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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는 임인생이고 자(字)는 효직(孝直)이며, 경오년 진사에 장원하였다. 천(薦)으로써 참상(參上)직에 특배(特拜)되어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가 되었다. 을해년에 급제하여 벼슬을 대사헌까지 하였다. 능성(綾城)으로 귀양갔다가 곧 사사(賜死)되었다.
기묘년 8월 정해일에 주강(晝講)을 하다가, 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웠고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였습니다. 도학에 침잠하여 문구(文句)에 일삼지 않았으며,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습니다. 한 시대 사람이 많이 헐뜯고 나무라서, 광자(狂者)라 하거나 화태(禍胎)라 하여 붕우들도 절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때를 당했으나, 입지(立志)한 것이 매우 독실하여서 조금도 흔들리거나 굴하지 않았습니다. 반정(反正) 초기에 그 학문으로써 후생을 인도하니 그를 따라서 감발(感發)한 자가 많아 비록 필부였으나 사류(士類)를 도야하고 성취한 공이 조정에 미쳤습니다. 폐조(廢朝) 때 판탕(板蕩 국정이 문란함)한 뒤에 사기(士氣)를 붙들어서 고동(鼓動)시켰고, 신이 약간 개발한 것도 모두 이 사람을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음애일록(陰崖日錄) : 조효직 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죽었으니, 아, 사람이 죽었다 하는데,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널리 배우고 힘껏 행하였다. 잇달아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청현직 벼슬을 지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남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고 도에서도 이탈하지 않았으니, 사림(士林)이 다 추중(推重)하였다. 국가가 중흥할 운수를 당해서 조야에서 유신(維新)하기를 바랬다. 까닭에 공은 홀로 침착하게 건의하여 선왕(先王)의 법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스스로 세상에 흔하지 않은 지우(知遇)라 하여 교화할 조목을 밟지 아니하고 등용되었는데, 특별히 공을 대사헌으로 제수하여 군중의 바람에 부흥하였다. 기강(紀綱)을 파악하여 명령하면 행하여지고 금하면 그쳤다. 그러나 후진 여러 현사(賢士)는 넓고 기(氣)가 날카로워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점차적으로 개혁함이 없었으므로 험한 세정(世情)에 저촉되어 인심이 크게 어그러졌다. 공이 신 대용(申大用 신상(申鏛))ㆍ권중허(權仲虛 권벌(權橃))와 함께 신(新)ㆍ구(舊) 두 사이를 조화시켜서 파국(破局)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신ㆍ구가 서로 미워하여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사람의 꾀한 것이 착하지 못했음이랴. 아, 옳고 그름이 비록 한때는 혼돈했으나 정상(情狀)이 후일에는 반드시 드러날 것이니, 어찌 반드시 운운하리오. 머리 말과 편(篇) 끝은 음애전 가운데에 자세히 적혀 있다.
척언 : 회령(會寧) 성 밑에 살고 있던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速古乃)가 가만히 먼 곳 야인과 공모(共謀)하고 갑산부(甲山府)에 들어와서 백성과 가축을 많이 노략해 갔다. 무인년에 남도 공사(南道共使)가 밀계(密啓)하기를,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잠입하여 어렵(漁獵)하면서 왕래하나 무리가 많아서 잡기 어렵습니다. 불시에 군사를 풀어 덮쳐 잡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3공과 병조와 변경(邊境) 일을 아는 재상을 불러서 논의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것을 징계하지 아니하면 성 밑에 살고 있는 야인들도 잇달아 반란할 것입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감사ㆍ병사(兵使)와 함께 적을 잡아서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먼저 비밀 교지(敎旨)로써 본도(本道)에 알리고, 또 병기ㆍ갑옷ㆍ기계 따위를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지방(李之芳)을 보내도록 명하고, 특히 어의(御衣)와 활ㆍ화살을 하사하여서 즉일 하직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서 소대(召對)하고 이어서 전송하는 잔치를 벌였다. 3공 및 여러 신하가 좌우에 시위(侍衛)하였는데, 나는 병방 승지(兵房承旨)로서 참석하였다. 내시가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와서 입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곧 윤허가 내리니 조광조가 나와서, “이번 일은 바로 도둑과 같은 짓입니다.