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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1-6절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순히 맹인 된 자로 하여금 보게 하는 육신적인 차원이 아니라, 영적으로 맹인 된 자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심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데, 누가 심판의 대상인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기도 하시는데, 심판은 곧 구원이라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온 것은 한편으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기 위해서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보는 자들로 하여금 맹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의 뜻은 단순히 맹인 된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처럼 육신에 제한되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의 눈을 밝히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요, 반면 영적으로 밝히 보고 있다고 하는 자들은 사실 어두운 자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당시 종교지도자로 있던 바리새인들이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반응하기를 우리도 맹인인가, 만약 맹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더욱 분명하게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었겠지만,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죄인 됨을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을 통해 참 목자와 거짓 목자에 대한 대조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시게 되는데, 우선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여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다음 주 살피게 될 7절 이하를 통해 나타나지만, 누가 참된 목자고 누가 거짓된 목자냐 할 때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자가 참된 목자요, 그리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목자가 아니라 거짓된 목자라는 것입니다. 이때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 혹은 양의 목자와 절도 혹은 강도에 대한 분별을 무엇으로 하느냐?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가느냐로 나눠지게 됩니다.
여기서 양 우리의 문의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7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그러니까 참된 목자는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자인데, 양의 문이 누구냐 할 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으면 누구도 참된 목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 말씀을 하시느냐? 당시 종교지도자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가 참된 목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밝히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었을 것이지만 스스로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요 무지한 자임을 인정해야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 영적으로 보는 자요 영적으로 아는 자로 바뀔 수 있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 스스로 목자라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결코 참된 목자일 수 없음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그리스도의 양 떼를 훔치고자 하는 절도요, 강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누가 참된 목자냐?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그가 중심이 되도록 가르치는 자가 참된 목자입니다. 물론 예정론 입장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조차 선택의 수단으로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보면 1항에서부터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 왕, 그의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 만유의 후사, 세상의 심판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고 정하시길 기쁘게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에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한 백성을 그리스도의 씨가 되도록 주셨다고 하면서, 정하신 때가 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속 받고, 부르심 받고(소명), 의롭다 하심을 받고(칭의), 거룩함을 받고(성화), 영화로움을 받도록(영화)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중보자와 삼중직, 교회의 머리되심과 성육신, 구원의 서정에 이르기까지의 전 내용이 이미 영원한 예정의 내용임을 확고하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도르트 회의의 결정 내용처럼 구원의 길과 방편으로서 ‘선택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예수 그리스도를 원인으로 돌리고자 한다면 구원을 위한 수단과 방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질료적 원인’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원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근원적인 원인은 성자를 포함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으로만 있습니다.
이런 내용에도 불구하고 참된 목자냐, 아니면 거짓된 목자냐를 분별하는데 있어 그리스도가 시작이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거짓 목자일 수밖에 없는가?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고 그의 하신 일에 대하여 시비를 걸 뿐만 아니라 적대시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전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이 그들에게 있고 기록된 성경을 가르치면서 참된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 안에 없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사용할 뿐이지 그들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거짓 목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하여 칼빈은 이 경고는 어느 시대에나 매우 유익하다고 말하면서 이리가 목자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교회에 더 파괴적인 질병은 없다고 경고합니다. 칼빈 당시만 하더라도 가톨릭의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중보자란 말을 하면서도 또 다른 중보자를 세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지만, 그들은 수없이 많은 성인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까지 동원하여 구원에 이바지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헌물, 행위, 금식, 기도, 고행 등을 통해서도 구원에 이바지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양들에게로 가는 양의 목자라 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해 구원을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방금 언급했던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로움과 거룩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골2:3).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함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양들에게 가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그리스도에게 돌리지 않는 것,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것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것, 이런 모든 내용이 참된 목자가 아니라 거짓된 목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내용에 대하여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양 우리 안에 있는 양이 절도요 강도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참된 목자가 있는가 하면 거짓된 목자가 있는 것처럼 교회라는 말에도 참된 교회가 있는가 하면 거짓된 교회도 있다는 데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지상에 있는 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 교회라는 말은 존귀한 명칭입니다. 택자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존귀한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 있는 교회 가운데는 참된 교회가 있는가 하면 거짓된 교회도 있습니다. 때문에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에 대하여 분별해야 함과 동시에 우리는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에 대해서도 분별해야 합니다.
