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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諱)는 진문(振文)이요 자(字)는 질보(質甫)이고 성(姓)은 홍씨(洪氏)로 선계(先系)는 남양(南陽)에서 나왔다. 비조(鼻祖)는 홍선행(洪先幸)으로, 벼슬은 금오위위(金吾衛尉)를 지냈으며, 대대로 현달한 인물이 있었다. 8대(代)를 전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홍덕의(洪德義)에 이르러 비로소 남양(南陽)에 장사지냈고 자손들이 그곳에 살았다. 전서(典書)가 홍자경(洪子儆)을 낳았는데, 그는 국조(國朝)에 벼슬하여 문과에 급제한 뒤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고 공에게 8세조(世祖)가 된다. 이로부터 더욱 현달하고 더욱 창대(昌大)하였다.
5세조는 홍형(洪泂)인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고 연산(燕山)의 혼조(昏朝)에서 사화(士禍)를 당하였다가 중묘(中廟)가 반정(反正)한 뒤에 특별히 포증(褒贈)을 입었으며,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를 말함)이 그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고조(高祖)는 홍언광(洪彦光)인데, 행의(行誼)로 선발되어 제조(諸曹)의 낭관(郎官)을 역임하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증조(曾祖)는 홍담(洪曇)으로, 이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諡號)는 정효(貞孝)이며, 청조(淸操)와 아망(雅望)이 한 시대의 모범이었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두 조정의 명신(名臣)이었으니, 그 사적(事蹟)이 국승(國乘)에 실려 있다. 조고(祖考)는 홍종복(洪宗福)인데, 재능이 있었으나 펴보지 못한 채 일찍 별세하여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홍희(洪憙)인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내고 순충 보조 공신(純忠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익평 부원군(益平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인 정경 부인(貞敬夫人)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현숙한 부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 문의공(文懿公)에 추증된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문의공은 곧 인헌 왕후(仁獻王后)를 탄생하였으므로 공은 인묘(仁廟)에게 종모형제(從母兄弟)가 된다.
공은 만력(萬曆)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9월 18일에 태어났다. 영특하고 준발하여 남다른 자질이 있었으며,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기개(氣槪)를 좋아하였다. 조금 자란 뒤에는 기절(氣節)을 꺾고 배움에 힘써서 몸가짐을 가다듬고 행실을 닦아 스승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도 문사(文詞)가 갑자기 진보하였으므로, 여러 장자(長者)들이 모두 원대한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관례(冠禮)를 치르자마자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공의 문하에 나아가 일찍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들었으며, 경서(經書)를 깊이 공부하고 반복하여 강마(講磨)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점잖게 자신을 수칙(修飭)하니, 잠야공(潛冶公)이 매우 기중(器重)하게 여겼으며, 더불어 교유한 자들도 모두 당세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 적신(賊臣) 박승종(朴承宗)과 유희분(柳希奮)이 공에게 모두 인아(姻婭)의 친의(親誼)가 있었는바, 그들이 공의 재능과 인망을 흠모하여 총애를 얽어맬 계책을 삼으려고 매번 공에게 부지런히 초대하는 뜻을 보내왔으나 공은 그때마다 비루하게 여겨 침을 뱉고 거절하니, 사람들이 간혹 공을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태연하게 지냈다. 광해(光海)의 혼우(昏愚)와 포학(暴虐)이 날로 심해지고 간얼(奸孼)이 권병(權柄)을 훔치어 모후(母后)를 유폐(幽閉)시키고 동기(同氣, 형제를 말함)를 살해하니, 이륜(彛倫)이 끊어지고 종사(宗社)가 무너지려 하였다. 이에 공은 항상 개연히 세상을 광정(匡正)하려는 뜻을 가졌다. 