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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의 원천, 가족
임현준
황유원, 「마파두부밥」, 『문학과사회』, 2024 여름.
장옥관,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 『애지』, 2024 여름.
양애경, 「쎄로켈」, 『애지』, 2024 여름.
이순희, 「아!」, 『서정시학』, 2024 여름.
고재종, 「가족 우화」, 『애지』, 2024 여름.
인간은 인간인 이상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문학도 문학인 이상 변치 않는 주제가 있다. 시대의 풍조나 경향에 따라 형식과 내용이 변화해 온 문학이지만 인간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대자연의 섭리에 대해서만큼은 지독하리만큼 변함없이 드잡이하며 끌고 가거나 끌려오면서 한길을 걸었다. 문학은 인간 중심의 삶이 대자연에 맞서거나 순응하는 방식을 테마 삼아 그 서정성의 미학을 축조해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고나 할까.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나타내는 서정시는, 특히 우리 현대시는 역사·정치·경제·교육 등 서구적 영향력에 휘청이면서도 자연의 섭리와 보편적 인륜을 기반으로 한 서정성을 놓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물론 ‘근대 문학의 종언’과 같은 낭설에도 한때 떠들썩했던 우리 문학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는 꿋꿋한 데가 있어 나름 다변화된 형태로 그 서정성의 몸집을 불려 왔다고 자부한다. 이는 치기 어린 우생학적 발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 현대문학과 현대서정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시대의 굴곡마다 태풍 속에 놓인 촛불같이 위태로웠지만, 그 열기와 밝기가 사그라진 적은 없었다. 되레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미디어의 스토리텔링적 성격까지 문학의 범주로 껴안으려는 포용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우리의 서정성 가운데 지강한 그 무엇이 있음을 어슴푸레 느끼게까지 한다랄까.
그 원천으로서의 서정성은 한 가지로 일갈될 수 없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연의 섭리와 보편적 인륜을 기반한 그 무엇을 상정해 놓고 한 가지 면모를 드러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섭리와 보편적 인륜은 한가지 신앙으로 구분 없이 모호하게 다뤄져 왔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윤리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결국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기에 자연의 변화와 순환의 체계라는 불가지론의 영역까지도 인간적 사고 안에 욱여넣을 수밖에는 없다. 세상 만물의 이치를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 안에서 재단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도 과학도 자연도 인간 중심의 세계 안에서 정립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 인륜을 이야기할 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가족’에 대한 것이다. ‘가족’은 지극히 인간적인 개념이지만 막연히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일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동서의 철학은 가족을 중요한 성찰의 대상으로 하는데, 특히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는 일찍부터 가족을 인륜적 삶의 초석으로 삼아왔다. 게다가 우리의 유교 전통에서 가족은 국가를 비롯한 모든 공동체의 축소판이자 사회의 원형으로 여겨졌다. 이는 절대적인 믿음인 동시에 신앙에 가까운 것이어서 우리의 시적 서정성도 거기로부터 발현되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모습은 피폐하고 기괴하고 잔망스러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함의는 시대의 흐름과는 달리 변하지 않는 서정성을 담고 있다. 문학이 문학인 이상 ‘가족’이라는 보편적 인륜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 하나같이 ‘가족’이라는 서정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제각각 미학적 변주를 시도하는 시 다섯 편을 음미해 보자.
1.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기
상처 입은 짐승들은
겨울이면 토굴에서 웅크리고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준다고 했었지요.
봄이면 그 토굴 앞에
노루귀꽃이며 개불알꽃들이 반짝이곤 했지요.
―고재종, 「가족 우화」 부분.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이다. 헤겔이 인간을 ‘공동 존재(Mit-Sein)’라 부르는 까닭은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만 인간다운 인간으로 존립할 수 있는 존재라 여겼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인륜 공동체의 첫 단계를 ‘가족’, 둘째 단계를 ‘시민 사회’, 셋째 단계를 ‘국가’라 상정하고 있다. 인간의 공동 존재 방식에 맞물린 가장 기본이 되는 제도를 ‘가족’에 둔 것이다. 생활이나 행동 등을 같이하는 두 사람 이상의 모임으로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보더라도 ‘가족’은 한 개인으로만 구성될 수 없는 개념이다. 딴에는 저 혼자만의 서정을 두서없이 뽐내는 시들이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고 외면받는 원인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는 인간의 것이고, 인간은 공동 존재해야 하는 관계성의 동물이고, 거기서 연대하는 공감이 생길 테니까.