다시 2절을 보시면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시는데, 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더불어 양의 목자, 즉 참된 목자는 누구냐? 당시 거짓 목자가 바리새인을 비롯한 당신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할 때 그와 반대편에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절로 가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러니까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이지만, 그리고 양의 목자라고 할 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말하는 자이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말씀 사역자에게 돌아가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말씀 사역자의 머리는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된 목자요, 내가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양 우리의 문도 되시고, 양을 인도하는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이기도 하신 겁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문지기가 누군가에 대한 몇몇 견해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모든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칼빈의 해석을 따라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즉 문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열고 닫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보내신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당할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의 수단 혹은 구원의 원인이라고 할 때 질료적 원인으로 삼으신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자기 양들을 들여보내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내용은 양은 그의 음성, 다시 말해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5절에서도 나오고, 또 나중에 27절에서도 언급이 됩니다. 그러니까 목자의 양이라면 양은 그리스도의 음성,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 목자도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둔다면 양은 참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말씀인지, 무엇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말씀 사역자로 세워졌다면 누구의 음성을 들려줘야 하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들려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오직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양 떼라면 바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의 양 떼라고 하는 자들이 그 말씀 듣기를 거절한다면 그 양들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양 떼라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에게 한 백성을 그리스도의 씨가 되도록 주셨다면, 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혹 지금은 양 우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을 수 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1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속 받고, 부르심을 받고(소명), 의롭다 하심을 받고(칭의), 거룩함을 받고(성화), 영화로움을 받도록(영화) 만드실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하시는가? 그의 말씀으로, 그의 성령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 사역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 무엇만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교훈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되는 가르침만 가르쳐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고린도전서 3장의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말씀으로 말씀 사역자는 결코 주체가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체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그리스도라는 터를 잘 닦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을 터로 하여 교회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서신서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만큼 사도 바울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지만 거기에는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터 위에 다른 이가 와서 건물을 지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건물을 지을 때 조심해서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터와 어울리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이어지는 내용에서 말하는데, 금 은 보석 그리고 나무 풀 짚이 그 내용입니다.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와 풀, 짚으로 건물을 짓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금과 은과 보석, 그리고 나무와 풀과 짚은 무엇인가? 칼빈은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터 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가르침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건물이고, 터 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되지 않는 가르침, 불에 타서 사라질 가르침이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물을 지은 사람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들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터 되신 그리스도 위에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불에 타서 없어질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가르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있다고 할 때 영원토록 있는 그 말씀에 합당한 것만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자들이 참된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양 떼는 바로 이런 자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가르치는 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지, 나무와 풀 그리고 짚으로 건물을 짓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지, 사람의 전통이나 인간의 소견 혹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듣는 것에 우리의 귀를 열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의 양 떼입니까? 그리스도의 양 떼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의 양 떼입니까?
그런데 양만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게 아닙니다. 목자 역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즉 목자는 자기 양이 누구인지 하나하나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 인도하여 내십니다. 이때 말씀 사역자는 누가 그리스도의 양 떼인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상 교회에 속해 있지만 거기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의 구분을 말씀 사역자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고는 하지만, 100%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교회 밖에 있지만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처럼 잃어버린 양으로 있는 자도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누가 그리스도의 양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십니다. 아시기에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십니다. 불러 인도하여 내십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처럼 그가 양 떼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십니다(시23:2). 그러나 지상의 교회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양 떼라 할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도 있습니다(시23:4). 하지만 목자 없이 다니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목자가 그리로 인도하여 갈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 떼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주의 양 떼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주의 양 떼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로 요한복음 9장의 내용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 맹인이었던 자가 눈을 뜨고 이후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일은 그가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 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9장 1절에서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고 할 때 결코 우연히 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자들이 묻기를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요9:2)라고 하였을 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자기 백성임을 아실뿐만 아니라 그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신 모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있어 오랜 시간동안 고통과 비참함 가운데 있었지만, 영원한 예정을 따라 그는 택자로 있었고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는 아시되 때가 되어 그를 부르시고자 하실 때 그에게로 가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뜨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모태신앙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 믿게 되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있었다면 비록 양 우리 밖에 있었던 때가 있었다 할지라도 중보자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르신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때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은 모르신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으며, 그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십니다. 부르시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십니다. 믿음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전가 받게 하시고, 또한 그런 자로서 그가 친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구약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있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요, 참된 목자라고 생각했지만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를 믿지 않음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님을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였습니다.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의 말씀이 자신의 목자의 음성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가르침 역시 그리스도와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 떼를 인도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로 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의 표현으로 하자면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마23:15). 바로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절도요, 강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보시면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주님의 양 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양의 우리에서 나옵니다. 이때 누가 앞서 가느냐? 목자 되신 그리스도가 앞서 갑니다. 그러면 그 뒤를 양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게 됩니다. 그가 가는 길이면 계속해서 그를 따르게 됩니다. 양 스스로가 이 길을 가고자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있는 곳을 따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자가 누구인지 그 음성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은 우리의 능력에 달린 일이 아닙니다. 본성으로 하자면 우리는 누구도 목자의 음성을 알지 못합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자들이었습니다(사53:6). 그런 우리에서 성령을 주셔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새 마음을 주심으로 참 목자의 음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음성이 있는 곳으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반면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습니다. 따라가면 그 마지막은 지옥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음성을 멀리합니다. 혹 오라고 말하더라도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망합니다. 타인의 음성에 대하여는 멀리합니다.
