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은 문회장님에 의해서 사용(使用)되고 있는 用語로서 여기의 3대主體는 부모(父母)와 스승과 主人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3대中心을 말합니다. 부모는 가정의 중심입니다. 스승은 학교의 중심이요, 주인은 주관(主管)의 중심입니다. 여기서 주관의 중심이란 단체, 기업체, 회사, 국가 등의 중심을 말하는 것으로서, 관리(管理), 치리(治理)의 책임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단체장(예:조합장(組合長), 정당(政黨) 당수(黨首), 연합회장(聯合會長) 등), 기업체나 회사의 사장, 道의 도지사(道知事), 국가의 대통령(大統領) 등이 모두 총괄적으로 主人의 개념에 포함됩니다. 그리하여 부모, 스승, 주인의 세 중심을 3대주체(三大主體)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체에 관한 이론이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이며 이 3대주체(三大主體)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론인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절대(絶對)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絶對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한 절대(絶對)란 세속적(世俗的) 의미의 절대와는 다릅니다. 여기의 절대는 영원불변(永遠不變)性과 무한성(無限性), 보편성(普遍性)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을 영원적 존재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을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며 또 어디에도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하며 또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비유하면 태양광선(太陽光線)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태양광선은 지구상의 어디든지 안 비치는 곳이 없으며, 항상 쉬지 않고 계속해서 영원히 비추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참사랑이란 포괄(包括)的으로 전인류 뿐만 아니라 전체 만물에 대해서까지도 베풀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피조물(被造物) 전체가 참사랑의 대상입니다. 참사랑에서 빠지는 대상이라고는 이 우주에는 없습니다. 보통 사랑이라고 하면 인간끼리 주고받는 사랑을 말하는데 문회장님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참사랑이란 인간끼리는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더 나아가서 만물까지도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인간은 上下, 전후(前後), 좌우(左右)로 여러 계층의 사람을 대하지요. 上으로는 상관, 부모, 어른을, 下로는 자식, 부하, 연하자(年下者, 나이 어린 사람)를, 앞으로는 스승, 선배, 지도자를, 뒤로는 제자, 후배, 추종자를, 右로는 형제자매, 친우, 동료를, 左로는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者 혹은 자기를 반대하는 者까지도 대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계층(階層)의 사람들을 빠짐없이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에 옮기자는 것이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입니다. 여기서 사랑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려 보겠습니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인간이나 만물에게 온정을 베풀어서 그 대상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대상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世俗的인 사랑은 자기의 이익(利益)을 얻기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지요.
문회장님이 가르치는 사랑은 사랑에 있어서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남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란 온정을 다른 사람에게 한없이 베푸는 것인데, 어떤 方式으로 베푸느냐? 거기에는 부드러운 말을 건넨다든지 상대방을 이해(理解)해 준다 든지 물질, 금전 등을 준다든지 혹은 협조한다, 봉사한다, 도와 준다 혹은 어려운 상황에서 구해 준다, 포용한다, 원수를 용서한다, 친절히 가르친다는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方式으로 온정을 베풀어서 남을 위해 주자는 것입니다. 위해 주고 또 위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정신(精神)을 이타주의(利他主義) 혹은 위타주의(爲他主義)라고 말합니다.
(2) 3대주체(三大主體)의 참사랑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참사랑이란 위해 주고 또 위해 주는 사랑입니다. 위해 주되 한없이 주고 또 주는 것입니다. 마치 온천의 샘물이 한없이 솟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또 끊임없이 남에게 온정의 샘물을 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3대주체(三大主體)가 일상생활속에서 실천하라는 사상이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인 것입니다. 즉 부모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자녀에 대해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또 스승이 이러한 하나님의 참사랑을 제자에 대해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또 주인이, 즉 대통령이라든가 도지사, 기업체장, 회사사장, 단체장과 같은 주인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自己)에게 소속된 부하나 구성원들에 대해서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실천하느냐? 주체의 역할(役割)을 통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役割은 자식을 양육(養育)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養은 자식을 기르는 것입니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 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잘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거처를 편안케 해 주면서 부모의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먹이되 온정을 가지고 먹여 주고 입히되 온정을 가지고 입혀주고 재워 주되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재워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育은 교육(敎育)하는 것입니다.
