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전도사의 가정편지 20141005 밭 이야기
본문 말씀 : 마가복음 4: 1 ~ 9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본문 말씀은 흔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불리웁니다. 그러나 이 본문 속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씨 뿌리는 자라기 보다는 밭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어떤 밭이냐에 따라 열매가 맺히기도 하고 그렇지 못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 설교의 제목을 “밭 이야기”라고 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배를 타고 호숫가에 나가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아마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병고침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지요.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이후 모여서 기도한 사람이 120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이전의 시점으로 가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형 당시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군중들만 가득하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기적만 바라고 찾아 온 군중들을 향해 마음이 참 아프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군중들을 향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뜻을 물어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막 4: 11, 12)
그러니 비유 설명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되 들을 귀 없는 자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 뿌리는 자가 뿌리는 씨는 어느 곳에 뿌려지더라도 그 안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씨입니다. 돌밭에는 나쁜 씨를 뿌리고 옥토밭에만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도 사실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뿐이지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닫힌 것이 아니고 귀가 닫힌 것입니다. 마음이 닫힌 것이구요.
비유 가운데는 4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길가입니다. 길가는 굳어 버린 마음입니다. 갈아 엎어지지 않아 씨가 뿌리를 내리고 숨을 쉴 수 있는 흙이 아닌 것이지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부드럽습니다. 유연하고 모든 것을 쉽게 받아 들이지요. 그러므로 길가는 아이들의 마음과는 조금 거리가 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마음 속에 굳어져 새로운 생각을 잘 받아 들이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굳어버린 생각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경우도 있지요. 어릴 때 종종 누가 더 세냐, 이렇게 질문할 때가 있지요? 제가 어릴 때 저희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어느 나라가 제일 잘 사느냐고 물었었지요. 그때 어머니 대답이 미국이 제일 잘 산다는 거에요.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생각을 저는 꽤 자랄 때까지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답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도 많으시죠?
우리 아이들에게 닫힌 결론, 닫힌 가르침을 주면 그것을 마음 속에 간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질문들은 닫힌 답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열린 답을 주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좁고 편협하면 서로 다투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 가도록 가르쳐야 지요. 옳은 것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정말 옳은지에 대해서 확신하려면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얘기해야 할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기독교인들은 편협하고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듣고 있는데요, 사실 그러한 비난이 어느 면에서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기독교 안에도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느냐, 믿음과 행함이 같이 가야 하느냐 등 구원론만 해도 서로 다른 여러 교단들이 있는데, 우리 교단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교회의 배타성을 가중시킵니다. 믿음의 삶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알지 못 하는 가운데 하나님 손을 붙잡고 살아 간다는 데 있습니다. David Bosch 라는 선교학자가 “담대함 속 겸손” 혹은 “겸손 속 담대함”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이 분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안다고 하는 순간 교만해 질 수 있지만, 잘 모른다고 인정하면서도 담대하게 하나님 손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선교사이기 때문에 진리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선교지에서 행한 많은 잘못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교만함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들에 대해서 반성하면서 선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진리를 잘 모르는 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안다고 생각하면서 교만하게 선교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무엇이 진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얘기해 주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무엇인지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부모님 상을 보여 주는 것이 우리 어린이들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의 밭은 돌밭입니다. 바위 돌 위에 자잘한 흙이 있어 그 곳에 씨가 뿌려지면 우선 싹이 나지만 햇빛 아래 금방 시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넘어지는 자”라고 설명하십니다.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말하는 환난이나 박해가 우리 시대에는 흔하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 시대에도 힘든 일이 일어나면 믿음이 꺾이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기복적 신앙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나오면 복 받는다는 말을 종종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오면 기도 했더니 잘 되었다는 간증도 흔하게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에 대해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학 입시가 끝나면 붙은 사람이 있고 떨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한 부모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은혜”로 붙었다고 말이지요. 