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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 안형주
안재창의 가족 생애사를 통해 초기 미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살피다
알려지지 않은 이들 미국 동부 한인 이민자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재미 한인 역사의 빈 공백을 메운다. 저자 안형주는 자기 문중의 조상인 안재창 개인의 삶을 ‘라이프 히스토리 방법Life History Method’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추적하면서 당시 시대상과 안재창이 처한 사회 환경, 생활 조건 등을 살핀다. 구체적으로 안재창이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 중부 대평원에서 어떠한 생활을 했고 농장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들여다보면서 당시 한인들이 미국 대평원에서 살아간 역사를 고찰한다.
저자는 이 같은 작업을 통해 다음의 두 가지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첫째, 구한말 첫 하와이 이민선을 타고 간 한 인물 안재창을 추적, 그를 통해 재미 한인들이 언어와 문화가 생소한 이국에서 상부상조하며 삶을 개척하는 모습과 초기 재미 한인사회가 조성되는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더 나아가 나라를 잃어 조국 영사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던 탓에 어려움을 겪었던 당시 재미 한인들의 상황을 살펴보려 한다. 둘째, 초기 재미 한인들이 생계를 위해 경영한 중국 음식 도매업이 다문화국가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퍼져나가 미국인과 재미 한인들 사이의 문화소통의 첫 발을 내딛는 계기를 만들었음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구한말 가난을 면하려고 하와이로 이민을 갔던 민초들이 신산辛酸한 삶 그리고 애환 속에서도 나라 잃은 조선인의 자존감으로 이루어낸 여러 행적 속으로 들어가보자.
오늘날 한국의 재외동포는 700만 명이 넘으며 재미 한인만 해도 200만 명에 이른다. 이 책은 최초의 하와이 이민자였던 안재창의 삶을 통해 재미 한인들의 생활상과 자강 운동을 보여준다.
안재창은 1873년에 경기도 양주군 심근솔 마을에서 죽산 안씨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902년 12월에 첫 하와이행 이민선에 오른다. 농장에서 모은 돈으로 선진 문명을 배우고 부를 이루어 돌아오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밭의 노동자로 이민 생활을 시작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원사로 일했고, 네브래스카 주의 링컨 대평원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콜로라도 주에서는 한인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농토를 구입하기에 이른다. 그의 사업상 전성기는 디트로이트에서 중국 음식 도매업체인 정안회사를 설립한 이후였다. 그는 한인 동업자들과 힘을 모아 성공을 이루었고 마침내 디트로이트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안재창의 이동 경로는 한인들의 활동 무대가 캘리포니아를 지나 동쪽으로 네바다, 콜로라도, 유타 주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된다.
그의 삶은 재미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는 국채보상금, 장인환 정명운 의사 보호기금, 신한민보 의연금을 내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했고, 박용만이 유타 주에 건설한 한인소년병학교의 후원자이자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의 회원이었다. 그가 직접 접촉한 독립운동가에는 박용만, 이승만, 김규식, 서재필 등이 있었고 도산 안창호는 그의 조카였다.
필자가 20여 년에 걸친 자료 수집을 통해 한 개인과 가족, 주변 인물들의 삶을 오롯이 살려낸 것이 주목되는 역작이다.
저자 : 안형주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상과대학을 졸업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도밍게즈힐스 캠퍼스에서 행정학 석사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풀러턴 캠퍼스에서 역사학 석사를 수료했다. 로스앤젤레스 록히드항공사 시스템 분석가로 근무했으며,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 사회복지부 시스템 분석가로 근무하다가 은퇴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아시아계미국인 연구소 내 한국계미국인 연구소UCLA Asian American Studies Center, Korean American Studies 총무간사,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아시아계미국인 연구소UCLA Asian American Studies Center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 단국대학 한국민족학연구소 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국가보훈처 미주지역 사료조사위원을 역임했다. 틈틈이 모은 자료를 UCLA(‘Hyung-ju Ahn Collection' UCLA Special Collection)와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안형주문고)에 기증했다.
