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2. 우즈벡 타쉬켄트
역사민족박물관의 이색 샘존상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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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상> |
사진설명: 타쉬켄트 역사민족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보살상. 화려한 장식과 아름다운 상호가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우즈베키스탄 수칸다리아 지역에서 출토됐다. |
2002년 9월6일.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몽환(夢幻)과 동경(憧憬)의 세계’ 중앙아시아로 날아갔다. 실크로드(Silk Road)와 다르마로드(Dharma Road. 불교가 전래된 길)의 서쪽 기착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에 가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구도자들이 ‘목숨 걸고 걸어갔던’ 구도(求道)의 길을 우리들은 비행기 타고 날아갔다.
타쉬켄트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으로 2002년 9월6일 저녁 9시10분(한국시간 2002년 9월7일 새벽 1시10분). 처음으로 들이마신 타쉬켄트의 저녁 공기는 덥지도 쌀쌀하지도 않았다. 습기가 부족한 듯 목이 칼칼했다. “동경의 땅에 마침내 왔다”는 기분에 잠도 오지 않았다. 호텔 창(窓)을 통해 타쉬켄트 거리를 보고 또 보았다. 거의 뜬 눈으로 중앙아시아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다음 날 곧바로 바자르(시장)를 찾았다. 참깨·오이·마늘·호두·석류·완두콩·당근 등이 실크로드를 통해 우리나라와 중국에 전해졌는데, 지금도 이곳에서 생산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시장엔 모든 것이 있었다. 게다가 야생 뽕나무도 곳곳에 보였다. 말 그대로 ‘실크’로드였다. 뽕나무 그늘에 앉아 흥정하는 상인들을 보며, 옛 실크로드 대상(隊商)들을 그려보았다.
타쉬켄트. 당나라 문헌엔 석국(石國)으로 나온다. 물론 당나라 이전의 중국 사서에도 보인다. 중국 측 문헌에 보이는, 타쉬켄트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북위(北魏. 386~534)시대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554년 완성) ‘자설국(自舌國)조’. “태연 3연(437)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으며 그 때 이후로 끊이지 않았다”는 부분이 그것. 당나라 현장스님(?~664)의 〈대당서역기〉에도 적혀있다. ‘자시국’이 바로 타쉬켄트를 가리키는데, 내용은 이렇다. “자시국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고 서쪽은 엽하(葉河)에 접해 있다.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토지와 기후는 노적건국(타쉬켄트 부근에 있었던 나라)과 같다. 성읍은 열 개이며, 각각 군주를 세우고 있고 전체적으로 다스리는 왕은 없다. 그리고 돌궐족에 복속돼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천여 리를 가다 보면 발한국(페르가나)에 이른다.” 어원학적으로 ‘자설’과 ‘자시’는 모두 돌을 의미하는 중세 이란어 ‘챠치’에서 나온 말, 따라서 ‘석국’은 의역(意譯)한 말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문헌엔 石國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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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취재이동 경로> |
주지하다시피 고대 중앙아시아엔 농경과 상업을 영위하는 오아시스 주변의 ‘정주민’(定住民)과,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가는 초원의 ‘유목민’(遊牧民)들이 - 지금도 많은 유목민들이 있다 - 있었다. 정주민은 주로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는 ‘아리안’족이었고, 유목민은 주로 ‘투르크계’의 여러 민족이었다. 당시 정주 농민과 상인들은 유목민 집단에게 세금을 바쳤다. 대상(隊商)이나 마을을 기습 공격하는 비적(匪賊)들이 적지 않았기에, 세금을 내야만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일종의 안전장치로 유목민들에게 세금을 내던 것인데, 역사에 기록된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는 이들 정주민과 유목민 사이의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어찌됐던, 고선지로 대표되는 당나라 세력과 아랍세력(압바스왕조)의 대결이었던 탈라스 전투(751년) 이후 타쉬켄트를 포함한 중앙아시아 전체는 종교적으로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페이퍼로드〉(진순신 지음. 예담출판사)에 의하면 당시까지 공존하던 불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 등이 사라지고 점차 이슬람교 일색으로 변했다. 751년 전까지만 해도 중앙아시아 주민들은 이슬람군이 주둔할 때는 〈코란〉을 암송하고 예배드렸지만, 그들이 물러가면 숨겨놓았던 불상과 제단을 다시 꺼내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실하게 중앙아시아에 자리 잡자, 주민들은 ‘편안히 살기 위해’ 이슬람 신도로 개종해 버린 것이다.
