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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산(華嶽山)의 지맥이 동으로 뻗어 옥교산(玉轎山)에 연( 連)하고, 남( 南)으로 비봉산(飛鳳山), 북으로 차일봉(遮日峯)이 있어 삼면(三面)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향(西向) 마을이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연포동(鳶浦洞)이 이 마을의 일부이다.이 마을의 본땀은 옥교산(玉轎山)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무정부락(舞亭部落)인데 부락의 시원(始原)은 분명치 않다. 동명(洞名)의 연유(緣由) 또한 알 수 없으나 춤출 무'(舞)'字와 정자 정'(亭)'字로 무정(舞亭)이 된 것이라든지, 소리개 연'(鳶)'字와 개포'(浦)' 字로 된 연포(鳶浦) 등 洞名에 무슨 사연이 있을 듯하지만 아는 이가 없다. 지금부터 약 250여 년 전에이( 李),김( 金),한( 韓)씨 등이 전거(奠居)하였으며 그 후 천( 千),정( 鄭),진( 陳), 박씨(朴氏) 등이 입주(入住)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무연리(舞鳶里)라는 이명(里名)은 무정(舞亭)과 연포(鳶浦)의 두 땀을 합해서 나온 것인데 왜정(倭政) 때에 된 이름이다.
■ 비봉산(飛鳳山)
마을 남쪽의 산인데,봉( 鳳)이 나는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고, 풍수설(風水說)에 의하면 포란봉(抱卵鳳)의 지형(地形)이니 반드시 명당(名堂)이 있다고 전해오고 있기도 하다.
■ 독메(독산-獨山)
비봉산하(飛鳳山下) 봉계동(鳳溪洞)과 가까운 곳에 동그란 모양으로 알(난(卵))과 같이 생긴 길고 조그만 산이 들판에 따로 우뚝 솟아 있어 독메라고 부른다.
이 독메 정상에 분묘(墳墓)가 있는데, 그 주인공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금부터 약 100여 년 전의 일이라 한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한 선비가 노년(老年)에 이르러 부자(父子)가 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八旬이 넘은 어른과 六旬이 넘은 아들이었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면서 어느해 가을에 겨우 쇠솥 하나를 사다가 걸었는데 모처럼 장만한 쇠솥이라, 애지중지(愛之重之)하였다고 한다.그런데 어느날 밤이 깊어 새벽녘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父子가 일찍 잠이 깨어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창 밖에서 뚜벅뚜벅 발자욱 소리가 나서 살그머니 일어나 문 틈으로 내다보니 등에 우장(도롱이)을 걸친 건장한 도둑놈이 때마침 기울어가는 그믐 달빛 아래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부자는 숨을 죽이고 도둑놈의 행동만 지켜보고 있었다. 도둑놈은 거침없이 창 밑에 걸려 있는 솥을 보고 아궁이에 도롱이를 걸친 채로 엉덩이를 내밀어 넣고는 그렇게 아끼던 솥을 등에 짊어지고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였다.이 부자(父子)는 도둑놈이 급히 달아나다가 넘어져 다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응겁결에 큰 소리로 '이 사람아 다칠라. 조심하게.'라고 했다는 것이다.도둑놈은 들은 채 만 채 그길로 가버렸다. 두 노인(老人)은 하는 수 없이 전과 같이 질솥(질그릇으로 만든 솥)에 밥을 지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났다. 어느날 새벽녘에 잠이 막 깨려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나서 '그 누구요? '했더니 '작년에 왔던 도둑놈이 올시다.'하고는 사라졌다. 날이 밝아 나와보니 창 밑에 커다란 밀기(짚으로 짠,곡식 등을 넣어두는 용기(容器))하나가 동댕이 쳐져 있었다. 父子가 있는 힘을 다하여 겨우 방에 굴러 넣고는,이것은 틀림없이 도둑질해 온 것이라고 직감하였다. 그때부터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이 밀기의 주인을 어떻게 찾아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침 이웃 마을의 친구 환갑 잔치에 초대되어 갔다.그 곳에는 인근의 많은 친구들이 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하고 밀기 주인을 찾아 보았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주인이었다. 다음날 밀기는 내용물과 함께 고스란히 주인에게로 돌아갔다.그러던 어느날 그 도둑놈이 이 父子를 찾아와서는 뜰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것이었다.솥 도둑질하며 밀기 도둑질,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죄상을 낱낱이 고백하며 깊이 반성하였다는 것이다.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란 말과 같이 착한 선비의 후손들은 번창하게 발전하였으며,그 어진 넋들은 가는 이 오는 이의 존경을 받으면서 이 곳에 고이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 대방골
골이 넓고 평평하며 그 밑으로 넓은 들이 이어진다고 하여 대방골이라 한다. 이 골의 산등(山嶝)에는 월산, 춘화 등 양리(兩里)의 공동묘지(共同墓地)도 있다.