그러면 떨어진 자녀를 둔 부모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 은혜가 없는 것일까요? 교회에서 이런 믿음의 간증이 흔하다 보니까 그런 간증이 없으면 곧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 집니다. 그래서 다들 하나님 은혜로 무척 좋은 일들이 가정 안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하지요. 곧 교인들의 삶은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얘기로 믿음이 좋으니 장로님들마다 다 가정이 윤택하다고 얘기하곤 하는데요,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조금 윤택하신 분들이 장로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아닐까요? ^^)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돌아 보면서 회개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좋은 신앙의 모습인 것처럼 가르쳐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감시하는 감시자, 평가자가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꼭 들어 주어야 하는 분,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기도에 종속된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믿는 사람에게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있고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좋은 일 일어나면 감사하고 나쁜 일 일어나면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떠나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설교 예화에 다루었습니다만, 저와 친한 동기 전도사에게 2살 바기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갑작스런 알레르기 증상으로 구급차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생사를 오가는 아이를 두고 그 전도사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 아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회개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또 생각하기를 이 죽어가는 아이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겠다 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죽어 가는 아이를 두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믿음의 태도일까? 왜 슬픔을 슬픔 그대로, 아픔을 아픔 그대로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내가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열심히 믿으면 내 모든 다른 일들을 다 챙겨 주시는 하나님, 믿기만 하면 복 주시는 하나님, 이런 생각들이 우리 기독교인들 안에 가득합니다. 목사님들이 주로 그렇게 설교하셨구요.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도 종종 있구요. 우리가 잘해서 좋은 일이 일어나고 우리가 잘못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결국 우리 삶의 주인은 우리지요. 하나님은 그냥 우리의 선함과 악함을 증폭해 주는 증폭기에 지나지 않을 거구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면 일본의 쓰나미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시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요? 내 삶의 모든 인과 장치를 하나님께 두면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성숙된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인과가 다 우리 삶 안에 일어난다면 천국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이 불안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받아 들이면서, 그래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인도하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담대함 속 겸손함이고 겸손함 속 담대함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 등장하는 밭은 가시 덤불입니다. 이곳에 뿌려진 씨는 햇빛을 못 받고 가시가 자라나는 것을 방해해서 곧 시들고 말지요. 가시밭은 말씀에 보면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 (막 4: 19)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 (눅 8:14)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 가는데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매여 살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는 것이 문제이지요.
사실 기복적인 신앙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믿음은 결과적으로 복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믿음의 동기부터가 하나님이 우선이 아닙니다. 세 번째 밭은 우리 아이들보다 우리 어른들에게 더욱 더 조심해야 할 부분들을 알려 주고 있지요?
이상 세 밭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를 얘기해 주려고 합니다. 사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삶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이웃 사랑의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지요. 이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씨앗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굳이 전도를 많이 한다고만 볼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믿음의 열매가 수많은 우리 이웃들을 통해 맺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번 주에는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설명하는 4가지의 밭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한번 물어봐 주세요. 제가 “밭 이야기”라고 이름 붙였듯이, 우리 아이들에게 모든 설교가 이야기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을 향한 삶의 교훈과 우리 부모님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삶의 교훈이 달라서 설교문과 이 가정 편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느꼈는지, 한번 들어 보세요. 사실 굳이 잘 이야기 하지 못하더라도 교회에서 배운 것에 대해서 같이 얘기를 나눠 보려고 하는 부모님 모습에서 아이들이 따뜻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중요한 광고가 하나 있습니다. 10월 26일, 10월 마지막 주일에는 운동회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어린이들이 1부 예배에 나와 같이 예배드리고 덕현 중학교로 이동해서 하루를 보낼 거에요. 신나게, 우리 부모님들이 했던 옛날 골목길 놀이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얼음 땡, 비석치기, 오재미 놀이 (이거 일본말 같은데 한국말로 하면 못 알아들으실 것 같아서요…콩주머니 놀이라고 해야 할까요?) 등, 추억의 놀이들을 아이들과 같이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날은 모든 어린이들이 1부 예배에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한 주간 평안 하시구요, 다음 주 가정 편지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 10. 3 문전도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