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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은 영사기>의 줄거리:
예수님은 영사기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은 영사되는 필름의 내용이었습니다. 영사되는 모든 과정이 오직 빛의 작용이듯이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과 행동 모두는 빛이셨습니다. 영사기의 빛은 레이저 광선과는 달리 백년을 비추어도 빛이 닿는 곳에 그 어떤 힘도 가하지 않고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단지 필름의 내용을 영사해 드러낼 뿐입니다.
예수님은 영사기
(막12:13-17)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은 영사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영사기이십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환등기를 통해서 교육을 받게 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대학생이나 청년 나이에 해당되는 선생님들이 아무개 집사님의 집에 있는 환등기를 빌려다가 앞에 스크린이나 하얀 벽면에 맞춰서, 그러면 모두 의자를 고쳐서 안기도 하고 그랬죠, 그래서 영상을 하나씩 보여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늘 문제가 되는 것이 환등기의 높이입니다.
대부분 가정용으로 나온 환등기를 공간이 넓은 예배당 안에서 작동시키게 될 때 높이를 맞추지 못해서 환등기가 작은 스크린으로 딱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높이를 조절하는 동안에 환등기가 천정에 가서 비치기도 하고 옆의 벽면에 가서 비치기도 하고, 뒤에 강대상이나 강대상 옆의 화분이나 꽃에 가서 상이 겹쳐서 어른거리면서 비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칠 때는 대체 무슨 모양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환등기뿐만 아니라 영사기도 마찬가지에요.
가끔 취미로 집안에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시설을 해놓는 집이 있습니다.
스크린을 걸어놓고 영사기를 사서 영화 필름을 돌립니다.
그럴 때 영화가 끝났다고 스크린을 올려버렸는데 아직 등장인물이나 제작자에 관한 소개가 계속 나오거나 어떨 때는 영화를 찍을 때의 NG 장면들이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잘 모르고 스크린을 올려버리면 그게 벽면에 비치게 됩니다.
그럴 때 벽지에 무늬가 있거나 할 때는 영상이 잘 보이지를 않아요, 어른거리면서 구분이 안 가죠.
여기서 본문과 연관 지어서 우리가 이 영사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한 가지 더 관찰해본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광선 중에서도 레이저 광선은 물리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광선을 쐬게 되면 쇠판 같은 것도 절단이 가능하고 벽에도 구멍이 뚫어질 수가 있죠.
그런데 이 영사기의 빛은 백년을 비추고 있어도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습니다.
그냥 비춰지고 있는 것뿐이죠.
바로 이러한 빛의 작용으로 상이 비춰지는데, 그 상이 비춰질 때는 그 벽면에 어떤 힘도 작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비춰지고 있는 것뿐이에요.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사기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영사기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지구의 표면이, 좁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던 당시 2000년 전에 유대나라, 그 나라의 상황이 이게 바로 벽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벽면 위에 영사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영사되어지는 그 필름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생각인데, 특별히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 이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 하나님의 생각,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나야 될 아버지의 생각들이 필름의 내용이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모든 행동들은 바로 영사기이신 예수님 자신을 통하여 표현하는 그 아버지의 생각들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표현될 수 없는 아버지의 생각들을 예수님은 필름 삼아서 이 땅에 말씀하시고 행동하심을 통하여 영사하시면서 사셨던 영사기였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영사기를 하늘에 매달아 놓은 것과 같은 거죠.
하나님의 생각이 필름이고 예수님이 사셨던 이 지구의 상황, 유대 땅이 바로 스크린이요 벽면이었다는 얘깁니다.
자, 이 점이 도대체 오늘 본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오늘 본문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와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질문을 하나 합니다.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런데 주석가들에 의하면, 헤롯당과 함께 와서 책잡는다는 사실을 정황을 미루어 생각할 때 바리새인 중에서도 강경파, 원칙주의에 입각한 강경파인 샴마이 학파였을 거라고 추측을 합니다.
헤롯당은 샴마이 학파와 대척점에 있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힐렐 학파가 타협을 하는 온건파라고 하면, 샴마이 학파는 타협이 절대 용납되지 않는 강경파인데 절대로 로마에 세금을 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었습니다.
