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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염려를 극복하는 신앙/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생활에서 가장 없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염려와 근심일 것입니다. 올 한 해 벌써 4월까지 지냈는데, 1/3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의 삶만 돌이켜 보아도 , 얼마나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왔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이 자녀들까지 있으면, 자녀들에 대한 염려가 붙습니다. 그런데, 염려와 근심은 우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염려'라는 말이 영어로는 worry입니다. 이 '워리'의 어원은 '워겐'입니다. 이 말의 뜻의 어원은 '물어뜯는다'입니다. 즉 짐승이 사냥을 할 때에 이빨로 목을 물어 질식시켜 죽이듯이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바로 우리가 마음에 근심하게 될 때에 그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질식시켜 죽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근심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근심하는 동안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근심에 싸인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얼굴에서 역력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염려를 '느린 형태의 자살'이라고도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살이 죄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심하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 자기 생명을 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의 근심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로 마르게 합니다. 건강도 안좋아집니다.
존 홉킨스 대학의 에드워드 포드스키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퇴원하는 환자를 보면 그 사람이 다시 올 것인지 아닌지를 대충 짐작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이것입니다. 퇴원하는 환자 가운데 다시 찾아오는 환자들을 그가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의 안정을 찾은 사람이 다시 찾아오는 경우는 15%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퇴원하는 환자가 1년 안에 재발하는 경우는 무려 70%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에 근심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육체의 건강까지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생활의 염려는 마음이 둔해지고, 염려가 깊어지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염려 속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면 그래서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범사가 잘 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건강도 해칩니다. 마음도 상합니다.
어떻게 해야 염려를 이기는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을까요?
1.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현재를 충실하게(책임있게) 사는 것입니다.
염려와 계획은 다른 것입니다.
염려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고, 올바른 계획의 출발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계획한 다음에는, 나머지는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 목사님은 염려가 자주 일어나자, 한꺼번에 염려를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수요일 염려박스”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매일 매일 염려를 박스에 넣었습니다.
수요일에 염려박스를 열어 본 결과, 실제로 염려를 해야 하는 염려가 현저히 줄어 들었답니다.
와싱톤 대통령도 염려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염려에서 벗어났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염려에서 벗어나니까, 걱정이 3분의 1로 줄어 들어서, 현재를 충실하게 살았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노만 빈센트 목사님은 염려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염려의 40%는 과거에 관계한 것이므로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모든 염려의 50%는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관계한 것으로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염려의 10%만이 걱정거리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누구한테 드립니까? 하나님.
염려의 90%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쓸데없는 걱정이어서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10%는 - 염려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염려의 십일조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염려의 십일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질 십일조는 드리기 어려워도, 염려 십일조도 못 드리십니까?
하나님은 물질은 물론이거니와, 정말로 염려해야할, 염려의 십일조도 대환영 하십니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염려의 십일조를 드립시다." 같이 옆에 분과 말해 봅니다.
막막한 상황에서 성도는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돌보심)하심이니라』
맡겨 버린다는 것은 던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던져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 대한 염려를 내 던지면 주님의 용서와 화해의 평화가 마음에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에 대한 염려를 주님께 내던지면 주님의 지혜가 든든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엄습할 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면 조용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당신의 문제를 안고 염려하며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던져 버리십시오
기도할 때 우리는 염려의 소재를 옮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쉼과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 맡기고 기도함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쉼과 평안 속에서 범사에 형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와 근심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은 많은 교훈과 권면을 주고 계십니다.
대표적인 구절로 마태복음 6:25-33을 보겠습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 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염려를 이기는 길을 알게 됩니다.