어느 날 눈을 감고 사후 세계에 갔다
사후 세계에서 너무 배가 고파 들어간 밥집 메뉴판에
마파두부밥이 있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나는 호기롭게 마파두부밥을 시켰다
사후 세계이니 매운 것도 괜찮겠지
얼굴이 얽죽얽죽 얽은 할머니가
벌건 마파두부밥이 담긴 접시를 두 손으로 들고
조심조심 걸어와 내 앞에 내려놓고는
다시 조심조심 걸어 주방으로 돌아갔다
사후 세계인데도 저렇게 느리다니
나는 저 노파가 산 사람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어쨌거나 마파두부밥은 왠지 하나도 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매웠고
너무 매워서 땀과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사후 세계인데 땀이라니 눈물이라니
비라니
어느새 창밖으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얼굴이 얽죽얽죽 얽은 할머니는
마차 사고로 잃은 남편을 그리며 꺼이꺼이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소리 없이
문가에서 울고 있었다
사후 세계에서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다니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급히 틀어막고
마파두부밥을 얼른 한술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늙어서 더는 일할 수 없게 된 소를
도축하여 잘게 썰어 만든 소고기가
밥알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다
사후 세계에서 먹는 마파두부밥 맛은
아무래도 사후 세계 맛이 났고
거기 든 모든 것은 죽은 것이었고
나도 어쩌면 이 가게를 나서다가
저 자욱한 빗길을 돌진해 오는 마차에 치여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파는 내가 죽은 채로 찾아오면
나를 기억하고는 다시 조용히
벌건 마파두부밥을 내어줄 테지
그러면 나는 또 너무 매워서
땀과 눈물을 비 오듯 흘리다가
어느덧 비 오는 문가에 서서 죽은 나를 떠올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내
아내를 쳐다보고는 화들짝 놀라
그동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말겠지
―황유원, 「마파두부밥」(『문학과사회』, 2024 여름) 전문.
‘가족’의 사전적 의미에서 중요한 지점은 ‘부부를 중심으로 한’ 정서적 유대이다. 황유원의 「마파두부밥」은 부부라는 인륜적 관계를 기저에 깔고 “사후 세계”라는 환상적 시공간과 “벌건 마파두부”의 유래를 뒤섞어 “사후 세계 맛”이 현실처럼 “매워서” “땀과 눈물을 비 오듯 흘리”게 만드는 독특한 스토리텔링의 시이다. 역사적 일화와 환상과 보편적 서정을 잘 버무리는 시인의 「마파두부밥」 스토리텔링은 읽는 이로 하여금 시적인 것을 상기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투영하게 한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많은 시이다.
마파두부는 ‘얽었다’는 시각적 묘사로서의 ‘마(麻)’와 ‘할머니’를 뜻하는 ‘파(婆)’의 합성어로 우리식으로 풀이하자면 ‘곰보 아줌마네 두부 요리’쯤 된다. 19세기 초 중국 사천성(四川省)을 대표하는 음식 마파두부의 유래는 온교교(溫巧巧)라는 여성이 진춘부(陳春富)라는 이와 결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얽은 곰보였던 온교교는 남편의 성이 진 씨였기 때문에 진마파(陳麻婆)라 불렸다. 진마파의 남편은 성도(成都)를 향하는 길목인 만복교(萬福橋) 옆에 작은 기름 가게를 열어 생계를 유지했던 모양이다. 성도 시내를 왕래하던 남편과 그의 동료들, 또는 가난한 행인이나 인력거꾼이나 심부름꾼 같은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가게에서 한숨 돌리며 요기를 해결했을 것이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고 쪼들린 그들은 가게 근처 두부방에서 값싼 두부를 사고 또 근처 정육점에서 고기를 끊어다가 “얼굴이 얽죽얽죽 얽은 할머니” 진마파에게 요리를 부탁하곤 했다. 요리에 재능이 있던 진마파는 기름 장수들이 준 유채기름을 가지고 고추와 두부, 후추와 고추기름, 잘게 썬 양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식재료를 섞어 맵고 얼얼한 두부 요리를 만들어 냈다. 진마파의 두부 요리는 고된 일을 하는 이들에게 건강식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사천 지방의 특색이 강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마파의 남편이 기름을 배달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남편이 죽자 생계를 위해 진흥성(陳興盛)이라는 식당을 열었는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마파두부의 유래를 길게 소개한 까닭은 황유원 시인이 시 안에서 펼쳐놓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매우 매끈하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추렴에다가 “사후 세계에서 너무 배가 고파 들어간 밥집” 같은 환상성, “벌건 마파두부밥이 담긴 접시를 두 손으로 들고/ 조심조심 걸어와 내 앞에 내려놓고는/ 다시 조심조심 걸어 주방으로 돌아”가는 현장감, “마차 사고로 잃은 남편을 그리며 꺼이꺼이/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소리 없이/ 문가에서 울고” 있는 노파[진마파]가 곧 “내/ 아내”로 바뀌는 서정적 요소, “그동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현실로 돌아오는 극적 설정 등이 얼얼한 마파두부처럼 조화롭게 잘 조리되어 있다.
