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을사사화(乙巳士禍)
사화 후 조정에는 두 파가 갈라졌다. 사림측은 이언적(李彦迪) 이행(李荇) 정광필(鄭光弼)이 있고 소인측은 김안로(金安老)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이 서로 결탁하여가지고 유파(儒派)를 공격하였다. 이때 중종의 재취(再娶)인 장경(章敬) 왕후윤씨의 소생인 곡(峼)이 세자가 되고 삼취(三娶)인 문정(文定) 왕후 윤씨에게도 왕자 항(峘)이 생하였다.
문정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자기의 생질(甥姪)로 세자를 삼으려 하고 세자의 외숙 윤임(尹任)은 이를 반대하여 조정에 양파가 대립하니 사화가 변하여 외척(外戚)의 다툼이 되니 사람들은 이 틈바구니에 쏠려 들어가 많은 참화를 입었다.
왕이 39년에 하세하시고 세자 곡(峼)이 위에 오르니 곧 인종(仁宗)이다. 부왕의 병환을 모시고 주야고 시탕(侍湯)하여 우고(憂苦)로 인하여 병이 되었다. 시의가 들어와 진찰하기를 허락지 않으시고 왕이 대신을 부르시고 짐의 병은 어찌할 수 없으니 왕위는 동생 경원(慶源)대군 항(峘)에게 전하시오 또 짐이 조광조의 일을 잊을 수 없으니 그 관작을 회복하고 현량과를 다시 세우라 부탁하시고 운명하시니 즉위한지 8개월이다. 국상을 반포함에 영항 백성들이 듣고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분곡(奔哭)하더라.
유교를 따라 경원이 즉위하니 곧 명종(明宗)이다. 모후 문정왕후를 높여 대왕대비라 하고 왕이 나이 12세로 어림으로 왕대비 수렴(垂簾)하시고 정사를 들으시다. 이때 윤원형이 정권을 잡음에 전에 자기를 반대하던 윤임(尹任) 일파를 모조리 잡아 주육 혹 유배하니 이로 인하여 윤임의 세력이 홀지에 떨어지고 원형의 세력이 떨치었다. 이때에 대윤소윤이란 이름이 있으니 대윤은 윤임이오 소윤은 원형이다.
원형이 윤임의 당을 다 구축하기 위하여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을 결탁하여 4인이 광화문 밖에 모여 정원에 나아가 상소하되 윤임이 오래 다른 뜻을 품과 유관 유인숙 등과 결탁하여 음모를 꾀하는 형적이 있다고 고하니 왕은 놀라 육경(六卿)을 모아 의논하고 드디어 윤임과 유관 유인숙을 원지로 유배하였다가 죽이고 계림군(桂林君) 유도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계로 잡아 죽이고 왕 2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이상한 글을 올리였는데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에 여행할 제 그 벽상에 한글을 발견하니 그 뜻은 여왕이 우에서 정사를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은 아래서 권세를 잡으니 나라 가망하기 쉽다 어찌 한심치 않으리요 하였다. 이것은 을사(乙巳) 옥에 관계있는 자의소위라 하고 이 일을 다시 추궁하여 봉성군(鳳城君) 완(岏)과 송인수(宋麟壽) 이약빙(李若氷) 등을 죽이고 권발(勸發) 이언적(李彦迪) 백인걸(白仁傑) 유희춘(柳希春) 등을 유배하니 이것을 을사사화(乙巳士禍)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