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의 수호신 다르마팔라이야기
설법성지 사르나트참배를 마치고 바라나시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다.
가이드가 탑승시간 여유가 있으니 스리랑카 사원에 참배하고 간다고 하였다.
절입구에서 바라보니 보드가야 대탑의 이미지로 사원이 건축되어 있었다.법당 내부는 오비구에게 처음 섧법하는 초전법륜 붓다를 모시고 있었다.
법당 벽면에는 부처님생애에서 주요한 부분을 벽화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경내에는 희랍의 철학자를 연상시키는 수려한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이분이 바로 근대 인도불교중흥의 아버지로 꼽는 다르마 팔라였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을 때 회생을 도모하는 운동은 스리랑카에서 일어났다.
아쇼카왕이 스리랑카에 뿌린 전법의 씨앗이 23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모천(母川)으로 회귀한 역사적인 일이다.
근세 인도불교중흥의 주인공은 다르마 팔라이다.
다르마팔라는 1864년 9월17일 콜롬보의 전통적인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모두 불교 가문 태생으로 재가 불교도로서의 엄격한 삶을 살았다.
부모님들의 삶은 다르마팔라의 종교적인 삶에 모범이 되었다. 다르마팔라는 유년시절부터 15년 동안을 줄곧 기독교 선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가 태어날 당시 콜롬보는 기독교가 성행하고 있었으며, 민족 종교인 불교는 오히려 금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기독교 선교학교에서의 교육은 다르마팔라에게 불교도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그는 8세 되던해에 브라흐마 차리야서원을 하였다.
일생동안 성행위를 하지않고 청정한 행을 닦아갈것을 서원하였다.재가자의 삶을 살면서 팔제계의 계율을 평생 지켰던 것이다.
그의 이름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세속의 집을 떠나 불법의 진리를 수호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인도불교 성지순례를 하면서 인도불교 부흥운동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91년 1월에 부다가야 성지순례는 다르마팔라의 대각회 창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붓다의 대각성지 부다가야 사원이 힌두교 관리의 소유 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부다가야를 비롯한 인도의 불교 성지들을 회복하고 인도에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 결심은 그 해 5월 스리랑카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같은 해 7월 네 명의 스리랑카 비구가 부다가야에 파견되고 인도에서 대각회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발상지에서 불교부흥운동이 시작되는 중대한 사건이다.
10월에는 전 세계 불교계에 부다가야의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다르마팔라는 부다가야에서 국제불교회의를 개최했으며, 스리랑카, 중국, 일본, 치타공 등지에서 비구들이 참석했다.
오늘날 인도의 불적들이 그나마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르마팔라의 사심 없는 노력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도 고고학회가 1904년 사르나트 불적 발굴을 시작했을 때, 수많은 유물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도록 측면 지원했던 사람도 바로 다르마팔라였다.
그가 창간하고 주도한 마하보디 저널도 인도의 불교부흥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오늘날 최고의 세계적인 불교 저널이 된 마하보디 저널은, 다르마팔라가 인도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 이듬해인 1892년 5월에 시작되었으며, 아시아의 여러 불교 국가들과 부다가야 간에 뉴스를 실어 나르는 수레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33년 재가자로써 청정행을 닦으며 살아온 그는 삭발하고 비구가 되었다.
68세 임종을 앞두고 그는 서원하였다.
나는 25번을 다시 태어나 부처님의 성지를 회복할것이다.불법의 영광이 인도땅에서 다시 빛나게 할것이다.
그는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장이 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를 서원했던 것이다.
이슬람의 파괴로 불교성지가 무너지고 오랜세월 방치되어왔다.
근세 100년전에는 불교성지가 힌두교에서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불교성지를 참배할수 있는것도 다르마팔라의 공덕이 크다고 할수 있다.
사진 1번 불법의 수호신 다르마팔라 동상앞에서
사진 2번 인도가이드와 불전에서.
사진 3번 보드가야 대탑형태의 불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