家法을 세워서 예의범절(禮儀凡節)과 윤리, 도덕을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지식도 가르칩니다. 여기에도 부모의 따뜻한 온정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부모가 자식의 養育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식이 자란 뒤에 부모가 그 자식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자식을 기르고 공부시켜서 나중에 그 자식을 통해서 돈을 벌고 권세를 얻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선(善)하고 훌륭한 사람, 인격(人格)을 갖춘 지식인, 봉사할 줄 아는 사회(社會)人이 되기를 바라는 단 한가지 마음만 가지고 온정에 넘치는 養育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養育을 통한 사랑이 부모의 참사랑입니다.
그 다음은 스승의 사랑입니다. 스승의 役割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식교육(知識敎育), 기술교육(技術敎育), 體育, 예육(藝育)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친절하게 정성껏 제자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질문이 있으면 誠意를 가지고 답변해 주고 제자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可能한 한 그 해결도 도와 주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보았는데 요즈음 선생들중에 오로지 수입(收入)만을 위해서 가르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을 매매(賣買)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바른 교육이 절대로 안됩니다. 거기에 사랑이 깃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것은 제2차의 문제로 해야 합니다. 학생을 정성껏 가르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目標)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그 학생이 성장한 후 사회에 봉사할 줄 아는 인격(人格)의 소유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스승 자신(自身)이 먼저 인격적 자세, 봉사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온갖 정성을 다 하고 온정을 베풀어 가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스승의 참사랑입니다. 즉 스승의 사랑이란 이러한 역할을 통해서 실현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인의 역할을 통한 주인의 사랑입니다. 주인의 役割이란 무엇입니까? 대통령의 역할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지사의 역할은 道民을 위한 것이고 기업체장의 역할은 종업원이나 여러 직원들을 잘 위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업체의 경우를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업체장은 부하(部下)나 종업원들에게 일만 시키고 돈만 많이 벌어서 축재(蓄財)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기업체이기 때문에 먼저 돈을 벌어야 하겠지만 번 다음에는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 번다는 정신이 기업정신이어야 합니다. 기업체의 주인은 위타주의(爲他主義)의 봉사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각급 직원과 종업원들을 위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며 의식주(衣食住)의 문제로 곤란을 당하고 있지 않나하고 온정을 가지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사랑의 주관입니다. 주관에는 부하에게 명령하는 주관도 있습니다. 명령 그 자체는 차가운 것이지만 따뜻한 온정의 마음을 가지고 명령(命令)한다면 명령 그 자체는 비록 차갑다 하더라도 명령을 받은 부하(部下)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관(主管)에는 건물이나 시설의 관리도 포함됩니다. 성경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 중의 제3축복(第三祝福)은 사랑으로 만물을 주관하라는 명령입니다. 1차산업, 2차산업, 3차산업 등과 물질을 다루는 활동은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됩니다. 주관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건물이나 시설도 내 것이기 전에 公的인 것, 하나님의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이나 시설을 정성껏 관리하고 유지(維持), 보존(保存)하는 정신도 또한 사랑으로 만물을 주관하는 주관정신, 관리정신입니다. 요즈음에 와서 심각하게 거론되는 공해문제(公害問題)는 모두 이같은 본연의 주관정신, 관리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물에 대한 사랑의 정신 즉 주관정신, 관리정신도 또한 주인의 참사랑입니다.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3대주체(三大主體)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해야 한다는 이론이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인 것입니다.
