했던 칼빈에게는 더한층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자 칼빈은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과업 앞에서 머뭇거린 적이 없었다. 설교하지 않을 때는 주석을 쓰고 주석도 쓰지 않을 때는 편지를 썼다.”
그가 병상에 누워서도 주석 작업에 매진하는 것을 본 주위 사람들이 “좀 쉬어가며 하시라”고 권하자 칼빈은 “하나님께서 나의 게으름을 어떻게 보시겠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칼빈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단호한 자세를 이렇게 밝혔다.
“주여, 나의 심장을 주께 드리나이다. 신속히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여기서 우리는 칼빈 주석의 영적 특성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석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심장이 녹아 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경건, 복음을 왜곡하는 세력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주석의 행간에 스며 있는 것이다.
칼빈 주석과 기독교 강요와의 관계
종교개혁기 성도들에게 성경을 기반으로 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교리의 체계를 제시한 것이 《기독교강요》라면, 체계적 교리를 근간으로 성경 본문을 해석한 것이 《칼빈 주석》이다. 이 둘은 상보적相補的 관계이다. 칼빈의 주석을 읽다보면 신학적 도움을 얻기 위해 《기독교강요》를 보게 되고, 《기독교강요》를 읽다보면 인용된 성경 구절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얻기 위해 주석을 찾아보게 된다. 칼빈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강요》는 성경의 가르침을 조직화한 것으로 주석 없이는 해석될 수 없다. 반면에 주석은 《기독교강요》와 분리되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백석대 조직신학 교수인 권호덕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주석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교의학이 정해준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의학은 항상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칼빈의 위대한 공헌을 본다. 즉, 그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한 손에는 분명한 교리적 체계인 《기독교강요》를, 다른 한 손에는 그 교리에 따른 건전한 성경의 해명인 주석을 쥐여준 것이다. 교리와 성경 본문 양수겸장兩手兼將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두고두고 개혁교회의 견고한 기틀이 되었다.
규장 칼빈 주석 출간의 의의
오늘 한국 교계도 중세 교회처럼 계시의 등불이 가물가물하며 꺼져가고 있다. 강단이 말씀 선포와 말씀 해명의 자리가 아니라 공연公演의 자리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설교는 짧아지고 박수 치고 노래 부르는 시간은 길어지고 있다. 2부 순서와 프로그램은 발달하나 말씀에 대한 성도의 ‘무지몽매 지수’ 또한 높아만 간다. 권세 있는 말씀 선포로 인한 회개와 영적 부흥은 먼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이제 말씀의 권세가 회복되고 복음을 재발견해야 할 때이다. 칼빈에 의해 말씀이 재발견된 그 거울(칼빈 주석)을 되돌아봄으로써 오늘 한국 교회의 제2차 종교개혁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규장 칼빈 주석’을 펴낸다.
규장은 칼빈 주석 조사와 연구, 정식 계약 추진, 번역 준비 작업에 3년여의 노력을 기울였다. ‘규장 칼빈 주석’은 현대 영어판 가운데 권위 있는 미국 Eerdmans 출판사의 파커(T. H. L. Parker) 역본을 정식 계약을 맺어 출간한다. 파커는 영국 더럼대학교의 명예신학 교수로서 평생을 칼빈 연구에 매진한 칼빈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그는 칼빈 주석의 의미를 현대어로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정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규장은 칼빈 주석의 여러 역본들이 대부분 고풍스러운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는 파커의 현대 영역본英譯本의 장점이 가장 크기에 이를 선택했다. J. I. 패커도 파커 영역본 칼빈 주석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걸출한 영어로 번역된 칼빈의 가장 훌륭한 주석이 여기 있다. 새롭게 번역된 이 주석은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고, 칼빈의 라틴어 주석처럼 생동감이 있다.”