가족에 있어서 부부 관계는 사랑이라는 정서적 유대를 본질로 하는 인륜적 관계다. 사랑의 모습이 모두 제각각일 테지만, 보편적 부부의 사랑이란 상대 속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만나는 관계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내/ 아내를” 쳐다보는 일은 “사후 세계에서 너무 배가 고파” “마파두부밥”을 먹는 “나”가 “가게를 나서다가/ 저 자욱한 빗길을 돌진해 오는 마차에 치여” “죽은 나”를 떠올리게 하는 서정적 유대를 환기시킨다. 나아가 “얼굴이 얽죽얽죽 얽은 할머니”가 “아내”로 변신(?)하면서 “나” 또한 진마파의 남편과 그의 동료들, 또는 가난한 행인이나 인력거꾼이나 심부름꾼 같은 고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수렴된다. “나”에 대한 보편성의 범주가 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파두부밥」은 부부라는 가족의 인륜적 관계를 단순한 연민이나 그리움이나 애환 같은 사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시인 특유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공동체적 삶과 연민이 보편성의 영역에까지 닿아 있음을 체험케 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런 체험 속에서 “상처 입은 짐승들은/ 겨울이면 토굴에서 웅크리고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준다”는 인륜적 ‘가족’의 서정성을 “땀과 눈물을 비 오듯 흘리”도록 “맵게” 느끼게 한다.
2. 램환수라고 하는 호흡메커니즘
참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헤엄을 멈추지 못한다고 하네요.
램환수라고 하는 호흡메커니즘 때문인데
물고기가 전진, 유영하면서 아가미 표면에
계속 물을 공급, 산소를 교환하는 방식이라지요.
혹여 졸기라도 해서 헤엄치지 못하면
물이 아가미로 흐르지 못해서 질식해 죽어 버린다네요
하루라도 모래를 쓸어내지 않고는
모래에 묻히고 마는 모래집의 사람이라니요?
―고재종, 「가족 우화」 부분.
헤겔은 ‘가족’ 철학을 남긴 드문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인정 개념에 의하면 “사랑은 남 속에서 나를 아는 것”이다. 헤겔이 정의하는 사랑은 남이 인정하는 나를 남의 눈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의 변증법은 공동체의 첫 시작인 ‘가족’에서 ‘국가’라는 최종장으로 나아간다. 헤겔이 전통적 남성우월주의의 확신을 담은 문장을 그의 저서에서 여럿 보여주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국가’를 물리적 의미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의 남성중심적 국가관으로 볼 여지가 생긴다. 거기에는 ‘남의 눈 속’이라는 견고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태어나 보이 모태신앙인기라. 봉제사 접빈객이 헌법이고 족보가 경전인 경상도 땅인기라. 꿈에도 생각 몬 해본 배교背敎는 오직 분선이 이모 때문이제. 이모는 내보다 딱 한 살 더 뭇는데 분해서 분서이, 다섯째 딸인기라. 우에 히는 필선必宣이고, 그 우에 히는 필조必助. 삼신할매한테 우짜든동, 우짜든동, 손바닥 닳도록 치선 드리가 얻은 아가 또 딸인기라. 낳자마자 웃목에 던져짔던 분서이는 큰히의 큰아들인 날 딴 별에서 온 사람으로 여겼을끼라. 외가 가믄 분서이 이모는 방금 낳은 알을 몰래 내 손에 쥐키줬지. 그기 새 새끼 심장메로 팔딱이는 기라.
내가 어무이 뱃속에 들앉아 있을 때 이모는 외할매 몸에서 불안한 숨 몰아쉬었을 끼라. 부른 배 때매 사우 피해 츠마 밑으로만 댕깄다는 할매, 한 지붕 아래 뒤뚱뒤뚱 딸내미와 어매가 서로 마주치는 거도 을매나 민망시러운 일 아니었겠노. 누가 등 떠민 것도 아인데 또 아를 가진 할매, 고마 죽은 아들 손잡고 저세상으로 가시뿌고. 분서이는 뺑덕어마이 눈칫밥이 떠밀어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대처로 떠났는기라. 큰히의 아들은, 아부지 어무이 다 잃고 교복차림으로 난생처음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는데 이모는 주인 몰래 나왔다카미 구개진 지폐 한 장 쥐키주고 캄캄한 골목으로 사라지는기라.
