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포 기적의 길을 아십니까? (흥남철수작전과 피난민이야기) 1900년대 초 일본 어업인들은 황금어장인 거제도를 털어 가기 위해 수 많은 어민들이 왔다. 거제도 전역에 걸쳐 왔지만, 그 중 장승포 1~2구에는 집단일본촌이 형성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건물들이 일부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6.25가 터지고 국군과 UN군은 중공군 개입으로 평양, 함흥지역에서 철수하면서 공산 치하에서 시달림을 받던 백성들은 남으로 남으로 밀려오고 그중 일부는 미군 LST와 상선을 타고 부산으로 거제도로 피난 오게 되었다.
“고생 많았소. 어서 오시게” 1950년 12월 23일,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항에서 피란 민1만4,000명을 태우고 3일 만에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한다. 장승포가 품고 있는 이 날의 이야기는 거제시 장승포동에 있는‘장승포 기적의 길’에 잘 표현돼 있다. 장승포 기적의 길은 1구간‘기적의 배에 오른다.’, 2구간‘기적의 항해, 기적의 탄생’, 3구간‘기적의 터전’, 4구간‘따뜻한 겨울 희망의 꽃’으로 나뉘어 있다. 그 당시 거제군민은 10만, 피난민이 10만, 포로가 17만 3천명이었다.
1구간 기적의 배에 오른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정박하던 날의 모습은 기적의 길 1구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남철수작전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통역관 현봉학(1922~2007) 씨가 알몬드 미 육군 10사단장을 설득하는 장면, 흥남항의 모습을 담은 사진, 그리고 필사적으로 배에 오르는 피란민의 그림이 이어진다. 절박한 심정과 안도의 한숨이 교차했을 그때의 풍경은 마치 장승포항이 갈치와 청어 떼가 풍성한 만선의 넉넉함 같았을 거라 상상해본다. 2구간 기적의 항해, 기적의 탄생 1구간이 끝나고 작은 도로를 건너면 2구간이 시작된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4,000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흥남항을 떠났지만, 장승포항에 도착했을 때는 1만4,005명으로 사람이 늘었다. 배 안에서 김치 다섯 아기가 탄생했고, 그렇게 그들은 모두의 삶에 희망이 됐다. 이중 김치 5 이경필(71) 씨는 장승포에서 가축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도 평화와 은혜, 나눔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며 흥남철수작전의 역사와 피난민들의 한(限)을 기록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구간이 끝나기 직전엔 안내판이 하나 있다. 흥남철수작전의 영웅과 피란민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글로나마 읽을 수 있다.
3구간 기적의 터전 장승포 초등학교 앞에 있는 작은 도로를 건너면 3구간이 나온다. 따뜻한 눈이 내리는 장승포마을의 전경이 담장을 덮고 있다. 피란민들은 추위와 불안, 공포의 항해 끝에 장승포에 내리면서“아 이제 살았구나!”하고 함성을 질렀다고 한다. 남한 날씨가 온화한 탓에 저절로 나온 탄식이다. 춥고 배고픈 피란길이 얼마나 고생이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장승포 주민들은 초등학교에 모여 있던 피란민들에게 소금물을 적신 주먹밥을 만들어주고 집도 내어 주면서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 그들은 곤궁한 생활에도 장승포 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희망의 터전을 가꿔 나갔다. 3구간은 피란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림과 작은 소품, 포토존이 있다. 4구간 따뜻한 겨울 희망의 꽃 3구간의 끝, 소망의 길 계단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4구간이다. 동백이 눈에 띄는 벽화가 보이고‘새 희망의 꽃을 피우다’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춥고 혹독한 겨울이었지만 피란민들은 장승포 주민들의 도움으로 마음만은 따뜻한 겨울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거제시의 상징 꽃이기도 하고 겨울에도 화사하게 피어나는 동백꽃으로 희망을 찾은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라는 글귀가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4구간 끝부분은 일본 어업인들이 살던 집들이 아직도 그 모양을 하고 있으며 신사(神社)가는 길은 그대로입니다. 최근에 장승포 둘레길을 개설하였는데 그 길과 연결 됩니다.
6.25 피난시절 서울 세브란스 거제도 분소 흥남에서 피난와서 3대체 영업하고 있는 중국집
흥남철수 때 같이 피난 온 식당
그때 피난 온 사람들은 대부분 부산으로 서울로 경기도로 이주하고 지금은 김치 5 이경필 씨와 천화원, 함흥식당 등 몇몇이 서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베스트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