규장의 칼빈 주석은 신약 13권, 구약 42권, 총 55권으로 계속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칼빈 주석의 번역 작업은 참으로 힘들게 진행되었다. 실력 있는 번역자들에게 맡겨도 번역 작업의 난해함을 호소하며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힘들게 번역이 완료되어도 편집 작업이 보통의 신앙 서적보다 4~5배의 노력이 들었다.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칼빈의 어조와 어투가 그대로 표현되도록 최대한 애를 썼다. 그 시대 타락한 교회에 대한 칼빈의 험한 표현도 가급적 그대로 표현되도록 했다. 번역 작업에서 특히 신경 쓴 것은, 칼빈 주석의 대중화를 위해서 어려운 신학 용어, 신학자 이름, 고대 문헌, 그리스 신화 등에 대해 ‘역자 주’를 상세히 달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규장에서 발간하는 칼빈 주석은 성경 본문을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명확하게 연구하여 설교하기를 원하는 목회자, 신구약 석의를 분명한 신학적 토대하에서 착실히 연구하기를 원하는 신학생, 성경공부를 깊이 하기를 원하는 평신도 모두에게 적합하도록 면밀히 준비되었다.
요한복음 주석의 특성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시종일관 느껴지는 것은 복음 수호와 복음 변증에 대한 칼빈의 열심이다. 복음을 왜곡하는 세력을 꾸짖고, 참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참 복음을 변증하는 것이다. 초기 교회 이단들과 중세 로마 가톨릭이 복음을 어떻게 왜곡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중심으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이 흐른다는 것을 누구나 감지하게 될 것이다. 공관복음과는 다른 요한복음의 독특한 관점을 존중하면서 칼빈은 이런 신학적 해석을 우려내고 있다.
다른 주석의 특성과 동일하게 요한복음 주석에서도 적시 적소에 적확한 원문 해석, 해당 본문에 대한 교부들의 다양한 해석에 대한 분별,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의 다채로운 인용 등 하나님께서 칼빈 자신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총동원하여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해명하려는 칼빈의 열심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그에게서 하나님 말씀의 밭에서 수고하는 충성스런 일꾼의 자세를 보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주석에서 목회자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soli Deo Gloria), 자신은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려는 칼빈의 목회관을 엿볼 수 있었던 구절이 있다.
“사역자가 교회를 그리스도에게 드리지 않고 사역자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은 마땅히 영예롭게 해야 하는 ‘거룩한 결혼’(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파기하는 행위이다.”
진실한 목회자 칼빈이 오늘날 모든 목회자들에게 주는 준열한 경고라 할 만한다. 칼빈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그리스도 뒤에 숨어 목회했으며, 양들을 자신의 양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양으로 만들기 위해 목양했다. 칼빈의 하나님 중심의 목회 원리, 바른 신학에서 나온 목회 지침이 오늘 우리에게도 힘있게 다가온다. 규장에서 칼빈의 공관복음 주석보다 요한복음 주석을 먼저 출간하는 까닭은 칼빈 자신이 공관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싶다면, 먼저 요한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장을 꺼내 희생제물로 드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칼빈의 열창을 들어보라!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 목사
[│헌정사│ The DEDICATORY EPISTLE]
하나님이 친히 그 손가락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존경하는 제네바 시의 모든 장관님과 의원님, 그리고 경외하는 재판장님들께
저 칼빈은 주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능력의 영靈을 부어주시어 정부의 모든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시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자비로운 행위를 마치 주님 자신에게 한 것처럼 여기시며 무척 칭찬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존경 받을 만한 자들로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 도시(제네바)를 나그네들의 안식처로,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의 안식처로 제공한 것은 주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다른 사람을 환대하는 행위가 단순한 칭송거리를 넘어서 최상의 덕德으로까지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의 지독하게 야만적이고 미개한 태도를 정죄하고 싶을 때 ‘악세누스’axenous, 즉 ‘인정머리 없는’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힘들고 어려운 때에 주님이 여러분을 지명하셔서 적그리스도(로마 교황)의 참람하고도 무자비한 폭정으로 자기 나라에서 추방된 경건한 자들과 의인義人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도록 하셨으니, 여러분을 더욱 칭송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거룩한 처소를 봉헌하게 하셨으니, 이는 여러분이 주님을 더욱 순수하게 예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파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러분의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장식품을 훼손시킴으로써 도시를 흉물스럽게 만들려는 것일 뿐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이 도시의 안전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곳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흩어진 지체들을 위해 베푼 경건한 친절 때문에 저 불경건한 개들(교황주의자들)이 시끄럽게 짖어댄다 하더라도,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그리고 세상 여기저기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복을 내릴 터이니, 이것이 여러분에게 충분한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심도 없고 수치스러워할 줄도 모르는 저 사람들의 혐오스러운 만행을 당당하게 멸시하십시오.
