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행정조직은 1995년 3월 광역시로 바뀌면서 8개구와 2개군으로 새로이 정비되었다. 최근 인천가치재창조 차원에서 역사성을 살린 구의 명칭으로 바꾸자고 하는 기초자치단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수차례 걸친 행정구역의 확장이 원인으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구의 명칭이 불합리하다면 개선해야 한다.
|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1888년 9월19일 상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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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으로 인구감소로 구의 명칭이 소멸되거나 통합될 수도 있고 언젠가 또 바꾸어야 하는 시기가 올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구 명칭이 절대 불변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도시가 성장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구’라는 구 명칭은 광주시를 제외한 모든 광역도시에 있는 기초자치단체이다. 중구는 대부분 그 도시의 행정, 경제, 교통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도시광역화로 도시기능이 약화되었고 시가지도 물리적으로 노후화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천시 중구는 1989년 옹진군 영종∙용유면이 포함되면서 100년 만에 가장 빠르게 변화했다. 공간적으로 기존 육지보다 6배나 큰 섬을 보유하게 되었고, 기능면으로는 기존 항만, 철도에 새로이 영종 공항이 들어와 복합운송도시가 되었다. 한때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고 구월동 신청사시대가 시작되면서 주요시설 이전 및 인구감소로 이어져 낙후되어 가는 대표적인 구시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100년의 개발역사를 가진 구시가지도 재개발에 의한 정비시대에 와 있다.
| ▲현재 위성영상지도위에 1888년 각국조계지도를 겹쳐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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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는 1883년 인천 제물포를 개항하면서 시작된 도시이다. ‘제물포’는 19세기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의 올림푸스 호텔 근방으로 짐작된다. 이 제물포에 부두시설을 가장 먼저 설치하고 외국인과 각종 물건이 들어오고 나갔다. 외국인 거류지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응봉산 밑자락에 지금의 중구청사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개항장에는 일본인(1883.8), 청국인(1884.4), 미국∙독일∙프랑스∙영국 등 구미 외국인(1884.10)이 거주하는 구역이 따로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이중 구미외국인 거류지에서는 화재에 약한 목조가옥이나 초가집은 짓지 못하게 했다. 건물벽체는 반드시 벽돌이나 석재 또는 철재를 사용하고, 지붕은 기와를 사용하도록 규제했다.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건물규모에 따라 일정 금액의 공사비를 정해 두었다. 또 도로와 가로등, 청소 등은 누가 건설하고, 관리하며 비용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를 정했다. 유리, 시멘트, 석회, 철 등 건축용 자재 및 카펫, 벽지, 침대, 소파, 벽난로 등 각종 근대적 생활용품도 인천세관을 통해 유입되었다. 인천에 있었던 영국인 경영의 홈링거양행(Holme Ringer Co.), 미국인 경영의 타운센드양행(Townsend Co.), 독일인 경영의 세창양행(E.Meyer & Co.) 등 수입상의 역할이 컸다.
| ▲1888년 서울에서 각국 영사들이 합의한 인천 제물포 각국조계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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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조계지도(1888.7)를 보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대지는 도로로 구획하여 대지의 모양과 도로선을 반듯하게 설계했다. 영사관, 세관, 감리서 등 공공청사와 공원(지금의 자유공원), 외국인 묘지, 부두시설 등 도시시설도 지정되어 있다. 각국조계지도는 인천 최초의 도시계획도라 할 수 있다. 이 도시계획도를 그린 기술자는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 1860~1921)이다. 그는 개항할 때 입국하여 인천세관의 건축, 토목기술자로 근무하면서 부두축조, 제물포구락부, (구)러시아영사관, 독립문, 덕수궁 중명전, 손탁호텔 등을 설계했다. 계획에 의해 조성된 개항장은 지금의 중구를 구성하는 골격으로 남아있다. 각국조계지도는 100년이 지난 지금의 중구 관내로 당시의 도시경관을 비교, 추정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수립된 서구식 계획도시였음을 증명하는 귀중한 역사∙문화 자료이다. 우리나라 각 도시에서 도시계획이 시행된 것은 일본보다 15년이 늦은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 제정 이후이다. 인천에서도 1936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1937년 도시계획이 처음 수립된다. 개항장이었던 중구(영종도 제외)와 동구는 1930년대 까지 인구 10만 명이 모여 사는 중심지였다.
글· 사진 김용하 전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원, 도시계획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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