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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연구 51. 마태복음 25장
주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
이것은 톰 라이트(Tom Wright)의 주석을 요약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톰 라이트에 대한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현대의 신약 성서 학자들 중에, 라이트는 전통적인 신학 주제인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중요한 제안을 하는 학자다. 나아가, 그는 동성애자에게 공식적으로 목사 안수를 주는 것과 동성 결혼을 반대한다. 그런 일들은 성공회에서는 간혹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문자적 휴거를 비판하며, 그의 친구 마르쿠스 보그와 함께 책을 저술하기도 했고, 자유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목소리를 널리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교류하고 있는 운동은 개방적인 복음주의 운동과 바울에 대한 새 관점 운동이다. 이 둘은 많은 보수적 신학계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1]
마 25:1~13 열 처녀 비유
1. 이 비유는 기본적으로 준비하고 있으라는 의미다. 그 외에도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한 유대 전통에 뿌리를 같이 한다. 잠언에서는 어리석은 여자[2]와 현숙한 여자(지혜로운 여자)[3]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본문에서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나온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불에 사용할 기름을 미리 준비했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너무 늦도록 준비하지 않았다.
2. 여기서 기름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옳지 않다. 믿음이나 사랑이나 다른 기독교적 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톰 라이트는 그런 생각에 반대한다. 이 이야기는 중요한 순간을 위해 잘 대비하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세부적인 것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자연스럽지 못하다. 5절을 보면, 신랑이 늦게 오므로 지혜로운 처녀들도 다 졸며 잠이 들었다. 13절에서는 예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처녀들도 다 졸며 잤다는 구절을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이 비유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것과 준비하는 것, 미리 생각하는 것,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조만간 위기에 직면할 것을 인식하는 것,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지 않으면 후회할 것 등이다.
4. 신랑이 온다는 이야기는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① 마 9:15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할 수 없음.
② 마 22:2 천국은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배설한 왕의 이야기와 같다.
③ 마 25장 이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신랑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언급하며, 그 이후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셨다.
④ 이것이 강조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비유가 종말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세상과 교회가 기다리고 있는 큰 날이자 무서운 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⑤ 예수님의 사역을 통틀어 볼 때, 주님께서는 그 백성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들은 결혼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그들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나뉜다. 지혜로운 자들은 예수님을 알며 주님의 오심에 깨어 있는 자들이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⑥ 이것은 산상수훈에서도 동일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후에 일어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가르침을 담은 본문에서 (산상수훈의 이야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최소한 그 기본 의미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5. 이런 결론은 피하고 다른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이 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시대에 있었던 고유한 상황에 독점적으로 해당된다고 가르치면 모든 시대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독특하고 결정적인 일이었고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하나님과 관계맺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고, 그 안에서 주님의 주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6.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새 시대에서도, 예수님과 그의 첫 번째 추종자들이 살았던 독특한 시대보다 덜하지 않게, 우리도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우리도 쉽게 일에 태만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일과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될 수 있으며, 갑작스런 순간이 닥쳐 왔을 때 준비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주석을 참고로 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이미 주께서 산상 수훈에서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요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의 오심을 준비한 자들은 지혜로운 자요, 준비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신랑의 혼인잔치는 이미 주께서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그 때도 역시 신랑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신랑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 구름을 타고 인자가 오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믿는 자들과 예루살렘의 거짓 지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 그 때에는 집의 사람들을 맡아 때를 다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 착하고 지혜로운 종이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오심을 대비하는 이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신랑과 더불어 잔치에 들어가고 믿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자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심판 날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이야기는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앞두고 믿는 자들에게 깨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우리에게 적용된다. 즉, 우리들도 신랑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우리들도 예루살렘에 있었던 그 슬픔과 기쁨이 경고가 되어 우리들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인도한다.
달란트의 비유: 마 25:14~30
1. 이 비유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기독교는 하늘의 시험 제도가 아닐까?’ 이다. 유대교에서는 그렇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부할 교과 과목과 배우고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규칙을 주시는 분이다. 어느 날 주님께서 오셔서 기말시험을 보게 하신 후에, 합격자들과 불합격자들을 만나신다. 좋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나쁜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비유를 처음 접할 때는 그런 인상이 든다.
2. 물론 예수께서 하신 전(全)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관점의 기독교, 또는 그런 복음,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반대하게 했다. 예수께서 선언하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들이 정해 놓은 유대교의 어떤 시험과목에서도 세리와 창녀들이 시험에서 불합격했지만, 그들이 너희들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마태복음 23장 전체를 할애하여 스스로 지도자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지키려고 노력하는 규칙으로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씀하셨다.
3. 그렇다면 이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떠나 있을 오랜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일들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그들이 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기독교를 또 하나의 ‘시험제도Examination System’로 쉽게 전락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만 쉽게 그렇게 된다.