(3) 한 中心의 3주체성(三主體性)과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
다음은 하나의 중심의 3주체성(三主體性)과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에 대해서 말씀하겠습니다. 여기의 3주체성(三主體性)이란 하나의 중심이 부모, 스승, 주인이라는 三主體의 역할과 사랑을 동시에 시행하는 일을 말합니다. 부모와 스승과 주인은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부모는 동시에 스승이고, 주인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三主體의 역할과 사랑을 부모 단독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주로 하면서도 스승의 역할, 주인의 역할도 다 하면서 대상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3주체성(三主體性)을 부모도 실천하는 것이고, 스승도 주인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학교의 스승은 스승의 일을 주로 하면서 부모로서 학생을 자녀처럼 길러 줄 줄 알아야 하고 또 主人으로서 부하(部下)를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主人은 주관하고 관리하는 일, 다스리는 일을 주로 하면서도 부모(父母)로서의 역할도 또 스승의 역할도 다하면서 부하나 종업원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관리자(主人)는 관리의 일 외에 자식을 養育하는 마음으로 종업원을 먹이고 입히고 주거(住居)를 제공하는 문제에 항상 관심을 보이면서 온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 스승의 입장에서 부하나 종업원을 규범(規範)이나 지식(知識)에 관해서 가르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 주체(主體), 즉 한 중심이 3주체성(三主體性)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 문회장님의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입니다. 부모의 3주체성(三主體性), 스승의 3주체성(三主體性), 주인의 3주체성(三主體性)의 실천에 관한 사상이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스승, 주인의 사랑은 각각 자녀, 학생, 부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내리 사랑(下向愛)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주체가 세 가지 역할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상이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기 중심의 어떤 이익(利益)을 얻자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한없이 주고자하는 것이 참사랑인데, 여기의 특기할 것은 그 참사랑은 완전 투입(投入)하고 잊어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고 또 주되 주고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관한 문회장님의 가르침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아무리 많이 사랑하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사랑해 주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잊어버려야만 내 마음이 비워지고 겸허(謙虛)해 집니다. 내가 저 사람을 많이 사랑했는데 왜 반응이 없느냐? 괘씸하다 하는 마음을 먹으면 내가 교만해진다는 말입니다. 한번 교만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참사랑을 주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베풀고는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솟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이 그 빈 마음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나 새로운 기분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문회장님의 사랑의 사상(思想)입니다. 부모(父母)도 스승도 主人도 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참사랑입니다.
(4) 사랑의 확산(擴散)
다음은 사랑의 확산(擴散)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모(父母)가 그런 참사랑을 자식에게 베푼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식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사랑은 유발효과(誘發效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식은 부모의 사랑에 감명받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게 됩니다. 부모가 정성껏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에게 정성껏 효도(孝道)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리 사랑(上向愛)입니다.
또 부모의 참사랑을 받게 되면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은 물론이고 자식들 상호간, 즉 형제자매끼리도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횡적(橫的)사랑(가로사랑, 水平愛)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子息)과 자부(子婦; 며느리), 즉 부부(夫婦)끼리도 참사랑(夫婦愛)을 주고 받게 됩니다. 이것도 횡적(橫的)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上向愛(올리사랑), 水平愛(가로사랑) 등이 유발되어서 가정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에서는 부모의 사랑(내리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스승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참사랑(내리 사랑)을 받는 제자는 자동적으로 자기의 스승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 선생님은 위대하고 휼륭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선생 앞에 자연히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적갈구(知的渴求)가 채워지고 가르침의 정성에 감화되어서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선생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올리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저희들끼리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스승의 참사랑에 감명받아서 저희끼리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횡적(橫的)사랑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발효과(誘發效果)를 일으키는 것이 또한 스승의 사랑(내리 사랑)입니다.