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당당한 큰 나라에서 요망한 오랑캐를 잡기 위해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는 일을 신은 적이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우에서 진언하기를, “병가(兵家)에는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있고, 오랑캐를 제어하는 데에는 경법(經法)과 권도(權道)가 있습니다. 여러 의논이 이미 같았는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 “밭 가는 것은 농노(農奴)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고, 베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서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신의 말을 청종(聽從)하기를 청합니다.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예로부터 이러한 바, 비록 이치에는 근사하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그 지방으로 보내려던 것도 파하였다. 조광조는 3품관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또 대간이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여러 달이 지나도록 윤허하지 않았고, 홍문관에서도 날마다 논계하였다. 하루는 조광조가 부제학으로서 스스로 소장(疏章)을 짓고 동료를 거느려 정원(政院)에 나아가서, “오늘도 이 일에 대해서 윤허를 받지 못하면 집으로 물러갈 수 없다.” 하고, 날이 저문 뒤에 대간도 모두 옥당(玉堂)에 몰려와 머물러 있었다. 계하는 것이 닭이 울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승지들은 모두 책상을 의지하여 깊이 잠들었으니, 모두 염증(厭症)과 괴로움을 느꼈다. 대내(大內) 엄밀한 곳에 중사(中使)가 밤새도록 출입하면서 번거로이 계하여 그치지 않았으니, 임금인들 어찌 듣기를 싫어하지 않았으랴.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것은 반드시 충성과 착한 도로써 임금의 마음과 맺고, 임금의 마음이 트인 곳으로부터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토록 핍박하고도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 조광조가 패한 뒤에 임금은 곧 소격서를 다시 세우도록 명하였다. 또 대사헌 조광조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하였는데, 반드시 의리를 끌어 비유하고, 경전(經傳)에 종횡으로 드나들면서 말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딴사람은 한마디 말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었다. 비록 깊은 겨울이나 한여름이라도 한낮이 되도록 중지하지 않았다. 입대할 때에 한 말은 윤허받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함께 입시한 자는 매우 괴로워하고 모두 싫어하는 빛이 있었다. 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衙門)에 출사(出仕)하는 길에서 찬성(贊成) 고형산(高荊山)을 만났는데, 인사하지 아니하고 지나갔으므로 미워하는 자들이 이를 갈았다. 한(漢) 나라 《사기》를 상고하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되어서 마음에 승상(丞相)을 가볍게 여기고 만나서도 예를 갖추지 않았고, 장탕(張湯)은 어사가 되어서 매양 아침에 정사를 아뢰기 시작하여 해가 돋은 다음에 파하니, 승상은 자리만 지킬 뿐이고 천하 일은 모두 장탕이 결정하였다. 두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아니하나, 거만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다가 화를 취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군자가 처신하는 데 있어 공경하고 겸손하는 것이 복을 누리는 기초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참언(僭言)상사(上舍) 정사원(鄭士元)이 지은 것이다. : 김사재(金思齋)가 지은 척언(摭言)에, “정암(靜庵) 선생이 소격서를 혁파하는 일에 대해 계달(啓達)하기를 닭이 울 때에 이르도록 그만두지 않아서 임금의 듣기 싫어하는 뜻을 범했으니, 이는 간언을 할 때에 기미를 보아 점진적으로 하는 도리[納約自牖之道]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진 사람이 성의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 범연하게 상인(常人)의 마음으로써 요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저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당연한 도리로써 인도하고 지성(至誠)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힘쓸 뿐이니, 어찌 딴 짓을 헤아릴 것이랴. 만약 임금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요량하고 후일을 기다린다면 어찌 군자가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이루기에 급한 마음이겠는가. 