미 한인들의 100년 이민 역사,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 많다
오늘날 한국은 재외동포가 700만이 넘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재외동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우리 재외동포는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데, 미국에만 그 수가 200만 명에 이른다. 지난 100년 동안 재미 한인들은 여러 분야에 진출해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2003년, 하와이 이민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 미주 한인, 특히 하와이 한인 이민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를 통해 하와이 한인 이민의 역사가 많이 밝혀졌으며 학계는 크게 진전했다. 이를테면 여러 이민자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고생한 이야기와 그들의 생활상이 밝혀졌다.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진출한 한인들이 주로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캘리포니아 중부나 북부로 이주하였다는 것도 밝혀졌으며 특히 한인들이 남부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의 과수원에 모여들어 일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를 지나 동쪽으로 진출한 한인들이 네바다, 콜로라도, 유타 주 등으로 흩어져 광산이나 철도부설 노동자로 일을 하러 갔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안재창, 미국 이민사의 산증인
첫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안재창安載昌(字 德順, 1873~1963)은 구한말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별비면別非面 식송리植松里 ‘심근솔’ 마을 모두 열 가구 남짓하게 모여 살던 조그만 죽산 안씨竹山安氏 집성촌에서 몰락한 사대부 종갓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과감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쇠잔해가는 대한제국과 전통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외국으로 나가 생을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1902년 12월 22일, 첫 하와이행 이민선을 탄 안재창은 하와이 농장에서 모은 돈으로 미국 본토에 가서 새로운 선진문명을 배우고 부를 축적한 후 귀국하여 조그만 사업을 하며 친척들과 가까이 살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이 같은 계획은 당시 국내 ‘개국진취’ 여론과 개화기 실업자강운동을 일으켜 조국을 근대화한다는 국가적 방향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떠돌이 노동자에서 정착 농부로
안재창은 1907년에 미국 본토로 밀입국한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떠돌이 사탕무 농장 노동자 생활을 곧 청산하고 정원사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 3년간 유타 주 작은 도시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미국 주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정착자가 되어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청년 지도자 박용만과 함께 네브래스카 주 링컨의 한 농장에 투자하여 대평원에서의 농장 운영에 첫발을 내딛는다. 미국 이민국에서 감시하는 떠돌이 노동자에서 정착한 농부가 되어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대자본으로 움직이는 대평원에서는 농사만으로는 돈을 벌 수 없음을 깨닫고 동료들과 소규모 농지개간 사업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 1915년부터 1920년까지 세 번 농지개간 사업을 벌여 성공했다. 작은 모험들을 분수에 맞게 신중하게 택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농지 개척에서 중국 음식 도매업으로
안재창의 전성기는 정안회사를 운영할 때였다. 정안회사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동업자 정양필과 조오흥의 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정양필과 조오흥은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미국인 집에서 스쿨보이school boy로 살면서 고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하여 영어를 미국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창하게 했다. 게다가 자영업도 경영한 경험이 있어 미국 사회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 음식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전 미국에 소개한 유일한에게서 영감을 받아 중국 음식 도매업을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시작했고, 새 메뉴를 개발해 시장을 개척했다. 30세 전후인 이민 온 농부 출신 안재창과 동업자들은 서로의 장점을 잘 이용하며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안재창은 음식이 조리되어 점심시간 전에 배달할 수 있도록 안살림을 총감독하는 일을 했다.
정안회사 동업자들은 ‘약속의 땅’ 미국에서 살게 된 것에 만족해했고, 열심히 일하면 보상을 받고 미국인의 신뢰를 얻으면 인종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찹수이 만드는 과정을 공개하여 동양인들이 불결하다는 미국인들의 선입견을 해소하고 최첨단 시설과 기술을 활용, 위생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정안회사의 경영진들이 이미지의 중요성, 고객 관리와 홍보의 중요성을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 문화 동화의 한계
일반적으로 이민자가 미국에서 오래 살수록 미국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것은 이민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재창의 경우는 달랐다. 겉으로만 미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그는 어릴 적 미국으로 와서 주류사회 문화에 자연스럽게 순응한 정양필과 조오흥과는 달랐다. 안재창은 언어의 한계가 있는 동양인 이민 1세 농부였다. 그의 미국 문화 적응 과정은 더디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문화에 많이 동화된 정양필과 조오흥은 한인 독립운동은 파벌이 심하다고 하면서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자주 찾아오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를 돕는 데 소극적이었다. 반면 나이가 많아 미국 문화에 적응이 안 된 안재창은 어느 재미교포보다도 열심히 임시정부를 도왔다. 임시정부 지원금인 인구세, 광복군 지원금인 혈성금, 국민회 의무금을 꼬박 꼬박 냈고, 심지어 어린 아들 광호 이름으로도 ‘독립금’을 10달러씩 주기적으로 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 동지회, 대한인국민회의 지원금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가 발행한 전쟁 국채를 구입하는 데 더 많은 돈을 썼다. 이는 그가 미국 정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자주 독립과 반일정신을 토대로 지역사회에 기여하다
안재창이 살았던 초기 재미 한인사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자주 독립과 반일정신이라는 확고부동한 정치적 이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이념만이 재미 한인을 대동단결시키는 구심점이고 대의명분이었다. 둘째, 지도자 중심의 사회였다는 점이다. 서재필, 도산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이 지도자들이었다. 재미 한인사회는 분열되어 있다가도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안재창은 지역사회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있는 개화기 독립협회 소장파의 박용만을 지도자로 섬기고 성원했고, 박용만이 하와이로 떠난 후에는 이승만을 후원했다.