4. 이런 해석이 가진 진짜 문제는 주인과 종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서 주인은 종들에게 할 일들을 남겨주고 멀리 떠나간다. 그리고 그 후에 돌아온다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도 그의 복음서(19:11~13)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제안한 것처럼, 산상수훈과 이 마지막 이야기가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당시와 그 이후에 곧 다가올 시기에 대하여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 도전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이 비유를 동일하게 해석해야 한다.
5. 그러므로 이 비유는 마태복음 23장과 가까이에 속해 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그들은 주인의 돈을 숨겨둔 악한 종으로 묘사된다. 한 달란트는 대충 말해서 화폐의 단위로서 노동자가 15년 동안 일한 대가에 해당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맡은 달란트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맡은 자들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표시였다. 그들이 받은 위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통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복 주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약속을 땅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 그 빛을 비추라는 명령(마 5:15~16)에 등돌려버렸다.
6. 그들은 무익한 종이었다. 이제, 그들의 주인이 마지막에 와서 그들과 회계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에 대한 경고는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은 종에 대한 형벌로 여겨진다. 이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계속해서, 이 세 번째 종이다. 그는 어리석게도 주인의 너그러움에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7. 그렇다면 나머지 두 종은 누굴까? 그들은 주인의 신임에 올바르게 반응한 자들인데 이들은 누굴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은 자들로서, 전에 이스라엘에 받은 명령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발전시켜 새로운 것이 되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태복음 13:31~32에 나오는 겨자씨와 같은 자들로서, 작게 시작하였으나 크게 자라게 된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란 작은 싹으로 시작했어도 꽃이 무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것을 반대하고 거슬린 제도와 최종 대면을 하실 때, 그 때 주님께 충성된 사람들은 맡겨진 돈을 지혜롭게 사용한 사람들과 같은 자들이다.
8. 이런 배경이 의미하는 바는, ‘최종 시험’에 대한 어떤 개념도 더 넓은 상황에 놓여져야 한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곳곳에 넘치는 자리에 놓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잘 사용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인격이신 예수 메시아로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오셨고, 택하신 백성들이 자신들이 받은 축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는지 알아보려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말한 대로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와도 같은 맥락을 형성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라는 인격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한 모든 것을 체로 걸러내시고 무게를 달아보신다(특히 고전 3:10~15, 고후 5:10을 보라). 이 모든 것은 중요하며 무시될 수 없다.
고전 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9. 그러나 우리가 또한 항상 주장해야 하는 것은, 이 비유는 다른 비유와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즉,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분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표시로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비유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이 이야기의 절정이 나온다. 그것은 인자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다(20:28)는 점이다.
10. 예수께서 누군가를 바깥 어두운 곳으로 버려질 것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을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바로 어두운 세상으로 오셨고, 자신이 친히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27:45~46).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국제사법재판소가 네델란드의 헤이그에 있다. 정의는 인간이 가진 가장 심오한 갈망 중의 하나다. 정의가 없으면 깊은 내면에서부터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정의(正義 Justice)를 정의(定義 Definition)하기는 어렵지만 실행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다고 인간은 정의를 추구하는 일을 멈춘 적은 없으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며,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끊이지 않는다. 정의는 단지 ‘악을 처벌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보통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정의는 세상에 균형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의 핵심을 이루기도 하지만, 정의에 대한 갈망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온 세상에 정의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꿈에도 그리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의로울 것이다. 세상은 다시 바르게 될 것이다.
인자의 오심에 대한 성경적 이미지에는 정의가 시행될 것이라는 선언이 있다. 성경과 유대교 문학의 많은 장면에는 이런 것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이야기이자 다섯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이것은 비유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천상의 장면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마태복음 24장의 이야기가 발전된 형태처럼 보인다. 예수께서는 세계의 통치자로 높아지셨으며, 고난 당하신 후에 보응하시는 장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전해야 할 증거에는 주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비유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일차적으로 보면 이것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적어도 서방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야기에 익숙해 있다. 그들은 그림이나 신비극, 그리고 많은 고전 작품에서 전통적으로 이런 심판 이야기를 들어 익숙하다.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 흥미롭다. 심판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여기 있는 내 형제나 자매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어떻게 대우했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내 형제나 자매는 누구며,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누굴까?
예수께서는 일찍이 주님의 형제와 자매에 대해 정의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셨다.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따르는 자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인데, 예수께서 자기 가족이라고 여기시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향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잘 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우리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한 본문을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세한 것을 끼워 맞추기 위해 왜곡하는 수가 있다.
