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9일생으로 전쟁둥이이기도
하다. ‘진정 난 몰랐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등의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으며, 지금도 올드팬에게는 최고의 곡들이기도 하다. 두 아들이 있고, "개같은 날의 오후" 의 영화감독 이민용의 누나이기도
하다.
임희숙 - 진정 난 몰랐네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 잃어버리고
타오르는 내 마음만 흐느껴 우네
그토록 믿어왔던 그 사람 돌아설 줄이야
예전에는 몰랐었네 진정난 몰랐네
누구인가 불어주는 휘파람 소리
행여나 찾아줄까 그 님이 아니올까
기다리는 마음 허무해라
그토록 믿어왔던 그 사람 돌아설 줄이야
예전에는 몰랐었네 진정난 몰랐네
누구인가 불어주는 휘파람 소리
행여나 찾아줄까 그 님이 아니올까
기다리는 마음 허무해라
그토록 믿어왔던 그 사람 돌아설 줄이야
예전에는 몰랐었네 진정난 몰랐네
1950년 6월 29일생 전쟁둥이인 한국의 티나터너 임희숙.
6.25 전쟁 중에 부친의 사망으로 어머니인 조종순씨의 편모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당시 우익청년단체 대한청년단 소속이던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납북됐고, 세살 터울의 언니는 제대로 먹지 못해 숨지고 말았다.
5년간 남편을 기다린 임희숙의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재가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임희숙에게 더욱더 각별한 애정을 쏟게 된다. 재혼한
어머니는 두 명의 동생을 낳았고, 그중 한명이 영화 ‘ 개같은 날의 오후’로 주목을 받았던 이민용 감독이다.
‘진정 난 몰랐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부른 가수
임희숙. 짙은 허스키에 영혼을 울리는 그녀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흑인 재즈 가수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목소리, 굴곡진 삶을 노래한 짙은 감성의 허스키 보이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절절한 호소력의 소울, 트로트, 재즈,
가스펠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능력. 이 모든 것이 그녀가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인듯하다.
임희숙의 음악적 재능은 부모가 물려준 것이다. 그의 부친은 아코디언,
색소폰, 기타, 드럼, 하모니카 등 5개의 악기를 연주할 정도였다고 한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어머니를 똑닮았다고 한다. 딸에게 인생을 건
어머니는 그의 가수 데뷔를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가장 큰 지원자가 되어 주었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외국 팝송을 많이 접했는데 특히 미국
흑인가수 샘 쿡(Sam Cook)의 노래에 푹 빠져 지냈다. 어린 그녀는 짙은 감성으로 사람의 영혼을 감싸주는 외국의 솔 가수들의 끈적끈적한
솔이나, 블루스 같은 흑인 재즈성향의 노래가 특히 좋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음악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녀가 고집을 꺾지 않자, ‘목포의
눈물’을 작곡한 손목인 선생님에게 데리고 갔다. 손목인 선생님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흑인들의 애절하면서도 힘있는 느낌을 발견하고, 그런 분위기의
노래 몇 곡을 주며 그녀를 연습시켰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려는 딸을 반대했었지만, 그녀가 가수로 데뷔할 때 ‘딸을 잘 부탁한다’며 MBC
라디오 DJ 이종환 선생님께도 찾아가셨다고 한다. 또한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하면, 밴드 뮤지션들을 먹이기위해 수십인 분의 갈비를 만들어올 만큼
어머니는 그녀의 뒷바라지에 헌신적이셨다.
66년 덕성여고 2학년 때 그녀는 가수로 데뷔했다. 당시 최고로 치던 워커힐
무대에 선 그녀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69년 첫 히트곡인 ‘그 사람 떠나가고’를 받아 처음으로 음반을 내고,
작사·작곡가이며 방송국 PD였던 전우중씨에게 발탁돼 매주 TV에 출연했다.
그녀는 TBC TV의 ‘ 쇼쇼쇼’, ‘ OB카니발’, 동아방송 등 방송에
출연해 팝송을 주로 불르며 바쁘게 보냈으나, 어린 나이에 방송생활을 시작했던 그녀는 정작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진 못했다. 그녀는 68년 한양대
영화학과에 입학했지만, 결국 바쁜 가수생활로 인해 1년이 못 돼 중퇴하고 말았다.
당시는 주류 대중 음악을 지배하던 트로트가 서서히 대중의 관심 밖으로
내몰리며, 미 8군 무대를 기점으로 영입된 솔, 록,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기세가 어느 때 보다 드세던 시기였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들어간 그녀는 독특한 소울 창법과 남자 같은 화통한
성격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조영남과 곧잘 비교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별명이 ‘ 여자 조영남’. 외모를 비하했던 별명이었던지라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었던 증거이기도 했다.