선민이 이방인의 정부에 세금을 낸다는 것은 선민의 정체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반(反)로마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당은 굉장히 상류층의 사람들이었고 이 헤롯당 중에 사두개인들이 있었고 제사장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던 그런 당인데, 이 당은 로마정부의 요구를 잘 수용하면서 로마 식민지하에서라도 유대나라 안에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말아야 된다고 샴마이 학파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면 헤롯당이 로마정부에 고발을 하려고 하고 있었고, 만약에 로마정부에 세금을 내자고 하면 샴마이 학파가 유대사회 안에서 반 신앙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성모독자로 몰아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라고 대답을 하시면서 이 헤롯당과 샴마이 학파가 예상했던 그 어떤 대답도 아닌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대답을 해버리시고 맙니다.
이것을 학자들이 어떻게 이해를 하는가 하면, ‘국가권력과 하나님관계를 동시에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건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일본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식민지를 국가행정부로 인정한다, 이런 뜻의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여러분, 하나님의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데나리온 동전이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건 샴마이 학파에게 하는 말이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의 마음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이들이 이렇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그 예수님의 대답 이면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었을까요?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영사기라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조국이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식민지하에 있다는 이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음으로 그 상황을 붙잡고 그 상황을 변화시킨다든지 그 상황에 적응한다든지 하려는 어떠한 관심도 마음의 힘도 거기에 들이지 않고 있는 거예요.
조국이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다는 그 상황 자체는 지금 예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 식민지 상태인 벽면에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개인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생각을 그냥 영사해내는 데에 예수님의 온 관심이 기울여 있다는 거예요.
상황을 붙잡지 않아요.
영사되는 벽면이 붉은 벽돌이건 꽃무늬 벽지이건 그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선생님들이 잘못해서 벽면에 비추고 강대상에 비추고, 화분에 비추고 해도 강대상이나 화분을 치운다든지 하지 않고 그냥 비추는 것처럼 그렇게 조국의 상황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고, 그것을 바꾸려고 힘쓰지 않고, 상황을 붙잡지 않고 그 상황을 벽 삼아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영사하고 계셨다는 겁니다.
참 이해가 안 가지요?
그래서 놀란 거예요.
그렇게 대중들의 관심을 끌고 센세이션을 일으키셨던 예수님의 행동에 비하면 이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조국이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는데 입장이 없느냐 이겁니다.
그렇다고 헤롯당처럼 친 로마가 되어서 안정을 구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샴마이 학파처럼 반(反)로마도 아니고 헤롯당처럼 친(親)로마도 아니에요.
이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대답을 하신 겁니다.
저 사람의 마음이 어떤 입장인지를 알 수가 없는 대답을 하셨다는 겁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러니까 예수님은 조국의 식민지 상태에 대해서 유관순누나의 마인드가 전혀 없으셨던 거예요, 안중근의사나 이준열사의 마음이 없었고…
또 당시 경제적으로 도탄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루즈벨트 대통령처럼 뉴딜정책을 세워서 백성들과 국민들을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그런 마인드가 없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조국과 이웃과 제자들이 놓여 진 이 땅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그분의 관심은 이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상황의 벽면에다가 그냥 하나님의 뜻을 영사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셨다는 거예요.
새벽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시고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그렇게 애쓰시면서 찾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을 따라 행동하고 움직이셨을 뿐이지, 예수님의 마음이 진심으로 serious 하게 지구표면 위에 있는 상황을 붙잡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바꾸려 한다든지 하는 레이저광선과 같은 물리적인 힘을 쓰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예수님은 식민지 상태를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무관심하신 거였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꼭 지금 현재 내가 처한 이 세상 안에서의 형편에 대해서 무관심해야만 되느냐?
그래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영사하려는 마음이 있는 한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죽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지금 로마의 식민지상태에 있던 조국의 상태를 예수님이 받아들이게 되면 마음속에 식민지하에 있다는 조국의 상황이라는 벽면이 만들어집니다.