이 장면은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 곧 장차 지도자가 될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중에 하신 긴 이야기의 절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이 합당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는 높임을 받으셔서 성경에서 보여주는 대로 인자의 보응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유대인의 일반적인 방식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어떤 유대 문학작품에서는, 유대인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이방인 나라들은 심판을 받는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재정의하심에 따라, 세상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따라 자신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세상 나라들에 대한 심판은, 물론, 메시아의 일 중의 일부로 흔히 생각되었다(시 2:8~12). 그리고 왕 또는 메시아는 목자로 표현되었다(겔 34:23~24). 아마도 그것이 심판의 장면에 양과 염소의 이야기가 삽입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 언제 천사들을 대동하시면서 예수께서 심판의 자리에 앉으실까?
마 16:27[4]에서 이미 우리는 이 장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인자의 보응은 마24:30[5]을 가리킨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미래의 재림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 세대 안에 일어날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나머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물론, 예수께서 이미 정의로운 주인으로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고전 15:25~28[6]). 그러면 이 심판의 장면은, 비록 그것이 멀리 떨어진 미래의 최종 사건으로서 일처럼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역사에 일어날 일 곧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곧 다가올 사건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를 기다리는 마지막 심판도 될 수 있을까?
마지막 심판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과 다른 이들이 이미 주장하지 않았는가? 최후 심판은 있을 것이라고 (롬 2:6[7], 고후 5:10[8]). 그러나 적어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형제 자매로서 받은 사명이 얼마나 위험하고 해를 입기 쉬운지를 보여주고 계신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맏형인 자신이 이미 세상을 통치하고 있으며 그들이 당할 일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독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여러 곳에서 당한 일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까지도, 경멸과 학대, 고문과 죽음이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 본문이 마태의 일차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을까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도 큰 희망을 줄 것이다.
이상이 톰 라이트가 주석한 마태복음 25장 이야기다. 그 핵심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열 처녀 비유는, 지혜로운 자들처럼 깨어 준비하라는 말이다. 산상수훈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않는 자들은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며, 주께서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이런 선언은 왕이 심판석에서 하는 말이다. 열 처녀 비유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묘사하는데, 이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지혜로운 자들처럼 깨어 준비하라는 메시지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옛적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달란트 비유는, 마태복음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그리고 특히 24장을 생각해 볼 때, 성전과 율법을 맡은 바리새인들을 세 번째 종이라고 책망하시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종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옛 이스라엘이 받은 새로운 제사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자들, 곧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특히 주의할 점은, 예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은 맞지만, 기독교를 ‘시험제도’로 전락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유대교의 율법주의 또는 공로주의로 쉽게 간주하게 하는 본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속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달란트는 결국 이방의 빛이 되라고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데, 이것의 가치를 망각하고 그 책임을 방기함은 달란트를 땅에 묻은 것과 같은 행동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면서 새 백성들을 세우셨으며 새로운 계시와 은혜와 사죄와 신분을 주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야말로 이 시대에 새로운 달란트를 맡은 자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워야 할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나라다. 우리가 믿고 순종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핵심은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에게 어떻게 이방인들이 대했는지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될 이야기다. 왜냐하면 여기서 심판하시는 분은 자신들의 맏형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세 이야기에서, 경고의 대상은 엄연히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요, 위로와 칭찬의 대상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성도들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준비한 사람들이요, 한 달란트 맡은 자가 버린 임무를 새로 맡아 감당한 충실한 종들이요, 그들이 비록 환난을 당하나 결국은 위로를 받을 것을 아는 주님의 형제 자매들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성도들에게 무서운 심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이야기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 이야기는 마태복음 21장부터 시작하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그리고 그들에 대한 경고와 심판 메시지의 절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미 예루살렘의 심판이 선언되었고, 그 결과로 열 처녀의 이야기로서 준비되지 않은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고[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맡은 바 은총의 축복을 사명으로 알고 충성하지 않는 자들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박해 받는 주님의 형제들을 돌보지 않고 외면하는 자들은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주님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3중 경고라 할 수 있다. 먼저, 깨어 신랑을 맞이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사명을 잃어버린 자들도 쫓겨날 것이며, 그 나라의 백성들을 선대하지 않는 자들도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반면에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새 언약 백성들에게 박해가 있을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 중에 인내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일세기의 독자들에게도 마태의 이 이야기는 매우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묶어서 통으로 이해하면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가 더욱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 본문을 가지고 차근차근 하나씩 다룰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세 개를 동시에 다룰 것이다.
[1] 김세윤 박사는 그의 책 ‘바울 신학과 새 관점’(두란노아카데미, 2002)에서 N.T.Wringt의 새 관점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2] 잠언 7장에서 음녀는 먼 길을 떠난 남편을 배반하고 음행을 일삼는다.
[3]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은 남편의 이름에 존경을 더한다.
[4]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6]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8]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