그 후에는 말해가 뭐하겠노. 우째우째 내가 얼치기 박사 따고 교수되는 동안 이모는 나이 많은 신랑 만내 노점채소장사하다 덜컥 암종에 발목을 잡혔는기라. 여러 해 방서선에 항암제에 조리돌림 당하다 서둘러 가고 말았으이,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남자와 여자, 아니 여자와 남자 그 한 끗에 누린 것들, 당연해서 당연하다 여기고 저질렀던 것들 미안코 미안해 때늦게 신앙 고백하는기라. 수지븜 많았던 이모는 외가 삽짝 밖에 핀 분꽃을 닮았었제. 살구꽃 이파리 날리듯 이 눈발 흩뿌려지는 이 겨울 아침, 난데없는 까치 울음 속으로 분서이 이모가 사부잭이 내리와 내 어깨를 다독이는기라.
*송재학,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문학과지성사, 2019.
―장옥관,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애지』, 2024 여름) 전문.
헤겔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여성은 국가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라고 주석을 붙였다. 안티고네의 삼촌인 크레온[남성]은 국가와 공적인 삶을 대변하고 안티고네[여성]는 가정과 사적인 삶을 대변한다. 남성 중심의 전통사회의 규율은 공적인 것이지만 변방부로서 여성이 지키는 가족은 개별화 원리로 여겨진다. 남성성은 보편성과 금욕적 절제를, 여성성은 개별성과 쾌락적 향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성은 보편성의 원리를 중시하는 공적인 삶의 적으로 간주된다. 이 공고한 메커니즘은 아직까지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우리 사회에 면면히 작동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옥관의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은 “분선이 이모”와 시적 화자 ‘나’를 중심으로 가족이라는 사회적 체계 안에서 자행된 부조리와 모순을 고백하는 시이다. 가족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일은 여성의 오랜 역할이다. 어떤 대가나 권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만이 “당연해서 당연하다” 여겨져 왔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어쩌면 앞으로도 이어져 갈 남성 중심의 편파적인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죽을 때까지/ 헤엄을 멈추지 못한다”는 “참치”의 “램환수라고 하는 호흡메커니즘”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성의 삶은 “유영하면서 아가미 표면에/ 계속 물을 공급, 산소를 교환하는 방식”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 메커니즘으로서 남성의 권위는 “태어나 보이 모태신앙”인 것처럼 공고하고 단단하다. 그렇지만 “모태신앙” 같은 운의 논리는 “분서이 이모가 사부잭이 내리와 내 어깨를 다독이는” 모성적 서정 앞에서 흔들리게 된다. 모성이라는 서정성이 가족이라는 인륜을 설명할 때 운의 논리보다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서이 이모는 방금 낳은 알을 몰래 내 손에 쥐키줬지. 그기 새 새끼 심장메로 팔딱이는” 것을 느끼게 될 때 ‘나’라는 국가와 공적인 삶은 충격을 받는다. “주인 몰래 나왔다카미 구개진 지폐 한 장 쥐키주고 캄캄한 골목으로 사라지는” 분선이 이모의 사적 행위는 “알을 몰래 내 손에” 쥐어준 것처럼 단편적이고 작은 파문일 뿐이지만, 세월이 흘러 “살구꽃 이파리 날리듯 이 눈발 흩뿌려지는 이 겨울 아침, 난데없는 까치 울음 속으로 분서이 이모가 사부잭이 내리와 내 어깨를 다독이는” 시적 순간이 오면 “모태신앙”과도 같았던 공고한 가족 메커니즘이 전복되기에 이른다. 기저에 눌려 있던 모성적 서정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는 “당연해서 당연하다 여기고 저질렀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시적인 순간에 힘이 세지는 법이니까.
“분선이 이모”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가족을 지키고 보살피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상징한다.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에 등장하는 필선, 필조, 딸과 같은 시기에 임신해서 민망시러운 외할매, ‘나’를 뱃속에 품은 어무이 같은 인물들도 그러하다. 이들의 삶은 “분선이 이모”를 필두로 “나이 많은 신랑 만내 노점채소장사하다 덜컥 암종에 발목을 잡혔는기라. 여러 해 방사선에 항암제에 조리돌림 당하다 서둘러” 간 여성상의 보편적 모습으로 귀결된다. 이때의 여성의 보편적 모습은 희생과 따뜻한 ‘엄마’의 이미지로서 모성성을 함의하며, 마음을 진동시키는 울림으로서 시적인 서정성의 원천이 된다. 결국 이러한 “신앙 고백” 앞에서 ‘나’는 진전한 인륜을 깨닫게 되고 모성성으로 개종한 “배교자”가 된다.
