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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8월 27일, 승문원 서리의 고목이 휴가를 내고 쉬고 있던 상주 집에 도착해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빨리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고목은 여느 때와 달랐다. 승문원 고위 관원이 재촉하는 내용이 아니라 동료들이 빨리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분관(分館)을 해야 하는데 권상일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배경이야기◆ 과거급제자의 분관
분관은 과거 합격자를 승문원, 홍문관, 교서관에 나누어 배치하는 일을 말한다. 선임 참하관에게 있어서 분관은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기 후임을 자기가 선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승문원의 선임 참하관이었던 권상일도 자기 후임을 올해 과거 급제자 중에서 선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규례가 있었다. 선임 참하관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공론이 모아진 뒤에야 선발이 가능했다. 그런데 권상일은 휴가를 내고 고향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선정 장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권상일이 빠지면 불가능하므로 결국 유일한 방법인 칭병을 통해 위임할 수 밖에 없었다. 합법적으로 권상일이 빠진 상태에서 분관이 진행될 듯도 싶었지만, 다시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선임 참하관 사이에 이견이 발생한 것이다. 일부 동료 관원이 특정 급제자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영의정을 지냈던 정태화의 증손이었던 정석삼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만 과거 시험에서 이름이 드러나는 일로 헌부의 탄핵을 받은 상황이었다. 결국 분관은 파행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고 다른 관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상일이 올라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려야 했다. 원문정보◆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신묘년(1711, 숙종 37) 8월 27일 승문원 서리의 고목(告目)을 보니, 바야흐로 분관(分館)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동료들이 날더러 올라오라는 일이었다. 병으로 가지 못하는 뜻을 배지[牌旨 : 위임장]를 작성하여 보냈다. 이는 분관할 때 동료 관원이 비록 한 사람이라도 참여하지 않으면 개좌(開座)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병 때문이라는 배지를 받은 뒤에 모여서 개좌하는 것은 승문원의 규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9월 작음 9월 1일 정해 맑음. 무이서실(武夷書室)이 새로 지어져 제영(題咏)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나에게도 함께 화답할 것을 요청하여 병중에 한 수를 써서 보냈다. 무이 서당 편액이 좋으니 武夷堂扁好 여기서 주문공을 경모하네 此地景朱文 강학은 대학 장구가 남아있고 講學遺章句 명륜은 군부가 먼저이네 明倫首父君 강은 굽이쳐 무이 구곡을 통과하고 江回通九曲 봉우리는 끊어져 쌍문을 열었네 峰斷闢雙門 장수하는 뜻 귀중하게 지니고 珍重藏修意 바라는 것은 뭇 성인들이네 希之卽聖群 9월 5일 구계(九溪) 상주(喪主) 사촌이 왔다. 장사 날짜는 10월 10일로 정하였고, 장지는 다인(多仁) 선영으로 정하였다. 먼 곳이어서 상여가 가기에 아주 곤란하여 나에게 용궁현(龍宮縣)의 연정(烟丁)을 얻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9월 10일 영주 사촌 송후(宋后)가 찾아왔다. 9월 13일 사촌 송후(宋后)가 돌아갔다. 9월 17일 보가리(保家里) 김씨 어른이 서울로 가기에 강사언(姜士言)에게 안부 편지를 부쳤다. 