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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도로 번역되어 있는 여러 가지 단어들 가운데 하나προσεύχομαι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께 향한다, 하나님을 구한다.” 등의 뜻입니다. 기도는 자신이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무엇인가를 달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형편과 사정이 어떤지 늘 궁금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다녀온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한걸음에 달려가 묻곤 했습니다. 가까운 친척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녀왔습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사로잡히지 않고 남아 있던 백성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 탄 채 여전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대로 털썩 주저 않았습니다.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금식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은 물론 가족과 개인의 죄를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예루살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리겠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하늘 끝으로 쫓겨나 있을지라도 거기서 한데 모아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순간, 예루살렘의 회복을 자신보다 아니 세상 그 누구보다 훨씬 더 간절하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었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 자신을 도구들 가운데 하나로 써달라고 외쳤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었던 경험입니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이끌어주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온전히 맡기는 순간, 저와 여러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기도 내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어휘語彙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어휘들이 정말로 풍성해집니다. 깊어집니다. 화려해집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모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성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기도가 거침없이 술술 쏟아집니다.
내 생각을 이루어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루어달라고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뜻을 이루실 때 자신을 수없이 많은 도구들 가운데 하나로 써주시기를 구합니다. 몇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서 기도했는데, 몸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난 것처럼 가뿐합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쌓여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했다는 기쁨과 즐거움이 부어집니다. 더할 나위 없는 평안과 함께 만족까지 부어집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는 것입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뜻은 내려놓고 하나님 뜻을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9)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의 생각은 저와 여러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단어에는 예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원함과 바람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것을 일컬어 예배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기도 곧 예배에는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삶이 있습니다.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드리는 삶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드리신 기도였습니다. 예배였습니다. 실제로 사도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a)라고 외쳤습니다.
“올렸다προσενέγκας”의 원형προσφέρω은 “(제물을) 바치다, 드리다, 봉헌하다to offer” 등의 뜻입니다. 제의 곧 제사 또는 예배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올려드렸습니다. 통곡과 눈물로 드린 기도와 간구의 내용은 “보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히10:9a),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 고난의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6)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곡과 눈물로 드린 제물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된 희생 제물로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죽기위해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통곡과 눈물이 앞을 가리는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시시각각 심장을 졸이게 만드는 두려움을 뛰어넘는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경건한 복종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히5:7b)라는 증거대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응답해 주시는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14:34a)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실로 다가온 엄청난 고난과 죽음의 무게 앞에서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습니다. 실핏줄이 터져서 흐르고 있던 피가 땀과 함께 떨어질 정도로 간절했던 기도 곧 예배를 마쳤을 즈음에는 몸의 진액이 거의 다 빠져나간 상태였습니다. 걷기조차 힘들 정도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도 전에 이미 초주검이 되셨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그분 곁에 서서 힘을 북돋아 주었다.”(눅22:43)라는 증거대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도와주셔야할 정도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제물로 드려지는 삶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미 부어주셨고, 오늘도 여전히 부어지고 있고, 이후로도 영원히 부어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과 문제 속에 던져지게 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때,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던 유다가 관원들을 이끌고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나아가셨습니다. 당신인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가려는 그들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대답을 듣고는 당신이 바로 그들이 찾고 있는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병사들은 크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순간, 사랑하는 제자 유다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그라고 너희에게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이다.”(요18:8a)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붙잡혀 주셨습니다.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심문과 함께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며 비웃고 조롱하던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종이거나 경비원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천대와 모욕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맡겨지자 돌변했습니다. 오랫동안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마음 속 깊이 꼭꼭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던 울분을 이번 기회에 풀어버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잔인하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때, 이미 거룩한 희생 제물이 되기로 작정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온갖 굴욕 앞에서 철저히 무너진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연약함을 보셨습니다. 어두움을 보셨습니다. 빈곤貧困하기만 한 영적 상태를 보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끌어안아주셨습니다. 사실, 영적으로 아무리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감당하기 힘든 혐오와 모욕과 조롱과 폭력을 무고誣告하게 당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懷疑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급기야, 자기도 모르게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고해와 같이 힘겨운 인생 속에서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곧 메시아)냐?”(눅22:67a)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셨을 때 크게 놀라워하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온갖 질병을 완벽하게 고쳐주시고, 귀신들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몰아내주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이미 죽어서 장사지내고 있던 이들을 살려주셨을 때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셔도 절대로 믿지 않을 아니 스스로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형편없는 위인爲人들이었습니다. 정답을 말해준다 할지라도 부질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 오른편 권능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눅22:69)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냐?”(눅22:70a)라고 재차再次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말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은 너희다.”(눅22:70b)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모호한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누군지 정확하게 대답해주지 않으셨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우리에게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소? 우리가 들은 것처럼 이 자는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소.”(눅22:71)라고 외쳤습니다.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목구멍까지 차올라와 있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유대인의 법과 질서를 허물고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 곧 왕이라고 가르치며 다닌다고 고발했습니다. 빌라도는 왕이라는 말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역모가 떠올랐습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죄였습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종교 장사치들의 고발 내용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네 말이다.”