사실 그들은 자기들 마음에 기뻐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쏟아붓고 있다기보다 하나님 그분께 쏟아붓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저들(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모욕함으로써 여러분을 비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이러한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향해 증오의 불을 댕기게 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런 위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여러분을 보호하시어 그들의 분노를 대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도시들을 친히 신실하게 지키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경건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저 원수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리 문제 외에) 다른 이유로 여러분이 해를 입거나 학대 받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복음을 핑계로 여러분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옹호한다는 이유만으로 여러분을 공공연히 대적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들의 음모와 위협들을 무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날개 그늘 아래 두신 교회를 보호함으로써, 경건한 돌봄을 행하는 것과 순수한 신앙을 장려하는 일, 이 두 가지 견고한 보루를 단호하게 방어해야 합니다.
교황의 사주를 받은 일당들은 교황청과 결별했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가 배교하여 교회를 떠났다고 우리를 비난합니다. 저들이 습관적으로 비난하는 그 죄목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쉽게 변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 더러운 웅덩이(교황청)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노라고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만큼 담대하게 주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가톨릭 교회’(‘공교회’ 또는 ‘보편교회’라는 의미에서)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지만, 율법과 복음의 ‘보편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그 어느 부분도 그대로 보존하지 않고 모조리 다 오염시켜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온갖 혐오스러운 미신 행위로 하나님의 예배 전체를 모독하였으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사람이 고안해낸 것들로 바꾸느라 영적인 간음을 행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은 교회를 수백 번 파괴하고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기독교 전체를 뒤엎어버린 엄청난 오류를 범하는 데 있어서 매우 가톨릭적(보편적)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을 힘입어, 저들의 그 사망의 소용돌이로부터 안전하게 피하여 우리 신앙의 닻을 하나님의 견고하고도 영원한 진리에 고정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그 큰 선하심을 아무리 높이고 찬양한다 하더라도 부족할 따름입니다. 저는 이 요한복음 주석을 통해, 교황제도가 사탄의 수많은 속임수가 낳은 기괴함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교회라고 부르는 것 또한 바벨(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의 대명사)보다 더 난잡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언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우리가 저 더러운 웅덩이에서 벗어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 전염의 정도가 실로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교황)는 우리가 자기를 배반했다고 불평하지만, 우리는 그가 세상에 전염시킨 수없이 많은 사악한 것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의 순수함, 건전한 신앙, 하나님께 드리는 순전한 예배 그리고 성례聖禮의 올바른 시행 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대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풍습과 생활에서 변화가 왕성하게 일어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은, 꽤 많은 사람들이 구속拘束 받지 않던 자유를 기억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멍에에 익숙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교황주의자들은 이 자유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거슬러 방자히 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원수들이 무지한 자들에게 우리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가 모든 규범들을 파기했노라고 공격적으로 외치며 나올 때, 그들의 중상모략은 (설사 우리가 침묵하고자 해도) 다음 한 가지 사실로써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규범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해 보일 만큼, 우리는 본국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그러한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자신이나 동료들이 마땅히 해야 할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거나 엄격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러분이 가장 잘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이 양심적으로 내린 결정들에 대해 기꺼이 복종하듯, 여러분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우리의 원수들이 보이는 저 뻔뻔스러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교리를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저의 많은 저술들이 온 세상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믿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여러분의 이름이 이 책에 기록되어 특별한 기념으로 남는다면 더욱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제가 가르친 것과 같은 유의 교리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과 여러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제가 죽은 이후에라도 지금까지 출판된 저의 책들에서 유익을 얻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도시에서 시작된 이 가르침이 외국의 여러 나라로 널리 퍼져서 풍성한 열매를 맺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도시에서는 무시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특별히 여러분에게 헌정하는 이 요한복음 주석이야말로 여러분의 기억에 무엇보다 더 강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손가락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이 주석의 내용을 깊이 새겨주시기를, 그래서 사탄의 어떤 속임수로도 그것을 지울 수 없게 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제 수고가 성공할지 어떨지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제가 여러분 모두의 구원을 위해 신실하게 마음 쓰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훌륭한 목사라는 그 직책의 위대함과 탁월함에 부합하는 면밀함과 부지런함, 그 밖의 다른 덕성들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또한 제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많은 죄를 생각하며 늘 하나님 앞에서 통곡합니다. 그러나 감히 고백하기는, 충성스럽고 진지한 의지만큼은 제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일 저 악한 자들(교황주의자들)이 저를 괴롭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저는 당연히 저의 선행으로써 저들의 비방을 논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거룩하고 강력한 권위로써 저들이 하는 짓을 억누르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존경하는 장관님들과 의원님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며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1553년 1월 1일 제네바에서
[요한복음의 주제]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보여준다!