이는 근래의 분관(分館)에 대한 일을 알고 싶어서이다. 9월 18일 들으니, 관찰사에 이의현(李宜顯)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9월 20일 용궁(龍宮) 현감을 만나러 가서 군정(軍丁)을 요청하였는데, 허락을 얻어 다행이다. 한사득(韓士得)은 서울에 가고 없고 그의 아우 덕항(德恒)만 만나 보았다. 전적 홍도달(洪道達) 어른이 마침 와서 만나보니 매우 위로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말미를 얻어 며칠 전에 집에 왔다고 한다. 길을 둘러 무이(武夷) 두 빈소에 조문하고 처갓집에서 잤다. 9월 21일 집에 돌아왔다. 9월 22일 들으니, 고옥여(高沃汝)의 장사 날짜가 2□일이라 한다. 그의 어른은 병이 더욱 위독하여 틀림없이 여러 용구를 마련할 길이 없을 것이니, 매우 참담하고 가련한 일이다. 9월 2□일 무이(茂李)에 갔다. 저곡(渚谷) 어른 모자(母子) 두 장사가 내일이기 때문이다. 9월 2□일 병으로 호상(護喪)을 하지 못하고 남아서 반혼(返魂)을 보았다. 9월 2□일 돌아오는 길에 구고(九皐) 고씨 어른을 앓고 있는 장소에서 뵈었다. 증세가 아주 위중하였다. 비록 나를 보고 조금 말은 하였으나 회복될 가망은 없어보였다. 옥여(沃汝)도 어제 묻혔으니, 닿는 곳마다 마음 아프고 불쌍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10월 큼 10월 1일 병진 맑음. 10월 2일 강사언(姜士言)의 답장을 받았다. 분관(分館)은 풍랑으로 한 번 사사로이 모인 뒤에 아직도 다시 거행하지 못하고, 내가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거행하려 한다고 한다. 이는 사사로이 모였을 때, 강사언과 권무경(權懋經)이 정석삼(鄭錫三)을 완강하게 거절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풍파가 크게 일었기 때문이다. 정석삼은 죽은 재상 태화(太和)의 증손으로, 회강(會講) 때 자호(字號)를 바꾼 일로 청의(淸議)에서 배격되었으나, 지금은 소론의 권문세족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10월 4일 들으니, 구고(九皐) 어른이 별세하였다고 한다. 매우 애통하다. 상가에 가서 호상(護喪)하였다. 10월 5일 상가에 가고자 하였으나 제사가 머지않아서 가지 않았다. 10월 9일 대송(大松) 선영에 갔다. 송소(松巢) 선조의 상순(上旬) 묘사를 우리 집에서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10월 10일 이계(伊溪)의 여러 친족이 모두 모였다. 철곡(鐵谷) 종조와 종숙도 왔다. 제사를 무사히 지내고 그대로 머물러 잤다. 10월 11일 구계(九溪)에 왔다. 내일이 발인인데 비로소 빈소에 곡을 하였다. 슬픈 회포에 더욱 견디기 어렵다. 10월 12일 호상(護喪)하고 유계(柳溪)에 오니 몸이 아주 불편하여 망정(望亭) 족조 댁에 들어가서 조리하며 누웠다가 날이 저물어서 집에 돌아왔다. 가친께서는 중도에서 영호(迎護)하기 위하여 이미 출발하셨다. 10월 1□일 가친과 작은 아버지께서 다인(多仁) 장지에서 돌아오셨다. 10월 20일 안기 찰방(安奇察訪)의 편지를 받았다. 모레 감영으로 길을 나서서 관찰사를 만나 말미를 얻어 본가로 돌아가서는 한 달을 머무를 예정이라고 한다. 또 일직(一直) 김씨 아저씨의 편지를 받았다. 편안하다고 하니, 매우 위로되고 다행이다. 10월 22일 통성산(通聖散)을 열 첩 복용하였더니 조금 효험이 있는 것 같다. 10월 25일 승문원 서리의 고목(告目)을 보았는데, 올라오라고 독촉하는 일이었다. 이는 분관(分館)이 지체되어 동료관원들이 반드시 나와 함께 끝없는 풍랑을 헤쳐 나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 이함경(李咸卿)이 다음 차례로 조사(曹司)의 일을 담당할 예정인데, 국가에 일이 많을 때 자기만 혼자 잘나서 고생하고 싶어 하지 않고, 강계주(姜啓周)는 상피해야할 제조가 있어서 파면되기를 도모한다고 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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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선 관청의 행정이 상당히 민주적임을 알수 있는 대목이네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