선생이 중종(中宗)께 지우(知遇)하였을 때에,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선생의 한 말씀으로써 조정의 중론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임금에게 득의(得意)한 것이 오로지했다 할 수 있다. 소격서를 혁파하는 것도 또한 임금을 바루는 도리의 하나였다. 여러 달을 논계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은즉, 천의(天意)를 돌리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음에 있었다. 까닭에 선생은 임금을 공경하는 의(義)를 궁리하고 못다한 정성을 확충해서 여러 차례 계하여 그만 두지 않아 밤중에 이르니 정성이 마침내 천심(天心)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 복합(伏閤)할 때에 반드시 미리 재계(齋戒)하고 성심으로 하기를 생각해서 임금이 감동되기를 기대한 것이 정 부자(程夫子)가 진강(進講)한 뜻과 같았으니, 보통 사람이 능히 엿보고 측량할 바 아니다. 그 계사(啓辭)를 내가 보지는 못했으나, 반드시 임금의 한 점 트인 곳을 인해서 계발(啓發)한 것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였으리오. 옛적에 명도(明道 정호(程顥)) 선생은 소대(召對)했을 때 오시(午時)가 되어야 비로소 물러났고, 회암(晦庵) 선생은 조정에 있으면서 진강할 때와 주사(奏事)할 때에 말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선생의 한 바가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매양 소대할 때에 말을 그치지 않아서 딴사람은 한마디 말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었다.”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선생이 강독하기를 반복해서 임금에게 의리를 익히 알아듣도록 하며, 함양하고 훈도(薰陶)하여서 깨닫지 못하는 중에 성덕(聖德)을 성취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물며 임금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던 선생으로서, 자신이 아는 바를 다 말하지 아니하고 딴사람에게 미루는 것이 가하겠는가. 옛적에 이천(伊川) 선생이 진강할 때, 항상 그 문장의 뜻 외의 것을 반복하고 추리해서 밝히니 듣던 자가 탄복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한 바도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적신(賊臣) 남곤(南袞)이 화얼(禍孼)을 꾸며서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죄다 죽인 그 사건이 선생의 처사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이 하고는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 미워하는 자가 모두 이를 갈았다.” 하였으나, 소식(蘇軾)의 무리가 이천 선생을 원수같이 본 것이 정자가 미움받을 허물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가하겠는가. 소망지(蘇望之)와 장탕(張湯)의 일에 있어서도 또 어진지 어질지 않은지, 간사한지 바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한 말은 불합리함이 심하기도 하다. 학술이 밝지 못한 사람이 도학(道學)의 귀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상정(常情)으로 현인(賢人)을 논의한 것이 이에 이르렀는 바, 김공(金公)을 정인 군자(正人君子)라고 하는데 소견이 이와 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유 : 을해년 여름에 이조 판서 안정민(安貞愍)이 계하기를, “진사(進士) 조모(趙某)는 경술(經術)에 밝고 행검(行檢)이 있어서 성균관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니, 등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계자 격식(階資格式)에 구애되어서 보통 예(例)와 같이 참봉(參奉)으로 조용(調用)하면, 사림(士林)을 권장하기에 부족합니다. 육품(六品)의 준직(準職)에 제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여 곧 사지(司紙) 벼슬에 제수되었다. 이해 가을, 알성 별시(謁聖別試)에 응시하여 을과(乙科)에 첫째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으로 제수되었다가 감찰(監察)ㆍ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졌고,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어서는 대간인 권민수(權敏手)ㆍ이행(李荇)들이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은 잘못에 대해 탄핵하였다. 