이에 앞서 공의 구씨(舅氏)인 능성(綾城) 구굉(具宏)공이 평성(平城) 신경진(申景禛)과 더불어 창의(倡義)하려는 계획을 가졌고 공의 백씨(伯氏)인 남양공(南陽公, 홍진도(洪振道)를 말함)도 그 계획을 밀접하게 주선하여 대책(大策)을 협찬(協贊)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3월 13일에 이르러 서교(西郊)에서 모여 인조 대왕(仁祖大王)을 추대(推戴)하여 반정(反正)하니 천일(天日)이 다시 밝아지고 윤기(倫紀)가 다시 질서를 되찾았다. 조정이 공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발탁하여 제수하였고, 얼마 뒤에 책훈(策勳)하여 분충 찬모 정사 공신(奮忠贊謨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하사하였다. 곧이어 장성 현감(長城縣監)에 제수하였는데, 장성은 곧 의정공(議政公, 부친인 홍희를 말함)이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진 고을이었다. 공은 선친의 자취를 추락시킬까 염려하여 전심(專心)으로 사무에 임하니 정사(政事)가 다스려지고 소송이 공평하여 강한 자는 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는 공을 의지하였으며, 청단(聽斷)이 마치 물이 흐르듯 하여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1년 정도 지나자 온 경내가 기뻐하여 노래를 불렀고, 도신(道臣)이 공의 치적이 도내에서 제일 뛰어나다고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옷감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게 되자 백성들이 모두 수레바퀴를 부여잡고 길을 막은 채로 유임(留任)하기를 청원하였으며, 뜻대로 되지 않자 철비(鐵碑)를 주조(鑄造)하여 공이 떠난 뒤의 사모(思慕)하는 뜻을 부치었다.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는 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에 제수되었고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는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에 제수되었고,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 봄에는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임명되었다가 가을에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옮겼는데, 일로 인하여 체직되어 돌아왔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는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의 풍속이 강활(强猾)하고 쟁송(爭訟)을 좋아하였는바, 공은 이곳에 부임하여 청백하고 엄격하게 사람들을 거느리고 부세(賦稅)를 균등하게 매기고 학교를 흥기하는 것을 가장 시급한 사무로 삼았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공의 아우인 주부공(主簿公)이 요절(夭折)하였다. 그 당시 백씨(伯氏)인 남양공(南陽公)이 외주(外州)를 다스리고 있었고 양친(兩親)이 모두 칠순(七旬)에 가까웠는데 곁에서 모실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공이 간절하게 아뢰어 해직을 간청하였다. 대관(臺官)이 “외관(外官)이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는 것은 상격(常格)에 어긋난다.”고 말을 하니, 임금께서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공은 마침내 관인(官印)을 풀어놓고 돌아와서 부모를 모시며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몸소 아침저녁의 진지 등을 받들었다.
병자년(丙子年, 1635년 인조 14년) 겨울에 마침 종모(從母)의 장소(葬所)에 나아갔다가 변보(邊報)가 갑자기 이른 것을 듣고는 밤낮없이 길을 달려 돌아왔는데, 노기(虜騎)가 이미 도성(都城)에 가까이 닥치어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을 떠났으므로, 공은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행재소(行在所)로 달려 나아갔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임금의 피난처를 심도(沁都)로 옮기려고 하여 어가(御駕)가 남문(南門)에 머물렀는데, 추위가 몹시 매서웠으므로 공이 모선(毛扇)을 바치니, 임금께서 공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쌍친(雙親)이 나이가 많으니 형제가 모두 말고삐를 잡는 반열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는, 인하여 화량진(花梁鎭)에 명하여 배를 빌려서 해도(海島) 안으로 피난하도록 하였다. 