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몬드리안의 꿈 17x23x16 아래그림 : 몬드리안, 묘사 III
- 칸딘스키,
몬드리안 그리고 知音 -
색은 예술가로부터 그리고 영혼의 떨림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색은 죽은 말(언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력 풍부한 추상의 영혼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때 추상의 영혼은 계시를 들어내기 위한 형식을 발견한 예술이며 동시에 공간의
음악을 가진 심포니 형태를 띠는 예술을
의미한다. -칸딘스키-
얼마
전 여산님께서 칸딘스키의 혼 이라는 작품을 올려 주셨다. 작품을 보는 순간 그리고 그 작품에 ‘칸딘스키의 혼’이라는 이름을 붙이신 여산님의
미의식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여산님의 작품’, 또는 ‘그 작품에 대한 여산님의 느낌의 해석’만으로 전율을 느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대학 2학년 무렵, 바움가르텐을 그 기점으로 시작된 서양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겠다고 결심 했던 것은
어쩌면 치기였는지도 모른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또 한편으로는 공감하기도 어려운 서양미학사를 훑어 내려가는 것은 참으로 지루하고 따분함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만난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나에게 한줄기의 감로수였고 가슴속까지 시원하고 서늘한 구원의
물줄기가 한없이 분출하는 용천수와 같은 것이었다. 밤을 새워 칸딘스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구성의 기본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점, 선, 면』에서 칸딘스키의 위대성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구현한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또 한사람은 몬드리안이었다. 칸딘스키가 추상의 아버지라면 몬드리안은 추상의 어머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칸딘스키가 점, 선, 면과 색의 화합을 원을 포함한 기하학적 문양의 조화로서 그의 추상을 완성 하였다면 몬드리안은 더욱더 간결화
된 사각의 모자이크의 반복으로 자신의 추상을 이끌어 내었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현대 추상을 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추상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 있다. 이들의 추상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상의 세계를 극단으로 끌고 가다가
점점 간략화 단순화 하면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점점 추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기존의 관념을 깨어 나가면서 추상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 것이다. 여기에 이들의 위대성이 있다. 이러한
기존의 관념을 깨어 내면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은 비단 이들만의 위대성이 아니라 창조성을 그 기초로 하는 예술의 본질이자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의 위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석의 세계도 그러한 것을 아닐까?
지금 우리가 수석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눈군가 처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인식의 세계로 끌어 들였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음으로서 수석으로서 인가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수석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아름다움의 공감을 거처
공유로서 완성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수석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야하는 의무가 우리 수석인에게는
있다. 그러한 새로운 아름다움의 추구는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수석으로 인정하고 또 아름답게
감상하는 작품들도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작품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한 수석들도 오랜시간 동안 검증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관념에만 매달려 있다면 결국 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수석도 매너리즘에 빠져 정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수석이
아름다움의 발견을 그 시작으로 하는 예술이라 한다면 수석인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찾아내어 그 아름다움을 대중의 인식속으로 끌어 들이고 또
공감받을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몬드리안의 꿈」이라 이름붙이고 즐겨 감상하며 사랑하는 추상석이 있다.
아마도 여산님의 「칸딘스키의 혼」이라는 작품을 보고 내가 느꼈던 전율은 돌 하나에서 칸딘스키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여산님의 미의식에 대한 감탄과
또한 수석을 통하여 그러한 미의식을 끊임없이 추구 하시는 여산님의 마음을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칸딘스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 이므로...
지음(知音)이 적어 거문고를 꺼내 타지 못하는 (不彈少知音!)현대의 사회에서 서로의 느낌이 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음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반갑고 행복한 일인가! 어쩌면 여산님의 작품에 대한 반가움 보다는 그러한 미의식을 갖고 도
그것을 이해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여산님을 만난 것이 더욱 기쁘고 행복한 일일 것이다. 천하 명석을 만나는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클 수
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