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항변 -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1]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1) 끌려 나갈 때
다말은 완전 범죄인 취급을 받았다.
(2) 보내어
유다는 자신의 선고가 집행되는 그 처절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2]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다말은 몸값으로 받은 약조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여자가 임신한 것은 남자를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3]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1) 청하건대
다말이 요청한 것은 살려달라는 말이 아니다. 약조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라는 요구이다.
(2) 보소서
식별할 목적으로 '세밀히 조사하다' 혹은' 훑어보다'란 뜻을 가진 동사 '나카르'(히)의 사역형 명령법으로 '잘 살펴보시오'란 말이다.
(3) 누구의 것이니이까?
약조물의 장본인을 확인하는 일이다. 유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질서를 세우신 분이 약속한 언약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오늘과 같으시다. 그러한 하나님을 신봉했던 다말이다. 약조물을 붙잡고 자비와 은혜를 간구했던 다말이 아닌가?
26. 유다의 결심 -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더라.
1]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유다는 약조물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약조물은 구원을 상징하는 증표들이기 때문이다.
2] 그는 나보다 옳도다.
(1) 일반 해석
시부(媤父)를 속여 잉태한 다말의 행위가 결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유다 자신의 처신에 비해 더 타당성이 있다는 말이다. 즉 유다는 하나 남은 셀라의 생명만을 보존하기 위한 나머지 그를 통하여 후손을 낳아 주기로 했던 다말과의 약조(11절)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자신의 실책을 솔직히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다말의 행위가 단순한 욕정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후손에 대한 갈망에서 행해졌음을 인정하고 다말을 용서해 주었다.
(2) 저자의 해석
유다는 다말의 요청에 따라 제시된 약조물을 보고 그때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유다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강조했다면 다말은 복음에 의한 은혜를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을 경험하지 않고서 어찌 이런 부분을 이해한단 말인가?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유다를 통하여 장자의 직분이 계승되어야 하는데 두 아들이 육적 범죄로 명분을 상실했고 자녀가 없이 죽어버리자, 하나님의 계보가 끊기게 되었다.
그런대도 유다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은 유다의 부인을 죽게 하고 그를 결혼의 법에서 풀어주셨다. 다시 말하면 유다는 다말을 내쫓을 때 율법의 명분을 들어 수절하라고 명했다.
셀라가 장성할 때를 기다리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명분이요, 사실은 파혼이다. 파혼하지 않고 어찌 아비의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가? 그가 가난하여 먹여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생활고로 돌려보냈는가? 아니다.11절에 셀라가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하여 버린 것이다.
* 고전 7: 39-40 – 39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 레 22: 13 - 만일 그가 과부가 되든지 이혼을 당하든지 자식이 없이 그의 친정에 돌아와서 젊었을 때와 같으면 그는 그의 아버지 몫의 음식을 먹을 것이나 일반인은 먹지 못할 것이니라.
과거 결혼의 실패를 경험한 유다와 다말의 만남이 세상 법은 어떻게 정죄하는가? 우리들은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 중에서 어디를 따를 것인가?
3]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유다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셀라의 안녕만을 간구했다.
4]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영적 생활을 위해 육적 삶을 멀리하였다. (고전 7: 40)
27-30 출산과 자손 –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1]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임산'은 아이를 낳기 위해 시작되는 '진통'을 의미하며 진통이 시작될 때 비로소 쌍동이(twins)인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25: 24).
2]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1) 손이 나오는지라.
일반적으로는 출생시 머리가 먼저 나오는데 그렇지 못하고 머리보다 손이 먼저 나오는 것은 태아의 위치가 정상적이지 못하며 위험스러운 상태(난산)임을 의미한다.
(2)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장자(長子)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 신 21: 15-17 – 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3]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홍사를 맨 아이가 뒤로 가고 다음에 있던 아이가 먼저 나온 것을 가리킨다. 즉 비정상적인 아이의 위치가 정상적으로 된 것을 뜻하는데 장차 그리스도가 이 아이를 통해 탄생할 것을 예견해 주고 있다.
(1) 터뜨리고 나오느냐(히, 파라츠타 파레츠)
'터뜨리다' '뚫다'란 뜻을 가진 '파라츠'의 과거형인 '파라츠타'와 명사로서 '틈'을 의미하는 '페레츠'가 합쳐져 '틈을 뚫었느냐' 즉 '틈을 만들었느냐'란 말이다.
이는 쌍동이 형제 세라에 앞서 갑작스러운 베레스의 출생으로 인한 회음부(perineum)의 파열을 가리킨다.
(2) 베레스(히, 파레츠)
'깨뜨리다', '터뜨리다' (RSV;breach)라는 뜻보다는 '나오다'란 뜻이 더 적절하다.
4]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분명 육적 장자는 홍사를 맨 '세라'였지만, 성경에 나타난 실제적이고 영적인 장자는 '베레스'이다. (46: 12).
* 대상 2: 4 -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주었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즉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패륜(悖倫. 이것은 인간의 윤리에 의한 판단일 뿐이다.)에 의해 출생한 베레스가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될 줄은 유다 자신도 뜻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부패함을 단적으로 대조시켜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성도 역시 하나님의 특별 은총으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한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다.
* 말 3: 16 -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 눅 10: 20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유다와 다말과의 관계를 통하여 영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 참고 자료로 살펴보았다.12절의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영적 의미를 깨닫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