대체로 임금께서 공의 상재(桑梓,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을 말함)가 남양(南陽)인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공은 감격하여 울면서 곧 성을 나와 양친을 모시고 남양의 대부도(大阜島)로 피난하였는데, 마침 부사(府使)인 윤계(尹棨)가 적에게 죽었으므로 분조(分朝)에서 공에게 부사의 사무를 대신 행공(行公)하라고 명하였다. 온 경내가 이미 오랑캐에게 도략(屠掠)을 당한 판국이어서 일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으나, 공은 불에 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성심껏 안집(安集)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에 힘입어 살아난 자들이 많았다. 얼마 후에 성하(城下)의 비보(悲報,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한 일을 말함)가 이르자 공은 팔을 걷어 부치며 비분(悲憤)에 겨운 나머지 잠자고 먹는 일조차 잊을 정도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에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여 물조차 입에 대지 않은 채 통곡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제(喪制)를 일체 주 문공(朱文公, 송대(宋代)의 주자(朱子)를 말함)의 가례(家禮)를 준행하였으며, 3년 동안 여묘(廬墓)에서 복상하면서 슬픔과 예절을 모두 갖추었다. 기묘년(己卯年, 1639년 인조 17년)에 복제(服制)가 끝나자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임명되었는데, 서관(西關)에는 처음 가보는 길이었고 병란을 겪은 나머지 모든 사무가 새로 시작된 까닭에, 사개(使价)들이 잇달아서 그들을 응접하는 일이 바쁘고 시급하였으나, 공은 고을을 마치 자기 집처럼 여기고서 자봉(自奉)을 검약하게 하고 관사(官事)를 다스렸으며, 또 소(疏)를 올려 폐막(弊瘼)을 진달하여 변통하게 해준 일이 많았다. 이리저리 철습(掇拾)하고 보지(保持)하여 관사(官事)가 점차로 체모를 갖추니 도신(道臣)이 공의 치적을 포문(褒聞)하여 특별히 비옥(緋玉, 당상관을 말함)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그 당시 남양공(南陽公)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판여(板輿)를 받들고 그곳에 갔는데, 그해 겨울에 대부인(大夫人)이 병으로 누워 지내자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서 모친을 모시며 약이(藥餌)를 마련하고 죽반(粥飯)을 조리(調理)하는 일 등을 모두 손수 해내고 남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모친이 일어나고 앉을 때마다 반드시 자기가 몸소 부축하여 받들었다. 또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로 잠자고 두 눈을 모두 감지 않은 채로 지낸 기간이 모두 40여 일이나 되었는데, 마치 하루처럼 변함없이 정성스럽게 병구완을 하였다. 마침내 상을 당하게 되자 슬프게 사모하고 호곡(號哭)하는 것을 이전의 부친상을 당했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며, 예법대로 따르고 어긋남이 없었다. 조석(朝夕)의 궤전(饋奠)도 비록 질병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자기가 친히 올렸으며, 애훼(哀毁)함이 더욱 심하여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몸이 여위었다. 이에 임금께서 능원 대군(綾原大君)에게 명하여 어선(御膳)을 갖고 가서 권도(權道)를 따르도록 다그쳤다.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에 복제(服制)를 마치자 군함(軍銜)에 부쳐졌다. 그해 3월에 역적 심기원(沈器遠)이 광주 부윤(廣州府尹) 권억(權澺)과 함께 모역(謀逆)하였는바, 권억이 병사(兵士)들을 매복시킨 뒤로는 광주부의 인심이 흉흉하여 조석(朝夕)조차 보전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공의 위엄과 명망이 아니고서는 인심을 진복(鎭服)시키기 어렵다고 여기어 공을 천거하여 광주 부윤으로 삼으니, 공은 명을 받고 그곳에 부임하여 마음을 다해서 위무(慰撫)하니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즉시 군민(軍民)의 자막(疵瘼)과 산성(山城)의 형세(形勢) 등을 일일이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모두 가납(嘉納)하여 시행하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그 뒤에 공의 뒤를 이어 부임한 자들이 모두 공이 설시(設施)한 규정을 준용(遵用)하였다.