오늘날 인터넷 방송을 보편화되어 틀면, 검색하면 여러 사람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거짓 된 목자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내용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가르침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명하다는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예정론을 철저히 부인하는 분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된 적도 있습니다. 개혁주의가 신론적으로 생각한다고 할 때 예정론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정론을 부인하더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라 할지라도 그런 그의 음성이 그리스도의 음성과 일치되는 음성인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관련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즉 그들을 통해서도 진리가 가르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참된 목자로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요, 또한 바리새인과 달리 선한 행위로 있다 할지라도 그의 신학 전체가 개혁파의 내용이 아니라 알미니안적이고, 반펠라기안적이고, 펠라기안적이고, 또 그와 같은 이단적인 내용이라면 이런 자들의 가르침은 결코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멀리하셔야 합니다.
결국 본문을 통하여 주께서 알리고자 하신 바는 참된 목자가 있는가 하면 거짓된 목자가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양 떼라면 참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참된 목자의 음성인가?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참된 목자입니다. 양의 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자만이 참된 목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총체임을 말하는 자,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고 전하는 자, 그가 참된 목자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의고, 그리스도가 나의 거룩이고,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모든 것 되신다는 것을 말하는 자가 참된 목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양 떼라면 참된 목자의 음성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분별은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여 주심으로 가지게 되지만, 성령 하나님의 조명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게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때문에 말씀에 대한 지식,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지식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음성을 말한다고 해서 실제 그리스도께서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살아나시고,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장차 우리를 위해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금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육체로 임하시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께서 친히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하여 비상직분으로서 사도를 세우셨고, 오늘날 목사를 세워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 음성이 그리스도의 것이 맞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음성이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고 있는지, 아니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별하여 그리스도의 음성이 맞다면 우리는 그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타인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타인의 음성이 그리스도의 음성보다 부드러울 때가 있습니다. 타인의 음성이 그리스도의 음성보다 귀를 솔깃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되는(시23:6) 그런 음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이 때로는 강하게 들릴 수 있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음성이 때로는 건조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 음성만이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귀는 바로 그 음성에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가?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인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물을 때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1-12) 비유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의 양 떼는 받아서 넉넉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있는 것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의 비유는 사실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도, 그리고 그들의 실제 삶을 통해서도 익숙한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 중에도 인용했지만 목자와 양에 대한 내용은 시편 23편을 통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자요 그의 백성이 양으로 비유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선지서들도 보면 종종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이사야 40장 11절, 예레미야 23장 11절, 에스겔 34장 1절과 2절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이라는 짐승은 이스라엘 사람의 실제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만큼 친숙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오늘 본문이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먼 원인, 좀 더 근원적인 원인으로 보자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양 떼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음성을 들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양 떼가 아니가 때문에 말씀하셔도 그의 말씀에 대하여 부드러운 마음으로 받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맹인인가?” 반항하는 자세로 대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알고 있어도, 심지어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자로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 가운데서도 주의 양 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 말미에 언급된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모든 부류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의 음성이 하늘의 음성이요, 참된 목자의 음성일지라도 저들 편에서는 타인의 음성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럼 누가 그들의 목자로 있는가?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사실은 그들이 바알세불을 자신의 목자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 배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분의 양 떼라면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의 음성만으로 만족해야 하고, 그의 음성만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간혹 개혁주의와 관련된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인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용하는 사람이 개혁파 입장, 장로교 입장이 아닌 사람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인용한 말 자체가 틀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학 전체가 개혁신학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장로교 입장에 있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굳이 인용해야 하는가? 인용한다면 우리 쪽에 있는 사람들로 할 수는 없는가? 이런 생각을 간혹 하게 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많은 목사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지만, 이런 말씀 저런 말씀 많이 듣는 게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쪽의 내용만 채우고 채워도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 자신의 안위 등을 생각하는데, 굳이 이런 쪽의 내용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음성만 들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되는 음성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의 음성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모든 말씀, 이것만을 우리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겨야 합니다. 여기에 참 복이 있으며, 여기에 진정한 형통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