■ 사태곡
비봉산 아래 있는 황토 계곡으로, 산 사태로 생긴 골이라고 사태곡이라 한다.
■ 소시랑등
쇠스랑 모양으로 생긴 산등(山嶝)이 있고, 그 사이의 골이 깊어 옛날부터 水源이 좋아 작은 못이 있었는데 해방 후 확장하여 관개(灌漑)에 쓰이고 있다.
■ 옥교봉(玉轎峯)
옥교산의 한 봉우리이다. 해발고(海拔高) 539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나 화악산의 연맥(連脈)으로 길게 뻗어 밀양시(密陽市) 교동(校洞) 뒤산까지연( 連)해 있고, 그 정상의 부분에 남북으로 능선(稜線)따라 큰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두 바위 사이가 활장같이 옴팍하게 파인 것 같이 보이는 곳을 옥교봉이라고 한다.또는 부쇠가 낡아서 옴팍하게 파인 모양으로 보인다고 부싯돌 바위라고도 한다. 그런데 지형을 따라 꿰어 ꁹ춘 말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마귀 할멈이 낙동강을 건너 화악산으로 가는데,상남평야(上南平野)를 거쳐 밀양성내(密陽城內)로 오는 길목이 작은 능선으로 가로 막혀 있어 큰 손으로 홱 그어 길을 탁 티웠다는 것이다. 그 곳이 지금의 가곡동 용두목과 예림리 뒤쪽의 마암산 사이라고 한다.마귀 할멈은 그 길로 올라오면서 치마에 담아온 흙 한 무더기를 떨어뜨린 것이 신촌 북쪽에 있는 茶山이란 독뫼가 되고, 한 걸음에 올라오다가 다시 치마의 흙을 떨어뜨린 것이 비봉산 아래쪽에 있는 독뫼가 되었다고 한다. 이쯤와서 마귀 할멈은 용변(用便)이 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옥교산 정상 부근의 능선에 있는 두 바위에 한 다리씩을 딛고 용변을 보는데, 대편(大便)은 동( 東)으로 굴러 상동면(上東面) 구찔(안인리(安仁里))로 떨어져 구린내가 난다고 구찔이 되었고, 앞쪽으로 소변(小便)이 흘러내려 물바다가 되었다고 무정이 되었으며, 뒤를 닦으려고 앞산을 긁었는데 다섯 손가락의 자욱이 남아 다섯 골이 된 청운리(靑雲里) 서북쪽산의 오배골이라고 한다. 옥교봉 두 바위 사이가 활장같이 옴팍하게 파인 듯 보이는 것은 마귀 할멈의 오줌 자국으로 파였다는 것이다. 용변을 마친 마귀 할멈은 치마에 남은 흙을 다시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무연리의 독뫼가 되고, 나머지는 훌훌 털어 버린 것이 청운후산(靑雲後山)의 산성(山城)이 되었다. 똥이 굴러간 구찔은 땅이 비옥하여 수목이 무성하였으며, 오줌을 맞은 무정 뒤산은 골이 지고 돌이 많았다고 한다.
■ 차일봉(遮日峯)
옥교산 지맥에 우뚝 솟은 산형(山形)이 흡사히 차일(遮日)을 쳐 놓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부락의 뒤산으로 동절(冬節)에 북풍(北風)을 막아 주어 차일 본래의 역할을 다 하는 셈이다.
■ 절태골
옛날 이 골짜기에 절이 있어서 절터골이라고 했는데, 이제 변음(變音)이 되어 절태골이 된 것이다.
■ 무정 뒤 고개
위양(位良)의 말치고개와 더불어 옛날 상동면(上東面)과 서울로 가는 육로(陸路)이다.
■ 효자각(孝子閣)
효자각(孝子閣)은 연표 부락 앞에 있는데, 영모당(永慕堂) 이원보(李元輔)의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1794년에 창건된 것으로 그 후 두 차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청룡등(靑龍嶝)
무정(舞亭) 부락 남쪽으로 쑥 내밀은 옥교산 지맥인데 마을에서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된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 정자(亭子)나무껄
연포 부락 어귀에 정자 나무들이 서 있고, 한옆에 서너 자 높이의 송덕비(頌德碑)라고 새겨진 빗돌이 서 있다. 이는 위양못을 개수확장(改修擴張)하면서 무연리 앞 들의 관개용수(灌漑用水)로 이용되겠금 배려된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 숲등
무정 부락 앞에 동서로 약 1500m 길이의 긴 숲이 있는데,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이 방풍림(防風林)으로 조성(造成)한 것이다. 풍치(風致)도 좋거니와 하절(夏節)에 농부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며, 맨 위에 있는 당산(堂山) 나무는 이 마을의 수호목(守護木)으로 매년 당제(堂祭)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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