그때 마침 관해(官廨)를 수리(修理)할 때에 한 장(丈)의 문서(文書)를 발견하였는데, 곧 역적 권억이 군대를 징발하는 전령(傳令)이었는바, 그 문서에 “총융사(摠戎使)의 분부(分付)에 의거하건대, 수어사(守禦使)의 전령 안에 발병(發兵)하라고 하였다. 운운(云云)”이라고 한 대목이 있었다. 그 당시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공 형제가 함께 총융사와 수어사의 직임을 띠고 있었는데, 대체로 권억이 이들의 지위를 빌리어 민심을 유혹하려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 문서가 비록 거짓이었으나 이미 한 부(府)의 여러 사람들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으므로, 남양공과 내형(內兄)인 재상 구인후(具仁垕)에게 문의(問議)하였고 그 과정에서 말이 한두 명의 경재(卿宰)에게 흘러 들어가 조정의 관원들 사이에 전파되니, 연양군 형제가 사패(司敗, 법사(法司)를 말함)에 대죄(待罪)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글을 올려 일의 정상을 모조리 진달하고 그 문서를 봉진(封進)하니, 임금께서 국청(鞫廳)에 내리어 연양군 형제가 마침내 결백함을 신변(伸辯)하게 되었다. 국청에서는 공이 처음에 즉시 상문(上聞)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나치(拿致)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공이 무심결에 그런 것이라고 여기어 단지 문비(問備)만 하도록 명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임금께서 영국 공신(寧國功臣)들과 회맹(會盟)을 행하면서 공의 관질(官秩)을 가선(嘉善) 품계로 올려주고 남창군(南昌君)에 봉하였으며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게 하였다. 임금께서 사적(私的)으로 공을 어수당(魚水堂)에서 접견하시고 특별히 금권(金圈)을 하사하여 총우(寵遇)하였다. 그해 겨울에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해주는 평소에 이리저리 얽힌 바가 많은 곳으로 알려졌는바, 공은 맨 먼저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보살펴서 빗으로 때를 벗겨내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이 하였으며, 교활한 자들을 단속하고 강포한 자들을 제압하니 치적(治績)이 나날이 드러났다. 그 당시 조 서인(趙庶人)의 가노(家奴)가 세력을 믿고서 횡포를 부렸는데 심지어 사자(士子)인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사람의 부녀자를 침욕(侵辱)하기까지 하였다. 공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그 가노를 체포하여 장살(杖殺)하니, 방백(方伯)과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다. 이윽고 조 서인이 임금에게 호소하였는데, 임금께서는 도리어 가탄(嘉歎)히 여기시어 “모(某, 홍진문을 말함)가 어려서부터 궁노(宮奴)가 세력을 믿고 사납게 구는 버릇을 몹시 통분하더니 지금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였다. 대체로 공의 집안이 왕실의 내척(內戚)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자년(戊子年, 1648년 인조 26년)에는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융정(戎政)을 수칙(修飭)하고 민은(民隱)을 고휼(顧恤)하는 일에 힘을 썼다. 마침 국척(國戚, 국상(國喪)을 말함)을 당하여 산릉(山陵)에 차역(差役)되었는데, 조금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모두 관아에서 스스로 준비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월름(月廩)의 나머지에서 수백 곡(斛)을 떼어내어 생활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었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고 곧 좌윤(左尹)으로 승진하여 총관(摠管)을 겸대하였다. 이어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보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원봉(原封)을 그대로 띤 채로 다시 경조(京兆, 한성부를 말함)에 제수되었으며 인하여 총관을 겸대하였다.
그 당시 조정의 논의가 마구 무너지어 당파(黨派)가 버릇처럼 굳어졌고, 탐욕스럽고 방종하게 구는 기습(氣習)과 분경(奔競)하는 풍조가 날로 깊어가고 달로 심해졌다. 공은 항상 이 일을 개탄하여 매번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이를 따져 논하고 통렬히 논척하였으므로, 당로(當路, 요직을 담당한 자를 말함)가 원한을 품고 미워하여 일마다 유감(遺憾)을 드러내더니 엉뚱하게 공을 “척리(戚里)로서 나랏일을 맘대로 한다.”고 비난하면서 헐뜯음이 갈수록 심하였다. 이에 공은 영예로운 벼슬자리를 물러나 피하여 제명(除命)을 극력 사양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에 백씨(伯氏)가 별세한 뒤로는 더욱 세상에 즐거움이 없어져서 세상일에 뜻을 끊고 시골로 영영 돌아가서 늙어 죽을 계획을 세웠다. 비록 중간에 소명(召命)에 나아간 적은 있었지만 몇 달 동안도 서울에 머무른 경우가 없었다.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 봄에 신 부인(申夫人)의 상사(喪事)로 장차 호좌(湖左)에 장지(葬地)를 정하려고 가다가 수원(水原) 땅에 이르러 2월 17일에 갑자기 여사(旅舍)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은 55세였다.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은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께서 몹시 놀라고 애도하며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빈염(殯殮)을 감호(監護)하게 하였으며, 별도로 상사에 필요한 물품과 관곽(棺槨)을 내려주고 조문과 부의(賻儀)를 후하게 보태주었다. 남양의 치소(治所) 서쪽에 있는 청명산(淸明山) 남쪽 산기슭의 신좌(辛坐) 자리에 예장(禮葬)하였다.