또한 안재창은 자신이 살았던 크고 작은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었다. 안재창은 가는 곳마다 지방 한인사회를 조직하고 회사를 세우고 그 회사들의 목적 달성을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으로 받아들였다. 무의식중에 집단 지향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추구했던 것이다. 안재창은 언제나 같은 처지에 있는 동지들을 발견, 규합하여 유대감을 조성하고 공동 목적을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자녀들도 그의 행동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서 착실한 전문직을 가진 사회 일원이 되었다. 동업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당시 다른 한인들과 달리 안재창의 정안회사는 전문적 역할 분업을 능력에 맞게 했고, 직장과 사생활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이것이 정안회사가 30년 동안 존속할 수 있던 배경이었다.
그들은 서로 신의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대가족처럼 매주 일요일마다 모여 함께 예배를 보았다. 그런가 하면 주일학교를 진행해 2세들에게 영어로 한국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가까운 미시간 대학 한국 유학생들을 데려다가 한국어를 가르치게 했으며, 지역문화 공동체를 만들어 자녀들에게 소수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했다. 이는 그들이 다민족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전문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찹수이 도매업’을 통해 인생의 흥망성쇄를 경험하다
1920년대 정안회사는 재미 한인들의 성공의 상징이자 한인들이 선망하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큰 자동차 공장들이 들어서 있는 디트로이트에서는 소수 민족의 극히 작은 자영업체에 지나지 않았다. 정양필과 조오흥이 미국 주류사회에 적응했다 해도 백인들에게는 그들은 동양에서 온 ‘변두리’ 사람들이었다. 그런 ‘변두리’ 사람들에 불과했던 정안회사 동업자들이 모험을 감행했다. ‘찹수이 도매업’을 창출한 것이다.
‘찹수이’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색적 문화의 산물로 1920년대 비서구식 하류사회 음악인 재즈와 함께 유행하기 시작한 뒤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찹수이’ 장사는 노동집약적이고, 이윤이 낮고, 값에 비해 양이 많고, 미국인의 주식이 아니라서 기호와 취향이 변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모험적 사업이었다. 그런 사업에 정안회사 동업자들은 뛰어들었고 초기에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시들어들고 만다. 물론 그러한 실패가 변두리 사람들인 정안회사 이사들이 급변하는 미국 자본주의 경제, 소수 민족 요식업계의 변화, 미국인들의 식생활의 변화,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이 소개되는 시장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디트로이트 시가 인종 문제, 주택 문제를 해소하지 못해 백인들이 모두 시외로 이주하고 흑인들의 도시가 되면서 발생한 디트로이트 시의 지각변동으로 정안회사의 시장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안재창,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잇는 가교
써보지 못한 인감도장, 순박한 농부 안재창의 꿈
안재창의 유물 중 상아 인감도장이 있다. 미국에서는 사인으로 모든 서류를 결제하여 아무 소용이 없는 인감도장을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가난을 면하려고 이민 왔던 동양인 노동자의 금의환향을 향한 꿈, 자신의 농토를 갖고 싶다는 소박한 농부의 본능이 인감도장을 버리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태평양 건너 식민지 조선의 사정은 안재창의 그런 꿈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도로공사, 수리 사업, 저수지 공사에 토지가 수용되고, 광복 후에는 토지개혁에 들어가 소작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애틋하게 보관되었던 상아 인감도장은 예상 못할 만큼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어느 순박한 농부의 못 이룬 꿈의 상징이 되었다.
안재창 연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우리를 되새기게 하다
안재창은 1902년 12월 22일에 하와이행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후 미국 본토로 밀입국했다. 미국 중부 대평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초기 미국 본토 재미 한인사회 건설에 참여하고 당시 해외 동포들의 공동 목표인 조국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한 한인 지역사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동료들을 설득해 이윤을 추구하는 합자회사, 주식회사를 네 번이나 설립했고, 재미 한인 지역사회 조직인 네브래스카 거류민회, 동지회 지부, 국민회 지부를 세웠다.
모국 영사관의 그 어떤 보호조차 받지 못하면서 이질적이고 낯선 서구문명에 맞닥뜨렸던, 언어장벽과 인종차별을 겪으며 많은 어려움을 경험했던, 그럼에도 오로지 자신의 노동력만으로 적은 자본을 모으고 그것을 기반으로 같은 처지의 한인들과 상부상조하면서 초기 재미 한인사회를 만들고 삶의 터전을 형성했던 안재창.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행해진 안재창 연구는 이민자들의 초창기 생활 모습을 오늘에 되살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우리와 우리 문화의 모습을 되새기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