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교회를 다녀와서
6.25관련 영상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6월25일이 일요일인 어제는 1950.6.25일 일요일을 더욱 상기하고
보수 정권과 정치가 궤멸된 누란지위의 현실은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가
애국지심으로 느껴졌습니다.
누구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에서 돈독한 신앙이 느껴지듯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마음의 새김은 곧 애국의 충성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좌좀들도 촛불 대신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를 외친다면
태극기 애국시민과 동일한 조국애로 넘칠 것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생의 각오는
독립의 투혼이요, 애국의 투혼이며 자유 통일의 투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바른 국가관은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에 온전히 담겼습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이 어색하고 낯선 사람은
그 삶에 조국이 없고 민족의 정기가 흐르지 않는 조국도 달갑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나직한 흚조림에도
항일 독립 투쟁과 광복과 건국, 그리고 6.25의 참화와 조국의 건설과 발전이 그려진다면
애국심과 국가관이 투철한 대한의 건아일 것입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에 투영된 나라 사랑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우리 나라 국민의 한결같은 충성된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이 거슬리고 싫은 사람은
분명 애국가와 태극기를 싫어하는 적성 세력일 것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태극기 집회를 통해서 울려퍼진 군가는
애국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력, 그 자체였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는 태극 전사의 전투력은
힘찬 군가와 함께 애국 행진의 태극기 물결을 이룬 대장정이었습니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파면은
보수의 반동과 대결집을 이루었으나 적성 세력의 보수 궤멸 작전으로 갈가리 찢겼습니다.
내부의 적을 이용한 교란 작전은
배신의 도미노 현상이라는 절대 함정의 늪에 빠져 보수 정권과 정치는 몰락하였습니다.
삼팔선이 휴전선이 되는 과정에서 희생당한 호국영령에 대한 현충일 기념사의 이해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충성과 그 충성을 와해 시키는
적성 세력의 경계지점이 무엇인가를 일깨웠습니다.
북괴군의 남침으로 삼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한 달만에 낙동강 최후 방어선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엔군의 한국전쟁의 참전과 최악의 상황에서 인천 상륙 작전의 감행과
장벽의 38선을 넘어 북진한 국군의 용감한 자유 통일 정신은 그 날을 국군의 날로 재정하였습니다.
6.25전쟁은 북괴군의 남침으로 낙동간 전선까지 밀려났으며
38선의 장벽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의 용맹은 자유 통일의 초석이 되었으며
서부 전선의 청천강 전투와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는 자유 통일을 목전에 둔 최북단 전선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은 작전상 후퇴를 하였으나
특히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는 기적의 탈출 전투였으며
흥남 철수 작전으로 생명을 살리는 성공한 전투였습니다.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은 강계의 북한 임시 정부를 무너 뜨리기 위한 총력전을 폈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중공군 병사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총을 들고 두 명은 괭과리와 악기를 불며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하여 낮에는 땅굴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인해 전술을 폈습니다.
여기에서 총대신 괭과리와 북을 든 병사는
국공 내전의 모태동 포로라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국공내전의 포로를 한국 전쟁에 인해전술로 투입시켜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중국의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당한 사람은
모태동 휘하에 5천만명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는
미해병 1시단과 미육군 10사단이 출전하였는데 병사의 11배가 넘는 중공군에게 완전 포위당하였습니다.
미 사령관은 항공편으로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10군단장은 부상병만 항공편으로 후송하고
당시 북한의 기독교 주민과 함께 산악의 육로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후퇴 작전을 폈습니다.
장진호의 하갈우리에서 황초령의 고투리까지는
죽음의 계곡을 넘나드는 해발 1200미터의 험악한 산악지대였습니다.
많은 전사자와 동상의 죽음을 안고 황초령의 고투리까지 왔으나
고투리와 진흥리 사이 수문교를 중공군이 끊어 놓았습니다.
눈보라가 치고 하늘이 흐린 가운데 절대 절명의 순간.......
하갈우리에서부터 함께 동행한 수 많은 기독교인의 철야 기도는 다음 날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새벽 별은 맑은 날씨를 예고하였고
항공편으로 다리를 놓을 재료를 운송하여 죽음의 끊어진 다리를 연결하여 기적적으로 구사일생하였습니다.
장진호의 하갈우리에서 황초령의 고투리를 거쳐 흥남까지 180키로를
중공군의 포위망과 전투를 하며 걸어서 이동하였으며
마침내 흥남에 주둔한 육군의 도움을 받아 흥남 철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흥남 철수 작전은 군인 10만명과 북한 주민 10만명의 철수 작전으로
당시 철수한 북한 주민의 95%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함선 194척이 동원된 철수작전은
영화 국제 시장의 장면 처럼 아비규환이 아니었습니다.
10만명의 북한 주민은 질서 정연하였으며
각 교회별로 안전하게 승선하였습니다.
모든 함선에 가득 태우고도 남은 흥남 부두의 북한 주민은
군수물자를 실어갈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리고
남은 만사천여명을 모두 태웠습니다.
장진호 전투의 미해병 1사단과 육군 10사단의 장병은 중공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항공편으로 후퇴하지 않고
북한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많은 전사자를 내면서 사랑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은 북한 주민의 탈출은 작전에 없었으나
당시 북한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 대부분의 전쟁 물자를 모두 버리고 인명을 구하였습니다.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장진호 전투는
미해병 1사단이 만든 사랑의 기적을 이룬 전투였습니다.
참으로 장진호 전투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한
대한의 건아가 된 미군의 위대한 전투였습니다.
* 사진 자료는 조시철 목사의 영상에서 캡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