공은 기우(氣宇)가 준정(峻整)하고 식려(識慮)가 심원(深遠)하였다. 자안(姿顔, 자태와 용모를 말함)이 아름답고 말수와 웃음이 적었으며, 아도(雅度)가 내면에 응축되고 정화(精華)가 외면에 드러났다. 또 게으른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았고 비루한 언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가정에서 처신함에 있어서는 효도와 공경이 순수하고 지극하여 지양(志養)을 갖추어 다하였으며 매사에 순종하고 어기는 바가 없었다. 부모의 좌우에서 부지런히 직분을 다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애썼는데, 백씨인 남양공(南陽公)을 모심에 있어 매우 공경하였고 계씨(季氏, 막내 아우를 말함)를 독실하게 사랑하여 벼슬할 때가 아니면 하루도 서로 떨어져 지내지 않으면서 화락(和樂)하고 사이좋게 지냈다. 계씨가 죽은 뒤에는 그 유고(遺孤)들을 보살펴주어 은의(恩義)가 주흡(周洽)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이 가옥(家屋)을 사들여 그들을 따로 살게 해주려고 하자, 공은 마땅히 그들과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지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그 의식(衣食)과 갖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몸소 자기가 장만하여 주었고, 제때에 맞춰 장가와 시집을 보내주어 모두 가정을 꾸리도록 해주었다. 집안을 다스림이 더욱 엄격하여 내외(內外)가 반듯하였고, 잗단 일부터 중대한 일까지 반드시 부지런히 애를 썼고 모든 행동에 예법과 법칙을 따랐다. 한가하게 지낼 때에도 장숙(莊肅)한 태도로 지내고 느슨하게 풀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감히 곁에서 떠들거나 소곤대지 못하였고 하인들이 감히 내정(內庭)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성색(聲色)과 분화(紛華)한 것들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기어 멀리하였고, 만일 남의 옳지 못한 곳을 보게 되면 대번에 규간(規諫)을 해주었는데, 비록 상대가 존귀(尊貴)한 자일지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안산(安山)을 다스릴 때에 기사(耆社, 기로소(耆老所)의 별칭)의 제공(諸公)이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공에게 요구하였는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공을 보더니 물품을 넉넉하게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사부(士夫)의 집안에서 면례(緬禮)를 치르면 세 달 동안 음악을 가까이하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조금 전에 천릉(遷陵)을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소.”라고 하자, 연평이 부끄럽게 여기어 사과하고서 즉시 그 잔치를 중지하였으니, 그가 남들에게 꺼림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공은 인묘(仁廟)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려서부터 서로 함께 자랐고 매양 필연(筆硯)을 함께 하여 지기(志氣)가 서로 일치하였으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 겪었다. 광해(光海)가 능창 대군(綾昌大君)을 죄로 몰아 죽이니 화색(火色)이 갈수록 치성(熾盛)하여 사람들이 모두 자취를 거두어 멀리 피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고념(顧念)하지 않았다. 원종 대왕(元宗大王)이 승하(昇遐)하신 날에 이르러 광해가 몰래 액례(掖隸, 궁중에서 심부름하는 하인)를 보내어 그 호상(護喪)하는 사람을 엿보아 살피도록 하니, 비록 가까운 친척일지라도 모두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조문(弔問)을 하지 못하였으나, 공은 백씨(伯氏)와 더불어 자기 한 몸의 화복(禍福)을 돌아보지 않고서 염습(殮襲)하고 빈소(殯所)를 차리는 등의 절차를 스스로 몸소 맡아서 해냈으므로, 인헌 왕후(仁獻王后)께서 그 의리에 감동하시어 그 일을 언급할 때마다 번번이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거의(擧義,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말함)하던 처음에 공은 폐부(肺腑)의 인친(姻親)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한 몸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내어 안팎에서 주선함으로써 대계(大計)를 도와 성사시켰으니, 그 모획(謀劃)을 거들어 도와준 공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많았는데도 공은 일찍이 승평(昇平) 김유(金瑬)에게 거슬림을 당하여 공훈을 감정하는 날에 논공(論功)이 가장 낮았고 그 뒤에 천거를 받았을 때에도 번번이 일마다 저해(沮害)하고 앞길을 막아서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그 축적한 재능을 모두 펼 수 없게 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모두 아깝게 여겼다.