‘복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성경에서 ‘탁월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카타 엑소켄’(kata exoken)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은혜의 반갑고 기쁜 메시지를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세상과 및 세상의 덧없는 부富와 쾌락을 멸시하라고 가르치며, 이 비교할 수 없는 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을 온 마음으로 바라고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경건치 못한 자들이 세상에서 무절제하게 헛된 쾌락을 즐기면서 영적인 복을 거의, 아니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일반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관해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명하셨는데, 이 메시지를 특별히 ‘복음’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참되고 실제적인 행복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안에서만 복된 삶에 필요한 모든 부분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복음’이라는 단어를 심지어 율법과 선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친히 선언하실 때마다 그리스도를 내세우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이 비추시는 기쁨의 광선이 닿는 곳은 모두가 그분의 소유임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저 주시는 믿음에 관해서라면, 나는 믿음의 선조들이 우리와 동일한 복음에 참여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에서 늘 말씀하시듯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을 ‘복음’이라고 표현하는 방식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미 제시한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장엄한 선포’라는 정의定義를 따라야 할 것이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복음은 ‘대사’大使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케 하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의 사랑을 보증해주셨으므로 그분은 복음의 주제로 가장 적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마침내 승천하셨음을 서술하는 기사記事들이 특별히 ‘복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을 나타내는 용어이긴 하지만, 앞에서 제시한 이유에 비춰볼 때, 실제로 복음이라는 말은 제유법(일부분으로써 전체를 가리키는 수사법)처럼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죽으셨으며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고 선포하는 신약성경의 특정 메시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역사歷史는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도 않고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에, 복음서 기자들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죽음을 정복하셨다고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에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처음 세 복음서의 기자들(마태, 마가, 누가)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데 반해, 요한복음 기자는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갖는 능력에 대해서 설명하는 교리를 좀 더 강조한다. 다른 세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베풀려고 세상에 오신 사실과 죽음이라는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세상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 한마디로 말해서 중보자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한다. 요한 역시 그의 복음서의 일부에서 역사적인 서술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발생한 능력과 열매를 알려주는 교리는 여느 세 복음서보다 요한복음에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물론 네 복음서는 모두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허용될지 모르겠지만, 처음 세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몸body을 보여주는 반면, 요한은 그분의 영혼soul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이 다른 세 복음서를 이해하는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요한복음에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된 그리스도의 능력을 파악한 사람이라면, 이후에 다른 세 복음서 기자들이 ‘계시된 구원자’에 대해 언급한 것을 훨씬 수월하게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당시 하나님을 모독하는 에비온(Ebion, 예수님이 한갓 사람에 불과하다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유대인 이단)과 케린투스(Cerinthus, 1세기의 영지주의자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함)의 불경스러운 태도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주장할 목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유세비우스(Eusebius, 3세기에 활동한 팔레스타인 출신 초대교회 역사가)와 제롬(Jerome, 347~419. 초대교회의 학자로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음)은 고대인들의 공통된 의견을 들어 이 사실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어떤 이유를 지녔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네 명의 복음서 기자들에게 그들이 써야 할 내용을 각각 받아쓰게 하셨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분량을 기록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복음서 전체는 하나의 완벽한 작품을 이루었다. 마치 하나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이 네 복음서를 서로 연관시켜 통합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이 네 번째에 놓인 것은 요한복음이 시간 순서상 네 번째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네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다른 순서로 읽는 것이 더 낫다. 즉, 마태복음을 비롯한 나머지 복음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싶다면, 먼저 요한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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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칼빈 주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 예전에 나온 칼빈 주석에 대해선 잘 모르기에, 이번에 새로 출간된 칼빈 주석과의 차이를 난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현재 이 주석을 보고 느낀거는 너무나도 귀한 책인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