정축년에 수찬(修撰)에서 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역임하였고, 8월에는 전한(典翰)이 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사직하는 글에, “소신(小臣)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실지로 힘쓰지 못했던 까닭으로 식견이 나날이 공소(空疎)하여지고, 직임(職任)은 매우 무거우니 마음에 저절로 부끄러워집니다. 사사로 동료(同僚)에게,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다스림에 뜻이 있는데, 외람되이 시종하는 반열에 끼어 있으니, 어찌 스스로 편하겠는가. 물러가서 힘껏 배워 학문이 성취한 다음 다시 와서 벼슬하면 반드시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궁벽한 고을에 보임(補任)되기를 청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여가에 학술에 전심하다가 다행히 버리지 않으시고 수용(收用)하시면, 백성을 다스리고 학문을 이루는 데에 거의 양쪽으로 완전할 것이다.’ 하였으나, 소신이 생각만 하고 감히 우러러 계달하지 못 하였습니다. 전에 응교로 삼으시고 특별히 4품 계자에 뛰어올리실 때에 반드시 사면하고자 하였으나,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실행하지 못 하였습니다. 또 사사로 생각하기로는, ‘이 4품 관직에 3년 만 종사하면 국사(國事)를 거의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마는, 한 달 동안에 또 전한(典翰)으로 된 다음에는 사람과 벼슬이 합당하지 못하여, 전에 먹었던 생각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하는 바를 보는 것인데, 소신은 완성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은택을 입었으니, 어찌 그 직위를 무턱대고 차지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정월에 특별히 통정(通政)으로 올려서 부제학으로 제수하였고, 5월에는 동부승지로 옮겼다. 이에 우부승지 김정(金淨)이 진계(進啓)하기를, “조모는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성학(聖學 임금의 학문)을 보익한 것이 컸으므로, 중론이 모두 그 직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곳이니 진실로 사람을 가려서 맡길 것이요, 또 입시하여서 논란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 업무를 전적으로 맡는 것만 못합니다. 전하께서 조모가 경연관으로서 합당하다는 것을 참으로 아신다면 반드시 딴 관직에 이임(移任)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이 조광조와 임무를 같이 하는 것은 진실로 다행입니다마는, 경중을 헤아려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도로 임명되었다. 임금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문치(文治)에 뜻을 모았으므로 더욱 의중(倚重)하였다. 선생은 이에 세상에서 쉽지 않은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임금의 마음은 다스림을 내는 근본이니 근본이 바르지 아니하면 정체(政體)가 확립되지 못하고 교화를 행할 수 없다 하여, 매양 입대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생각하기를 오래하여 신명을 대하듯 하였다.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말한 것은 바른말 아닌 것이 없었다. 마음속에 온축(蘊蓄)된 것을 자세히 논하고 극진하게 말하였다. 혹 날이 저물더라도 임금이 모두 허심(虛心)으로 귀를 기울여 듣고 날마다 더 권장하였다.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도록 청하였고 속고내(速古乃)를 잡으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며, 선왕의 법을 밝혀서 차례로 거행하였다. 《소학(小學)》을 인재 양성의 근본으로 삼고 향약(鄕約)을 풍속 교화의 방법으로 하니, 백료(百僚)가 용동(聳動)하지 않는 이 없었고 사방에서 바람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무인년 겨울에 특별히 대사헌으로 임명되자, 온축된 의리가 바람을 내어서 풍속을 고동(鼓動)하였다. 염치를 숭상하고 병이(秉彝)를 떨쳐 일으키어 효제를 숭상하니, 온 나라 백성이 분발하여서 따랐다. 기묘년 봄에, 김우증(金友曾)이란 자가 사림을 모함하여 헐뜯다가 일이 발각되어 정신(廷訊)하게 되었다. 선생이 대성(臺省) 장관(長官)으로서 국정(鞫庭)에 참석하였으나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벼슬을 갈도록 논란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5월에 다시 대사헌으로 되었으며 임금의 총애는 더욱 융숭하여 능히 사퇴하지 못 하였다. 도(道)를 행하기 어려움을 알고, 당시 사세에 크게 걱정스러움이 있음을 생각하여 진계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수보(修補)하고 거행하는 일은 모두 선조(先朝) 때에 미처 못한 바입니다. 훗날 소인이 만약 소술(紹述)이란 말을 빌려서 중상(中傷)한다면, 선한 무리가 위태합니다. 근래에 노산(魯山)에게 제(祭)를 지내고 소릉(昭陵)을 회복하는 등의 일은 모두 뜻있는 사람들이 행하고자 하였으나 되지 않았던 것인데, 성세(聖世)에 와서 시종하는 신하가 건의하여 거행한 것입니다. 