인묘(仁廟)께서 공을 대우해준 은고(恩顧)가 가장 깊어서 매양 한가하게 접견하는 때에 한 자리에 조용히 앉아 술잔을 서로 권하였으며,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옛일을 언급하시며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공이 몹시 술에 취하여 정신을 잃자 임금께서 효묘(孝廟)에게 명하여 부축해서 보내주게 하였다. 공이 평소 술을 좋아하자 임금께서 특별히 은(銀)으로 만든 술잔을 하사하여 절주(節酒)하도록 경계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재리(財利)에는 욕심이 없어서 집안사람들의 산업(産業)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의로운 것이 아니면 티끌 한 개도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 정혁(鼎革, 인조반정을 말함) 초기에 역적 집안의 토지와 노비들을 훈신(勳臣)들이 스스로 골라 가지도록 해주니 사람들이 대부분 너나없이 달려들었다. 이에 공이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오늘날의 거사(擧事)는 종묘사직을 보전하고 인기(人紀)를 바로잡기 위해서였지, 좋은 전답이나 주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고서 하나도 취하지 않으니, 인묘께서 그 소문을 듣고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전결(田結)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전후로 아홉 고을을 맡아 다스렸는데, 몸가짐을 간소하고 검약하게 하여 청렴 결백한 지조를 지켰고, 체직되어 돌아오는 날에 이르러 관아의 창고가 가득 넘치어 전에 비해 증가하였는데도 한 가지 물건도 가지고 돌아오지 않았다. 몸이 훈귀(勳貴)의 반열에 있었고 늠록(廩祿)이 넉넉하고 상사(賞賜)를 숱하게 받았는데, 공은 평소의 성품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친족과 지구(知舊) 중에 살림이 궁핍한 자들에게 성의를 다하여 도와주어 거의 모조리 나누어 주었으며 남은 것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성곽 밖에 서너 묘(畝)의 전토도 없었고 성 안에 초가집 한 칸도 없었으며, 만년에야 종남산(終南山) 아래에 작은 집을 지었는데 집 주위가 쓸쓸하여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으니, 대체로 청렴결백한 가르침은 집안에 대대로 전해온 것으로 공이 능히 그것을 따르면서 혹시라도 실추시킬까 염려하여 더욱 견고하게 가다듬고 힘썼던 것으로, 청고(淸苦)하고 담아(澹雅)한 절조(節操)는 단지 천성(天性)이 그러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른 나이에 유현(儒賢)의 문하에 출입하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종사하여 경전(經傳)의 뜻을 깊이 연구하고 의리(義理)의 근원을 강구(講究)하여,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법도를 따랐다. 비록 공은 남창군(南昌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경재(卿宰)에 올랐는데도 처신하는 태도는 간소(簡素)하여 사치하는 습성이 전혀 없었으며, 관청에서 물러나온 여가에는 잡빈(雜賓)을 사절하고 종일토록 경건한 자세로 서사(書史)를 탐완(探玩)하고 독서를 중지하지 않았다. 그가 부임하여 다스린 고을에서는 학교(學校)와 교육에 유심(留心)하여 향교(鄕校) 건물을 세워 고을의 선비 중에 배우려는 자들을 끌어들여 몸소 자신이 강론(講論)하면서 과정(課程)을 따라 배우도록 권장하여 흥기시키고 성취시킨 보람이 많이 있었다. 