당시 임희숙의 넘치는 끼를 높이 산 작곡가 신중현은 ‘님은 먼 곳에’ 등
훗날 빅히트를 친 자신의 곡을 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작곡가 김희갑과 음반을 내기로 약속했기에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종환 선생님은 저를 바보라고 했지만, 그때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69년 김희갑 선생님께 받은 노래 ‘진정 난 몰랐네’가 인기를 끌었고, 신중현 선생님도 이후 김추자라는 걸출한 가수를
만났잖아요.”
미 8군의 ‘ 신중현 스페셜 쇼’에 출연한 임희숙은 음악적 코드가 통했던
한국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 등과 음악적 교류를 했다. 이 때의 활동 때문에 임희숙은 ‘ 신중현 사단’에 간혹 포함이 되곤 하지만 사실
신중현의 곡을 부른 것은 군방송 드라마 주제곡 ‘ 슬픈 고백’ 등 그리 많지는 않았다. 임희숙의 넘치는 끼를 높이 산 신중현은 ‘ 님은 먼
곳에’ 등 자신의 곡을 임희숙에게 주려고 했지만, 이미 작곡가 김희갑으로부터 MBC드라마 ‘ 왜 울어’의 주제가를 받아 노래한 그녀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희갑 휘하로 갔다. 그래서 김희갑곡‘ 진정 난 몰랐네-1970’를 부르게 되었다.
솔 풍의 가요인 ‘ 진정 난 몰랐네’를 처음 불렀던 가수는 임희숙이
아니었다. 김상희였다. 하지만 1967년 맑은 음색의 김상희의 노래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 임희숙의 호소하는 듯한 소울 풍의 끈적한 목소리는
3년이 지난 후에야 이 노래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곡으로 되살려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녀는 75년
가요정화운동이라는 명분하에 벌어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5년간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대마초를 한번도 피우지 않았던 그녀는 해명할 기회도
없이 다른 가수들과 함께 일괄적으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했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노래를 할 수 없어 방황하던 그녀는 그해 서울 종로의
한 여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해금이 되자 재기 곡 ‘돌아와 주오’를 발표했지만 예전과
같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출연한 81년 10월의 TV 공개 방송 ‘명랑 운동회’는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었다.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과격한 게임으로 허리를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 척추 디스크는 3년 4개월 동안 활동 중단이라는 좌절의 시간을 또 다시
안겨 주었다.
과거 교통사고 후유증이 겹치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이때부터 연예인 교회에 나가 신앙 생활에도 전념하며
재즈 피아노를 익혔다. 삶에 진지해진 그녀는 사랑 노래보다는 영혼을 노래하는 솔과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척추 디스크에 이어 왼쪽
다리에도 마비가 오자, 무려 180개의 금침을 몸에 넣는 시술을 했고 효과를 보았다.
84년 5월, 병마에서 이긴 그녀는 84년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발표해 재기에 성공했다. 작사가를 통해 이 노래의 가사를 받아본 그녀는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라는 대목에 반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어두운 시련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그가 대중에게 새롭게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이 노래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련기를 딛고 일어서는 부활의 노래가
되었다. 강렬하면서도 정적인 목소리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삶의 향내가 배여 나왔다. 큰 반응이 있자 신세계레코드와 3년 계약을 이루어졌고
‘한국의 티나 터너’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작곡가는 시인이자 노래 운동가로, ‘제2의 김민기’라고도 불렸던 백창우(현재
시노래 동인 나팔꽃의 리더). 서적 외판원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백창우가 27세 때 만든 노래였다. 시인의 고단한 삶과 그녀의 아픈 과거가
호소력 짙은 보컬과 어우러지면서 빅히트가 터졌다. 2003년 12월, 시전문 문예계간지 ‘시인세계’가 국내 유명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이 노래는 전체 순위 8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임희숙은 “음반이 나온 뒤 2년 후에야 작곡가 백창우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이 노래보다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히트곡이 제겐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노래가 2000년 MBC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삽입곡으로 등장하고, 조관우씨가 리메이크한 ‘진정 난
몰랐네’가 2001년 MBC 드라마 ‘그 여자네 집’ 주제곡으로 나오는 것을 보며, ‘세월이 흘러도 내 노래가 잊히지 않는다’는 생각에
감사했어요.
85년 오준영의 곡을 받아 골든 2집 ‘상처’를 발표하며 이번에는
트롯가수로도 변신에 성공했다. 86년엔 지명길 곡 ‘사랑의 굴레’를 히트시킨 골든 3집 음반도 연속으로 발표했다.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리틀렌젤스 회관에서 열렸던 대한민국 제 1회 Jazz Festival 공연에도 참가했다. 또한 한때 연극 영화를 전공했던 그녀는 86년 KBS1
TV 드라마 ‘노다지’, 87년 영화‘토요일은 밤이 없다(송영수 감독)’ 등에서 주제가를 부르며 특별 출연을 했다.