덧붙이자면,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에 인용된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은 송재학의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에서 온 것인데, 이 제목은 또 1935년 세창서관에서 발간된 딱지본 『미남자의 루』에 수록된 옛 소설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송재학의 시는 ‘진명’이라는 조선의 청년 시인을 통해 “자신의 궁핍이 또한 조션의 궁핍이라는 것도 청년은 자각하지 못햇다”는 식민지 감성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망한 조선의 운명을 대변하는 ‘진명’과 고단한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분선이 이모”에게서 운명적 비극을 예감한다는 점에서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이 거느리는 서로 다른 두 심상은 동질의 서정일지도 모를 일이다.
3. 약한 닭 하나를 골라 항문을, 부드러운 창자를 꺼내먹기
시골에다 헌 집을 하나 마련해놓고
주말이면 닭장 관리를 하러 내려가는데
갈 때마다 한두 마리 닭이 죽어 있더라는 얘기지요
그것도 항문이 파이고 내장이 죄다 없어진 채여서
주변의 살쾡이 같은 짐승의 소행이라고 여기고는
철망을 겹겹으로 씌워 방책을 했지요
그러나 백약이 무효, CCTV를 설치했더니
에그머니나, 여러 닭들이 그중 약한 닭 하나를 골라 항문을
집중적으로 공격, 부드러운 창자를 꺼내먹더라는 것이지요.
수의사를 불러 물어보니
닭들이 먹이가 부족해서 그런다고 하더군요.
―고재종, 「가족 우화」 부분.
‘가족’이라는 서정은 때론 잔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이 ‘가족’이라는 사회적 관습 메커니즘 안에서의 자기반성이라면, 양애경의 「쎄로켈」은 ‘가족’이라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 안에서의 잔혹한 현실 체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와 “할머니”의 관계가 혈족인지, 환자와 간호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시의 핵심 기조는 ‘가족’이라는 인륜의 공동체가 접하게 되는 냉정한 자본주의의 기괴한 현실이다.
잠들어요
쉬~ 잇
잠들어요
코끼리도 재울 수 있는
쎄로켈 25밀리그램
오늘 임무는
36킬로그램 할머니 재우기예요
껌이죠 뭐
잠들게 해요
고장 난 뇌를 멎게 해요
윙윙거리는
불안과 공포를 멈춰요
왜 팔을 못 드는지
왜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 아픈지
왜 손목을 못 쓰는지 묻지 못하게 해요
왜냐하면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들은 말 잊고 또 잊고 또 잊고
뭐~어? 내가 팔이 부러졌다고? 손목이 부러졌다고? 수술을 했다고?
깜~짝 놀랐다가 왜 내가 이 팔을 못 움직여? 왜 나를 묶었어?라고 화를 냈다가
또 팔이, 손목이, 수술이…
엉 엉 엉 나 어떡해 나 무서워
멀쩡한 사람은 못 견디니까요
저녁 5시에서 다음 날 낮 12시까지
이러한 모든 일들을 멈춰요
단, 할머니는
어디로 나가 어디서 헤매는지 신경 쓰지 말자구요.
자! 우리 쎄로켈 씨가 임무를 다하는 동안
PC를 켜 주식 시세를 보고
부동산 현황도 보고
외환시장도 둘러보고
고기 구워 밥 먹은 다음
TV도 보고
모기장 펼치고 잠을 자요
침대 위의 할머니가 광기의 동산에서 헤매는 동안
주름진 시트와 겹쳐진 옷자락이
할머니 엉덩이 피부를 잘근잘근 씹는 동안
고마워요 쎄로켈 25밀리그램 씨
―양애경, 「쎄로켈」(『애지』, 2024 여름) 전문.