지난번 모 大學에서 학생이 스승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 때 신문마다 학생을 비난(非難)했습니다. 이것은 틀린 非難은 아니지만 문제의 접근방식(接近方式)을 모르는 꾸짖음인 것입니다. 학생의 잘못은 제2차 문제입니다. 一次的인 책임은 스승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스승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스승들이 平素에 3주체성(三主體性)을 실천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맞은 선생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스승들이 평소에 3주체성(三主體性)을 실천하면서 사도(師道)를 다 하였다면 학생들이 선생을 때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번의 학생의 폭행은 선생이 왜 우리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았습니까?라는 불평의 표현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부모(父母)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 학생의 부모가 자식에게 부모로서의 내리사랑을 평소에 베풀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같은 스승을 존경할 생각이 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학생 폭행과 같은 문제에의 접근은 이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의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3대주체(三大主體)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주인이 부하에게 주는 사랑, 즉 내리 사랑(下向愛)인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이 내리사랑이 먼저입니다. 이 내리사랑에 유발되어서 2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상향애(上向愛), 수평애(水平愛) 등입니다.
사랑은 유발효과, 상호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上向愛가 먼저 행해 지더라도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나중에 하위자(上位者; 손아래사람)의 하향애(下向愛)가 유발되는 수가 있음은 물론입니다. 자식이 먼저 부모에 효도하고 제자가 스승을 먼저 존경하고, 부하가 주인(상관)을 먼저 사랑함으로써 각각 부모(父母)愛, 스승愛, 主人愛가 이차적으로 유발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내리사랑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 다음이 올리사랑, 횡적(橫的) 사랑(水平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내리 사랑이 먼저일 경우에는 上向愛, 水平愛는 100% 유발되지만 上向愛가 먼저일 경우에는 下向愛가 100% 유발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水平愛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참사랑의 출발은 내리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참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모든 것이 먼저 내려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컨대, 한 기업체의 長이 그 부하들, 종업원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종업원들은 받기만 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즉 기업주(사장)가 많이 번 만큼 온정을 가지고 많이 주려고 부단히 노력할 때 부하들은 그 사장을 높이 우러러 보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한 기업주가 만일 어려움을 당하면 종업원들은 우리의 봉급을 올려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 비용으로 공장을 더 발전시키십시오라고 하기에까지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업주가 참사랑을 베풀면 종업원들도 서로가 사랑하게 되고 직원이나 종업원 상호간에도 사랑이 오가게 됩니다(횡적(橫的)사랑). 뿐만 아니라 종업원들은 공장의 시설, 또는 기물(器物)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주체의 사랑(내리 사랑)이 언제나 선차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스승의 사랑, 주인의 사랑이 선차적(先次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사랑이 가정에 확산되고, 학교에 확산되고, 기업체에 확산되면 결국은 이러한 사랑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드디어는 전세계적으로까지 확산되게 되어서 결국 이 지구(地球)星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지상의 모든 범죄(犯罪)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참된 平和, 영원한 평화가 실현되게 됩니다. 이런 운동을 지금 문선생님은 세계적으로 전개하고 계십니다.
(5) 3대주체(三大主體)의 근원은 하나님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3대주체(三大主體)의 근원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주체의 뿌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체중에서 가장 대표되는 주체가 이 3대주체(三大主體)입니다. 따라서 3대주체(三大主體)의 뿌리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즉 먼저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만 하나님은 陽 陰의 원리를 다 갖고 계시기도 하기 때문이겠지요.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은 인간을 아들딸로서 지으신 것입니다. 타락 때문에 죄인(罪人)이 되었지만, 본래 인간은 결코 죄인이 아니며 하나님이 아들 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인 동시에 참사랑의 본체입니다. 또 하나님은 로고스로써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의 기록대로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진리(眞理)로써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로고스는 진리(眞理)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眞理의 주체입니다. 진리의 주체란 무엇입니까? 스승입니다. 하나님 자신(自身)이 스승인 것입니다.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또 진리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은 또 主人이십니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동시에 주관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창조주는 동시에 주인이십니다. 가장 근원되는 부모, 스승, 주인을 우리나라의 고래(古來)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군사부(君師父)입니다. 君은 나라의 주인입니다. 師는 스승이고 父는 부모입니다. 우리 민족은 고래로 이러한 군사부사상(君師父思想)을 가졌는데 그 君師父의 뿌리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체가 부모요 주인이요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君師父는 글자의 順位가 다를 뿐, 바로 3대주체(三大主體)와 같은 뜻의 용어입니다.