또 신씨(愼氏)를 다시 세우라는 논의는 김정(金淨)ㆍ박상(朴祥)이 상소까지 하였는 바, 이것은 정당한 논의이나 당시에 논란하던 자는 그들을 대죄(大罪)로 처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등등의 일은 모두 소인이 구실로 할 바이며, 사림의 화근이 여기에 잠복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모르고 계셔서는 불가하며, 또한 원자(元子)에게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師道)는 비록 서지 않았으나, 조정 선비로서는 붕우간에 서로 책선(責善)하는 의리가 있으니, 붕우의 도는 아직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훗날에 군자를 무함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당류(黨類)라고 지목하여 송(宋) 나라 원우(元祐) 연대의 일같이 할 것입니다. 서로 친교를 맺어서 왕래하는 자는 모두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고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도를 강론한 것인즉 이것은 국가의 복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정직한 선비가 세상에 성하면 반드시 큰 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붕우 사이에 교유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서로 자뢰하여 유익하고자 함인데, 어찌 이런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여염에서도 모두 큰 화가 반드시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바, 대개 예전 일에 깊이 징계되었던 것입니다. 개국 이래로 사림의 화가 끊이지 않았으나, 군자가 국사(國事)에 힘을 기울여 거의 성공한 적은 있었으나, 패망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소신은 폐조 때 사림의 화를 눈으로 직접 보았으므로, 도무지 벼슬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로서 이 세상에 나서 무심할 수 없었고, 외람되이 성은을 입어서 마지못해 종사하거니와 다만 두려워하는 마음만은 사람마다 있습니다. 국가가 비록 한때는 공고(鞏固)하더라도 후사(後嗣)에 가서는 위태하지 않은 적이 드무니, 가장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그런즉 선생이 염려한 바는 세대가 바뀌어진 뒤를 생각하였던 것인데, 어금니를 갈고 입맛 다시던 자가 곁에 있어서 가만히 틈을 엿볼 줄을 어찌 뜻하였으리오.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이 올바른 논의에 용납되지 못하여 원망이 가슴에 쌓였던 참인데, 선생이 임금의 지우(知遇)로 말미암아 학자들이 추향(趨向)을 같이하고 소민(小民)이 선(善)을 칭도(稱道)하니, 그들은 이런 점을 구실로 하여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홍경주(洪景舟)를 시켜 초방(椒房 내전) 액리(掖吏 내시)를 인연하여, 인심이 죄다 조씨에게 쏠렸다 하여 임금의 뜻을 흔들리도록 하고, 또 이치에 닿지 않는 참언(讖言)으로 금원(禁苑) 나뭇잎에 무엇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겁나게 하였다. 정국 4등 공신(靖國四等功臣)의 명단을 삭제하던 날, 교묘하게 온갖 간계를 얽어서 북문을 열도록 청하고, 밀계를 올려서 드디어 선생을 죄인의 괴수로 만들었다. 잡아다가 곧 쳐서 죽이고자 하여 흉한 기구를 이미 전(殿) 뜰에 벌여 놓았으나, 다행히 수상이 임금의 옷깃을 잡아당김으로써 정성이 천심을 감동되게 하였고, 벼락 같은 위엄이 조금 누그러져서 조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에 도성 안 약도(約徒)로서 차자(箚子)를 올리는 자가 궁성에 몰려와서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고, 관학 선비들은 대궐 뜰에 호곡(號哭)하여서 소리가 대내에 들렸다. 이러므로 참소하는 자는 구설거리를 더했고 임금의 의혹은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다시는 임금의 용안을 볼 수 없어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으니, 공의 지성도 또한 극진하였다. 김정ㆍ김식(金湜)ㆍ김구(金絿)와 같은 말로 추국(推鞫)당했는데 공이 공초(供招)하기를, “사(士)가 세상에 나서면 믿는 바는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국가의 병통은 이(利)가 나는 근원에 있다는 망령된 요량으로 국운을 새롭게 하여 무궁토록 하고자 했을 뿐이었고, 딴뜻은 전연 없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는 사율(死律)로 정했으나, 마침 영상(領相)이 구원하여서 능성(綾城)으로 장배(杖配)하게 되었다. 다음날 다시 금부(禁府)에 모여서 전지(傳旨)를 받고 갔다. 김 판서와 김 제학 등의 전(傳)에 자세하다. 얼마 뒤에 대간이 죄를 더하도록 청하여, 적소(謫所)에서 사사(賜死)하도록 명하였다. 