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건설의 아버지 이범석> 독립·광복군 이끈 초대 국방 장관 ‘국군 우둥불’
작성일: 2018-01-03 09:47:17
<1> 철기 장군을 말한다
여운형 선생 만나 항일민족의식 자각1
6세에 상해 망명 운남강무당 입학
수석 졸업… 교관이 호 ‘철기’ 수여
수차례 전투 연승 청산리대첩 이끌어
광복군 초대 참모장 등 국내탈환작전
광복 후 국방 장관으로서 국방 ‘초석’
기사사진과 설명광복군 시절의 이범석.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말 달리는 선구자’의 전형적 모습이다. |
2018년 올해는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이 정식으로 출범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맞이한 광복은 국내외에서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광복 3년 후인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국군 또한 공식적으로 첫발을 내딛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부 장관은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의 철기 이범석 장군이다. 그는 경기고보 재학 중 모든 것을 버리고 16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망명해 우둥불을 벗 삼아 30여 년간 항일무장 투쟁을 벌여왔다. 대한민국 광복의 큰 별이자 국군의 거목이 바로 철기 이범석 장군이다.
왜 지금 철기 장군인가?
“우둥불은 함경북도 방언으로서 노영화(露營火)를 지칭한다 -(중략)- 우둥불, 그 불길을 바라보며 때로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고, 그리운 조국을 생각했다. 우둥불 앞에서 불꽃 사이로 어른거리는 쓰러져간 전우들을 생각했다 -(중략)- 이글대는 불길 속에서 내일의 승리도 다짐했다---(후략)”(철기의 회고록 ‘우둥불’ 서문에서)
“금일부터 아(조선경비대)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명예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에 장병 제군은 오직 근면진충보국(勤勉盡忠保國)의 정신으로…. (후략)” (대한민국 국방 장관 훈령 제1호)
지금 왜 우리는 철기 장군을 조명하는가? 그것은 철기 장군의 특별한 삶과 업적이 오늘의 우리 군과 사회에 주는 시대적 메시지 때문이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는 뛰어난 많은 군사 지도자들이 명멸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철기 장군은 단연 우뚝 선 큰 별이자 거목이다. 그의 항일무장 투쟁과 초대 국방 장관으로서의 자취, 그가 남긴 삶의 의미를 알아보는 일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임이다.
국방일보가 대한민국 국군 건설 70주년을 맞아 2018년 올 한 해 철기 장군 일대기를 연재하기로 한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오늘 제1회 차에서는 철기의 전반적인 생애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요약한다.
기사사진과 설명이범석 장군. |
민족의식의 자각, 망명과 항일무장 투쟁
철기 장군은 1900년 음력 10월 20일 서울 용동(지금 명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눈으로 보고 항일의식을 키운다. 경기고보 재학 중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 독립 회복이 청년의 시대적 사명임을 자각한다. 중국 망명을 결심해 경기고 3학년이던 16세에 상해로 향한다.
중국에서 이범석은 독립운동의 급선무가 군사력 배양에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중국 운남성 운남강무당에 입학한다. 1919년, 이범석은 2년 6개월의 정규 사관생도 교육을 마치고 12기 기병과를 수석 졸업한다. 졸업 시 교관 서가기(徐家驥)는 철기라는 호를 수여한다. 강철 같은 의지와 천리마의 기상을 가지라는 의미다.
기사사진과 설명국무총리 겸 국방 장관 재직 시절의 이범석. |
청산리전투의 영광, 그리고 고난의 길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진다. 철기는 남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이 된다.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남만주의 서로군정서와 북만주의 북로군정서로 나뉘어 있었다. 이때 북로군정서 김좌진 사령관은 새로운 사관연성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에서 명성이 높던 청년 교관 철기를 특별 요청한다. 철기는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취임해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 될 600여 명의 생도를 훈련시킨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전투가 시작된다. 10월 26일까지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 수차례의 전투에서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연성대원들은 대승을 거둔다. 광의의 청산리전투는 북로군정서 단독으로 치른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등 수 개의 대소 교전과, 홍범도 연합부대가 치른 완록구전투와 고동하전투, 그리고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가 연합으로 치른 어랑촌전투 등을 포괄하여 말한다. 청산리전투는 대한제국 멸망 후 대규모 항일무장투쟁의 첫 승전보였다.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후퇴하던 중 불의의 참사를 맞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의 간계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흑하사변이 그것이다.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와해 및 침체기로 들어선다. 이범석은 이 시기 중국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한다.
광복군 창설의 주역이 되다
1940년 9월 17일, 이범석은 한국 광복군 창설 시 초대 참모장으로 취임한다. 1942년 광복군 예하 부대 조직 재편 시에는 광복군의 주력인 제2지대장으로 취임한다. 1945년 임시정부는 한미 군사합작을 추진한다. 7월에는 국내탈환작전을 수립하고, 김구 주석은 국내 정진군 총사령관에 철기 장군을 임명한다. 철기 장군은 미국전략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오늘날 CIA 전신) 책임자 도노반, 서전트 등과 함께 국내 정진작전인 독수리작전을 준비한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김구 주석은 철기 장군에게 명령해 즉시 미군의 지원 아래 국내로 들어가 일본군 항복 접수를 지시한다. 8월 18일 오후 2시경, 철기 장군이 지휘하는 국내 정진군 선발대는 미군이 지원한 C-47 군용 수송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다. 광복군 중 최초로 고국 땅을 밟게 되나, 일본군과의 협상이 원활치 못해 중국으로 다시 복귀한다.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 국군 건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직뿐만 아니라 초대 국방 장관직을 이범석 장군에게 맡긴다. 대한민국 국군사의 결정적 흐름이었다.
장군은 이후 취임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사임하는 1949년 3월 21일까지 8개월간 초대 국방 장관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국방의 초석을 마련한다. 그의 경험과 철학이 국군 건설 과정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간다.
철기는 “국군은 광복군의 독립투쟁 정신을 계승한다”고 천명한다. 독립투쟁 정신과 자주독립국가에 대한 민족적 자각과 소명의식을 건군의 정신으로 삼는다. 이러한 정신적 계승 노력은 ‘국방부 훈령 제1호’을 비롯하여 ‘국군 3대 선서’나 ‘국군맹서’ 등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장군은 당일에 국방부 훈령 제1호를 발령,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확립한다. 국군의 성격을 ‘국방군’으로 규정하면서 국군장병의 사명을 분명히 하였다. 1949년 3월 철기는 정치적 이유로 국방 장관 직을 물러나고 이어 국무총리직에서도 물러난다. 그리고 1972년 5월 11일 71세의 나이로 명동 성모병원에서 서거한다.
철기 이범석은 말한다. 대한민국 국군은 독립군-광복군 역사의 계승자라고. 광복의 큰 별이자 국군의 거목인 철기가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의 큰길이었다.
박남수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사진 제공=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