이 벽면에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비추어주셔도 그 생각이 명확히 비춰지지를 않아요.
붉은 벽돌에 영사를 할 때 그 상이 명확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깁니다.
조국이 경제적인 파탄에 빠져있다는 그 상황이 예수님께서 심각하게 생각해서 붙잡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경제적 도탄에 빠져있다는 상황의 벽면에 하나님의 뜻이 비춰질 때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이 명확해집니까?
마음이 하얗게 돼야 되요. 마음이 지금 현재 예수님 당신과 제자들과 가정과 가족과 조국이 처한 이 지구 위의 상황에 대해서 하얀 스크린처럼 백지가 될 때라야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영사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에 비춰져야 그 마음에 비쳐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수가 있고,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것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고 하신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이죠.
영사기에요, 영사기.
그런데 마음이 이 지구 위에서 현재 예수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해서 반응했다고 하면, 그 상황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이것을 변화시켜야지, 이것을 바꿔야지’ 하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려야 될 하나님의 것은.
로마정부도 하나님의 것이고 유대나라도 하나님의 것이고, 로마제국의 운명도 하나님의 것이고, 선민의 나라 유대의 운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유대나라 선민의 역사와 이방나라 로마의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것입니다.
반(反)로마도 아니고 친(親)조국의 편을 들 것도 아니고, 친(親)로마를 하면서 내 형편을 좋게 하겠다고 할 것도 아닙니다.
내 형편도 전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이 지구 위에서 만나게 되는 내 삶의 모든 상황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지구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작게는 나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가정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 상황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내 마음을 이 상황에 대해서 백지로 만들어서 나 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들을 영사하는 영사기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것이 뭐라고요?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이 걱정하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이 상황에 대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마음이 백지가 되는 겁니다.
자, 경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경제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지금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는 하나님의 것이에요.
내 자식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뭐 합니까?
이 상황에 대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백지가 됩니다.
백지가 되면, 나 아니면 안 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끔 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 생각들이 내 마음에 먼저 영사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 비쳐진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면서 사는 것, 그것뿐이에요.
그것을 위해서 날마다 십자를 가지고, 상황에 대해서 자꾸 반응하려고 하는 내 마음을 죽이고, 내 마음을 백지 스크린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영사기로서 사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사기가 어떤 벽면에 비추든지 간에 그 벽면의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부부간의 문제가 있고, 일이 안 되고 사업이 안 되고, 건강에 문제가 있다, 이 상황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그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 영사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아내가 볼 때는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니, 돈이 없어서 먹고살 수가 없는데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지! 지금 그런 말과 행동이 다 무엇이냐?’고 깜짝 놀란다 이겁니다.
어떻게 돈이 없어서 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이 상황에 대한 입장이 없을 수 있느냐 이겁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지요.
건강이 시들시들해 가는데 어떻게 건강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이 하나도 안 되고 있느냐 이겁니다.
그 상황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이 내 몸의 역사는 죽든 살든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나는 지금 건강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건강은 내 일이 아니니까 밀쳐두고, 건강은 단지 벽면이에요.
건강이 상해 가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벽면에 불과한 것이고, 나는 그 벽면에다 대고 그냥 하나님의 뜻을 영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사기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 모두가 다 상황에 대하여 우리 마음이 하얀 스크린이 돼버리는, 죽어버리는… 그렇게 되라고 십자가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상황이 마음에 파고들어올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그 상황에 대해서 죽어버립니다.
하얀 생각이 없는 스크린이 돼버릴 때 내가 행동하고 말해야 될 하나님의 생각들이 비쳐지고 그대로 상황에 대해서 영사하면 되는 겁니다.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도 말고 벽면에 비쳐진 영사기의 상처럼 그대로 영사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상황, 벽면은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지요.
예수님도 영사기, 우리도 영사기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여러 가지 면으로 삶의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단지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상황에 대하여 죽으므로 내 마음이 하얀 스크린이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생각이 명확하게 비쳐짐에 따라 이 상황의 벽면에 대해서 나도 단순히 영사기로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