아이 종이 도사(都事)가 또 왔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선생은 도사에게 “주상 전하께서 신에게 사사하셨으니 죄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들은 다음에 죽겠다.” 하고, 뜰에 내려가 북쪽을 향해서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교지를 받았다. 임금의 체후(體候)가 어떤가를 묻고, 다음으로 3공ㆍ6경ㆍ대간ㆍ시종의 성명을 낱낱이 물은 뒤에 집에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한 자도 틀림이 없었다. 목욕을 하고 옷을 바꿔 입는데, 금오랑(金吾郞) 유엄(柳渰)이 재촉하는 빛이 보였다. 선생은 크게 탄식하면서, “조서(詔書)를 안고 주막에 엎드려 울던 옛사람과 어찌 그다지도 다른가.” 하였다. 자리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임금을 사랑한 것이 아비를 사랑함과 같았다. 하늘의 해가 나의 단심(丹心)을 비출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약을 마시고 죽으니, 12월 20일이었고 나이는 38세였다. 다음해에 용인(龍仁) 선영(先塋) 밑에 반장(返葬)하니, 선생이 남긴 뜻이었다. 선생이 죽던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는 각각 두 돌림이었고, 남북으로는 각각 한 돌림이었다. 남북으로 두른 바깥쪽에 또 두 줄기 무지개가 띠를 드리운 듯한 것이 하늘에 뻗쳤고, 또 미방(未方)에는 한 발 남짓한 한 줄기 무지개가 있었는데, 모두 한참 지나서 사라졌다. 이때에 아들 조정(趙定)은 5세였고, 조용(趙容)은 2세였는데, 조정은 일찍 죽었고 조용은 벼슬하여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아들이 없어서 종질(從姪) 조순남(趙舜男)으로 후사를 삼았다.
인묘(仁廟) 을사년 봄에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이 소장을 올려서 선생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모는 젊어서부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서 학업을 받았습니다. 김굉필의 학문은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인 사예(司藝) 신(臣) 김숙자(金淑滋)에게서 전해 왔으며,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였던 길재(吉再)한테서 전해 왔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 됩니다. 그 학문의 연원(淵源)과 행신의 바름과 설시(設施)한 방법이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궐문에 엎드려 세 번이나 소장을 올리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서 타일렀다. 대간과 시종도 또한 차자를 올려서 간절하게 아뢰었다. 6월 30일에 하교하기를 “조광조의 일은 일찍이 내 마음에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때 일이므로 경솔하게 고치지 못 하였던 것이다. 지금 내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조광조의 관작과 품계를 회복하라.” 하였다. 지금 임금 무진년 여름에 태학 유생 홍인헌(洪仁憲)ㆍ이계(李啓)들이 소장을 올려서 공부자(孔夫子)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선유(先儒) 조모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품(資稟)이 이미 다르고, 확충(擴充)하여 수양한 것이 도가 있었습니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여서 드디어 큰 선비가 되었습니다. 용이 풍운을 만난 것처럼 우리 중묘의 지우(知遇)를 얻어서 후직(后稷)과 설(契)이 임금을 섬기던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요순의 다스림을 그 임금에게 기대하였습니다. 《소학》의 가르침을 밝혀서 인재를 떨쳐 일으키고, 천거하는 과거를 설치하여 준예(俊乂)를 숭장(崇獎)하였습니다. 한 시대의 인재를 양성하여 거의 삼대(三代) 시대와 같이 융성할 뻔하였는데, 간사한 사람이 질투하고 한 그물에 화를 얽어서, 도를 일으키며 다스림을 이루려는 기회를 중도에서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50년 동안은 온 나라 인심이 소경과 귀머거리 같아서 탐내는 것이 버릇으로 되고, 어진 사람을 원수같이 보는 바, 이것은 기묘년 사화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베이고 사그라든 나머지에서도 간혹 스스로 분발하여서, 의를 흠모하고 이(利)를 부끄러워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왕사(王事)에 급할 줄 아는 연이어진 정기(精氣)가 오늘까지 내려온 것은 모두 광조의 힘이니,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양사(兩司) 및 영의정 이준경(李俊慶)이 서로 잇달아 계청하고 옥당에서도 높은 관작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기를 청하였던 까닭에, 영의정으로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 소장을 올려 논열(論列)하였다. 모두 신원소(伸冤疏) 가운데 있다.