2. .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구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였는데, 나라는 그 의미상 "통치"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하시면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기르심을 구하고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걱정과 염려가 밀려올 때, 너무나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와 상황을 다스려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길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옵소서"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통치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우리로 목도케 하여 주실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앞에 두고 뒤에서는 다시 잡으려 쫓아오는 애굽의 군대를 두고서 염려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방이 막히고 답답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할 때,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놀라운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을 목도케 하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근심되게 하는 것은 환경입니다. 어떤 환경이냐면, 사람과 일입니다. 사람과 일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근심과 염려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사람과 일 위에서 역사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바라볼 때, 세상의 불안, 염려, 걱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비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풍랑 속에서 배에 물이 들어오면서 겁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님은 다가 오십니다. 그것도 밤에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14:28)
이때 주님께서 "오라"하시자, 그 말씀대로 믿고 걷자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에게 공포의 대상, 염려의 대상인 물 위를 유유히 걸었습니다. 더 이상 물이 공포와 염려의 대상이 안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갔더니 말이지요.
그런데, 그의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떨어져서, 바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리지르며 주님께 구원의 손길을 펴자, 주님께서 건져 주셨습니다.(마14:22-33)
여기서 우리는 염려와 근심을 이기는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염려와 두려움의 환경에서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방향전환하는 것입니다. 시선을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와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받고, 그 두려움이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시선을 전환시켜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구원과 염려를 다스리며 사는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곤란하고 답답한 환경에 있다하더라도,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볼 때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의 승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통치 속에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악령과 함께 사람을 멸망시키는 무기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질병, 부도, 실직, 사이비 종교, 전쟁 등 수많은 무기들을 전시하고 가격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은 무기가 있습니다.
다른 무기들은 다 가격이 매겨져 있었는데 이 무기 앞에는 가격표가 붙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령들이 대장인 마귀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을 멸망시키는 모든 무기들은 그 무기에 따라서 가격이 매겨져 있는데 왜 이 무기는 가격표가 없습니까?
마귀가 대답했습니다.다.
"이 무기는 개인의 한 사람을 넘어뜨릴 분만 아니라 가정이나 교회나 회사를 백발백중 넘어뜨리는 가장 무서운 무기라네, 그래서 값을 매길 수가 없지, 부르는 게 값이니까?“
한 사람이나 사람이 속한 공동체를 한방에 쓰러뜨리는, 마귀 대장이 자랑하는 무기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가공할만한 무기는 바로 ‘염려’였다고 합니다.
이 염려는 한 사람의 건강을 해칩니다.
염려는 가정을 파괴하고 인격을 파괴합니다.
염려는 잘 나가는 회사를 망하게 합니다.
염려라는 질병은 약도 없고 치료의 방법도 없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믿음입니다.
한 신학자가 일세기를 살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이 기록된 문서를 뒤지다가 그들의 기록에서 이러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티테이오스 쟌, 티테이오스 폴, 티테이오스 바나바.
이렇게 이름 앞에 티테이오스라는 특별한 단어가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 단어가 붙어있습니까? "티테이오스"가 무엇입니까?
티테이오스라는 단어를 알아보면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티테이오스 폴, 염려하지 않는 사람 폴, 티테이오스 홍길동, 염려하지 않는 사람 홍길동"
초대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힘들게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생명의 위험이 늘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염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처럼 제일 염려가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베드로는 책임이 많은 사람이고 성질이 급할 뿐만 아니라
꼼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 보다 더 많은 염려를 하였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어쩌나/
세금을 안 내면 어떻게 되나/
로마의 군대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나/
파도에 빠지면 어떻게 되나/
이런 베드로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염려에서 벗어 났습니다.
그는 모든 생애를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지막 메세지는 베드로전서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저가 너희를 권고하신다는 말은 저가 너희를 돌보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는 근심이 주는 해악과 함께 근심, 염려를 이기는 길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근심은 우리에게 영혼육에 걸쳐서 해악을 줍니다. 근심은 서서히 영혼을 죽음으로 가게 합니다. 또한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악한 근심을 이기는 길은
1.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에 충실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 즉 통치를 믿고 모든 환경을 이기게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염려와 근심을 이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쉼과 평안함을 찾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육신의 강건함을 입는 복된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 처 :김경수목사의 신앙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