공은 일찍이 호중(湖中)에서 잠야공(潛冶公, 박지계를 말함)에게 학문을 물은 적이 있었고 왕래하며 강론하였으므로, 공이 별세한 뒤에 호중의 선비들이 공을 위하여 제향(祭享)할 곳을 만들었으니, 그가 후학(後學)들에게 흠모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전부인(前夫人)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부사(府使) 박안국(朴安國)의 딸이다. 숙철(淑哲) 간묵(簡默)하여 곤범(壼範)이 있었고 예법으로 몸을 가다듬고 법도로써 집안을 다스렸으며, 1녀를 두어 감사(監司) 원만석(元萬石)에게 시집갔다. 계부인(繼夫人)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첨지(僉知)로서 참판(參判)에 추증된 안설(安渫)의 딸이다. 유순(柔順)하고 정정(貞靜)하여 지아비를 섬김에 어긋난 행실이 없었으며, 1남 홍호(洪灝)를 두었는데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이다. 후부인(後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도사(都事)로서 참판(參判)에 추증된 신휘(申徽)의 딸인데, 단장(端莊)하고 정숙(貞淑)하여 부덕(婦德)이 있었다. 1남 1녀를 두었는바, 아들인 홍연(洪演)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딸은 참봉(參奉) 윤상신(尹商紳)에게 시집갔다. 도사(都事, 홍호를 말함)의 장남인 홍순원(洪舜元)은 참봉(參奉)이고, 그 다음은 홍중원(洪重元)과 홍이원(洪履元)이며, 딸들은 성억령(成億齡), 이기창(李箕昌), 생원(生員) 김준경(金濬慶), 이침(李沈), 심정최(沈廷最)에게 각각 시집갔다. 홍연의 아들은 홍재원(洪載元)이고, 딸은 이귀령(李龜齡), 이성귀(李聖龜), 변세윤(卞世胤)에게 각각 시집갔다.
공은 탁월하고 기위(奇偉)한 자질로써 학문을 갈고 닦은 공부에 힘입어 효제(孝悌)의 행실과 청수(淸修)한 절조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뛰어났고, 성세(聖世)를 만나 몸이 경재(卿宰)의 반열에 올라서 장차 그 포부를 모두 펼칠 듯 하였으나 시의(時議)에 방해를 받아서 벼슬이 덕망에 걸맞지 못하였으며 또 그 수명(壽命)까지 인색하였으니, 하늘의 보시(報施)가 과연 어긋남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서글픈 노릇이다.
불녕(不佞)의 외할아버지[外王考]인 원평공(原平公)이 공과 더불어 함께 공신(功臣)에 회맹(會盟)하여 정의(情誼)가 매우 돈독하였다. 불녕이 비록 늦게 태어났으나 공이 임금을 섬기고 부모를 섬긴 대절(大節)에 관하여 익히 들었고, 근래에는 공의 아들인 도사공(都事公, 홍호를 말함)과 더불어 수십 년간 같은 마을에서 살았으며, 또 공의 종증손(從曾孫)인 남계군(南溪君)이 지은 가장(家狀)을 얻어 보고서 공의 행의(行誼)가 훌륭한 것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지금 도사공의 여러 고자(孤子)들이 장차 역명(易名)의 은전을 청하려고 하는데, 그 장록(狀錄)을 상고하건대 자못 상세하게 기술하였고, 그 말이 모두 사실만을 기록하여 거짓이 없어서 세상에 믿음을 증명할 수 있으므로,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그를 위해 써서 태상(太常)에서 채택(採擇)하도록 하는 바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진문 [洪振文]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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