행장(行狀)의 대략에, “선생은 천분(天分)이 매우 기이하고 무리에서 뛰어났다. 난새[鸞]가 머무른 듯 따오기가 우뚝한 듯하였고, 옥처럼 윤택하고 금처럼 정순(精純)하였다. 또 아름다운 난초가 꽃다움을 떨치고, 밝은 달이 빛을 나타내는 듯하였다. 나이 17, 18세 적에 개연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다. 능히 어지러운 세상을 당해 험난함을 무릅쓰면서, 한훤(寒暄) 김 선생(金先生)을 희천(熙川) 적소에서 스승으로 섬겼다. 《소학》을 독신(篤信)하였고, 《근사록(近思錄)》을 숭상하였다. 일찍이 밤낮으로 가다듬고 신칙하여 허물이 없도록 하며, 언행을 단속하는 데에 옛 가르침을 상고하였음은 공경함을 갖는 법이었다. 강습하는 여가에 종일토록 우뚝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늘을 모신 듯하였고 대원(大原 근본되는 학문)을 수양하며, 굳게 견디고,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고요함을 주로 하는 학문이었다. 후진을 권장하면서 각자 그 재질대로 하였다. 본분을 지키는 행실이 나타나서 재주가 한 세상을 인도하기에 족하고, 영특한 재화(才華)가 밖으로 발(發)하여 도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했다. 그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 백료(百僚)가 다 마음을 기울였으니, 한 시대 사람들을 감복하도록 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왕신(王臣 참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신하)으로서 구오(九五)의 성한때를 당해서, 나아가면 날마다 세 번이나 인접하였고 물러나면 사람들이 다투어 가며 손을 이마에 얹었으니, 이것은 상하가 서로 기뻐하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할까. 하늘은 체동(螮蝀 무지개의 이명)을 그 사이에서 가만히 없애지 못하여, 위로는 그의 뜻이 크게 시행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아래로는 그 덕택이 널리 덮임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때 운수와 나라의 액운에 관계된 것이었다. 천지가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고 귀신이 조희(調戲)한 바이니, 선생께서야 어떻게 할 수 있었으랴.”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 천도는 본디 떳떳함이 있고, 인심은 진실로 속이기 어려운 것이다. 방훈(放勳 요(堯) 임금)의 남긴 뜻을 중화(重華)가 아름답게 이루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학문은 이로 말미암아 방향을 알게 되었고, 세상 다스림은 이로 말미암아 화평을 거듭하게 되었으며, 사문(斯文)은 이를 힘입어서 무너지지 않았고, 국맥(國脈)은 이로 말미암아 무궁하였다. 이에서 말한다면, 한때 사림의 화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께서 도를 숭상하고 학문을 인도한 공이 또한 후세에 미친 것이다. 또 한 가지 말이 있다. 주(周) 나라가 쇠망한 이래로 한때는 성현의 도가 행해지지 못했으나, 오히려 만사에 행하게 되었다. 대저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의 덕과 재주로써 쓰이기만 되었더라면, 왕도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귀취(歸就)한 바는 의견을 발표해서 후세에 법을 보이고 만 것에 불과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운수는 진실로 알 수 없지마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선생의 나아옴이 이미 이로써 이름하였으니, 그 세상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음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유독 한스러운 것은 그의 실덕(實德)을 능히 밝혀서 우리 동방의 후생(後生)을 다행하게 하지 못했음이다. 또 대저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고 하면서 어찌 일찍 한 번 이루게 하는 데 만족할 수 있었으리오. 반드시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가 많아진 뒤에 크게 구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그렇지 못 하였다. 첫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크게 발탁되어서 높은 벼슬에 갑작스럽게 올랐고, 두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물러가기를 구했으나 이루지 못 하였으며, 세 번째 불행한 것으로는 귀양가던 날로 마친 것이었으니, 앞에서 이른바, ‘덕이 충분히 쌓이고 나이 많아진 뒤에’ 한 것은 모두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 의견을 발표해서 후세에 법을 보이는 일은 이미 미칠 수 없었은즉,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던 뜻은 마침내 어떠하였던가. 