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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일 주일 설교
시리즈 주제: 우리가 얻은 이 큰 구원 6
제목: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사도행전 10:33)
설교 목적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라면, 그것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사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전의식과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에 대한 확신은 우리에게 불의한 세상에는 마지막 때가 임박했다고 선포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새로운 삶으로의 방향전환을 촉구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이 설교에서 2024년도 우리 교회 표어를 정하고자 한다. 그것은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고백한 말로서,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실존이며 과제이며 동시에 복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매 순간은 하나님의 경륜의 날줄에 엮여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인생을 이해한다면 인생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설교 개요
1. 문제제기: 2023년도 표어를 되돌아봄
2. 말세를 인식하는 신앙
3.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
4.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날줄과 씨줄
5. 매 순간이 하나님의 경륜에 새겨지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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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2023년도 표어를 되돌아봄
오늘은 2023년도 마지막 달인 12월 첫 주일입니다. 저는 금년 우리 교회의 표어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정했습니다. 이 표어는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바라는 염원입니다. 그 염원은 세상의 종말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염원은 우리가 속히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왜 다시 오시는 걸까요? 그리고 교회는 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을까요? 이런 질문은 지금 생각해 보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대림절(待臨節) 첫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백성들도 하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사야 40:9~11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소식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자기 백성에게 오십니까? 강한 자로 오십니다. 그 팔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상급을 가지고 오시므로 하나님은 심판하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 심판을 통해 악인을 벌하시고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마치 목자가 그 양떼를 돌보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던 구약의 백성들은 이런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도 같은 목적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이유도 같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바로잡아 새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처럼 어그러지고 혼란한 것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성경은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 심판을 통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아가고 없어질 것이며, 의인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처럼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만드실 그 세상은 사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바로 그 세상이며,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심으로 열리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바라는 이유는 현재 세상이 어그러지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허하고 혼돈한 땅을 바로잡으셔서 질서 있고 생명이 가득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다시 오시면 현재의 혼란한 세상도 바로잡혀 새롭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의 주변에 강대국이 악한 일을 도모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 가운데 억눌리고 짓밟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 그리고 다윗 언약을 생각하면 현재의 모습은 정말 하나님의 뜻에서 매우 멀리 벗어나 있습니다. 그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 언약의 계승자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더욱 간절히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런 대림신앙을 간직하고 살아가던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눅 2:25). 이스라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언제 위로를 받을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로에 대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0:1~2
이스라엘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노역이 이제 끝날 때가 되었고 그들의 죄악은 사함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소개하는 복음서 기자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한 말씀이 바로 이 다음 구절에서 이어집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전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소리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하게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준비하라는 선포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죄 사함과 해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로 그 일입니다.
이것은 대림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린 목적은 죄 사함과 해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고 복음서는 소개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죄 사함이며 해방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고, 눌린 사람들을 그 누르는 것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셨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입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상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 사함과 해방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죄 사함과 해방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은 공허와 혼돈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옷같이 낡고 인생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21). 우리들도 구약의 백성들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성경의 예언대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메마른 광야가 장미꽃 만발한 생태 평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전쟁이 끝나고 강대국과 약소국이 서로 상생 협력하는 공존과 평화의 세상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다양한 전통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세상이 속히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지금이 말세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오셔서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선언입니다.
