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주교 압박
천주교에 대한 국령이 역대로 오며 극엄하다가 철종 때에 와서 금령이 좀 늦추어져 별안간 교도가 증가하여 국내에 변만 하였으나 정부의 정식허가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더니 영국은 국기모욕사건으로 불국은 선교사 살해사건으로 영불연합군이 청국과 싸워 청국이 여지없이 실패하여 황제는 열하(熱河)로 피하고 아라사 공사의 소개로 화약이 성립되어 향항(香港)은 배상으로 영국에 내어주고 불국에도 이권을 주게 하고 아라사는 화약 소개의 공로로 흑용강 이북의 땅을 아라사에 주기로 허락하여 우리나라와 두만강을 격할 뿐이고 아라사는 노서아라고 칭하는데 노국의 극동경영이 우리나라와 점점 가까워짐으로 조선은 적지 않은 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태왕 즉위 2년에 로인(露人) 수명이 두만강을 건너 정홍부에 와서 무슨 글을 주고 갔다. 그 글의 내용은 노국과 통상하자는 말이고 삼 개월 내로 회답하여 달라는 것이다. 부사 이석영(李錫英)은 이것을 함경 감사에게 보고하여 이 급보가 경성에 이르러 일대 충동을 주었다. 집정 대원군도 어이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대원군의 가정에는 천주교 교도가 왕래하여 부대부인께서 우리 상감마마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의뢰한 적도 있고 상감 어리실 때 유모로 있던 여자도 천주교인이오 그 문하에 출입하는 남종삼(南鍾三) 김면호(金勉浩)도 천주교이다. 대원군이 로국 문제로 근심하는 것을 알고 교도들이 로국을 거절할 방침을 말하고 마지막은 천주교를 의뢰하여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상서하였더니 대원군이 글을 보고 천주교 주장하는 불국 선교사 베루누를 좀 보자 하는지라.
그때 베루누는 시골 여행 중인 고로 제시간에 오지 못하였더니 대원군이 노국 문제가 그리 염려되지 않은 것을 알고 구태여 천주교를 의뢰할 것 없다고 생각하고 또 조두순 김병학의 상소로 인하여 서학의 불가를 말함으로 대원군도 역시 교도들의 주장이 비위에 맞지 않는 고로 도리어 증오감이 생겨 고종 3년 병인 정월에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려 교도들을 압박하고 잡아 죽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죽었다.
그때 김면호(金勉浩)는 도망하고 남종삼은 잡혀 죽고 불국선교사 6인도 죽었다. 이때 교도의 죽은 자 대략을 들면 대개 20만이라 한다. 이 무죄한 생명 20만이란 교인을 이렇게 참혹하게 죽였으니 하늘이 무심할리 없다. 그 집 운수가 국운과 함께 멸망하였으니 능히 하늘을 거스릴 자 뉘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