헤겔은 『법철학』, 「인륜」 편에서 ‘가족’, ‘시민 사회’, ‘국가’ 순으로 변증법적 논의를 이어 나간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가족’이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인륜의 단계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점은 산업화와 핵가족의 출현을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서구의 일반적인 논리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인륜’의 보편적 속성이 동서양 모두 비슷하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우에서만큼은 특수한 상황을 얹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네 문화와 역사, 사회 등은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곤곤한 풍파들이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 서정시에서 다루는 ‘가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근대, 현대적 요소들의 복합성, 그리고 이로 인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가족 형태라는 특유의 혼합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권용혁 교수의 『한국 가족 철학으로 바라보다』에 의하면, 한국의 가족은 서구의 근대적 가족 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독특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유교 전통은 급격히 단절되어 갔다. 전통적 가족제도가 일시에 폐기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정치의 미숙과 민주주의의 불완전함, 빠른 산업화 등 근대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농촌 중심의 공동체적 가족 문화가 도시 중심의 핵가족 문화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급격한 체질 변화가 진행된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는 이혼율, 세계 최저 수준의 출생률 등이 더욱 분화된 나노핵가족화를 야기시켰다. 그러한 와중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주의가 그 위력을 잃지 않았는데, 특히 직계가족 중심의 배타적 가족주의가 사회적으로 굳건히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혼합적인 우리의 ‘가족’ 공동체는 수많은 문제점 앞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떠한 진단이나 정비, 치료의 과정 없이 상처를 드러낸 채로 근대화를 건너왔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고도의 자본주의의 독소가 자극적이고 위험한 각성제같이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으로 ‘가족’ 공동체에 주입되고 있다. 위악과 위선과 위독한 물신주의와 경쟁의 시대 속에서 해독되지 않은 채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심각한 사회적 질병에 쇠약해져 간다.
양애경의 「쎄로켈」은 현대의 정신분열병과 양극성장애 같은 정신질환이 끼치는 악영향 속에서 인륜의 첫 단계인 ‘가족’ 공동체가 어떠한 기괴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이다. “고장 난 뇌를 멎게” 하거나 “불안과 공포를 멈”추게 하는 “쎄로켈”은 정신분열성 양극성장애의 조증이나 우울증을 급성으로 치료하는 의약품으로 파킨슨 환자의 환각이나 혼동 증상의 개선제로도 사용된다. 이러한 약을 투약해야 하는 대상은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들은 말 잊고 또 잊고 또 잊고/ 뭐~어? 내가 팔이 부러졌다고? …/ 왜 나를 묶었어?라고 화를 냈다가/ …/ 엉 엉 엉 나 어떡해 나 무서워” 하는 “36킬로그램 할머니”이다. “할머니”라는 말에는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에 등장하는 “분선이 이모”와 같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을 지키고 보살핀 모성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에게 “할머니”의 병증은 “할머니”의 모성성이 효력을 다했음을 암묵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당위성이 된다. 오히려 “저녁 5시에서 다음 날 낮 12시까지” 잠들게 하는 약효를 “우리 쎄로켈 씨”라 의인화시킴으로써 관계 단절의 합리성과 효율성 자체에 가짜 생명을 부여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도 “할머니”를 재우는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가족주의가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지만, “저녁 5시에서 다음 날 낮 12시까지” “광기의 동산에서 헤매”거나 “주름진 시트와 겹쳐진 옷자락이/ 할머니 엉덩이 피부를 잘근잘근 씹”게 방치하는 “멀쩡한 사람”은 가족의 보편적 인륜에 대해 능청스럽게 외면한다. “우리 쎄로켈 씨가 임무를 다하는 동안/ PC를 켜 주식 시세를 보고/ 부동산 현황도 보고/ 외환시장도 둘러보고/ 고기 구워 밥 먹은 다음/ TV도 보”기 위하여 “할머니”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단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는 독자가 심정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PC를 켜 주식 시세를 보고/ 부동산 현황도 보고/ 외환시장도 둘러보고/ 고기 구워 밥 먹은 다음/ TV도 보고” 하는 자본주의의 혜택이 “할머니”의 모성성에서 비롯되었다는 보편타당한 추론을 우리 모두 애써 모른척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하에서 우리 모두는 합리적 효율만 추구하는 공범일지도 모른다.
양애경의 「쎄로켈」이 좋은 시인 이유는, 기괴한 서정 속에서도 평이하지만 유쾌한 문체로 가족의 암담한 현실을 폭로하는 데 있다. 나아가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폐해를 통해 “멀쩡한 사람”조차 되려 “쎄로켈”을 복용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먹이가 부족해서” “약한 닭 하나를 골라 항문을/ 집중적으로 공격, 부드러운 창자를 꺼내먹”는 현대인의 정신병적 효율과 합리가 우리의 ‘가족’에 대한 서정성에까지 침윤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4. 허들링, 함께 놀기
남극의 황제펭귄들은
어마어마한 바람과 눈발이 쳐댈 때면
서로의 몸을 붙여 빙빙 돌면서
안에 있던 펭귄은 밖으로
밖에 있던 펭귄은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이른바 허들링을 계속 한답니다.