(눅23:3b)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도 다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함께한 무리들에게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잘못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는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소 애매모호한 대답을 놓고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판단을 했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백성 가운데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있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쉬지도 않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빌라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을 관할하고 있었던 헤롯에게 책임을 넘기기로 작정했습니다.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며칠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대답하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어떤 이적을 베푸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웬일인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이적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크게 기분이 상한 헤롯이 더욱 자극적인 질문을 던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은 체통體統도 없이 병사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비아냥거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빌라도는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해 보았지만,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이 고발한 죄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헤롯왕도 혐의를 찾지 못해서 그냥 돌려보내왔다고 말했습니다. 죽을 만한 일은 고사하고 어떤 잘못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채찍질한 다음 풀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죄 없는 자를 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로마가 영광으로 여기는 공정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재판관이 갖춰야할 공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무리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이성을 잃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대신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저지른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던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거듭해서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무슨 죄 때문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죽일 만한 어떤 죄도 찾지 못했소.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매우 채찍질하고 엄히 경고한 다음 풀어 주겠소.”(눅23:22)라고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하늘을 울렸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가장 우려하는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칫 어렵게 지키고 있던 자신의 자리가 날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로마 황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왕으로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준다면 즉시 고발하겠다는 종교 장사치들의 협박은 두려웠습니다. 두 손을 들었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의 요구대로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바라바는 풀어주었습니다. 죄 없다고 판단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한편,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대접을 하기보다는 대접받기를 좋아했습니다. 누구보다 많이 가졌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했습니다.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 무고한 혐오와 모욕과 조롱과 폭력과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마침내 가장 높이 들리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당신을 대적하는 일에 관한한 달인의 경지에 올라선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5:6a),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5:8a),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롬5:10a) 세상을 남김없이 다 드려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천사적인 것이든 악마적인 것이든, 현재 것이든 장래 것이든, 높은 것이든 낮은 것이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든 떼어 놓을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없는 그야말로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잃어버린 채 두려워 떨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을 향해서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41: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나의 벗אָהֵב(아헤브)”을 직역하면 “나를 사랑하는 자 또는 내가 사랑하는 자”입니다. 원래 뜻은 “바치다, 헌신하다, 집중하다, 쏟다.”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거룩한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만큼 사랑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행동으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역시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헌신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전부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만큼 사랑하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행동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에게 이집트의 강과 저 큰 강 유프라테스 사이의 땅을 주겠다.”(창15:18b)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성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불신앙과 죄를 쉬지 않고 쏟아냈습니다. 나라는 결국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B. C. 722년에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B. C. 586년에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두 왕국 모두 역사 속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총체적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역사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때가 되자 약속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못하십니다. 한번 맺은 관계는 결코 끊어버리지 못하십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41:9)라는 증거대로, 당신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라는 약속대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 가운데 친히 임재 하여 주십니다.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함께 동행 하여 주십니다.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굳세게 붙들어 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때가 이르면 환난과 시험의 자리로부터 불러내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완벽하게 끊어지게 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호와가 하나님 되어주시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누가 동쪽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켰느냐? 누가 그를 불러 하나님의 발밑에 두었느냐?...그가 칼을 휘두르니 왕들이 티끌처럼 되었고, 그가 활을 쏘니 그들이 바람 앞의 겨처럼 흩날렸다...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처음부터 역사를 결정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바로 그이다. 나는 처음부터 있었고, 마지막 때도 있을 것이다.”(사41:2-4)라는 증거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를 주장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역시 친히 주장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럴 만한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아직 연약할 때, 아직 죄인이었을 때, 아직 원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무엇으로도 떼어놓을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노래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살려 주었다...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호11:3-4)라는 증거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에게 부어주신 그야말로 엄청난 사랑 때문입니다. 형을 피해 달아나던 야곱은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은 커다란 사다리가 보였습니다.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땅과 보호와 동행과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하는 놀라운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셨습니다. 잠에서 깬 그는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이곳은 두려운 곳이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다.”(창28:16b, 17b)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이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두렵고 떨리는 장소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서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동행 하시는 성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신실하지 않은 오히려 지극히 죄 친화적親和的이고, 죄의 경향성傾向性이 농후하며, 지극히 작은 죄 앞에서도 여지없이 흔들리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προσεύχομαι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 때에는 아무리 큰 손해가 예상된다 할지라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어떤 자격도 갖추지 못한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 한 분만 섬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저와 여러분 역시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구별하여 드리기까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한번 맺은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끊어버리지 못하시는 하나님과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동행 하는 복된 삶,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복된 삶, 무엇보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