이런 까닭으로 논쟁하는 무리의 끝도 없는 말이 도리어 화복(禍福)과 성패(成敗)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여 세도(世道)는 더욱 구차하여졌고, 이에 방자하게 지목하여서 서로 헐뜯고 비웃었다. 행신하는 자는 꺼리고 선비를 가르치는 자는 경계하였으며 선량한 자를 원수로 삼는 자는 효시(嚆矢)로 삼아서 우리 도의 병통을 중하게 하였다. 아, 이것이 어찌 방훈의 남긴 뜻을 중화가 능히 따라서 사도를 붙들고 국운을 길게 한 훌륭한 뜻이리오. 또 후세의 착한 임금과 어진 정승이 무릇 세도를 바로잡을 책임을 맡은 자와 더불어 마땅히 깊이 근심하고 깊이 살펴서 힘껏 구원할 바이다. 그러므로 근년 이래로 바꿔 옮기고 고쳐서 새롭게 하여 호오(好惡)를 밝게 보인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선비된 자가 아직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霸道)를 천하게 알며, 정도(正道)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며,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자신을 수양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쇄소(灑掃)ㆍ응대(應對)하는 것으로써 이치를 궁구하여 타고난 성품을 다하는 데에 이르러서 차차로 능히 흥기 분발(興起奮發)하여 큰일을 하니, 이는 누구의 공이며,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인가. 상천(上天)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고, 성조(聖朝)의 교화(敎化)도 이에서 무궁하게 된다. 후일에 붓을 잡는 이가 만약 이를 상고하게 되면, 선생의 학문과 사업 언론과 풍채는 사책(史冊)에 기재되어서 생각하고 읊조리는 이에게 전파됨이 더욱 많을 것이다. 어찌 이것으로써 한할 것이랴.”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태상에서 시법을 상고하였는데, “도덕이 있고 넓게 들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바름으로써 복사(服事)한 것을 정(正)이라 한다.” 하여,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내렸다. 중간에 서서 기대지 않는 것을 정(正)이라 한다고 한 곳도 있다.
능성현(綾城縣) 사람이 선생을 추모하여 서원을 지었는데, 방백(方伯)이 사유를 갖추어서 계문(啓聞)하므로, 죽수서원(竹樹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또 서적을 하사하여 권장하였다.
선생은 한양(漢陽) 사람이다. 한양이 지금은 양주(楊州)에 예속되었는데, 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선생을 위하여 서원을 지었다.
효직(孝直)이 처음에는 호남 능성현에 귀양갔는데, 얼마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고사(故事)에, 재상에게 사사할 때에 어보(御寶)가 찍힌 문서가 없고 다만 왕지(王旨)만 받들어 시행하였다. 금오랑이 귀양지에 도착하여 선지(宣旨)하니, 공은, “국가에서 대신을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이 초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장차 간사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는 소장을 올려 말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 하였다. 목욕한 다음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조용하게 죽으니, 38세였다. 눌재(訥齋) 박 창세(朴昌世 박상(朴祥))가 시를 지어 곡(哭)하기를,
남대(어사대)의 옛 자의가 / 不謂南臺舊紫衣
우거로써 초초하게 고향에 돌아올 줄 알았으랴 / 牛車草草故鄕歸
훗날 지하에서 서로 만날 때엔 / 他年地下相逢處
인간의 만 가지 잘못은 말하지 말자 / 莫話人間萬事非
하고, 또,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악수하면서 / 分手院前曾把手
그대가 황각(정부)에서 주애로 감을 괴이하게 여겼다 / 怪君黃閣落朱崖
주애와 황각을 분별하지 마소 / 朱崖黃閣莫分別
구원(황천)에 이르자마자 차등이 없어진다오 / 纔到九原無等差
하였다.
공의 당손(堂孫) 조충남(趙忠男)이 퇴계(退溪)에게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퇴계가 시를 짓기를,
의봉이 임금의 뜰에 상서롭게 노닐던 것을 생각했는데 / 相思儀鳳瑞王庭
어제 옥수(남의 후손을 기리는 말)를 만나 그의 전형(얼굴 모습)을 상상한다 / 玉樹今逢想典刑
성스럽고 아름다움을 내 어찌 유양(남의 장점을 들어서 말함)하리오 / 聖美揄楊吾豈敢
눈서리 천리길에 그대 옴이 미안하다 / 雪霜千里愧君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