대는 한 그루를 심으면 죽는데
대숲을 이루면 바람을 불러 함께 놀지요.
―고재종, 「가족 우화」 부분.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서정성은 굳건할 것이다. 헤겔은 “사랑은 인륜의 예감”이라 말했다. 사랑이 인륜의 예감인 까닭은 인간 공동체의 첫 단계인 ‘가족’을 낳기 때문이다. 첫 단계여서도 예감이고, 변증법적으로 나아갈 힘의 “씨앗”으로서도 예감인 것이다. 여하튼 앞선 시들에서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면, 사랑이라는 “씨앗”은 ‘가족’ 공동체를 무한히 갱신시키는 특별한 원동력이 된다.
늙은 호박 거죽에 하얗게 핀 분을 닦다가
썩어들기 전에 끓여 먹어야겠다 했더니
호박 듣는데 그런 말 말라는 남편이 한마디 한다
죽은 호박이 뭘 알아듣겠냐 그랬더니
그 안에 씨가 있지 않냐고 한다.
아!
봄이 오면
씨앗을 고루 발라서
양지 바른 텃밭 한옆에 심어주겠다고
일부러 크게 말했다.
―이순희, 「아!」(『서정시학』, 2024 여름) 전문.
이순희의 「아!」는 굳이 ‘가족’이라는 서정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상 순리를 아우를 수 있는 품이 넓은 수작이다. 황희가 젊었을 때의 불언장단(不言長短)과 관련된 일화를 생각하게 하는 이 시는 시가 지녀야 할 언어의 품성과 덕목을 깨닫게 해준다. “죽은 호박이 뭘 알아듣겠냐”는 태도는 「쎄로켈」에서 말한 비인륜적인 합리성과 효율성의 대목과 같고, “그 안에 씨가 있지 않냐”는 태도는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의 “분선이 이모”의 모성성에 관한 대목과 일맥상통한다. 어느 쪽 태도로 대상을 관조하느냐는 엿장수 마음이겠지만, 시인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죽은 호박”이 아닌 “그 안에 씨”를 보아야 할 것이다. 시란 대상과 세계에 대한 효율성 입증이 아니라, 대상의 내면과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늙은 호박”이 “썩어” 죽는 과정에 “봄이 오면” 싹을 틔울 “씨앗”이 잉태되어 있다는 이 우주적 질서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나아가 “양지 바른 텃밭 한옆에 심어주겠다고/ 일부러 크게 말”하는 행위는 시가 “죽은 호박”과 같은 세계를 위로하는 새삼 귀한 언사이다. 관조하는 시는 때때로 세상의 병을, 위악을, 우울과 불안을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는 걸 「아!」는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생명과 우주적 질서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이러한 서정성은 “어마어마한 바람과 눈발이 쳐댈 때면/ 서로의 몸을 붙여 빙빙” 도는 “황제펭귄”의 “허들링”을 연상케 한다.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서 수많은 펭귄들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허들링”은 거대한 크기의 “씨앗”을 상상케 한다. “사랑은 인륜의 예감”이라는 헤겔의 말보다도 큰, 아니 어쩌면 ‘국가’ 단계의 공동체를 뛰어넘어 전 인류애적 단계로서의 위안과 연대와 희생과 치유가 가능해지는 공동체를 예감케 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온전한 모습이 우리들의 따스하고 안온한 고향으로서의 ‘가족’을 실체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5. 가족 우화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앞서 살펴본 네 편의 시들 머리맡에 인용된 시편들은 고재종의 「가족 우화」의 부분들이다. “상처 입은 짐승들”과 “참치”와 “닭들”과 “황제펭귄” 이야기들은 한 편의 시 속에 어우러져 훌륭한 우화 모음집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우화 시는 우리 사회의 ‘가족’에 대한 풍자와 교훈을 적확하게 이야기해 준다.
1
상처 입은 짐승들은
겨울이면 토굴에서 웅크리고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준다고 했었지요.
봄이면 그 토굴 앞에
노루귀꽃이며 개불알꽃들이 반짝이곤 했지요.
2
참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헤엄을 멈추지 못한다고 하네요.
램환수라고 하는 호흡메커니즘 때문인데
물고기가 전진, 유영하면서 아가미 표면에
계속 물을 공급, 산소를 교환하는 방식이라지요.