89년엔 KBS TV드라마
‘사랑의 굴레’의 주제가로 인기를 얻고, 그 해 10월 26일 대방동 해군해관에서 선배 재즈 가수 박대식과 재혼을 했다. 91년 6월엔 재즈가수
김준의 록 트로트 곡 ‘머물수 없는 사랑’을 발표했다. 자신의 아픈 사랑과 이별의 사연을 담은 이 노래는 제법 성공을 거뒀다. 11월엔 동경
재일 한국인 음성 나환자촌 위문 공연을 갖기도 했다. 94년엔 KBS 2TV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에서 기지촌 가수로 출연해 만만치 않은 연기
실력을 뽐냈다.
재즈 가수로 변신한 그녀는 95년 1월 김준, 정훈희, 이동원과 함께 KBS
빅쇼에 출연해 절묘한 4색화음을 선보이기도 했다. 6월에는 KBS 2TV ‘밤에 음악사이’에 출연, 굴곡 많았던 자신의 노래인생 40년을
되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친동생인 영화감독 이민용의 감독 데뷔작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는 출연료를 받지 않고 콩국수집 식당 주인
포항댁으로 출연을 했다. 당초 출연하기로 했던 김을동이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첫 주연급의 영화 데뷔였다. 영화의 성공으로
96년 1월 SBS TV 가족드라마 ‘엄마는 못말려’에도 출연을 했다.
그 해 3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메이플’이라는 고가구점과 카페를 겸한
공간을 오픈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음악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과천 시민회관에서 재즈콘서트를 개최하고 11월에는 동생이 감독한 영화
‘인샬라’에서 사하라사막 현지로케에 동행했다. 밥짓기는 물론 짐꾼 등 온갖 험한 일을 맡아 돈독한 남매 사랑을 과시했다. 99년 9월, 후배
장욱조의 도움으로 첫 CCM음반 ‘마음으로 사랑으로 영으로’를 발표했다. 2001년에는 독일의 재즈 캄보 살타첼로와 협연한 것을 비롯, 뮤지컬
‘블루 사이공’과 ‘겨울 나그네’에 출연 하는 등 폭 넓은 활동을 이어 갔다. 또 2002년에는 병마에 쓰러진 선배 솔 가수 박인수를 돕자는
콘서트를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가수 데뷔 40주년을 맞아 2006년 10월 말 40주년 자선 디너쇼를 열어
소아암 어린이들과 소년소녀 가장을 도운 데 이어 그해 12월 초부터는 뮤지컬 ‘슈퍼 루나틱’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대마초 파동으로 가수활동을 쉬어야 했을 때, 덴마크 황태자와 혼담이
오간 적도 있다고 한다. ‘이 마음 아시나요’가 실린 음반을 듣고, 덴마크 황태자가 임희숙의 목소리에 반해 프러포즈한 것이다. 하지만, 그곳으로
시집가면 더 이상 가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 그녀는 결혼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개성 넘치는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94년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에서 기지촌 가수 역할을 맡았고, 95년 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영화감독 이민용의 감독 데뷔작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는
출연료를 받지 않고 콩국수집 식당 주인 포항댁으로 출연했다. 또 ‘블루 사이공’ ‘겨울나그네’ 등 유명 뮤지컬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끼를 마음껏
펼쳤다. 그녀는 “연기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삶이 곧 ‘연기의 연습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특히 동생 이민용 감독과 각별한 우애를 과시해왔다. 동생이 최민수·이영애 주연의 영화
‘인샬라’를 만들 때, 그녀는 사하라사막 현지 로케에 동행해 밥짓기는 물론 짐 운반까지 온갖 험한 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임희숙은 현재는 음악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임희숙은 결혼하지 않았으나
아들이 2명이 있다. 둘 다 양자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은 11년전에 양자로 삼았다. 최근 결혼을 했고 직장을
다니고 있다. 임희숙은 "내 친구의 아들이었다.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내가 양자로 삼았다"고 말했다.
임희숙은 "아들이 11년전 가수가 되겠다고 나를 찾아왔었다.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방황을 많이 하더라"고 다시 상황을 말했다. 임희숙은 "이후 군대에 갔다. 나는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아들에게 편지가 왔다. '이모에게'라는 편지였는데 그 옆에 괄호가 있고 '어머니께'라고 돼 있었다. 이에 감동을 받았다"고 다시 상황을 전했다.
이후 입양을 해 이젠 호적에 이름까지 올렸다고 말했다. 아들은 임희숙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