당시 고선지 장군을 배신해 당나라에 패배를 안겨주었던 ‘카를루크족’은 전쟁 후 어떻게 됐을까. 카를루크족은 탈라스 전투 이후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긴 것으로 보이지만, 기록상 남아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 일대를 주름잡았던 ‘카라한 왕국’의 역사에 몇몇 카를루크족 인명이 보이는 정도. 위구르계 이슬람 왕국이었던 카라한 왕국은 10세기 후반 지금의 중국 신강성 카슈가르로 진출했으며, 서쪽으로는 사산왕조(부하라)를 멸망시켰다. 남쪽으로는 우전(현재 중국 신강성 호탄)을 병합해 투르키스탄 지역의 이슬람화를 촉진시켰으나, 11세기 중엽 동서로 분열되었다, 12세기 서요(西遼)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상념(想念)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역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장을 뒤로한 채, ‘역사적 흔적’을 찾기 위해 타쉬켄트 역사민족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직 개관 준비 중”이라고 관계자가 말하는 것 아닌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곳까지 왔는데….” 그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관계자를 만나 30분간 설득했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관계, 그리고 취재를 허용하면 우즈베키스탄에 관광객이 많아질 거라는 이야기 등을 침 튀기며 했다. 그러자 관리인도 인정하고 “우리에게만 특별히 보여주겠다”며 박물관 안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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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비구가 협시하는 삼존상> |
사진설명: 타쉬켄트 역사민족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1-3세기에 조성된 두 비구가 협시하는 삼존상. |
2층에 올라가니 전시실이 있었다. 불상이 바로 2층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무심코 들어갔다. 그런데 눈앞에 찬란한 삼존불과 보살상이 앉아 있는 것 아닌가. 순간적으로 합장하고 서서 삼배를 드렸다. 동행한 군인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슬람을 믿는 그들에게 불상은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이리라. 가까이 다가갔다.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인 수칸다리아 지역(옛 테르메즈)에서 출토된 유물들이었다.
기원후 1 ~ 3세기 사이에 조성된, ‘두 비구’가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삼존상이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다. ‘보살’들이 부처님을 협시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옆에 전시된 보살상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삼존상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인데, 채색과 자태는 2천년 전 조성당시 그대로 인 것 같았다. 상호는 파키스탄 간다라 지역에서 본 불상조각과 비슷했고, 아프가니스탄 카불박물관에 있는 불상 모습과 거의 동일했다. ‘간다라 불상’이 구법승들을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곳에 전해진 것 같았다. 부처님 얼굴을 그린 불화 역시 2천년 전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타쉬켄트 시내 중심가에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영웅 티무르(1336~1405) 동상을 보았다. 그리곤 곧장 타쉬켄트에 불교를 전하고 있는 양기훈 포교사를 만나러 갔다. 양 포교사가 타쉬켄트에 포교당 자광사(慈光寺)를 개원한 것은 99년 3월13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작은 포교당을 현재 자리(타쉬켄트 약사카이 라이온 보히도바 거리)에 열었다. 개원식엔 건봉사 주지 영도스님 등이 직접 찾아와 격려해 주었다. 개원 이후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양포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사방이 이슬람인 이곳에서 불교를 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한 발을 내디딘 것 같습니다. 할 일은 앞으로도 무지하게 많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지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며, 남은 시간을 우즈베키스탄 불교 포교에 다 바칠 생각입니다.”
양기훈 포교사 포교당 자광사 운영
지금도 여전하지만 개원 초기엔 특히 어려움이 많았다. 불교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것이 제일 큰 난관이었다. 특히 25만 명이나 되는 교포(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들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했다. 심정적으로는 누구나 불교를 지지하면서도, 다른 종교의 적극적 공격적인 선교행위로 인해, 불교를 거의 알지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오해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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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쉬켄트 도깨비시장에서 만난 매파는 아저씨> |
여러 가지로 노력한 끝에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자광사에서 정기법회를 열 정도가 됐다.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게다가 토요일 오전엔 ‘김병화 집단농장’에 나가 법회를 보며, 토요일 오후엔 타쉬켄트 근교 치르치크·켈레스까지 가 법회를 주관한다. “우즈베키스탄 교포들은 누구나 다 심정적으론 불교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적극적인 선교로 불교를 잘 알지 못하고, 심지어 불교에 대해 오해하기까지 합니다.”
교포들만 대상으로 포교하는 것은 아니고,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법회를 열기도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그런데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대불이 파괴된 후, 불교에 대한 이슬람교도들의 생각이 이상하게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양포교사는 전했다. 불교는 우상숭배 종교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무엇인가 다른 종교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양 포교사는 2001년 11월28일 우즈베키스탄 종교성에 종교단체로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우즈베키스탄에 문을 연 외국 종교단체로는 처음 있는 일이란다.
“우즈베키스탄 종교성도 처음엔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불교를 믿었고,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접경 지역에 있는 ‘수칸다리아 유적’ 등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냐고 하니깐, 공무원들도 차차 수긍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번 설득 끝에 우즈베키스탄 종교성이 2001년 11월28일 마침내 등록을 허락했습니다. 지금은 종교성이 자광사 최대의 후원자가 됐습니다.”
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엔 불교가 나름대로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이슬람의 동점 이후 불교는 서서히 사라져 10세기 이후엔 완전히 소멸돼 버렸다. 이런 불모지에 포교당을 개원한 양 포교사의 원력이 실현돼 중앙아시아에 다시 불교가 꽃필 날을 기대해 본다.
우즈베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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