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의 유래
‘덕수궁 돌담길’은 1999년 서울시에서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했고,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서울시 중구 정동길의 별칭입니다. 가을에는 낙엽 쓸지 않는 길로도 유명한 정동길은 너비 18미터의 일방통행 도로로, 정동교회 앞 사거리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 앞을 지나 새문안길에 이르는 구간입니다.
그래서 이영훈이 작사 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노래 「광화문 연가」에서는 이런 가사로 등장하지요.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걷고 싶은 길이고, 누군가에게는 옛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인 정동, 이곳은 조선 왕조의 비극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졌습니다. 태조는 강씨의 능을 이곳에 정성스럽게 치장해서 조성했고, 자신도 이곳에 함께 묻히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한 평범한 필부로서의 꿈은 아들 이방원 때문에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이복 동생이자 강씨의 아들인 방번과 세자 방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렇게 이전한 곳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이지요. 또 태조의 능은 양주로 옮겼는데 지금의 구리시입니다. 일부러 아버지와 계모의 능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한 계모에 대한 이방원의 분풀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정릉을 파괴해서 봉분을 완전히 깎아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했고, 정자각은 헐어서 목재는 태평관을 짓는 데, 석조물은 돌다리를 만드는 데 썼는데 이 다리가 광통교입니다. 장안에서 가장 넓은 다리를 만들면서 일부러 정릉의 석조물을 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라는 잔인한 의도가 담겨 있었지요. 대신 무덤을 호위하고 있던 문무석인은 그대로 묻어두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발굴됐다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최초의 이 조각물은 아직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저 주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을이면 유난히 더 걷고 싶은 거리 서울 정동길, 백 년이 넘은 건물들과 아름다운 가로수, 잘 꾸며진 도로가 어우러진 풍경은 아늑하고 포근해서 산책로로, 데이트 장소로 사랑받고 있는데요. 그러나 어떤 연인들은 이 길을 걷는 것을 주저했던 적이 있거나 주저할 수 있습니다. 바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 때문입니다. 속설치고는 참 야박합니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즐거움을 막는 것이니까요.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설이 있어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이혼한 부부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기 때문이라는 설입니다. 1927년, 이 길에 경성재판소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법원이었다가 1995년에 서초동으로 이전하자 리모델링을 거쳐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개관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이 아직 정동에 있던 시절 이혼 소송을 위해, 혹은 마친 후에 버스를 타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는 부부가 많았고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배재학교 학생들, 이화학교 학생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는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춘기 풋풋한 첫사랑을 시작한 남녀 학생이 함께 이 길을 걷다가 정동교회 앞에 이르면 헤어져야 했습니다. 왜냐고요? 각자의 학교로 들어가야 했으니까요.
세 번째는 바로 궁중 여인네들의 원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덕수궁에서는 종종 왕가에서 쉬쉬하는 스캔들이 벌어지곤 했는데, 광해군이 왕세자였을 당시, 자신의 백모 뻘인 한 과부와 사랑에 빠진 사실이 궁중에 발각되면서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고 하네요. 광해군은 오리발 작전으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자신의 정절을 증명하기 위해 덕수궁에 목을 매달았다고 합니다.
또 광해군 18년에는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키고 ‘대비’의 칭호까지 거두었으니 인목대비의 원한이 이곳에 사무쳤음을 짐작하고도 남을 듯하네요.
그리고 옛날에 임금의 성은을 받지 못한 후궁이나 궁녀들이 많았으니, 그 한 많은 궁중 여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연인들을 질투해서 헤어지게 한다.’는 오싹한 속설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예로부터 덕수궁이 위치한 서울 정동 뒷골목은 무당이 많아 ‘무당골’이라고도 불렸는데, 뒤 쪽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야산에서는 매년 무당들이 산제를 지내곤 했답니다. 제사의 주 목적은 바람난 남편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이처럼 여인들의 한이 서려있는 길목이라서 이별의 길목이 됐다는 한 많은 속설입니다.
그러나 덕수궁 돌담길에는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보다 더 슬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부터 그렇습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지금의 세 배 넓이에 170동 이상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궁궐이었습니다.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물러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정치 일선에 나서지 말고 ‘덕을 쌓으며’ 물러나 있으라는 굴욕적인 뜻이 들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경운궁의 70퍼센트를 분할 매각해서 궁을 축소하고 중간에 길을 내고 담을 쌓았는데 그 길이 오늘날의 덕수궁 돌담길로 원래 경운궁 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덕수궁 돌담을 보면 궁궐 담치고는 참 삐뚤삐뚤, 조악합니다. 이래저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덕수궁. 앞으로는 덕수궁이라고 부르지 말고 경운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요. 언젠가 그렇게 된다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도 옛말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