2. 말세를 인식하는 신앙
하나님이 오셔서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때가 임박했다는 선언이 ‘말세선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선포에서 두드러집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을 제자들과 당시의 사람들이 눈으로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 중에 생전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보리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하여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고, 자신들이 말세를 살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세상의 끝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의미는 이 세상이 폭발하여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악이 다스리는 그 세상이 끝난다는 선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예수께서 가르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속히 오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고 말씀하신 이유와 요한이 오시라고 대답한 이유는 모두 동일할 것입니다. 그 시대에 신자들을 억압하고 불의한 일에 끌어들이는 세력에 대한 심판을 내려 달라는 선언이자 기대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나 말세에 대한 선언이 2천년 전의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성경이 자기 시대를 말세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적인 귀결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보시고 강한 팔로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데 이런 불의와 불법이 계속 유지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과 통치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악한 세대에 대하여 심판과 종말을 선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시편 1편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말이 무엇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5~6)
이처럼 하나님을 늘 자신의 앞에 모시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가르시고 의인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졌기에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고, 교회는 지금 그 역사가 실현될 때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확신하는 신앙과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확신은 모두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여기서 저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통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로마인 장교 백부장 고넬료가 바로 이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사도행전 10:33)
영어성경 NIV로는 이렇게 소개됩니다: … “Now we are all here in the presence of God to listen to everything the Lord has commanded you to tell us.” 사무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삼상 3:10-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사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이사야 6:8 –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시편의 기자도 이와 유사한 고백을 기도로 드립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나 주님이 속히 오실 것이라는 신앙은 모두 하나님을 자신의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는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약속을 굳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지난 주일에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함께 드릴 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계획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문은 주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문은 성경의 가르침을 압축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다면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 앞이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시편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또한 하나님 앞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지성소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 또한 다음과 같이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19~20).
우리가 주님 앞에 서 있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아담 부부에게 위임하시려고 그들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시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주님 앞에 있다고 고백할 때, 주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던 제사장처럼 우리의 죄와 우리 이웃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고 백성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는 더 나은 예배자가 되고 더 나은 봉사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가리켜 사도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벧전 2:9).
4.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날줄과 씨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이야기를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줍니다. 예를 들면, 백부장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봉사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누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사도행전 10:1~2
그 후에 백부장 고넬료는 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종들을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그후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합니다. 고넬료는 온 가족과 식솔을 모아 베드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도착하자 극진한 예로 절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들려주신 명령에 대하여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를 말합니다. 그 말하는 가운데 고넬료는 자기 가족과 식솔들이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베드로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 두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두 사람을 찾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했고 교회에는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중에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그 후 교회에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음으로 순교를 했습니다. 교회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복음이 점점 확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떻게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었을까요? 누가는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0장에 그려진 백부장 고넬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미리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동참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순종을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선교의 문이 열렸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이자 청사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베를 짜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모시 같은 베를 짤 때는 베틀이 있습니다. 그리고 길게 뻗은 날줄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 짜는 사람은 그 날줄에 씨줄을 끼우면서 베를 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천이 만들어지고 그 천에 이런 저런 그림이 새겨집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그림이 그려진 천은 날줄과 씨줄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5. 매 순간이 하나님의 경륜에 새겨지는 그림이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면서 우리 인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배우면서 그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해해 본다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이루는 일부분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대서사(Meta-Narrative)를 차례대로 들려줍니다.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새겨져 있으며 불순종으로 암울하게 묘사된 시절도 있습니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요셉, 모세와 이스라엘, 다윗과 엘리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창조와 타락, 그리고 회복을 위한 대 장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톰 라이트를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하는 다섯 개의 키워드를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님, 그리고 교회로 잡았습니다.
이것은 다섯 개의 막으로 이루어진 드라마와 같습니다. 그 드라마의 각 막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대서사시를 이루는 일에 동참합니다. 그 각 사람의 이야기는 명장면으로 부각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성화를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해 보면 그 몇 가지 장면들이 우리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그것은 파노라마처럼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라면, 우리의 매 순간의 삶도 사실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는 삶이며, 그 순간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위대한 그림에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인생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날줄에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엮어지는 씨줄입니다. 그 날줄과 씨줄의 교차와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지난 11개월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직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떤 날 우리는 절망했고 어떤 날 우리는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있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난 1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지난 평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간 세월을 헛되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이 주님의 앞에 아름다운 순간들로 기록되고 기념될 것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찬란하게 빛나는 공을 세운 영웅들은 아니지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날줄에 동참하는 씨줄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매 순간은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기도대로 우리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함께 말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로마의 장교 백부장처럼 우리도 고백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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