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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덕랑행도사전주최공휘윤조지묘(通德郞行都事全州崔公諱潤祖之墓){비석}
- 통덕랑공 묘비 -
전북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龍城治北一舍許秀麗한德載山이雲霄에높히솟아있고앞흐로獒樹川이悠悠히흘은大明里乳懸洞一局은全州崔氏顯祖弘文館大提學烟村先生諡文肅公派一族의世葬山이다. 蒼松에雲烟이잠겨있는西麓一崗에四尺崇封이있으니이는곳烟村先生四代孫이며判決事吏曹參判巖溪公諱連孫에長男通德郞行都事崔公의墳庵이다. 公의姓은崔요貫全州이며諱潤祖로서生也에噐宇寬重하고庭訓을밧드러入孝出恭하며言忠行篤하고文藝夙就하여行通德郞都事하고配恭人은武功郞淳昌薛忠蘭女로서有淑德夫和婦順터니料外에公이早世하였으나幸히遺腹子를남기게되었다. 그러나얼마되지안해夫人마저不遐棄世하니家門은實로蒼黃慘淡케되고오직上堂에게신老祖巖溪公의膝下에서哌哌하게生育되다配恭人薛氏는親庭인淳昌에서遐世하니薛氏先山인金果面獨山에安葬하였으나失傳되어不得已武功郞墓下에設壇되었다. 그아들琬또한天賦가超凡하고學行이卓越하여部將副司果가되고娶昌原丁游軒先生從妹하여霽雲應雲得雲泰雲四孫을두웠고長孫齊雲은掌樂院直長을거쳐羅州判官을歷任하였으며曾孫緯地는海南縣監을거쳐漢城判官까지歷任하였으니이로써家門은다시爀爀한中興을보게되다. 噫라무릇人間事는興亡이有數하거니와公은幸히遺腹子琬을남겼으나그夫人薛氏마저幼孤를버리고遐世하니그祖考巖溪公이膝下에거두워風朝雨夕에抱之育之愛之敎之로오날에그后裔들이繼継承承이고을을주름잡고爀爀히살고있다. 一日에十五世孫龍鎬年迫九耆의老翁이龍城山館으로不侫을차저樹阡之文을請하기에世誼에屈하여辭不得按狀略述如石하고이어銘하되;
忠孝世家로厥后克昌이라根固枝繁이요山高水長이라德山一崗은善士攸葬이라顯刻貞珉하여昭示無疆이라
歲舍甲子仲春下澣
成均館副館長完山李萬器謹撰
完山李一珩謹書
남원 관아에서 북쪽으로 30 리(里) 즈음에 수려한 덕재산(德載山)이 구름 낀 하늘아래 높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오수천(獒樹川)이 유유히 흐르는 대명리 유현동(乳懸洞) 일대는 전주최씨 현조(顯祖) 홍문관 대제학(1) 연촌(烟村) 선생 시호 문숙공파(文肅公派) 가문의 선산이다.
푸른 소나무에 구름과 연기가 감겨있는 서쪽 산기슭 한 언덕에 넉자(120cm) 남짓한 높이의 묘소가 있으니 이는 바로 연촌 선생의 4대손이며 판결사, 이조 참판, 암계공(巖溪公) 휘 연손(連孫)의 장남 통덕랑 행(行) 도사 최공의 묘소이다.
공(公)의 성은 최씨요, 본관은 전주이고 휘는 윤조(潤祖)로, 살아생전에는 인품이 너그럽고 신중하였으며, 가정교육을 잘 받들어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을 공경하였으며, 말은 충실하고 행동은 독실하였고, 문예를 일찍이 성취하여 행 통덕랑 도사가 되었다.
배(配) 공인은 무공랑 순창설씨 설충란(薛忠蘭)의 딸로 착하고 아름다운 덕행을 갖추어, 부부사이가 화목하더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공(公)이 일찍 돌아가셨으나 다행히 유복자를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부인마저 돌아가시니 가문은 실로 어찌할 겨를도 없이 비참하고 처량하게 되고, 오직 윗방에 계신 늙으신 할아버지 암계공 슬하에서 고고하게 키워졌다.
배(配) 공인 설씨(薛氏)는 친정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설씨 가문 선산인 금과면(金果面) 독산(獨山)에 안장하였으나 전해오지 않게 되어 부득이하게 무공랑(설충란) 묘소 아래에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아들 완(琬) 또한 타고난 재질이 보통을 뛰어 넘고 학행이 탁월하여 부장, 부사과가 되고, 창원정씨 유헌 정황(丁熿) 선생의 사촌 누이와 혼인하여 제운(霽雲), 응운(應雲), 득운(得雲), 태운(泰雲) 4명의 손자를 두었다.
장손 제운은 장악원 직장을 거쳐서 나주 판관을 역임하였으며, 증손 위지(緯地)는 해남 현감을 거쳐서 한성 판관까지 역임하였으니 이로서 가문은 다시 혁혁한 중흥을 보게 되었다.
아! 무릇 인간사에는 흥망이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공(公)은 다행하게도 유복자 완을 남겼으나, 그 부인 설씨마저 어린 고아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으니 할아버지 암계공이 슬하에 거두어, 바람 부는 아침과 비 내리는 저녁에 안고, 키우고, 사랑하고, 가르쳐서 오늘날에 그 후예들이 대(代)를 이어가며 이 고을에서 매우 왕성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루는 15세손 용호(龍鎬)가 90세가 다 되는 늙은 노인의 몸을 이끌고 남원의 산 속에 있는 나의 집으로 찾아와서 비문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기에, 대대로 사귀어 온 정(情)에 못 이겨 사양하지 못하여, 행장을 살펴보고 비석에 적힌 바와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짓기를,
충성과 효도로 이어 온 명성 높은 가문이
사라질 위기를 이겨 내고 번성하였다.
뿌리가 단단하니 가지가 번성하는 것이요
산이 높으니 강물이 멀리까지 흐르는 것이라
덕재산(德載山) 한 쪽 언덕은
선행이 있는 선비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에 들어나게 새겨서
영원토록 비추어 보이게 할 것이라
1984년(갑자) 2월 하순.
성균관 부관장 전주 이만기(李萬器) 삼가 지음.
전주 이일형(李一珩) 삼가 씀.
* 각주 ----------------------
(1) 연촌공은 1523년(중종18) 부안종회의 활동으로 자헌대부,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경연청, 춘추관, 성균관 동지사, 세자좌빈객으로 추증 받았으나 연촌공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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