혹여 졸기라도 해서 헤엄치지 못하면
물이 아가미로 흐르지 못해서 질식해 죽어 버린다네요
하루라도 모래를 쓸어내지 않고는
모래에 묻히고 마는 모래집의 사람이라니요?
3
시골에다 헌 집을 하나 마련해놓고
주말이면 닭장 관리를 하러 내려가는데
갈 때마다 한두 마리 닭이 죽어 있더라는 얘기지요
그것도 항문이 파이고 내장이 죄다 없어진 채여서
주변의 살쾡이 같은 짐승의 소행이라고 여기고는
철망을 겹겹으로 씌워 방책을 했지요
그러나 백약이 무효, CCTV를 설치했더니
에그머니나, 여러 닭들이 그중 약한 닭 하나를 골라 항문을
집중적으로 공격, 부드러운 창자를 꺼내먹더라는 것이지요.
수의사를 불러 물어보니
닭들이 먹이가 부족해서 그런다고 하더군요.
4
남극의 황제펭귄들은
어마어마한 바람과 눈발이 쳐댈 때면
서로의 몸을 붙여 빙빙 돌면서
안에 있던 펭귄은 밖으로
밖에 있던 펭귄은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이른바 허들링을 계속 한답니다.
대는 한 그루를 심으면 죽는데
대숲을 이루면 바람을 불러 함께 놀지요.
―고재종, 「가족 우화」(『애지』, 2024 여름) 전문.
우화는 특수하고 개체적인 인간 사이의 사건을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로 단순화하여 보편적인 이야기로 탈바꿈시켜주는 기법이기도 하다. 「마파두부밥」의 “할머니[진마파]”와 “사후 세계”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토굴” 속 “상처 입은 짐승들”로, 「어느 배교자의 신앙 고백」의 “분선이 이모”의 삶과 애환은 “헤엄을 멈추지 못한다”는 “참치”로, 「쎄로켈」의 “36킬로그램 할머니 재우기”와 현대 가족의 기괴함은 “약한 닭 하나를 골라 항문”을 쪼아먹는 “닭들”로, 「아!」는 “죽은 호박” 안에 잉태된 “씨앗”을 “허들링”을 하는 “황제펭귄”으로 우화화된다.
각각 시들은 시인마다의 특수하고 개체적인 서정성의 발현으로 유일무이한 시세계를 이룬다. 그리고 어떤 시인은 유일무이한 개체적 시세계들을 아우르는 보편적 우화의 시를 빚기도 한다. 이러한 시들의 핑퐁은 “개별성과 보편성의 직접적인 통일이 ‘가족’이고, 이것이 부정된 이 양자의 분열로서의 특수성이 ‘시민 사회’이며, 이것이 거듭 부정되어 특수성과 보편성의 절대적 통일이 ‘국가’다”라고 한 헤겔의 변증법적 공동 존재의 작동 원리를 떠올리게 한다. 서정시의 변증법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 시적 변증법 속에서 ‘가족’이라는 서정성이 정반합되어 새로이 갱신되는 순간들을 목도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듯이, 문학이 인간과 삶과 자연의 섭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문학의 숙명 앞에서 서정성의 원천이 되는 ‘가족’에 대한 것은 시가 시인 이상 변하지 않고 관조해야 할 주제일 것이다. 아직 우리 서정시에서 노래해야 할 ‘가족’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딴에는 우리 현대시가 ‘종언’이라는 유언비어를 뿌리치고 근근이 겨우겨우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밀한 사회적 기대와 향유층의 조용한 확산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태풍 속의 풀꽃처럼 자못 낙관적이다. 물론 고령화 같은 사회문제에 따라 시를 향유하고자 하는 연령대가 노령화되었다거나, 파편적 개인화 성향에 따른 방구석 내면 같은 시들이 상호소통의 혈을 막고 있다는 난점도 인지해야 할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가 인간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대자연의 섭리에 대하여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응시하고자 하는 서정성을 유지하고 있음에 위안을 얻고자 한다. 낯 간지러운 말이지만, 유난히 ‘가족’을 내세우는 우리네 ‘K-영화·음악·문학’ 등이 득세하고 있는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 볼 때, ‘K-컬처’를 위시한 우리네 문화의 상승가도 속에는 ‘K-서정’이 어느 대목에 굳건한 지지대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서정시 앞에 ‘K’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 안에 보편적 인륜을 기반으로 한 서정성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흐르고 있음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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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준
약력
2018년 애지 등단. 애지 편집위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중.
첫댓글 좋은글 머물다 갑니다 마파두부의 유래도 즐감 하고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