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너희는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서 신실한 사람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사람은 가차없이 벌하신다.
[시편 31:23]
살다보면 임계점, 한계상황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홀로 맞이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 홀로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 계시는 주님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임마누엘, 그 하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분은 가족이나 친구나 동료, 타자로 불리는 이들을 통해서 늘 우리와 함께 계셨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우리로 비로소 오롯한 그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피할 곳이 분명하게 보이고, 우리를 구원해줄 분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그분은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반석이시고 요새시고 구원의 능력이신 하나님이시라도 그분을 보는 이들에게만, 그분에게 간구하는 이들에게만 능력을 베푸실 수 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시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도 어쩌지 못한다.
시인(다윗)은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에 에워싸여 있다.
그들은 시인을 죽이려고 몰래 그물을 쳐 놓았을뿐만 아니라 흑색선전을 통해서 이웃 사람이나 친구들조차도 혐오하고 끔찍한 것을 보듯하고, 거리에서 만나는 이들도 피해 지나간다. 그래서 그를 환호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졌고, 산산이 깨어진 그릇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속해서 들려오는 비난과 협박, 살해의 음모로 인해 더는 견딜 수가 없다. 그냥, 이제 끝났다 생각하고 회자정리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다.
하지만, 시인은 모두가 등을 돌린 그때 한결같은 하나님을 바라본다.
'한결같은 하나님',
그렇다.
하나님은 한결 같아야 한다.
그래야 진리다.
한결같지 않은 것은 진리가 아니다.
시인은 기도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주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시인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고(24).
그렇다면, 지금 시인 외에도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며, 시인이 당하는 고난은 개인적인 고난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인 고난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고난에 침묵하지 않으시고, 이런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이들, 기다리는 이들을 도우신다. 그리하여 신실한 사람은 끝내 지키시고, 거만한 사람은 가차없이 벌하신다. 한결 같이 이렇게 하신다.
7절 말씀에서 시인은 한결같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을 고백한다.
"주님은 나의 고난을 돌아보시며, 내 영혼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내 영혼의 아픔을 알고 계시는 한결같은 하나님이 계시고, 나의 고난을 돌아보시는 한결같은 하나님이 계신데 사방 욱여싸임을 당한들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이 시대에도 썩어 없어질 우상을 믿고 사는 이들(6)이 넘쳐난다.
안타까운 것은 그 썩어 없어질 우상을 믿는 이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착각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이 시인이 믿고 의지하던 그 한결같은 하나님이신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