애국가(愛國歌)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의 하느님은 바로 하나님과 同一한 뜻의 창조주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으로 우리나라를 보우하셨겠습니까? 부모의 참사랑, 스승의 참사랑, 주인의 참 사랑으로써 보우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父), 스승(師), 주인(君) 즉 君師父의 뿌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3대주체(三大主體)의 사랑은 천도(天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은 절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천도(天道)를 어긴 者, 이 사상을 지키지 않는 者가 있다면 그가 도리어 피해를 보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가 이토록 혼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三主體의 사랑 즉 천도(天道)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거역하면 육신적으로 피해를 보기 때문에 자연법칙을 지키면서 살아 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천도(天道)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뿌리를 둔 천도(天道)이기 때문에 안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지켜야만 평화가 오고 안지키면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종래의 종교가 사랑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자비(慈悲)를 행하라고 가르쳤고, 유교는 仁을 행하라고 가르쳤으며, 기독교는 사랑을 행하라고 가르쳤는데 왜 그래야 하느냐가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비(慈悲)나, 仁이나, 사랑의 뿌리가 하나님의 참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이면서 동시에 3대주체(三大主體)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모(父母)와 子女관계를 규정한 유교의 三綱五倫도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속에 다 포함됩니다. 불교의 수도(修道)에 관한 덕목(德目)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의 덕목(德目)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에 관한 성현들의 주장이나 가르침은 예외없이 모두 3대주체(三大主體)의 사랑이라는 카테고리속에 포함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종래의 가치관이 쇠퇴하게 된 것은 자비(慈悲)나 仁이나, 사랑의 뿌리가 하나님의 참사랑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며 그것이 三主體의 사랑의 형태로 구현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종래의 모든 종교의 덕목(德目)의 뿌리가 하나님의 참사랑, 따라서 3대주체(三大主體)의 사랑임이 밝혀질 때 종래의 모든 덕목(德目)이 활성화(活性化)되게 됩니다. 종래의 덕목(德目)들이 현대의 인간들의 마음을 지도해 줄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6) 共生-共榮-共義主義 및 이상가정(理想家庭)의 理念과의 관계
다음은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과 共生-共榮-共義主義와의 관계 및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과 이상가정(理想가정(家庭))의 理念과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공생-공영-공의주의는 미래사회(未來社會; 理想社會)의 경제적, 정치적 체제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共義主義(共同윤리)에 의해서 운영되는 경제체제요, 정치체제라는 점이 미래사회체제의 특성(特性)이 되고 있습니다. 同時에 공의주의의 실질적인 내용은 삼대주체사상의 실천(實踐)인 것이며 삼대주체사상의 가장 핵심부분은 이상가정(理想가정(家庭))의 이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을 요약하면 미래사회는 이상가정의 이념을 터로 하고 삼대주체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共義主義에 의해서 운영되는 경제 및 정치체제의 사회인 것입니다.
(7) 새 가치관(價値觀)의 定立
마지막으로 이러한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을 터로 하고서 새 가치(價値)가 세워진다는 점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3대주체(三大主體)의 참사랑의 행위와 이 사랑에 의해서 유발되는 모든 대상들의 사랑의 행위, 즉 내리 사랑의 행위와 올리 사랑의 행위 및 가로사랑의 행위 등을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참 선(善)이 되는 것이요, 지적(知的), 교육적 관점에서 볼 때 그 행동은 참 眞이 되는 것이요, 예술적 관점에서 볼 때 그 행동은 참 미(美)가 되는 것입니다. 행위에 관한 한, 眞 선(善) 미(美)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의 행위를 평가하는 각도에 따라서 眞도, 선(善)도, 미(美)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文會長님의 입장입니다. 종래의 모든 가치관의 뿌리가 바로 문회장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회장님의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에 의한 가치관이 바로 새 가치관(價値觀)인 것입니다. 종래의 모든 덕목(德目)에 이 새 가치관(價値觀) 즉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을 代入하면 그 뿌리가 소생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